고귀한 낭비 (Royal wa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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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6–16 (NKSV)
6 그런데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는,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8 그런데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말하였다. “왜 이렇게 낭비하는 거요? 9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을 텐데요!” 10 예수께서 이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 11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12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13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14 그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사람 유다라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15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16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좋아하는가? 좋아 보였는가?
좋아하는가? 좋아 보였는가?
유튜브에 쇼츠라는 짧은 영상이 있습니다. 이 영상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나도움이라는 목사님이 있어서 구독을 했습니다. 어느날, 이 목사님 채널을 통해서 김창옥 교수님의 짧은 메시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제목이 “남자친구가 군대에 갔어요. 기다릴까요 ?말까요"입니다.
주님, 오빠가 군대를 갔습니다. 오빠를 기다릴 까요 말까요? 오~ 오빠가 군대에 간것은 찬스 입니다. 새 오빠를 만날 수 있는 찬스가 아니구요 ~ 오빠를 좋아했는지 오빠가 좋아보였는지를 확인 할 찬스입니다.
좋아하는 거랑 좋아 보이는 거랑 어떻게 확인하나요? 좋아하는 것은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구요. 좋아보이는 것은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빠를 기다릴 그 댓가를 감정으로나 의지적으로나 지불할 가치를 느끼나요? 그러면 그 여학생은 그 오빠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근데,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빠를 기다릴 감정도 의지도 없다면 그 오빠를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댓가를 치를만한 가치를 의지로나 감정으로나 느끼는 그 사람을 만나세요.
우리가 이 이야기를 웃으며 넘길 수도 있지만, 좋아한다는 것과 좋아 보이는 것은 분명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아하면 댓가를 지불한다.
좋아하면 댓가를 지불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감정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댓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저는 연애할 때 체험했습니다. 연애하고 나서 선교단체 간사였던 저는 아내에게 (당시 여친) 제주도에 예수제자 훈련 학교에 가도록 권하였습니다. 그렇게 제주도에 보내고 나서 얼마나 후회를 하였는지 모릅니다. 연애하기도 바쁜데 6개월동안 훈련을 보내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 때 제가 했던 댓가지불은 두가지 였는데, 하나는 하루에 한번씩 편지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편지를 써서 우체국에 부쳤습니다. 그리고 간식도 박스로 가득채워서 보냈습니다. 군대 보낸 여친 마냥 말입니다. 편지를 쓸때도 그냥 쓰는게 아니라 색연필로 색칠해 가면서 이름을 써서 하트를 그리고, 스티커도 붙여가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를 잊지 말라는 거죠 )
두번째로는 한달에 한번씩 제주도로 면회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보다 당시 비행기 비용이 비쌌습니다. 천안에서 간사를 할 때니까 청주공항에서 제주도를 총 강의기간 3개월동안 세번 비행기를 타고 면회를 갔습니다. 이는 신입간사인 저에게는 전재산을 털어야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갔습니다. 왜요?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매를 위해서 댓가를 감정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지불할 가치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의 낭비
한 여인의 낭비
사랑하는 예수님을 향해서 감정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댓가를 지불할 가치를 느낀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때는 유월절을 앞두고 있던 시기에 예수님을 잡기위해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계획하기 시작한 때 즈음입니다. 마태 마가는 유월절 이틀 전이었고, 요한복음에는 유월절 엿새전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이며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태복음 -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설립 60주년 기념 성경주석 2)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26:6–13)
시기의 문제에 대하여, 마태와 마가는 유월절 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나, 요한은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요한이 말하는 유월절 엿새 전이란 무교절 주간(니산월 15–21일)의 안식일을 시점으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베다니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유월절 주간의 첫날을 함께 보내신 곳입니다. 그 중에서 나병환자 시몬 즉, 나병환자이지만 예수께 치유를 받은 베다니 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실 때 한 여인이 갑자기 나타나 예수님께 향유옥합을 깨뜨려 머리에 부었습니다.
6 그런데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는,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고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이라 칭찬합니다만, 당시 사람들은 모두 놀랐던 것 같습니다. 사실 나병환자 시몬이라는 설명을 보면 시몬이 한센병을 앓았던 것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 그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것은 어쩌면 이례적인 일일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그곳에서 식사하기를 꺼려 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식사의 상황에서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뜨려 남자인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순간, 같이 식사를 하던 사람은 놀라자빠졌을 것입니다. 물론 손님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맞이하는 예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손님 맞이할 때도 아니고 식사가 한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이 남자인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분개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8 그런데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말하였다. “왜 이렇게 낭비하는 거요? 9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을 텐데요!”
“낭비"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향유를 팔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귀한 향유를 왜 이렇게 낭비하냐고 비판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 말을 한 사람이 가룟유다라고 명시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까요? 어쩌면 제자들의 말이 옳은 것일까요?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이 향유가 순전한 나드라고 합니다.
나드(나르도스, νάρδος)는 인도의 나드 식물의 뿌리에서 채취한 고급향유
옥합(알라바스트론, ἀλάβαστρον)은 깨뜨렸을 때 한 번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목이 가늘고 긴 항아리
수입산으로 비싼 향유인데다 깨뜨렸을 때 한번 사용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격이 삼백데나리온입니다. 데나리온=하루 품삯 , 삼백 데나리온=일년치 품삯 하루 품삯을 15만원으로 계산하면, 연봉 4500만원의 가치가 있는 향유옥합입니다. 이 정도로 비싼 것이라면, 이 여인이 이것을 살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까요? 당시 여인의 경제적 능력을 생각 할 때 지금 향유는 부모에게서나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깨뜨려 버렸습니다. 정말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고귀한 낭비
고귀한 낭비
마르바 던이라는 예배학자는 예배를 “고귀한 시간낭비"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시간낭비다. 그러나 참으로 고귀한 시간 낭비다. 예배는 우리를 그 가운데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고귀한 광휘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 마르바 던
우리는 종종 인간의 문화가 성경의 가치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소비자 중심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상대주의와 실용주의 시대에서 예배를 개인적기호, 시간, 편의와 위한의 문제로 바꾸려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또한 심지어 선교사역을 하였던 돈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은 사위라는 부족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 “배신"이 그들의 문화에서는 미덕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때로는 인간의 문화의 변혁가로서 세상에서 가치없다고 하는 곳에 가난한 마음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와 가까이 하셨습니다.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식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사마리아를 방문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주적 가치를 가지신 분께서 자신을 낭비하셨습니다.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댓가를 지불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치르시며 우리를 향하여 부르신 노래가 무엇일까요? 성경교사 이지웅목사는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낭비는 십자가 입니다. 우리는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감정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댓가를 지불할 가치를 느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 고귀한 낭비를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고귀한 낭비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진심어린 헌신을 드리는 것아니겠습니까? 삼백데나리온의 양적인 숫자에 집중하지 않아야 합니다. 결국 그 의미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고귀한 낭비는 바로 예수님을 위해 치르는 장례의 의미라고 말씀하십니다.
10 예수께서 이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 11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12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13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헌신과 사랑을 옥합을 깨뜨려 표현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 한화로 200원 밖에 되지 않는 동전을 헌금한 가난한 과부에게 그 어떤 부자들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그 전부를 드릴 만큼 하나님께 그 마음의 중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은 삼십세겔
유다의 은 삼십세겔
그런데 우리는 혹시 유다와 같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삼백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어서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였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가치있게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자신을 위해서 은 삼십세겔에 팔았습니다.
15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16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유다는 사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주머니에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완벽한 배반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배반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어제까지도 예수님과 같이 밥을 먹고 길을 걸으며 대화하였던 가룟유다입니다. 더욱 황망한 것은 그가 생각한 예수님의 가치는 그저 출애굽기에 나타난 노예의 가치일 뿐입니다.
32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아 죽게 하였으면, 소 임자는 그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주고, 그 소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가룟유다의 배신의 댓가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스승 예수를 그저 노예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내 주 예수 여전히 날 부르사
그 참되신 사랑을 베푸시나니
내 형제여 주님을 곧 따르라
주께서 풍성한 은혜를 내려
내 영혼이 나날이 복 받으니
주 예수를 너희도 구주로 섬겨
곧 따르면 풍성한 복 받겠네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항상 비시네
무거운 짐 지고 애 타는 인생
주 예수께 돌아와 곧 쉬어라
내 주 예수 너희를 돌보실 때에
참 복락과 안위가 넘치겠네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항상 비시네
Royal Waste (주님을 위한 고귀한 낭비)
Royal Waste (주님을 위한 고귀한 낭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을 위해 예배의 자리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헛되이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고귀한 낭비라는 이 역설적인 진리를 신앙생활 속에서 깨닫기 소망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어떤 고귀한 낭비로 예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요? 그 구체적인 실천은 여러분에게 맡겨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한번 깊이 고민하시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맘으로 가장 고귀한 낭비인 예배로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