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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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21~30 2023/1/9,10,13,16,17,19,26,2/2,3/ 23년도 3월1일 화평교회 수요설교
na28
요한복음 8:21–30 (NA28)
21Εἶπεν οὖν πάλιν αὐτοῖς · ἐγὼ ὑπάγω καὶ ζητήσετέ με, καὶ ἐν τῇ ἁμαρτίᾳ ὑμῶν ἀποθανεῖσθε · ὅπου ἐγὼ ὑπάγω ὑμεῖς οὐ δύνασθε ἐλθεῖν.
그러므로 이르되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그리고 너희들은 너희들의 죄안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올 수 없을 것이다.
22ἔλεγον οὖν οἱ Ἰουδαῖοι · μήτι ἀποκτενεῖ ἑαυτόν, ὅτι λέγει · ὅπου ἐγὼ ὑπάγω ὑμεῖς οὐ δύνασθε ἐλθεῖν;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말하되 혹시 그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가 왜냐하면 그가 말한다. ‘내가 떠나간다. 너희들은 올수 없다.
23καὶ ἔλεγεν αὐτοῖς · ὑμεῖς ἐκ τῶν κάτω ἐστέ, ἐγὼ ἐκ τῶν ἄνω εἰμί · ὑμεῖς ἐκ τούτου τοῦ κόσμου ἐστέ, ἐγὼ οὐκ εἰμὶ ἐκ τοῦ κόσμου τούτου.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아래로부터 있다. 나는 위로부터 있다. 너희는 이 세상으로부터 있다. 나는 이 세상으로부터 있지 않다.
24εἶπον οὖν ὑμῖν ὅτι ἀποθανεῖσθε ἐν ταῖς ἁμαρτίαις ὑμῶν · ἐὰν γὰρ μὴ πιστεύση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 ἀποθανεῖσθε ἐν ταῖς ἁμαρτίαις ὑμῶν.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바 너희 죄안에서 너희가 죽을 것이다. 진실로 만일 나는 나이다를 믿지 아니하면 너희가 너희 죄안에서 죽을 것이다.
25Ἔλεγον οὖν αὐτῷ · σὺ τίς εἶ; εἶπεν αὐτοῖς ὁ Ἰησοῦς · τὴν ἀρχὴν ὅ τι καὶ λαλῶ ὑμῖν;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너는 누구이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처음부터 말한자이다.
26πολλὰ ἔχω περὶ ὑμῶν λαλεῖν καὶ κρίνειν, ἀλλʼ ὁ πέμψας με ἀληθής ἐστιν, κἀγὼ ἃ ἤκουσα παρʼ αὐτοῦ ταῦτα λαλῶ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나는 너희에 대하여 말할 것과 판단할 것이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시는 분이 참되시다. 나 역시 그에게(아버지) 들어 세상에 말한다.
27οὐκ ἔγνωσαν ὅτι τὸν πατέρα αὐτοῖς ἔλεγεν.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가 그들에게 말한분이 아버지라는 것을
28εἶπεν οὖν [αὐτοῖς] ὁ Ἰησοῦς · ὅταν ὑψώσητε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τότε γνώσεσθε ὅτι ἐγώ εἰμι, καὶ ἀπʼ ἐμαυτοῦ ποιῶ οὐδέν, ἀλλὰ καθὼς ἐδίδαξέν με ὁ πατὴρ ταῦτα λαλῶ.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들이 사람의 아들을 들어올릴 그때에 너희가 나는 나이다라는 것을 알 것이다.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어느것도 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나를 가르치신 대로 나는 이것을 말한다.
29καὶ ὁ πέμψας με μετʼ ἐμοῦ ἐστιν · οὐκ ἀφῆκέν με μόνον , ὅτι ἐγὼ τὰ ἀρεστὰ αὐτῷ ποιῶ πάντοτε.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있다. 그가 나를 홀로 두지 않는다. 나는 항상 행하여 그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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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1. 유사어 차이
ὑπάγω 떠나다/3 현능직1단 가다:
위치를 바꾸다; 움직이고 여행하거나 진행하다, 비유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멀리가다: 어떤 장소에서 다른 방향으로 멀리 움직이다.
죽다 떠나다: 어떤 장소를 떠난다고 이해되어. 관련 주제: 죽음; 구덩이; 끝; 멸망하다; 내세; 스올; 지하 세계로 내려가기.
물러나다:어떤 사람 앞에서 물러나거나 철수하다.
ἀποθανεῖσθε 죽다/3 ἀποθνῄσκω 미래능동태
죽다. 신체적 생명이 떠나고, 모든 신체적인 특징과 생명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기능이 상실되다. 구덩이; 끝; 멸망하다; 내세; 스올; 지하 세계로 내려가기. 죽다(초자연적으로)-초월적 방식으로 죽거나 죽게되다. 특히 죄와함께 하는 삶의 특징으로 관련주제 : 멸망하다.
무감각한, 죽은: 어떤 것에 대해 무관심한 느낌, 반응 감응에 있어서, 어떤것에 대해 죽은 것으로 이해된다.
위험에빠지다. 죽다: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상황에 놓이다. 실제로 죽는다는 의미로 관련주제 죽음, 구덩이 끝 멸망하다 내세 스올 지하세계로 내려가기 히브리어 등가 מות 무트
2. 반의어
ἐκ τῶν κάτω, ὑμεῖς ἐκ τούτου τοῦ κόσμου
ἐκ τῶν ἄνω, ἐγὼ οὐκ εἰμὶ ἐκ τοῦ κόσμου τούτου
3. 반복어
ἐγὼ ὑπάγω ὑμεῖς οὐ δύνασθε ἐλθεῖν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다. /2
ἀποθανεῖσθε ἐν ταῖς ἁμαρτίαις ὑμῶν 너희는 너희 죄가운데 죽을 것이다./3
ἐγώ εἰμι 나는 나이다/2(24절,28절)
λαλῶ 현능직 1단/ 5번이상
ὁ πέμψας με 나를 보내시는 분/2
ποιῶ 행하다, 만들다/2
4. 하나님 아버지 지칭 단어
ἐγώ εἰμι αὐτῷ πατὴρ πατέρα ὁ πέμψας με
5. 중심단어
① ζητήσετέ 미래 능동태 2인칭 복수 주어: 유대인 원: ζητέω 찾다 /1
ἤκουσα 부과 능직 1단 주어 예수님 원: ἀκούω 듣다 /1
③ ἐδίδαξέν 부과 능직 3단 주어 하나님아버지 원:διδάσκω 가르치다
λαλῶ 현능직 1단 주어 예수님 원: λαλέω 말하다 /5
ποιῶ 현능직 1단 주어 예수님 원: ποιέω 행하다 /2
6. 구조 분석
8장의 문맥 구조 분석
8:1~11 음행중 잡인 여자사건으로 손바닥 글씨 쓰시고 모두 떠남, 예수의 권위
A 8:12~20 예수의 증언에 관한 논쟁
B 8:21~30 예수가 누구인가 논쟁
B` 8:31~47 예수의 반대자가 누구인가 논쟁
A` 8:48~59 자신에 대한 예수의 증언
8장21~29 구조분석 다음 논쟁인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의 반대자가 누구인가 논쟁의 청사진, 미리보기
A 21 예수: 내가 가고 너희가 나를 찾다가 죄 가운데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곳 너희오지 못함
B 22 유대인: 내가 가는곳 너희가 오지 못함에 대해 이해 하지 못함
A` 23~24 예수: 너희 아래, 이세상 속함, 나는 위에서, 세상속하지 않아 나를 그인ἐγώ εἰμι줄알지 못하면 죄가운데 죽게 될거야
-이 세상 속함, 죄가운데 죽는다 세상에 속하지 않음 내가 그다ἐγώ εἰμι
B` 25 상반절 유대인:너가 누구이냐
A``25 하반절, 26 예수: 나는 처음ἀρχὴν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야 나를 보내신분이 참되셔 나는 그분께 들은 것을 말해
B`` 27절 나레이터: 유대인들이 못알아듣는다고 설명
A```27,28 예수 : 너희가 인자를 든후에 내가 그ἐγώ εἰμι줄라는 것 알거야, 아버지께서 가르친 것을 말하는 것도 너희가 알 거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혼자두지 안시기에 나는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해
-처음부터 말하여 온자, 인자를 든후 내가 그ἐγώ εἰμι
-논쟁의 권위 , esv authority 권위 ,nzsb95 initiative 새로운 계획, 주도권은 구조를 통해 볼 때 예수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죄가운데 죽을 것이고 나를 찾다가 내가 가는 곳에 오지 못할것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시지만 유대인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예수님은 더 친절하게 상세하게 두절이나 들여서, 긴 말로 유대인의 정체성과 예수님의 정체성은 에고 에이미 모세를 통하여 광야에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내시면서 예수님이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알지 못하게 된다면 죄가운데 죽게 될 것을 다시한번 강조한다.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올수없다고 두 번강조, 죄가운데 너희가 죽는다는 무려 3번 말씀하시며 강조하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그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직도 몰라 너가 누구이냐 라고 직접적인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께서는 에고 에이미와 더불어 아르케라는 창조, 시조의 단어를 사용하시므로 창조주이심을 말씀하시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심을 들어서 말씀하신다시며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그래도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나레이터는 더 답답한 마음에 유대인들이 못알아들음을 다시 강조ἄνω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 모세시대에 뱀을 든 것 가이 인자가 들려야 함을 드 드러내시고 태초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며 다시한번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과 하나임을 드러내신다.
8 단어연구
1) ὑπάγω 요한복음에서만 14번 본문 8장 3번
13장 제자들 발 씻기시고 제자의 배반을 예언하심, 베드로 부인 예언 하신후 ὑπάγω 말씀하심 2번 14장 2번 예수님 다락방 강화 제자들 위로 예수님 가는곳을 제자들 알게 될 것 말씀 내가 갔다가 다시 오겠다.
16장 다락방 강화 3번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간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지 못한다.
요 7:3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요13: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요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요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요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16: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요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2) κόσμου 요한복음 80회 요한 일서 23회로 가장 많이 사용 세상이라는 단어 요한이 가장 독특하게 사용하는 단어 계시록 5회 그런데 1000단어당 빈도수는 요한일서10.6 요한복음 요한 이서 순으로 코스모 가장 많이 사용함
κόσμου 원격 문맥- 본문의 저자 요한이 말한 세상에 관한 문맥
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유대인들이 몰랐던 세상의 구주를 우물가의 여인의 증언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알았다.
요한은 요한복음 첫 번의 서신을 통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 되었고 그 창조하신 세상에 빛으로 친히 우리 예수님이 이땅에 빛을 비추시기 위해 이땅에 오심을 말한다. 이것은 세상의 죄를 지고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모든 각 사람이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세상에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보내신분이 누구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말씀합니다. 세상이 행위가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그런 세상에 우리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받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심을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1서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1서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1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5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한은 두 번째 편지 요한 1서를 통해 더욱 깊이 세상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세상으로부터와 아버지께로 부터오는 것으로 나뉩니다. 이세상으로부터 온 것은 정욕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 속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영원히 거할수 있는 영생입니다. 더분명한 것은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하한다는 것입니다. 외냐하면 세상과 정욕의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과는 소속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의 말을 하는 것으로 알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자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으로서 세상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나님께 속한자는 세상의 말하는 말을 듣지 않기에 세상이 미워하고 이상이 여기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하나님께 속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꼐서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기에 능히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담대하게 우리의 소속을 밝힐수 있는 것이다.
계시록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계시록 13:8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시록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 당하여 주의 계시를 받으며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무로 세상의 최후의 날에 대하여 선포하기를 세상나라가 우리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세세토록 왕노릇한다고 당당히 선포한다. 세상이 창조된 이후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자들은 짐승에게 경배하며 그들은 명말에 들어갈자 땅에 속한자들이ㅣ 되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게 되어 심판을 받게 될것입니다. 우리가 멸망에 속한자들 땅에 속한 자들 세상에 속한자들이 되며 멸망으로 끔찍한 결말을 당하게 될것에 늘 말과 언행에 믿음과 행함에 주의를 기울여야함
κόσμου 상호 본문성- 바울과 그 외 구약성서의 세상에 관한 문맥 연구
로마서1: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엡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엡1: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2: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분명히 다르다고 바울은 말한다. 세상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은 요한과 같이 미움을 받아 박해를 박고 세상의 더러운 것 심지어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믿음이 없을 때는 세상의 지식으로 살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택하셨다. 그리고 세상의 지식가운데 종노릇하지 않도록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도록 세상에 속한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에 속ㅎ한다는 것은 세상 풍조를 따르고 중권세를 따르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인 사탄의 생각과 조종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는 세상의 물건을 다 쓰지 못하는 자들과 같이 세상의 것에 귀 기울여서는 안된다. 세상의 외형이 다 지나간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고 하나님의 영을 간구하고 사모해야 한다.
야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벧후2: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벧후2: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구약
신명기 17:3 칠십인역καὶ ἐλθόντες 3pλατρεύσωσιν θεοῖς ἑτέροις καὶ 3pπροσκυνήσωσιν αὐτοῖς, τῷ ἡλίῳ ἢ τῇ σελήνῃ ἢ παντὶ τῶν ἐκ τοῦ κόσμου τοῦ οὐρανοῦ, ἃ οὐ 3sπροσέταξ
3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령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시편 17:14
14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이사야13:11
11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스바냐 3:8
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Διὰ τοῦτο ὑπόμεινόν με, λέγει κύριος, εἰς ἡμέραν ἀναστάσεώς μου εἰς μαρτύριον, διότι τὸ κρίμα μου εἰς συναγωγὰς ἐθνῶν τοῦ εἰσδέξασθαι βασιλεῖς τοῦ ἐκχέαι ἐπʼ αὐτοὺς πᾶσαν ὀργὴν θυμοῦ μου, διότι ἐν πυρὶ ζήλους μου καταναλωθήσεται πᾶσα ἡ γῆ(땅 세상)
세상 – 크레이그 블롬버그 신약 신학
요한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있는 타락한 인류를 “세상”(코스모스)라고 말할 수 이 용어는 마태 8번 마가 누가 각각 세 번 요한 무려 일흔 여덟 번씩 사용하고 있다. 세상은 요3:16에서 같이 지구 인구 전체를 의미하지만 좀더 자주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항하면서 타락한 세상의 체계를 가리킨다. 요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구약성경시대 거의 대부분 세상은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이지만 부정적 느낌은 시편 이사야 13:11 스3:8 신약 사용에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오직 세 번 세상이 나오지만 두 번은 어ᄄᅠᆫ 비난의 의미를 함축하지 않고 ”세상의 토대“(13:8,17:8)라는 표현에서 나온다. 요 일서2:2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이는 타락한 세상을 염두한다. 그러나 좀더 자주 타락한 세상의 질서 요일2:16 코스모스를 사용할 때 ”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니“ 이 세요소는 하와의 유혹과 얼마나 가깝게 놓여질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하고 지혜롭게할 만큼 탐스럽기도한 것“ 이었다. 예수께서 저지한 세유혹도 세요소와 가깝다. ”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보고 얻는 것, 그리고 자신을 꼭대기로 내던져 초자연적으로 구조되는 것“ 타락 이르고 그 후 모든 세상의 원래 상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3) ἀποθνῄσκω 요한복음 로마서에서 가장 많이 사용
요8: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1: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8: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계3:2 사데교회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9: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계14: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9 배경연구- 구절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 저자와 최초 독자들의 동일한 언어와 문화권
예수님 오시기전 배경
페르시아 이후 헬라의 문화와 영향력은 유대인들의 율법에 불순종을 유도하는 유대한 유혹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헬라주의적 요소들을 공부하고 배워 그들의 생활방식으로 통합시키는 것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우상숭배와 관련된 헬라의 의복이 그들에게 부착되었으며 헬라의
체육관에서는 남성운동 경기가 유대의 윤리 관념에 반대되는 옷을 다 벗은 누드상 태로 진행되었으며
사람들이 스포츠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어서 예배와 희생 제사가 등한 시 되었다. 헬라주의 적 영향력
하에서 시작한 유대인들의 생활 방식을 타협하라고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압력이 주어졌고 헬라의
극장에 관객으로 참여하거나 배우로 참가하라는 것과 정결하지 않은 음식을 먹으라는 것을 포함했다.
헬라 언어의 확산 모든 사람들을 헬라어를 조금이라도 말할 수 있도록 배워야 했다 그래서 1세기에
팔레스틴에 살고 있던 많은 유대인들은 적어도 세나라 언어를 조금씩이라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히브리어(종교적 문헌), 아람어(공통일상어) 헬라어(사업, 상업, 군대, 정치 당국과의 관계)에 필요한
언어였다. 주전 3세기 유대인 공동체들 가운데서도 히브리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열망 위경 솔로몬의 시편17:21~24
보소서 오 주여 그들을 위해 그들의 왕 다윗의 아들을 일으키소서
오 하나님 당신은 정해진 시간에
그가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통치하도록 선택하셨나이다
예루살렘을 짓밟아 멸망시킨 이방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정결케하소서
그로 하여금 유업으로부터 죄인들을 지혜롭고 의롭게 내쫒게하시고
죄인의 교만을 토기를 깨뜨림 같이 박살내게 하시고
그들의 모든 자원을 철장으로 산산조각 내게하소서
그가 그의 입의 검으로 무법한 이방인들을 멸망시키도록 하소서
이와 같이 유대인들의 의식은 이방인들에 대한 환멸로 바울이 이방인에게로 가노라 하였을떄 죽이려고 함(행21:21,22)
솔로몬 시편은 다윗의 자손에 대한 메시아 칭호로 등장한다. 여기서 메시아는 죄인들을 벌하는 군사적 영웅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메시아는 죄인들을 벌하는 군사적 영웅으로 등장한다. 다윗의 자손은 솔로몬 시편 17편을 배경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키며 그들의 왕은 주 메시아이고 다윗의 자손은 결국 메시아 칭호이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을 이방인들로부터 정화시키며 거룩한 백성을 모아 열방을 심판하고 메시아가 될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통하여 우리는 왜 예수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메시아 칭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는지 추측할수 있다. 그것은 다윗의 자손이 당시에 군사전 메시아 칭호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교는 포로 유배지의 유대인들 고토로 돌아와 하나님 자유롭게 섬기고 모세 율법 순종, 유대인의 왕권 다시 확립의 미래를 고대하기 시작하였다. 주전 1세기 유대교의 변화 1회당의 발생, 2 세의 율법에 추가한 구전 율법 3이스라엘 페르시아 제국 여러 지역에서이 상업과 국제 교역을 위한 주요 언어로서 아람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사건- 그리스도시대 히브리어 능통 말하지 못함 성경 읽을 때만 제한적 사용
유대교는 포로 후기 페르시아인들에 의한 통치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통치하는 그리스인들로 대체되고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아무 간섭을 받지 않았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과 함께 셀류키드 왕조의 지배로 헬레니즘이 전국 확산 되고 헬라 종교를 신봉할 것을 요구 받았다. 167년 안티오쿠스가 성전을 더럽히고, 유대인들에게 제우스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했고 제단에다가 돼지를 제물로 드림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자였다. 마카비는 전쟁을 통하여 유다와 유다의 계승자의 독립을 쟁취하였고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다시 성결하게 되었다. 성전 재봉헌은 매년 기슬르 달의 하누카(재봉헌)축제, 빛들의 축제로 기념되었다. 비록 마카비 왕조의 통치가 후에는 독재, 부패, 부도덕 심지어 이교적으로 변하여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가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지만 유대인들은 하스모니아(마카비- 요나단- 시몬(시몬의 히브리어 이름 하스몬)-요한 힐카누스 왕조의 부끄러운 멸망에도 불구하고 후세대들은 이시기를 메시아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상화 시켰다. 이러한 발전은 결국 메시아의 기대에 영향을 끼쳐서 오실자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하게 하는 옛 마카비 시대의 통치자와 같이 표현되었다. 예수 시대에도 마카비의 황금시대에 대한 열망이 신앙의 교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에돔족속 안티파터는 하스모니아 왕조로부터 왕권을 강탈하자 유대교는 자치권과 제사장직, 종교생활이 제한된 그들은 직책은 유대적이지만 무엇보다도 로마에 충성해야 하는 왕의 호의에 의존하고 있어다. 우리주 예수께서는 정치적 로마 편향주의 와 구약의 제도적 타락, 종교적 분열과 세력 다툼이 가득한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 당시 유대교는 포로이후 초기의 유대교와의 유사점을 거의 볼수 없었다. 정책, 종교적 이상주의 다양한 문화 이식 단계들에 의해 많은 분파들로 분열되었다. 그나마 있는 사두개파와 엣세네파와 바리세파의 집단들도 전부 분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토라를 해석하는 서기관들로 인하여 랍비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토라의 선생으로부터 회당에서 가르쳤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고립된 상황속에서도 회당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이루었고 회당안에서 교제하기 위해 함께 만나고 그들의 주체성을 고무하기 위해 만날 수 있었다. 정치적, 언어적, 지리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회당제도와 토라와 교육체계로 연합되었고 그로 인하여 전통은 법적 변론과 결정 사항들의 큰 문서집으로 형성되어 성문 율법은 인간 전통의 조명하래에 해석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제사장들의 타락과 도도함 때문에 성전에 대한 각성을 필요로해서 엣세네파는 쿰란과 다메섹과 다른 곳에 공동체를 세우고 메시아와 사독계 제사장이 다시 세워지기를 기다렸다. 어떤 단체는 성전에 대한 혓=ㅇ식적 충성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또 다른 공동체는 위서들에 가득찬 묵시적 신비의 계시들에 관심을 두면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대교는 온갖 종류의 분파와 이익 단체들로 분열되고 갈라졌는데 모두가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려고 경쟁했고 서로가 다른 집단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신 세상은 구약기 전혀 주의 깊게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역적, 분파적 이익들이 결합하여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유대교는 크게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의 세 분파로 구분할 수 있는데, 신구약 중간기 때는 사두개파의 세력이 강했으나 이들이 지나치게 세속화(정치화)하면서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파가 중심 세력을 형성하여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비해, 엣세네파는 극단적인 율법 준수와 독특한 제도 등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이스라엘 대중과 다소 격리되어 지냈다.
한편,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한 것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의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가운데서도 율법을 가장 중시했고, 율법 연구를 최고의 의무요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곧,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요 은혜였다. 따라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에 비해, 예언서와 성문서는 율법의 보조 기능으로 이해했다. 그와 더불어 유대교는 기록된 율법(모세 오경, 성문 율법)과 구전 율법(장로의 유전)을 동등하게 여기며 최고의 성경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구약성경의 모세 오경에 장로의 유전(전승)을 가미하여 사상을 체계화 하였는데, 신약 시대에 와서 랍비들에 의해 유대교 법규가 유지 ·계승되었다. 그리하여 모세 오경을 비롯하여 장로들의 전통과 각종 유전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으로 종교적 의를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③ 성경관 - 유대교는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믿는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모세 오경을 오류가 없는 최고의 경전으로 인정하고 그 외의 예언서(선지서)나 성문서는 모세 오경을 보조하는 책이며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여긴다. 또 유대교는 유대교적 랍비 문헌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으로 여긴다. 반면, 기독교는 신구약 66권만을 성령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성경으로서, 결코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유대교는 장로들의 전통과 규범을 철저하게 준수함으로써 종교적 의(義)를 이루는 데 주된 관심를 가지고 있고, 결국 성경 말씀보다 전통과 유전을 더 중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더욱이, 이들은 종교적 의를 이루기 위해 외적 형식을 중시하는 바람에 외식에 빠져 율법의 정신(본질)을 상실하였다. 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마 23장; 막 7:3–13). 한편, 이들은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신약성경의 예수님을 부인했다.그 대신, 제4복음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스스로를 유대교의 논리적인 정점으로 이해했으며, 그래서 회당 관리들과의 갈등을 유대교의 믿음에 관한 그들 자신의 충성심 때문에 초래된 것으로 보았던 시기를 반영한다.
유대인
혹은 그들 자신의 유대성(Jewishness)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도 그 호칭을 유대인 대적들에게 적용할 수도 있었다.428 그 용어는 여러 용례를 갖고 있었다. 어떤 기록들은, 이 복음서에 관해 일부 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그것을 지리적으로 사용하며, 더 많은 기록들은 이것을 때로는 이방인 추종자들을 포함하여 인종적, 혹은 종교적으로 사용한다.429
문제는 요한복음이 그 용어를 너무나 빈번하게 부정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제4복음서에서 “유대인”이라는 용어가 부정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지배적이라는 것은 확실하며, “중립적인” 용례가 그 다음으로 많이 나타난다.“유대인의 지도자”는 3:1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주 일시적인 8:31의 “유대인들”처럼, 이 호칭은 다음 문맥(그를 긍정적으로 다루는 19:39에서는 그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에서는 긍정적이지 않은 인물과 연관된다.그 대신, 제4복음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스스로를 유대교의 논리적인 정점으로 이해했으며, 그래서 회당 관리들과의 갈등을 유대교의 믿음에 관한 그들 자신의 충성심 때문에 초래된 것으로 보았던 시기를 반영한다.
요한의 당대의 배경 에녹1서, 희년서, 솔로몬의 지혜서, 시락서 등은 모두가 다 극히 귀중하며 적절하게 초기의 자료들이며
전승에 의하면 이 복음서는 90년대 쓰였다고 한다. 요한은 반대자인 바리새인들에게 매우 신경을 쓰고 있으므로 갈릴리나 수이라에서 이 복음서를 썼다고 가정하는데 함당하다. 90년대는 유대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이 가장 빈번하였을 때였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문제에서 많은 지도력을 발휘하여 유대그리스도인들과 충돌했다. 요한이 염두에 두는 그리스도인들 곧 요한 복음의 독자들은 지역의 유대 당국 회당 관원들에게 회당에서 쫓겨나 후에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다. 기독교 교회는 상당기간 동안 유대교의 회당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계승자들로 자처했으며 회당은 긔릇도인들이 자기 구성원들을 빼내 가는 것으로 보였다. 둘사이의 긴장은 피할수 없었다. 요한은 유대인들이 하나같이 강력히 부인하는 예수의 메시아이심을 주장하려고 요한 복음을 쓴 것이다. 예수님을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시는 분으로 믿는 것 때문에 진정한 유대인인지 의심받았다. 요한은 이러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진정한 것이며, 성경적 유대교를 오해한 사람은 바로 그들의 대적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복음서를 쓴다. 요한복음3~12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강화 대부분은 유대 관원들과의 충돌이며 적들과의 논쟁하는 글을 닮았다. 요한복음에 되풀이되어 나오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대적과 일일시되던 사람들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분명 유대인이지만 요한은 유대인들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부정적 의미로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과 동일시한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공동체에서 쫒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의 믿음의 상속자들은 바로 이들이라는 것이다. 라고 요한은 주장한다. 요한은 그의 문화권에서 흔히 사용되던 빛과 어두움, 위 아래의 대조를 사용한다. 유대 백성들은 적어도 네나라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의 멍에 아래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많은 교사들은 이 나라들이 하나님의 종일 뿐이며 하나님이 최후에는 다른 나라들의 멍에를 깨뜨려 주시리라 믿었다.
요한복음 8:12~29 절 배경
사건은 초막절 마지막 날에 일어난 일이다. 7:2,37절로 보아. 유대문헌은 세상의 빛이라는 칭호를 자주 사용하여 이스라엘 예루살렘, 족장들 메시아 하나님 유명한 랍비 율법등에 그 칭호를 적용한다. 하지만 그말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어떤 것을 가리킨다. 초막절을 가장 화려하게 축하하는 행사중에는 온도시를 횃불로 밝히는 것이 포함되어있다. 따라서 이절기는 수전절(10:22)과 함께 화려하게 불을 밝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예수님이 온 세상에 열방에 자신의 빛을 제공하신다는 것은 이사야 42:6에대한 암시일 수 있다. 어두움에 다시는 것은 넘어지는 것 올바른 길에서 떨어지는 것은 멸망하는 것을 나타내는 자연스러운 비유이다.
21~29
위의 영역(하나님의 영역)과 아래 영역은 유대 묵시 문학에서 자주 등장했으며 말씀을 듣는 자들이 마음을 열고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파악했다면 그 의미를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죄 가운데 죽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죽을 때 회개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겔18:21~32 유대교사들은 처형당하는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고 죽음이 죄를 속할 것을 믿으라고 권고했다. 예수니미은 회개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시지만 진정한 회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보내는자
유대 율법에 따르면 대리인은 자신을 보낸자를 대리하여 그렇게 하는 정도만큼 자신을 보낸자의 권한을 발휘할 수 있었다.
위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처음에는 믿었지만 본문이 끝날 때쯤 도자 예수님을 죽인 준비가 되어있다. 8:59 요한의 독자들은 이 기사를 곰곰이 묵상했을 것이며 자신들의 주님이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직면했다는 사실로 인해 격려를 받았을 것이다. 그들 ”교회의 몇몇 교인도 변절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배신하여 핍박받게 하시 시작했다. 요6:67~71
3장에서 예수는 니고데모와 대화하면서 ‘위’와 ‘아래’라는 단어를 쓴다. 니고데모가 예수의 가르침을 터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래’ 세상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위에서’ 오는 힘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3장 3절에 있는 헬라말 ‘아노덴(anothen)’이라는 부사는 ‘위로부터’라는 일차적 뜻이 있고, ‘다시(거듭)’라는 부차적 뜻이 있다. 요한복음의 문체적 특징 중 하나가 이런 식으로 한 단어를 이중 의미로 쓰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위로부터’ 오는 힘으로 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인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위로부터’ 오는 힘으로 나는 것은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이 세상 출생과 다른 의미이므로, 부차적으로 ‘다시’ 또는 ‘거듭’ 남의 뜻이 있는 것이다. ‘위로부터’ 오는 힘에 의하여 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 자신이 바로 ‘위에서 ‘아래로’ 보냄받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위에서’ ‘아래로’ 오셔서 ‘위’의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래’에서 ‘위’의 하나님을 계시하여 ‘아래’의 사람들이 ‘위’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되고, 그리하여 ‘위’의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아래에서’ ‘위로’ ‘들림받음(들려 올려짐)’으로(요 3:13–14), 예수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길을 열어 놓는다. 예수가 ‘위’로부터 내려와 ‘아래’ 세상에 ‘위’로부터 오는 힘을 가져다 준다. 그 힘이 바로 성령이다(요 3:5). 예수가 이렇게 ‘아래’ 세상에 ‘위’의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자격으로 이 ‘아래’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아래’에서 ‘위’ 세상의 지식과 생명이 가능해졌다. 이것이 ‘기쁜 소식(복음)’이다.
본서는 예수님의 상황에 초점을 맞출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유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예수님의 사역(ministry)으로부터 65년이나 뒤에 살았을 그의 독자들과 저자의 상황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제4복음서의 역사적 전승들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우리의 더 큰 관심은 복음서의 기초가 되는 전승들이 의미했던 것보다는 완전체로서의 이 복음서가 1세기 후반의 독자들에게 “의미했던”(meant) 것에 있다.
1) 고대 사회에서 대리인
자신을 파송한 사람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은 메신저(messenger)라는 개념은 유대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가장 초기의 헬라 문헌은 전령들(heralds)의 면책권을 존중하는 여러 사람들을 보고한다.
로마 시대에, 시저(Caesar)가 총독(governor)이나 대변인(representative)을 보냈을(‘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 그리고 같은 어원의 말) 때, 그 대변인은 시저의 권위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으며, 또한 시저가 원하는 바를 수행할 책임이 있었다. 철학자들은 제자들을 보내서 자기 대신 가르치게 하고 그들의 대변인으로 행동하게 했다.254 추천서(letters of recommendation)는 종종 추천을 받은 사람을 보낸 사람과 동일시했다.
헬라인들도 그러한 파송을 종교적인 혹은 계시적인 목적과 연관시킬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성전은 신전을 위한 기부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엘레우시스(Eleusis: 역주-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의 사제가 파송한 대사인, 대변인을 보냈다.신들의 메신저(messenger)로서 헤르메스(Hermes)는 때때로 “하늘로부터 파송됐다(‘아페스테일란’[ἀπέστειλαν]).”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진정한 견유학자(Cynic)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타락상을 보여 주기 위해서 제우스가 보낸(‘아페스탈타이’[ἀπέσταλται]) 메신저(‘앙겔로스’[ἄγγελος])라고 조언했다. 무소유의 견유학자들은 “보라, 나는 하나님이 하나의 모범으로 너희에게 파송한 사람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약의 배경으로 더 후대의 영지주의의 사도직(apostolate)에 호소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타당하지 않다.260
이와 동등한 관습(custom)이 잠언(Proverbs)에서처럼 아주 먼 과거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했으며, 결국에는 유대교의 율법 아래서 공식화되었다. 우리는 대리의 관습(custom of agency)의 일부 양상들이 법제화된 시기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그 관습이 다른 문화 안에서 실행된 것을 보면 유대교의 관습이 그에 관해 해설하는 랍비 자료들보다 더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법과 유대법은 약혼을 할 때 대리인 혹은 중재하는 결혼 브로커의 기능을 인정했다.이런 종류의 관습은 부모들이 결혼 계약의 조건들을 협상해야만 하는 사회에서는 상당히 흔하게 일어난다. 유대법은 약혼을 할 때 대리인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들은 흔했으며, 그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규칙들이 제정되었다. 또한 이혼을 할 때나, 사업을 할 때에도 대리인들이 사용되었다.
다른 증거는 그 관습이 일찍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대리의 언어(language of agency)는 쿰란 할라카(Qumran halakah)에 나온다. 나중에는 나시(Nasi: 역주-산헤드린 의장에 관한 히브리어 호칭)가 디아스포라에게 “대사”(envoy)를 보냈는데, 그 관행은 랍비 문헌뿐만 아니라 로마 율법과 교부들에서도 증명된다.그러나 더 이전 문헌들은 대제사장이 동일한 관행을 시행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10 문학적 정황
1) 책의 전체구조 안에서 내 본문 위치
마태복음이 예수님이 구약의 메시아 소망을 성취하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복음서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요한복음 역시 예수님의 사명을 구약의 개념과 구약의 특정본문에 근거를 둔 복음서이다.요한은 예수에 관해 공관복음서들과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요한은 예수의 생애와 사건보다 예수의 말씀과 그가 일으키신 이적들의 표적으로써의 가치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심판을 상징하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오게됨을 선포한다. 그를 믿는자들은 생명을 가지며 하나님의 영을 받고 거듭나서 예수가 아버지의 영광과 사랑의 표명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복음서는 그 아들 이외에는 아버지께로 갈 방법이 없음을 말하고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공관복음과 비교하여 요한복음은 “영적인 복음서” 불린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주 그의 영화와 오실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영광을 받으시고 오순절에 그 영이 임하면 그 영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셔셔 그들도 역시 예수의 지상사역과 현재의 그의 영화로운 상태에 대하 특별한 통찰력을 얻게하실 것이다.
요한은 역사적 전승에 의존하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였으며 그분의 존재가 의미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데 더 관심이 있다. 제4복음서는 단순한 목격자 기사(eyewitness account) 이상의 것이다. 제4복음서는 목격된 것의 의미, 즉 요한이 자신이 처한 역사적인 상황에서 그의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의미에 관한 수십 년의 깊은 묵상을 보여 준다. 제사복음서는 설화와 논증과 말씀강화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의 논증적인 문맥에서 참된 지식이 가장 필수적인 성행 조건은 예수님이 주장들을 믿는 것이며, 세상에 거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인도해 줄 성령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님에게 잘못 반응했다. 위로부터 태어난 자만이 하나님나라를 볼수 있다.
이것은 요한의 논증의 일부분이다. 즉 율법을 안다고 자부하는 당국자들은 율법을 지속적으로 잘못 해석하지만, 신자들은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만큼 학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적들 어느 누구도 주장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아는 더 직접적인 지식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그래서 휘태커(Whitacre)는 자신들은 율법에 신실하다고 하는 대적들의 주장이 하나님을 안다는 주장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요한은 그들이 율법을 신실하게 해석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반박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153
요한 공동체는 많은 고대의 엘리트 계층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완전히는 아니지만) 더 이성적인 인식론의 관점에서 비판하거나 인정하기 어려운 (독특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한다.
요한은 지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우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부족한 반대파에 맞서서 그들의 믿음을 지키라고 독자들을 격려한다.
요한의 신학의 경우, 여러 배경들이 기독론적 목적에 기여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영화롭게 되었던 것처럼(cf. 고후 3:7–18; 요 1:14–18), 예수님 안에서 신적인 성품을 관조하는 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을 변화시킨다(cf. 요일 3:2, 6)
2) 구조분석
8장의 문맥 구조 분석
8:1~11 음행중 잡인 여자사건으로 손바닥 글씨 쓰시고 모두 떠남, 예수의 권위
A 8:12~20 예수의 증언에 관한 논쟁
B 8:21~30 예수가 누구인가 논쟁
B` 8:31~47 예수의 반대자가 누구인가 논쟁
A` 8:48~59 자신에 대한 예수의 증언
8장21~29 구조분석 다음 논쟁인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의 반대자가 누구인가 논쟁의 청사진, 미리보기
A 21 예수: 내가 가고 너희가 나를 찾다가 죄 가운데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곳 너희오지 못함
B 22 유대인: 내가 가는곳 너희가 오지 못함에 대해 이해 하지 못함
A` 23~24 예수: 너희 아래, 이세상 속함, 나는 위에서, 세상속하지 않아 나를 그인ἐγώ εἰμι줄알지 못하면 죄가운데 죽게 될거야
-이 세상 속함, 죄가운데 죽는다 세상에 속하지 않음 내가 그다ἐγώ εἰμι
B` 25 상반절 유대인:너가 누구이냐
A``25 하반절, 26 예수: 나는 처음ἀρχὴν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야 나를 보내신분이 참되셔 나는 그분께 들은 것을 말해
B`` 27절 나레이터: 유대인들이 못알아듣는다고 설명
A```27,28 예수 : 너희가 인자를 든후에 내가 그ἐγώ εἰμι줄라는 것 알거야, 아버지께서 가르친 것을 말하는 것도 너희가 알 거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혼자두지 안시기에 나는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해
-근접문맥 8:12~20
이 강화(discourse)에서 중심 주제는 기원(origins)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나며, 그의 대적들은 밑으로부터, 즉 마귀로부터 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세상과 관련해서 인종적인 용어(ethnic terms)가 아니라, 영적인 용어(spiritual terms)로 말한다(cf. 8:37, 56; 요일 3:8; 5:19).
8:12 초막절에 예수님 빛이라 선포, 어둠에 다니는 것”(8:12)은 은유이다. 즉 밤에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넘어지기 쉽다는 것이다(9:4; 11:9; 12:35).347 그러나 “어둠에 다니는 것”은 또한 이미 죄 안에서 사는 인류를 묘사하는 기본적인 표현이 되어 있었다.348 “생명의 빛”은 원래는 지하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 반대되는, 모든 살아 있는 인간들이 보게 될 햇빛에 적용되었지만,349 이것은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350“빛” 혹은 “세상의 등”(lamp of the world)이라는 호칭은 여러 인물들에게 적용되었지만, 공적으로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지혜/토라만이 스스로를 그것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351이전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증언이 없이는 증언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5:31).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증언은 어떤 경우에도 참되다고 말한다.358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알지만, 이 복음서에서 그의 대적들은 예수님의 출신지의 문제를 반복해서 들먹이면서도(cf. 7:27–29),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8:14)8:15–16에서, 예수님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내린 그들의 평가(cf. 7:24에서 이전의 혐의)359를 그의 신적인 관점에서 내린 평가(cf. 2:23–25; 3:11–13; 7:29; 8:14)와 대조한다. “육”(8:15)은 영의 분별력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3:6; 6:63; cf. 고전 2:11–16), 참된 평가를 위해서는 가치가 없다.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사실 토라의 반대가 아니라, 토라의 체현이며 성취이다(1:1–18에 대한 해설을 보라). 요한은 율법을 폄하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대적들이 율법에 호소하는 것은 폄하한다.366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다(8:19).
예수님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이 시점에서 그가 아버지에게 호소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도,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낸다(8:19).368 그들은 그의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8:19a). 그래서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예수님이 갈(8:21) 장소인 위에 있기 때문이다(8:23).“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과 8:25 “네가 누구냐” 질문은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그를 아는 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를 아는 것(8:19)이라는 그의 주장에 분개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에는 예수님의 발언은 그예수님이 하나님에 관해 말했다는 것을 그들이 아마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8:27).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은 때(hour)를 제한하는 요인이었다(8:20; cf. 7:30).“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 지식(theoretical knowledge)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spiritual communion)”를 의미한다.369 예수님은 아버지를 계시하기 위해서 왔다(1:18).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를 알고 그가 있는 곳으로 와서(14:4–10) 그곳에서 진리로 그에게 예배드리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다(4:23–24).
-본문 문맥 8:21~30
예수님의 죽음의 때를 예시하는 본문으로 갈등을 야기한다. 예수님은 죽을 것이지만, 그들은 죽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님이 있는 곳에 있게 될 것이지만(13:36; 14:3), 그들은 죽어서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cf. 7:34; 13:33)“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8:21), 혹은 “너희 죄 가운데서”(8:24)는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당하는 것을 가리킬 수 있으며, 아마도 시락서 16:9의 ‘엔 하마르티아이스 아우톤’(ἐν ἁμαρτίαις αύτῶν)도 그럴 것이다.375 아이로니컬하게도 예수님은 그들을 죄(1:29)와 사망(8:51)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려고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거부했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이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며(13:36–38),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는다(10:17–18).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그들이야말로 “죄 가운데서” 죽을 사람들이라고 선포한다(8:21).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확실하게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밝힌다(8:14). 그리고 왜 그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지를 밝힌다. 그들은 그곳으로부터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cf. 3:3, 10–12; 8:43).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며(cf. 3:13, 31), 세상으로부터 오지 않는 반면(7:14), 그들은 아래로부터, 즉 세상으로부터 온다.
랍비들은 때때로 “위”와 “아래”(8:23) 영역에 관한 논의를 비밀 주제(esoteric subjects)로 간주했다.382 그러나 초기 유대교의 묵시 사상 세계에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천사들의 하늘의 영역과 다른 한편으로는 땅 위 인간의 영역 사이에만 대조가 있을 뿐이다.383 현대의 독자는 “아래를” 마귀에게서 태어난 것과 연결시킬 것이며(8:44), 땅 아래 세상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사탄과 관련하여 지하 세계 안에 있는 죽은 자의 어두운 신들을 생각했던 반면,384 유대 백성들은 사탄을 그가 일하고 있는 인간 세상과 연관시켰을 것이다.385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아래에 갇혀 있는 타락한 천사들에 관한 유대 전승들에서도, 대부분의 전승들이 그들을 아래에 갇혀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오기 때문이다(8:23). (본서 1권, pp. 454–58에서 “수직적 이원론”에 대해서 보라).388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그”(8:24; cf. 3:18; 16:9)라는 것을 믿지 않는 한, 그들의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8:24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8:24에서 “내가 (그니라)”를 사용하는 것(cf. 8:28; 13:19)은 “나는 메시아이다”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389 그러나 이것은 8:58이 확증하는 것처럼, 이사야서 43:10로부터 온 신현 공식(theophanic formula)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390에고 에이이미의 예수님의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호칭의 무인식은 8:58에서 완전히 해결된다.392 한편, 그들이 믿지 못하는 것(8:24)은 그들의 유죄를 독자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3:18).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관해 아무런 개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8:25 “네가 누구냐”이 문맥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이해의 부족은 그의 정체보다도 그들의 영적인 인식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는 점을 확실히 한다예수님의 정체를 묻는 그들의 질문에 관한 직접적인 대답으로 번역한다(8:25a). 즉 “태초에 있는 이, 그가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이다”라는 것이다.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절대로 그들과의 관계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와 관련해서만 정의한다(8:26)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공생애 처음 아니 창조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말씀으로서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8:26에서 예수님은 7:18, 28에서 했던 것처럼, 자기를 보낸 이의 진리에 대해서 해설한다(8:26). 예수님은 아버지를 변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변호한다. 예수님은 그의 대화 상대들과 대조적으로(8:38), 아버지에게서 들었거나(8:26; cf. 18:20), 혹은 아버지에게 배운 것들(8:28; cf. 6:45), 아버지와 그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들(cf. 5:19–20)에 대해서 세상에게 말한다.예수님이 어떤 것들은 세상에게 말했지만, 아버지에게서부터 받았던 완전한 계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만 나누었다(15:15). 성령이 그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나눌 것처럼 말이다(16:13–15). 세상과 달리 제자들은 끝까지 그 메시지를 들을 것이기 때문에 종국에는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예수님의 대적들은 그의 정체를 인식하기 전에, 예수님을 들어 올릴 것이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그의 사명에 순종한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그의 대리인들(agents)의 권위의 궁극적인 원천이기 때문에 그의 대리인들은 그들 스스로의 권위로(‘아프 에마우투’[ἀπʼ ἐμαυτοῦ]) 행동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수행할 뿐이라는 것임(cf. 7:17; 15:5)이 이해되었다.398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배웠으며”(8:28; cf. 8:26; 5:19–20), 아버지와의 이 친밀함은 8:29에서 관계의 묘사로 이어진다. 아버지가 그에게 순종하는 자와 함께 거하신다는 것(8:29)은아버지가 그를 혼자 두지 않았다는 것(8:29; cf. 16:32)은 예수님과 요한의 청중에게 예수님은 아버지가 없이는 스스로를 증언하지 않는다는 것(8:16)을 상기시켜 준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항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주장하는데(8:29),399 그것은 아버지의 은총을 보장해 준다유대 전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피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상을 받는다(‘아레스톤’[ἀρεστόν], 토빗서 4:21)는 점을 강조한다아버지와의 연합과 서로와의 연합은 또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세상에게 드러내서 믿음을 유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제공해 줄 것이다이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반응했음에도 불구하고(8:30), 그것은 끝까지 견디지 못할 믿음이었다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빈번하게 언급한다(2:23; 7:31; 10:42; 11:45; 12:11, 42). 그러나 적어도 이 중 많은 경우에 이 믿음은 구원을 위해 끝까지 인내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이 증명된다.404
여기에서 요한은 전반적인 인간 본성, 아마도 특별히 하나님의 계시를 수납하는 자들에 관한 이전의 성경의 묘사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표적을 보았을 때 믿었지만(출 4:31), 도전을 받자 그들의 믿음은 무너졌다(출 5:21–23).
3) 주제 흐름분석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시기 전 하나님을 백성이었던 포로 귀환 후의 유대교는 포로 유배지에서 고토로 돌아가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고 모세의 율법 순종 유대인의 왕권을 다시 확립할 수 있는 미래를 고대하기 시작했다. 당시 1세기 유대교의 변화는 회당의 발생과 모세의 율법외에 구전율법을 추가하였고 페르시아제국의 여러지역에서의 상업과 국제교역을 위한 주요 언어가 아람어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때문에 그리스도 시대에 히브리어를 능통하게 말하지 못하고 성경 읽을 때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페르시아 통치 후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는 유대인들을 그리 간섭하지 않았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과 함께 셀류키드 왕조의 지배로 헬레니즘이 전국 확산되고 헬라 종교를 신봉할 것을 요구 받았다. 주전 167년 안티오쿠스가 성전을 더럽히고 유대인들에게 제우스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했고 제단에다 돼지를 제물로 드림으로써 예루살렘성전을 더럽혔다.
마카비는 전쟁을 통하여 유다와 유다의 계승자의 독립을 쟁취하였고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다시 성결하게 되었다. 성전 재봉헌은 매년 기슬르달의 하누카(재봉헌) 축제, 빛들의 축제로 기념되었다. 마카비 왕조의 통치가 후에는 독재, 부패, 부도덕, 심지어 이교적으로 변하고, 그들안에서의 내전으로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마카비 왕조(하스모니아, 마카비-요나단-시몬, 시몬의 히브리어 이름=하시몬), 요한 힐카누스의 왕조의 부끄러운 멸망에도 불구하고 후세대들은 이시기를 메시아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상화 시켰다. 이러한 발전은 결국 메시아의 기대에 영향을 끼쳐서 오실 자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하게 하는 옛 마카비 시대의 통치와 같이 표현되었다. 에돔 족속이었던 안티파터는 하스모니아 왕조로부터 왕권을 강탈하자 유대교는 자치권과 제사장직과 종교 생활이 제한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유대적이지만 로마에 충성해야 하는 왕의 호의에 의존하고 있었다.
유대교의 포로 이후 초기의 유대교와는 유사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정치, 종교적 이상주의, 다양한 문화들이 유입되면서 유대교가 분파로 분열되었다. 그나마 있는 사두개파와 엣세네파와 바리세파의 집단들도 전부 분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토라를 해석하는 서기관들로 인하여 랍비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토라의 선생으로부터 회당에서 가르쳤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고립된 상황 속에서도 회당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이루었고 정치적, 언어적, 지리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회당제도와 토라와 교육체계로 연합되었고, 그로인해 전통은 법적 변론과 결정 사항들의 큰 문서집으로 형성되어 성문 율법은 인간의 전통의 조명아래 해석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제사장들의 타락과 도도함 때문에 성전에 대한 각성을 필요로해서 엣세네파는 쿰란과 다메섹과 다른 곳에 공동체를 세우고 메시아와 사독계 제사장이 다시 세워지기를 열망하였다. 어떤 단체는 성전에 대한 형식적으로 충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또 다른 공동체는 위서들에 가득한 묵시적 신비의 계시들에 관심을 두면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대교는 온갖 종류의 분파와 이익 단체들로 분열되고 갈라졌는데 모두가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려고 경쟁했고 서로가 다른 집단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으로 로마에 편향적이고 구약의 제도가 타락했으며 종교적 분열과 세력다툼이 가득한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오신 세상은 구약이 전혀 주의 깊게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역적, 분파적 이익들이 결합하여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명을 구약의 개념과 구약의 특정본문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구약의 메시아 소망을 성취하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복음서이다. 요한은 예수에 관해 공관 복음서들과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요한은 예수의 생애와 사건보다 예수의 말씀과 그가 일으키신 이적들의 표적으로써의 가치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심판을 상징하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오게됨을 선포한다. 그를 믿은자들은 생명을 가지며 하나님의 영을 받고 거듭나서 예수가 아버지의 영광과 사랑의 표명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복음서는 그 아들 이외에는 아버지께로 갈 방법이 없음을 말하고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공관복음서와 비교하면 요한복음은 “영적인 복음서”라고 불린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주 그의 영화와 오실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영광을 받으시고 오순절에 그 영이 임하여 그 영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셔서 그들도 역시 예수의 지상사역과 현재의 그의 영화로운 상태에 대해 특별한 통찰력을 얻게하실 것이다.
요한은 역사적 전승에 의존하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였으며 그분의 존재가 의미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준데 더 관심이 있다. 제4복음서는 목격된 것의 의미, 즉 요한이 자신이 처한 역사적인 상황에서 그의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의미에 관한 수십년의 깊은 묵상을 보여준다. 제4복음서는 설화와 논증과 말씀 강화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의 논증적 문맥에서 팜된 지식이 가장 필수적인 선행조건은 예수님의 주장들을 믿는 것이며, 세상에 거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인도해 줄 성령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님에게 잘못 반응했다.
요한복음 8장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과의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다.
A 8:12~20 예수의 증언에 관한 논쟁
B 8:21~30 예수가 누구인가 논쟁
B` 8:31~47 예수의 반대자가 누구인가 논쟁
A` 8:48~59 자신에 대한 예수의 증언
그렇다면 그렇게도 메시아를 열망하던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속국으로 살았다. 바벨론 포로시기 586년에서 예수님오시기까지 500여년의 타국의 속국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유일하게 섬기는 살기를 원하며 자신들을 이 상황에서 구원해 줄 다윗왕조를 기다렸다. 페르시아 이후 헬라의 문화와 영향력은 유대인들의 율법에 불순종을 유도하는 유혹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헬라주의적 요소들을 공보하고 배워 그들의 생활방식으로 통합시키는 것이 수용할수 있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우상숭배와 관련된 헬라의 의복이 그들에게 부착되었으며 헬라의 체육관에서는 남성운동 경기가 유대의 윤리 관념에 반대되는 옷을 다 벗은 누드 상태로 진행되었으며 사람들이 스포츠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어서 예배와 희생제사가 등한시 되었다. 헬라주의 적 영향력 아래에서 유대인들에게 생활방식을 그 문화에 타협하라는 압력이 주어졌고 헬라의 극장에 관객으로 참여하거나 배우로 참가하라는 것과 정결하지 않은 음식을 먹으라는 것을 포함했다. 타협과 정절을 유지하는 삶의 갈림길에서 유대인들에게 주전 167년 안티오쿠스가 성전을 더럽히고 유대인들에게 제우스 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을 때 마카비 왕조의 승리엄청난 것이었다. 비록 마카비 왕조가 오래가지 못하고 또다시 로마의 속국이되는 절망을 안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은 마카비시대의 전쟁으로 승리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하였던 100여년(?알아보기 예수와 복음서참고) 그때를 열망하고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야를 고대하였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열망에 대한 초기 문서
솔로몬의 시편17:21~24
보소서 오 주여 그들을 위해 그들의 왕 다윗의 아들을 일으키소서
오 하나님 당신은 정해진 시간에
그가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통치하도록 선택하셨나이다
예루살렘을 짓밟아 멸망시킨 이방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정결케하소서
그로 하여금 유업으로부터 죄인들을 지혜롭고 의롭게 내쫒게하시고
죄인의 교만을 토기를 깨뜨림 같이 박살내게 하시고
그들의 모든 자원을 철장으로 산산조각 내게하소서
그가 그의 입의 검으로 무법한 이방인들을 멸망시키도록 하소서
(이와 같이 유대인들의 의식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환멸로 바울이 이방인에게로 가노라 하였을 때 죽이려고 함)
솔로몬 시편은 다윗의 자손에 대한 메시아 칭호로 등장한다. 여기서 메시아는 죄인들을 벌하는 군사적
영웅으로 등장한다. 다윗의 자손은 솔로몬 시편 17편을 배경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키며 그들의 왕은 주 메시아이고 다윗의 자손은 결국 메시아 칭호이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을 이방인들로부터 정화시키며 거룩한 백성을 모아 열방을 심판하고 메시아가 될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통하여 우리는 왜 예수께서 다윗이 자손이라는 메시아 칭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다윗의 자손이 당시에 군사적 메시아 칭호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한 것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의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가운데서도 율법을 가장 중시했고 율법 연구를 최고의 의무요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곧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요 은혜였다. 따라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에 비해 예언서와 성문서는 율법의 보조기능으로 이해했다. 그와 더불어 유대교는 기록된 율법과 구전 율법, 구전 율법은 장로의 유전으로 만들어진 율법을 모세오경, 성문율법과 동등하게 여기며 최고의 성경으로 생각하였다. 이들은 구약성경의 모세오경에 장로의 유전(전승)을 가미하여 사상을 체계화 하였는데 신약시대에 와서 랍비들에 의해 유대교 법규가 유지 계승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오경을 비롯하여 장로들의 전통과 각정유전을 엄격히 준수하는 종교적 의를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과 규범을 철저하게 준수함으로써 종교적 의를 이루는 데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결국 성경 말씀보다 전통과 유전을 더 중시하는 데 까지 나아갔다. 이들은 종교적 의를 이루기 위해 외적 형식을 중시하는 바람에 외식에 빠져 율법의 정신을 상실하였다. 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메시아 대망 사상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신약성경의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렇다보니 요한복음이 쓰였던 90년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유대인, 바리새인들의 반대와 그리스도인들과의 충돌이 가장 빈번하였을 때였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문제에서 많은 지도력을 발휘하여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충돌했다 요한이 염두에 두는 그리스도인들 곧 요한복음의 당대의 독자들은 지역의 유대 당국 회당의 관원들에게 회당에서 쫒겨나는 상황이였고 이 시기에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기독교 교회는 상당기간 동안 유대교의 회당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계승자들로 자처했으나 회당에서 바리새인,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구성원들을 빼내 가는 것으로 보였다. 둘 사이의 긴장은 피할 수 없었다. 요한은 유대인들이 하나같이 강력히 부인하는 예수의 메시아이심을 주장하려고 요한복음을 쓴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시는 분으로 믿는 것 때문에 진정한 유대인인지를 의심받았다. 요한은 이러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진정한 것이며, 성경적 유대교를 오해한 사람은 바로 그들의 대적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복음서를 썼다. 실제로 요한복음의 3장~12장의 세상에서의 예수님의 말씀 강화의 대부분은 유대 관원들과의 충돌이며 적들과의 논쟁하는 그를 담았다. 요한복음에 되풀이되어 나오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대적과 일일시되던 부정적의미로 사용된다. 유대인들을 바리새인들과 동일시되는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공동체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의 믿음의 상속자들은 바로 이들이라고 요한은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부족한 반대파에 맞서서 그들의 믿음을 지키라고 독자들을 격려한다. 요한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영화롭게 된 것처럼 그들 독자들이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의 이름의 능력으로 삶의 변화와 영화롭게 되는 모습으로 끝까지 살아가릴 원한다.
요8:12~30의 사건은 초막절 마지막 날에 일어난 일이다. 7:2,37. 유대 문헌은 세상의 빛이라는 칭호를 자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족장들, 메시아 하나님에 대한 유명한 랍비들이 사용하는 율법 등에 그 칭호를 적용한다. 하지만 그 말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어떤 것을 가리킨다. 초막절을 가장 화려하게 축하하는 행사 중에는 온 도시를 횃불로 밝히는 것이 포함되어있다. 따라서 이 절기는 수전절10:22과 함께 화려하게 불을 밝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예수님이 온 세상에 열방에 자신의 빛을 제공하신다는 것은 이사야42:6 에 대한 암시일 수 있다. 어두움에 다니는 것은 넘어지는 것, 올바른 길에서 떨어지는 것은 멸망하는 것을 나타내는 자연스러운 비유이다.
근접문맥 8:12~20 의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예수님의 강화의 중심 주제는 기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나며, 그의 대적들은 아래로부터, 즉 마귀로부터 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세상과 관련해서 인종적인 용어가 아니라 영적인 용어로 말씀하신다. (8:37.36.요일3:8.5:19) 8:12 초막절에 “예수님은 빛이라 선포하고 어둠에 다니는 것” 은 은유이다. 어둠에 다니는 것은 이미 죄 안에서 사는 인류를 묘사하는 기본적인 표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빛은 원래는 지하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 반대되는, 모든 살아있는 인간들이 보게될 햇빛에 적용되며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였다. 빛, 혹은 세상의 등() lamp of the wdorld)이라는 호칭은 여러 인물들에게 적용되었지만 공적으로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지혜, 토라만이 스스로를 빛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육”(8:15)은 영의 분별력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참된 평가를 위해서는 가치가 없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사실 토라의 반대가 아니라 토라의 체현이며 성취이다.(1:1~18) 요한은 율법을 폄하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대적들이 율법에 호소하는 것은 폄하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이 시점에서 그가 아버지에게 호소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도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의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8:19) 그래서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예수님이 갈 장소인 위(8:21)에 있기 때문이다.(8:23)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는냐?” 질문과 8:25 “네가 누구냐” 질문은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그를 아는 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를 아는 것(8:19) 이라는 그의 주장에 분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발언은 그 예수님이 하나님에 관해 말했다는 것을 그들이 아마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8:27) “하나님을 아는 것”은 유대인들의 반응과 같이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의 때를 예시하는 본문으로 갈등을 야기한다. 예수님은 죽을 것이지만 그들은 죽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이 있는 곳에 있게 될 것이지만(13:36,14:6), 그들은 죽어서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7:33,13:33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죽다의 의미 ἀποθνῄσκω 신체적 생명이 떠나고, 모든 신체적인 특징과 생명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기능이 상실되다. 위험에빠지다. 죽다: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상황에 놓이다. 끝; 멸망하다; 구덩이; 내세; 스올; 지하 세계로 내려가기. 특히 죄와 함께 하는 삶의 특징으로 관련주제 : 멸망하다.
무감각한, 죽은: 어떤 것에 대해 무관심한 느낌, 반응 감응에 있어서, 어떤것에 대해 죽은 것으로 이해된다.
“너희 죄 가운데서”는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당하는 것을 가리킬 수 있으며, 시락서 16:9 의 “엔 하마르티아이스 아우톤”도 그럴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이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죄 가운데서” 죽을 사람들이라고 선포한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확실하게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왜 그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지를 밝힌다. 그들은 그곳으로부터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며, 세상으로부터 오지 않는 반면 그들은 아래로부터, 즉 세상으로부터 온다.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있는 타락한 인류를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은 요한이 가장 독특하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세상은 요3:16에서 같이 지구 인구 전체를 의미하지만 좀더 자주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항하면서 타락한 세상의 체계를 가리킨다. 요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한다. 요한은 좀더 타락한 세상의 질서, 코스모스를 사용할 때 요한일서 2:16에서 “육신이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니” 이 세 요소는 하와의 유혹과 얼마나 가깝게 놓여질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하고 지혜롭게할 만큼 탐스럽기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저지한 세 유혹도 세 요소와 가깝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보고 얻는 것, 그리고 자신을 꼭대기로 던져서 초자역적으로 구조되는 것”이다. 세상은 타락에 이르고 그후 모든 세상의 원래 상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말하는 세상, 바울은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분명히 다르다고 말한다.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하려 하심이라” 고전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세상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은 요한과 같이 미움을 받아 박해를 받고 세상의 더러운 것 심지어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믿음이 없을 때는 세상의 지식으로 살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택하셔서, 세상의 지식 가운데 종 노릇하지 않도록,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도록, 세상에 속한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권세를 따르는 불순종의 아들을 가운데 역사하는 영인 사탄의 생각과 조종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는 세상의 물건을 다 쓰지 못하는 자들과 같이 세상의 외형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간구해야한다.
위, 아래의 영역에 관한 논의를 랍비들은 때때로 비밀주제로 간주했다 그러나 초기 유대교의 묵시사상 세계에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천사들의 하늘의 영역과 다른 한편으로는 땅 위 인간의 영역 사이에만 대조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위, 아래의 개념을 생각할 때 천국과 지옥이라는 말은 그리 흔하게 사용하지는 않지만 마가복음을 통하여 볼 때 천국은 하나님과 천사들의 처소(막11:25,30,12:25) 하늘들(막1:10,6:41,7;34) 혹은 언젠가 우리가 상을 받을 장소를 가리킨다. 지옥은 (마가복음9:43,45,47) “곧 꺼지지 않는 불” ,마태8:12,22:13,25:30 불과 어둠의 장소를 고려해 볼 때 우리는 거의 확실히 이것을 지옥의 외관이나 구조에 대한 문자적 묘사가 아닌 형벌이나 고통의 장소로 해석하게된다. 지옥은 그 자체 만으로도 불쾌한 곳이다. 현대의 독자는 “아래를” 마귀에게 태어난 것과 연결시킬 것이며(8:44) 땅 아래 세상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사탄과 관련하여 지하 세계 안에 있는 죽은자의 어두운 신들을 생각했던 반면, 유대 백성들을 사탄을 그가 일하고 있는 인간 세상과 연관시켰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아래에서 왔다”가“지옥에서 왔다”는 뜻이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의도적인 반역 가운데서 타락한 도덕적 질서 속에 있는 이 세상에서 왔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를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과 그에게 반역하여 타락한 피조 세계인 세상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시기 때문에 세상은 그를 미워한다.(7:7)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아래에 갇혀 있는 타락한 천사들에 관한 유대 전승들에서도, 대부분의 전승들이 그들을 아래에 갇혀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8:23)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이 “그”(8:24) 라는 것을 믿지 않는 한, 그들의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 예수님이 8:24에서“내가 그다”라고 사용하는 것은 “나는 메시아이다”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8:58 이 확증하는 것처럼, 이사야서 43:10로부터 온 신현공식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에고에이미의 예수님의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호칭의 무인식은 8:58에서 완전히 해결된다. 한편 그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유죄를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관해 아무런 개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네가 누구냐” 이 문맥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이해의 부족은 그의 정체보다도 그들의 영적인 인식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점을 확실히 한다. 예수님의 정체를 묻은 그들의 질문에 관해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절대로 그들과의 관계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와 관련해서만 정의한다.(8:26) 예수님은 아버지를 변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을 변호한다. 예수님은 그의 대화 상대들과 대조적으로 아버지에게서 들었거나, 아버지에게 배운 것들, 아버지와 그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들에 대해서 세상에게 말한다. 예수님이 어떤 것들을 세상에게 말했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완전한 계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만 나누었다. 성령이 그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나눌 것처럼 말이다.(16:13~15) 세상과 달리 제자들은 끝까지 그 메시지를 들을 것이기 때문에 종국에는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대적들은 그의 정체를 인식하기 전, 예수님을 들어 올릴 것이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그의 사명에 순종한 것을 드러낼 것이다. 무리들에게 있던 예수에 대한 점차 증가하는 실망감과 그의 처형에 찬성하는 지도자들의 확고한 의지는 그의 사역이 진전되면서 그가 군사적 혹은 정치적 메시아가 되고자 하는 어떤 의도도 없었다는 것으로 인해 확실하게 굳혀졌다. 특히 그의 공생애 사역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고 예루살렘에서의 여정이 길어지면서 예수는 세번의 다른 경우에 그의 죽음을 자세하게 예언했다. (막8:31,9:31,10:33~34) 그는 제자들을 불러 고난과 심지어는 필요하다면 그에 대한 헌신을 위해 죽을 것도 각오하고 그를 따라올 것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이 세상의 모든 안위와 쾌락은 하나님을 떠난 영원과 모든 좋은 것을 비교해 볼 때 중요하지 않게 된다. 비슷하게 모든 고난과 일찍 죽음을 맞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다가 올 삶의 영광과 위엄과 비교하면 그 중요성이 약해진다.
시편: 49:7~9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라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구약의 말씀은 신약의 성취
막8:36~37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대리인들의 권위의 궁극적인 원천이기 때문에 그의 대리인들은 그들 스스로의 권위로 행동할 수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수행할 뿐이라는 것임이 이해되었다.
고대사회에서는 대리인의 개념이 확실하였다. 대리인은 자신을 파송한 사람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은 메신저라는 개념은 유대교에만 국한된 것 아니라 가장 초기 헬라 문헌에도 전령들의 면책권을 존중하는 여러사람들을 보고한다. 로마 시대에 시저가 총독이나 대변인을 보냈을 때, 그 대변인은 시저의 권위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으며, 또한 시저가 원하는 바를 수행할 책임이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잠언에서처럼 아주 먼 과거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했으며 결국에는 유대교의 율버 아래서 공식화되었다. 우리는 대리의 관습의 일부 양상들이 법제화된 시기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그 관습이 다른 문화 안에서 실행된 것을 보면 유대교의 관습이 그에 관해 해설하는 랍비의 자료들보다 더 오래된 것임을 알 수있다. 예를 들어 로마법과 유대법은 약혼할 때 대리인 혹은 중재하는 결혼 브로커의 기능을 인정했다. 이런 종류의 관습은 보모들의 결혼 계약의 조건들을 협상해야만 하는 사회에서는 상당히 흔하게 일어난다. 유대법은 약혼할 때 대리인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들은 흔했으며, 그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규칙들이 제정되었다. 또한 이혼할 때나 사업할 때도 대리인들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대사에 대한 개념은 디아스포라에게 대사를 보내는 관행이 랍비 문헌 뿐만 아니라 로마 율법과 교부들에서도 증명된다. 그러나 더 이전 문헌들은 대제사장이 동일한 관행을 시행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배웠으며(8:28), 아버지와의 이 친밀함은 8:29에서 관계의 묘사로 이어진다. 아버지가 그에게 순종하는 자와 함께 거하신다는 것(8:29)은 아버지가 그를 혼자 두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과 요한의 청중에게 예수님은 아버지 없이 스스로 증언하지 않는다는 것을(8:16)을 상기시켜준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항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주장하는데(8:29) 그것은 아버지의 은총을 보장해준다. 예수께서 누구신지 온전히 밝혀지는 일은 인자가 들렸을 때 일어나게 될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들릴 때 그의 아버지 앞으로 들려 올라가서 그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누렸던 영광으로 돌아온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을 높아지심이고 비록 십자가가 원수, 대적들에 의해 자행되지만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말씀하심을 확증해주는 사건이 될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게된다면 십자가로 인해 아주 분명하게 알게될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 조차도 마지막 날에는 그들이 십자가 위로 들려올려서 죽인 예수에의해 정죄를 받게 될 것이고 전에는 눈이 멀어서 자신들 주위를 비추고 있던 영광을 보지 못했던 자들도 언젠가는 무릎을 꿇고서 예수가 주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름이 전부이며 그가 아버지의 뜻을 자원해서 철저하고 온전히 순복하여 행해 온 모든 것의 최종 결론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임재에 대한 깊은 인식을 지니시고 계시며 아버지께서 보내신 모든 뜻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자의 모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순복했다. 유대전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피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상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버지와의 연합과 서로와의 연합은 또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세상에게 드러내서 믿음을 유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 경우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반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끝까지 견디지 못할 믿음이었다. 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빈번하게 언급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중 많은 경우에 이 믿음은 구원을 위해 끝까지 인내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 증명되낟.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표적을 보았을 때 믿었지만(출4:31) 도전을 받자 그들의 믿음은 무너졌다.(출5:21~23)
11 정경적 정황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모세에게 그 백성을 구원하는 길에 있어서 계시하셨다. (출13장)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분의 백성을 삼으시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셨다. 스스로를 계시하시니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이 창조하신 땅에 오셔서 그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자기 땅에 보내셨다. 매일 드리는 제사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끗하게 할 수 없고, 마음으로 하나님 만을 섬길 수 없기에 자기 땅, 자기 백성을 향한 구원의 계획 속에 오셨다.
그러나 요한복음 8장에 드러난 그 백성들, 곧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분의 백성들은 예수는 어디서 왔는가(23,26,29)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21.22,28)아버지는 누구인가(26,27,38,54~55) 예수는 누구신가(23,26,38,54~55)를 알아야 했다.
히브리어 이사야 35:1~6
개역개정 이사야35:1~8
📷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고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누가복음 7:22~23
마태복음11:2~6 (누가와 병행구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1)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이사야 35:5~6
이사야 본문은 1~4절은 사막에 꽃이 필 것을 약속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에게 격려를 준다는 의미를 가진다. 5~7절은 구원을 선억하는 약속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이 선언에 두가지 비유가 사용된다. 병약한 자들이 고침을 받고 사막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비유이다. 8~10절은 구속 받은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대로에 대해 말한다. 가장 구체적인 약속은 시온에 계신 하나님과의 즐거운 교제다.(1절 에돔의 부정한 짐승으로 가득한 음울한 광야가 활짝 핀 꽃들로 가득한 기쁨의 장소로 바뀐다.)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 낼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기쁨은 언제자 하나님의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부산물이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멀리하며 그 최종결과는 황량함이다. 우리는 다른 모든 도움은 쓸모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만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다가오시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하게 되는 데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2절 영광이라는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이냐 열방의 영광인 두길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드리고자 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3~4절 “약한 손”은 두려움으로 무력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방보다 크시며 열방이 압제를 계속하고도 무사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불균형을 바로 잡으시고 압제자에게 보응하기 위해 오실 것이다. “하나님이 오사”는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셔서 나는 하나님께 이를수 없다”고 외치는 심령에게 성경은 대답한다. “네가 하나님께 이를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네게 오신다.” 그처럼 하나님은 구원의 과정을 통해, 섭리의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으로 수천년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토록 그분과 연합하게 될 마지막 날까지 계속해서 오실 것이다. 5~7절은 연약한 자들이 고침받고 사막에 물이 솟아난다는 두가지 구원의 비유를 제시함으로 1~4절에 대해 부연 설명한다. 성경시대 사람들은 연약한 자들과 사막을 모두 죽음에 예속된 황무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생명 없는 것에 풍성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생각은 이런 비유들을 통해 잘 표현된다. 맹인과 연약한 자들의 압제로부터의 자유는 보다더 풍성한 생명을 더 강조한다. 압제로부터의 자유는 약속 전체의 일부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내적인 풍성함이 없으면 물리적 자유는 축복 뿐만아니라 저주도 될수 있다. 맹인, 못듣는 사람은 육체적 상태뿐만 아니라 영적 상태를 말하는데 자주 사용되어왔다. 그래서 선지자는 참된 가치를 보고 참된 인도함을 받는 날이 올 것을 약속한다.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는 베드로가 성전에서 저는 자를 고친 사건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된다. “메마른땅”“승량이가 눕던곳” 사람들이 살던 곳이 승냥이들이 사는 광야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짐승들이 보통 거주하는 바위산들이 물이 튀는 목초지가 되었다. 인간의 방식은 사람이 거주하는 땅을 거주할 수 없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반면, 하나님의 방식은 황무한 곳을 택하여 그곳을 풍요로운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8~10절은 구속받은 자들이 시온으로 행진하는 대로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시를 절정으로 이끌어 간다. 핵심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로 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시는 것은 백성들이 예배와 교제를 위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누가복음 7:22~23
메시아적 시기의 도래를 알리며 명백하게 율법과 선지자의 해석의 권위는 이사야에 나오는 또 다른 중요한 예언의 더 나은 성취를 가지고 있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옥중에 있던 그를 방문하고 예수에게 돌아와 그가 메시아인지 물어보았을 때 예수는 정확히 이 본문을 언급한다.
요한에게 제기되는 질문과 이슈는 눅7:1~17절에서 묘사하는 예수의 사역의 특징에 토대를 두고 있다. 예수가 행하는 사역의 특징, 예수의 정체, 예수의 활동에 대한 반응에 초점을 맞춘다. 요한의 사역은 은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보다 더 강력한 능력을 가진 자가 오는 것을 예고했으며3:15~17에서 오실 이는 메시아로 밝혀진다. 예수에 대한 부정적 반응은 내러티브에서 이미 길게 묘사되는데 이런 반응은 누가의 청중에게 요한이 던지는 질문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구원을 위해 보냄받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어떻게 이런 반대에 직면할 수 있는가? 이는 누가가 요한이 던진 질문에서 그의 의도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오실 그이”를 요한이 언급하는 것은 예수에 대한 기대감을 가졌던 요한이 제기한 질문의 핵임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요한은 자신의 종말론적 기대와 예수가 보여준 현실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 분명하다. 예수의 정체에 대한 요한의 고민은 7:1~17과 관련성이 있다. 예수가 앞 장면에서 이방인 장교를 위해 은혜를 베풀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는 사건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가 행한 사역은 요한의 사역에 나타난 특징이나 심판을 집행할 오실 그분에 대한 요한의 기대와는 상당히 다르다. 과연 예수는 요한이 기대한 그이, 그 메시아가 맞는가? 요한은 예수의 활동에 나타난 특징이 그의 메시아 신분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강조할 내용처럼 요한의 의구심은 메시아, 그리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방문이 어떤 모습으로 실현될 것인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판단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키질”이 요한이 예상하지 못한 흐름으로 진행될 것을 분명하지만 사실상 요한이 예고했던 키질에 관여하게 된다(3:17~18).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통해 독자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예수의 정체를 메시아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요한의 질문에 이어서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의 강력한 활동, 치유, 귀신을 쫒아내는 활동을 요약한다.
예수는 이사야29:18~19,35:5~6,42:18,43:8,61:8에 근거하여 이사야서의 인유들을 종합하는 식으로 구원의 축제로 자신의 메시아 사역을 묘사한다. 예수가 언급하는 구원 활동의 목록은 그가 실행하는 사명의 특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강조하고 구체화하며 구원의 광범위한 범위를 의미한다. 예수는 주의 성령이 자신에게 기름 부은 목적을 행하고 있다. 예수가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도록 지시한 내용이 곧이어‘맹인이 보며’‘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을 언급한것도 이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자들과 함께 거론된다. 사회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면서 예기치 않게 구원을 영접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의 구원은 이런 가난한 자들에 국한 된것이 아니다.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을 짓는 비용을 지불할 만큼 부자이지만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외부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사역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탄생 내러티브에서 시므온은 예수가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누가의 내러티브에서 예수의 사역은 끊임없는 반대에 직면하고 결국 십자가의 처형으로 이어진다. 예수는 하나님의 목적, 시작된 종말론적 구원, 예수의 사명을 위해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 원하는 자들에게 복을 선언한다.
신약 요한복음 4:25~26, 41~42
요한복음 4:25~26, 41~42
25 λέγει αὐτῷ ἡ γυνή · Οἶδα ὅτι Μεσσίας ἔρχεται, ὁ λεγόμενος χριστός · ὅταν ἔλθῃ ἐκεῖνος, ἀναγγελεῖ ἡμῖν ⸀ἅπαντα.
26 λέγει αὐτῇ ὁ Ἰησοῦς · Ἐγώ εἰμι, ὁ λαλῶν σοι.
41 καὶ πολλῷ πλείους ἐπίστευσαν διὰ τὸν λόγον αὐτοῦ,
42 τῇ τε γυναικὶ ἔλεγον ὅτι Οὐκέτι διὰ τὴν σὴν λαλιὰν πιστεύομεν · αὐτοὶ γὰρ ἀκηκόαμεν, καὶ οἴδαμεν ὅτι οὗτός ἐστιν ἀληθῶς ὁ σωτὴρ τοῦ κόσμου.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4:25~26, 41~42
예수님께서는 사마이라 여인과 대화를 요청하시며 그녀에게 내가 주는 물은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며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바로 지금임을 드러내신후 그년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많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라는 칭호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를 아주 많이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 자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더 자제되어야 했고 신중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가 말하는 내가 그라” 라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준 예수님의 계시는 요한이 전하려고 하던 “Ἐγώ εἰμι”의 계시의 절정이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자신에 대하여 모호한 대답을 주신 반면 여인에게는 영원한 생수이신 자신을 나타내셨다. 여인은 영생의 물에 더 관심을 갖던 이여인은 자신이 마셔야 하는 육신적인 물통을 버려두고 가서 마을 전체를 데리고 온다.
요4: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여인의 요청“와서 보라” 하며 사마리아 마을 전체를 향한 초청의 말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준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영접하는 것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마을로 초청하고 구주로 부르고 왕들이나 황제들을 받아들이는 방식 이상으로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고백한다.
12 정경흐름 분석(주제흐름분석+정경적 정황)
예수님 이 땅에 오시기 전
포로 귀환 후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교는 포로 유배지에서 고토로 돌아가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고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며 유대인의 왕권을 다시 확립할 수 있는 미래를 고대하였다. 포로 후기 유대교의 변화는 회당의 발생과 모세의 율법 외에 구전 율법을 추가하였고 페르시아제국의 여러 지역에서의 상업과 국제교역을 위한 주요 언어가 아람어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때문에 그리스도 시대에 히브리어를 능통하게 말하지 못하고 성경 읽을 때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페르시아 통치 후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는 유대인들을 그리 간섭하지 않았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과 함께 셀류키드 왕조의 지배로 헬레니즘이 전국 확산되고, 헬라 종교를 신봉할 것을 요구받았다. 주전 167년 안티오쿠스가 유대인들에게 제우스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했고,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드림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다. 마카비는 전쟁을 통하여 유다와 유다의 계승자의 독립을 쟁취하였고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다시 성결하게 되었다. 성전 재봉헌은 매년 기슬르달의 하누가(재봉헌) 축제, 빛들의 축제로 기념되었다. 마카비 왕조의 통치가 후에는 독재, 부패, 부도덕, 심지어 이교적으로 변하고, 그들 안에서의 내전으로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마카비 왕조(하스모니아), 요한 힐카누스 왕조의 부끄러운 멸망에도 불구하고 후세대들은 이 시기를 메시아 시대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상화시켰다. 이는 결국 메시아의 기대에 영향을 끼쳐서 오실 자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하게 하는 옛 마카비 시대의 통치와 같이 표현되었다. 에돔 족속이었던 안티파터는 하스모니아 왕조로부터 왕권을 강탈하자 유대교의 자치권과 제사장직, 종교생활을 제한하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유대적이지만 로마에 충성해야 하는 왕의 호의에 의존해야했다.
포로 후기의 유대교는 포로 이후 초기의 유대교와 유사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정치, 종교적 이상주의, 다양한 문화들이 유입되면서 유대교가 분열되었다. 그나마 있던 사두개파와 엣세네파와 바리세파의 집단들도 전부 분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토라를 해석하는 서기관들로 인하여 랍비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토라의 선생으로부터 회당에서 가르쳤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고립된 상황 속에서도 그 지역의 회당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이루었고 정치적 언어적, 지리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회당제도와 토라의 교육체계로 연합되었다. 그로인해 전통은 법적 변론과 결정 사항들의 큰 문서집으로 형성되어 성문 율법은 인간의 전통의 조명아래 해석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제사장들의 타락과 도도함 때문에 성전에 대한 각성을 필요로 해서 엣세네파는 쿰란과 다메섹관 다른 곳에 공동체를 세우고 메시아와 사독계 제사장이 다시 세워지기를 열망하였다. 어떤 단체는 성전에 대한 형식적인 충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또 다른 공동체는 위서들에 가득한 묵시적 신비의 계시들에 관심을 두면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대교는 온갖 종류의 분파와 이익단체들로 분열되고 갈라졌는데 모두가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려고 경쟁했고 서로가 다른 집단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으로 로마에 편향적이고 구약의 제도가 타락했으며 종교적 분열과 세력다툼이 가득한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오신 세상은 구약이 전혀 주의 깊게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역적, 분파적 이익들이 결합하여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은 구약의 개념과 구약의 특정 본문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구약의 메시아 소망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요한은 예수님에 관해 공관복음서들과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요한은 예수의 생애와 사건보다 예수의 말씀과 그가 일으키신 이적들을 표적으로써의 가치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심판을 상징하는 어둠움에서 빛으로 나아오게됨을 선포한다. 그를 믿은 자들은 생명을 가지며 하나님의 영을 받고 거듭나서 예수가 아버지의 영광과 사랑의 표명임을 이해하게 될것이다. 이 복음서는 그 아들 이외에는 아버지께로 갈 방법이 없음을 말하고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공관복음서와 비교하면 요한복음은 “영적인 복음서”라고 불린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주 그의 영화와 오실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영광을 받으시고 오순절에 그 영이 임하여 그 영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셔서 그들도 역시 예수의 지상 사역과 현재의 그의 영화로운 상태에 대해 특별한 통찰력을 얻게 하실 것이다.
요한은 역사적 전승에 의존하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였으며 그분의 존재가 의미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데 더 관심이 있다. 제4복음서는 목격된 것의 의미, 즉 요한 자신이 처한 역사적인 상황에서 그의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의미에 관한 수십녀의 깊은 묵상을 보여준다. 제4복음서는 설화와 논증과 말씀 강화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의 논증적 문백에서 참된 지식이 가장 필수적인 선행 조건은 예수님의 주장들을 믿은 것이며, 세상에 거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인도해 줄 성령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님에게 잘못 반응했다.
요한복음 8장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과의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는 어디서 왔는가, 그는 어디로 가는가,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예수는 누구인가를 알고자 끊임없이 논쟁하며 묻는다.
그렇다면 그렇게도 메시아를 열망하던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유대인들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속국으로 살았다. 바벨론 포로기 주전586년에서 예수님 오시기까지 500여년의 타국의 속국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며 살기를 원하며 자신들을 이 속박의 상황에서 구원해 줄 다윗 왕조를 기다렸다. 페르시아와 이후 헬라의 문화와 영향력은 유대인들의 율법에 불순종을 유도하고 유혹하였다. 유대인들은 헬라주의적 요소들을 공부하고 배워 그들의 생활방식으로 통합시키는 것을 수용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우상숭배와 관련된 헬라의 의복이 그들에게 부착되었으며 헬라의 체육관에서는 남성운동 경기가 유대의 윤리 관념에 반대되는 옷을 다 벗은 누드상태로 진행되었으며 사람들이 스포츠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어서 예배와 희생 제사가 등한시되었다. 유대인들에게 헬라주의적 영향력 아래에서 그 문화에 타협하라는 압력이 주어졌다. 헬라의 극장에 관객으로 참여하거나 배우로 참가하라는 것과 정결하지 않은 음식을 먹으라는 것을 포함했다. 타협과 정절을 유지하는 삶의 갈림길에서 유대인들에게 주전 167년 안티오쿠스가 성전을 더럽히고 유대인들에게 제우스 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을 때 마카비 왕조의 승리는 엄청난 것이었다. 비록 마카비 왕조가 오래가지 못하고 또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되는 절망을 안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은 마카비시대의 전쟁으로 승리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하였던 100여년(주전167~63)의 그때를 열망하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고대하였다.
솔로몬의 시편17:21~24
보소서 오 주여 그들을 위해 그들의 왕 다윗의 아들을 일으키소서
오 하나님 당신은 정해진 시간에
그가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통치하도록 선택하셨나이다
예루살렘을 짓밟아 멸망시킨 이방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정결케하소서
그로하여금 유업으로부터 죄인들을 지혜롭고 의롭게 내쫒게하시고
죄인의 교만을 토기를 깨뜨림 같이 박살내게 하시고
그들의 모든 자원을 철장으로 산산조각 내게하소서
그가 그의 입의 검으로 무법한 이방인들을 멸망시키도록 하소서
(이와 같이 유대인들의 의식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환멸로 바울이 이방인에게로 가노라 하였을 때 죽이려고 함)
솔로몬 시편의 다윗의 자손은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키며 그들의 왕은 메시아였다. 이는 다윗의 자
손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을 이방인들로부터 정화시키며 거룩한 백성을 모아 열방을 심판하
고 메시아가 될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통하여 우리는 왜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메시아 칭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다윗의 자손이 당시에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 칭호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한 것은 자신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의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가운데서도 율법을 가장 중시했고, 율법 연구를 최고의 의무요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곧 율법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요, 은혜였다. 따라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에비해 예언서와 성문서는 율법의 보조기능으로 이해했다. 그와 더불어 유대교는 기록된 율법과 구전 율법을 만들었다. 구전 율법은 구약성경의 모세오경에 장로의 유전(전승)을 가미하여 사상을 체계화한 신약시대에 와서 랍비들에 의해 법규로 유지 계승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구전 율법은 모세오경, 성문율법과 동등하게 여겼고 최고의 성경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모세오경을 비롯하여 장로들의 전통과 각종유전을 엄격히 준수하는 종교적 의를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과 규범을 철저하게 준수함으로써 종교적 의를 이루는 데 주된 관심을 가지고 성경 말씀보다 전통과 유전을 더 중시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이들은 종교적 의를 이루기 위해 외적 형식을 중시하는 바람에 외식에 빠져 율법의 정신을 상실하였다. 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메시아 대망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신약성경의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렇다보니 요한복음이 쓰였던 90년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유대인, 바리새인들의 반대와 그리스도인들과의 충돌이 가장 빈번하였을 때였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문제에서 많은 지도력을 발휘하여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충돌했다. 요한이 염두에 두는 그리스도인들 곧 요한복음의 당대의 독자들은 지역의 유대 당국 회당의 관원들에게 회당에서 쫓겨나는 상황이었고 이 시기에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상당기간 동안 유대교의 회당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구성원들을 빼내 가는 것으로 보았다. 둘 사이의 긴장은 피할 수 없었다. 요한은 유대인들이 하나같이 강력히 부인하는 예수의 메시아이심을 주장하려고 요한복음 쓴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시는 분으로 믿은 것 때문에 진정으로 유대인인지를 의심 받았다. 요한은 이러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진정한 것이며 성경적 유대교를 오해한 사람은 바로 그들임을 주장하며 복음서를 썼다. 실제로 요한복음의 3장~12장의 세상에서의 예수님의 말씀 강화의 부분은 유대 관원들과의 충돌이며 적들과의 논쟁하는 글을 담았다. 요한복음에 되풀이되어 나오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대적들과 일일시되던 부정적의미로 사용된다.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과 동일시되는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의 믿음의 상속자들은 바로 이들이라고 요한은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부족한 반대파에 맞서서 그들의 믿음을 지키라고 독자들을 격려한다. 요한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영화롭게 된 것처럼 그들 독자들이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의 이름의 능력으로 삶이 변화와 영화롭게되는 모습으로 끝까지 살아가길 원한다.
요 8: 12~30 의 사건은 초막절 마지막 날에 일어난 일이다.(7:2,37) 유대인들의 구전 율법인 미쉬나(Mishnah)에는 초막절을 지키는 풍습이 잘 기록되어 있다. 살펴보면,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 인근에 1주일 동안 기거할 초막을 지었다. 여자나 아이들은 초막에 기거하는 것이 의무 사항은 아니었다. 초막은 종려나무, 버드나무, 도금양(挑金孃)의 가지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가지는 초막 장식에 사용되었다. 또 매일 할렐 시편(시 113–118편)을 부르며 118편 25절의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구절이 나올 때는 이 가지들을 흔들며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였다.이 기간에는 매일 특별한 세 개의 의식이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① 매일 아침에는 하나님께 물을 헌납하는 의식이 행해졌다초막절에 행한 또 하나의 성대한 의식은 밤에 이루어졌다. 제사장은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4개의 큰 촛불에 불을 밝혔고 참석자들은 이 불빛 아래서 춤을 추었다. 이때 레위인들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시 120–134편)를 불렀다.③ 이른 새벽 해가 뜨는 시간에는 제사장들이 성전 동문으로 가서 태양을 등지고 서쪽의 성전을 바라보며 “우리 조상은 동쪽을 보며 태양을 숭배했지만(겔 8:16) 우리는 성전을 바라보며 주를 경배하나이다.”라고 장엄하게 외쳤다고 한다. 유대 문헌은 세상의 빛이라는 칭호를 자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족장들, 메시아 하나님에 대한 유명한 랍비들이 사용하는 율법 등에 그 칭호를 적용한다. 하지만 그 말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어떤 것을 가리킨다. 초막절을 가장 화려하게 축하하는 행사 중에는 온 도시를 횃불로 밝히는 것이 포함되어있다. 따라서 이 절기는 수전절 10:22과 함께 화려하게 불을 밝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예수님이 온 세상에 열방에 자신의 빛을 제공하신다는 것은 이사야42:6 에 대한 암시일 수 있다. 어두움에 다니는 것은 넘어지는 것, 올바른 길에서 떨어지는 것은 멸망하는 것을 나타내는 자연스러운 비유이다.
근접문맥 8:12~20의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예수님의 강화의 중심 주제는 기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나며, 그의 대적들은 아래로부터, 즉 마귀로부터 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세상과 관련해서 인종적인 용어가 아니라 영적인 용어로 말씀하신다. (8:37.36.요일3:8.5:19) 8:12 초막절에 “예수님은 빛이라 선포하고 어둠에 다니는 것”은 은유이다. 어둠에 다니는 것은 이미 죄 안에서 사는 인류를 묘사하는 기본적인 표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빛은 원래는 지하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 반대되는, 모든 살아있는 인간들이 보게될 햇빛에 적용되며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였다. 빛, 혹은 세상의 등(lamp of the wdorld)이라는 호칭은 여러 인물들에게 적용되었지만 공적으로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지혜, 토라만이 스스로를 빛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육”(8:15)은 영의 분별력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참된 평가를 위해서는 가치가 없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사실 토라의 반대가 아니라 토라의 체현이며 성취이다.(1:1~18) 요한은 율법을 폄하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대적들이 율법에 호소하는 것은 폄하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이 시점에서 그가 아버지에게 호소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도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의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8:19) 그래서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예수님이 갈 장소인 위(8:21)에 있기 때문이다.(8:23)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는냐?” 질문과 8:25 “네가 누구냐” 질문은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그를 아는 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를 아는 것(8:19) 이라는 그의 주장에 분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발언은 그 예수님이 하나님에 관해 말했다는 것을 그들이 아마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8:27) “하나님을 아는 것”은 유대인들의 반응과 같이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의 때를 예시하는 본문으로 갈등을 야기한다. 예수님은 죽을 것이지만 그들은 죽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이 있는 곳에 있게 될 것이지만(13:36,14:6), 그들은 죽어서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7:33,13:33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죽다의 의미 ἀποθνῄσκω 신체적 생명이 떠나고, 모든 신체적인 특징과 생명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기능이 상실되다. 위험에빠지다. 죽다: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상황에 놓이다. 끝; 멸망하다; 구덩이; 내세; 스올; 지하 세계로 내려가기. 특히 죄와 함께 하는 삶의 특징으로 관련주제 : 멸망하다.
무감각한, 죽은: 어떤 것에 대해 무관심한 느낌, 반응 감응에 있어서, 어떤것에 대해 죽은 것으로 이해된다.
“너희 죄 가운데서”는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당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이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죄 가운데서” 죽을 사람들이라고 선포한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확실하게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왜 그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지를 밝힌다. 그들은 그곳으로부터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며, 세상으로부터 오지 않는 반면 그들은 아래로부터, 즉 세상으로부터 온다.
세상은 요한이 가장 독특하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세상은 요3:16에서 같이 지구 인구 전체를 의미하지만 좀 더 자주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항하면서 타락한 인류를 가리킨다.
요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한다. 요한은 좀더 타락한 세상의 질서, 코스모스를 사용할 때 요한일서 2:16에서 “육신이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니” 이 세 요소는 하와의 유혹과 얼마나 가깝게 놓여질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하고 지혜롭게할 만큼 탐스럽기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저지한 세 유혹도 세 요소와 가깝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보고 얻는 것, 그리고 자신을 꼭대기로 던져서 초자역적으로 구조되는 것”이다. 세상은 타락에 이르고 그후 모든 세상의 원래 상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분명히 다르다고 말한다.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하려 하심이라” 고전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세상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은 요한과 같이 미움을 받아 박해를 받고 세상의 더러운 것 심지어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믿음이 없을 때는 세상의 지식으로 살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택하셔서, 세상의 지식 가운데 종 노릇하지 않도록,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도록, 세상에 속한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권세를 따르는 불순종의 아들을 가운데 역사하는 영인 사탄의 생각과 조종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는 세상의 물건을 다 쓰지 못하는 자들과 같이 세상의 외형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간구해야한다.
위, 아래의 영역에 관한 논의를 랍비들은 때때로 비밀주제로 간주했다 그러나 초기 유대교의 묵시사상 세계에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천사들의 하늘의 영역과 다른 한편으로는 땅 위 인간의 영역 사이에만 대조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위, 아래의 개념을 생각할 때 천국과 지옥이라는 말은 그리 흔하게 사용하지는 않지만 마가복음을 통하여 볼 때 천국은 하나님과 천사들의 처소(막11:25,30,12:25) 하늘들(막1:10,6:41,7;34) 혹은 언젠가 우리가 상을 받을 장소를 가리킨다. 지옥은 (마가복음9:43,45,47) “곧 꺼지지 않는 불” ,마태8:12,22:13,25:30 불과 어둠의 장소를 고려해 볼 때 우리는 거의 확실히 이것을 지옥의 외관이나 구조에 대한 문자적 묘사가 아닌 형벌이나 고통의 장소로 해석하게된다. 지옥은 그 자체 만으로도 불쾌한 곳이다. 현대의 독자는 “아래를” 마귀에게 태어난 것과 연결시킬 것이며(8:44) 땅 아래 세상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사탄과 관련하여 지하 세계 안에 있는 죽은자의 어두운 신들을 생각했던 반면, 유대 백성들을 사탄을 그가 일하고 있는 인간 세상과 연관시켰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아래에서 왔다”가“지옥에서 왔다”는 뜻이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의도적인 반역 가운데서 타락한 도덕적 질서 속에 있는 이 세상에서 왔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를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과 그에게 반역하여 타락한 피조 세계인 세상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시기 때문에 세상은 그를 미워한다.(7:7)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아래에 갇혀 있는 타락한 천사들에 관한 유대 전승들에서도, 대부분의 전승들이 그들을 아래에 갇혀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8:23)
래서 그들이 예수님이 “그”(8:24) 라는 것을 믿지 않는 한, 그들의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 예수님이 8:24에서“내가 그다”라고 사용하는 것은 “나는 메시아이다”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8:58 이 확증하는 것처럼, 이사야서 43:10로부터 온 신현공식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에고에이미의 예수님의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호칭의 무인식은 8:58에서 완전히 해결된다. 한편 그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유죄를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관해 아무런 개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네가 누구냐” 이 문맥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이해의 부족은 그의 정체보다도 그들의 영적인 인식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점을 확실히 한다. 예수님의 정체를 묻은 그들의 질문에 관해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절대로 그들과의 관계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와 관련해서만 정의한다.(8:26) 예수님은 아버지를 변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을 변호한다. 예수님은 그의 대화 상대들과 대조적으로 아버지에게서 들었거나, 아버지에게 배운 것들, 아버지와 그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들에 대해서 세상에게 말한다. 예수님이 어떤 것들을 세상에게 말했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완전한 계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만 나누었다. 성령이 그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나눌 것처럼 말이다.(16:13~15) 세상과 달리 제자들은 끝까지 그 메시지를 들을 것이기 때문에 종국에는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대적들은 그의 정체를 인식하기 전, 예수님을 들어 올릴 것이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그의 사명에 순종한 것을 드러낼 것이다. 무리들에게 있던 예수에 대한 점차 증가하는 실망감과 그의 처형에 찬성하는 지도자들의 확고한 의지는 그의 사역이 진전되면서 그가 군사적 혹은 정치적 메시아가 되고자 하는 어떤 의도도 없었다는 것으로 인해 확실하게 굳혀졌다. 특히 그의 공생애 사역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고 예루살렘에서의 여정이 길어지면서 예수는 세번의 다른 경우에 그의 죽음을 자세하게 예언했다. (막8:31,9:31,10:33~34) 그는 제자들을 불러 고난과 심지어는 필요하다면 그에 대한 헌신을 위해 죽을 것도 각오하고 그를 따라올 것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이 세상의 모든 안위와 쾌락은 하나님을 떠난 영원과 모든 좋은 것을 비교해 볼 때 중요하지 않게 된다. 비슷하게 모든 고난과 일찍 죽음을 맞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다가 올 삶의 영광과 위엄과 비교하면 그 중요성이 약해진다.
시편: 49:7~9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라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구약의 말씀은 신약의 성취
막8:36~37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고대사회에서는 대리인의 개념이 확실하였다. 대리인은 자신을 파송한 사람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은 메신저라는 개념은 유대교에만 국한된 것 아니라 가장 초기 헬라 문헌에도 전령들의 면책권을 존중하는 여러사람들을 보고한다. 로마 시대에 시저가 총독이나 대변인을 보냈을 때, 그 대변인은 시저의 권위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으며, 또한 시저가 원하는 바를 수행할 책임이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잠언에서처럼 아주 먼 과거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했으며 결국에는 유대교의 율버 아래서 공식화되었다. 우리는 대리의 관습의 일부 양상들이 법제화된 시기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그 관습이 다른 문화 안에서 실행된 것을 보면 유대교의 관습이 그에 관해 해설하는 랍비의 자료들보다 더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법과 유대법은 약혼할 때 대리인 혹은 중재하는 결혼 브로커의 기능을 인정했다. 이런 종류의 관습은 보모들의 결혼 계약의 조건들을 협상해야만 하는 사회에서는 상당히 흔하게 일어난다. 유대법은 약혼할 때 대리인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들은 흔했으며, 그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규칙들이 제정되었다. 또한 이혼할 때나 사업할 때도 대리인들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대사에 대한 개념은 디아스포라에게 대사를 보내는 관행이 랍비 문헌 뿐만 아니라 로마 율법과 교부들에서도 증명된다. 그러나 더 이전 문헌들은 대제사장이 동일한 관행을 시행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은 그의 대리인들의 권위의 궁극적인 원천이기 때문에 그의 대리인들은 그들 스스로의 권위로 행동할 수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수행할 뿐이라는 것임이 유대인들에게 이해되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배웠으며(8:28), 아버지와의 이 친밀함은 8:29에서 관계의 묘사로 이어진다. 아버지가 그에게 순종하는 자와 함께 거하신다는 것(8:29)은 아버지가 그를 혼자 두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과 요한의 청중에게 예수님은 아버지 없이 스스로 증언하지 않는다는 것을(8:16)을 상기시켜준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항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주장하는데(8:29) 그것은 아버지의 은총을 보장해준다. 예수께서 누구신지 온전히 밝혀지는 일은 인자가 들렸을 때 일어나게 될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들릴 때 그의 아버지 앞으로 들려 올라가서 그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누렸던 영광으로 돌아온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을 높아지심이고 비록 십자가가 원수, 대적들에 의해 자행되지만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말씀하심을 확증해주는 사건이 될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게된다면 십자가로 인해 아주 분명하게 알게될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 조차도 마지막 날에는 그들이 십자가 위로 들려올려서 죽인 예수에의해 정죄를 받게 될 것이고 전에는 눈이 멀어서 자신들 주위를 비추고 있던 영광을 보지 못했던 자들도 언젠가는 무릎을 꿇고서 예수가 주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름이 전부이며 그가 아버지의 뜻을 자원해서 철저하고 온전히 순복하여 행해 온 모든 것의 최종 결론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임재에 대한 깊은 인식을 지니시고 계시며 아버지께서 보내신 모든 뜻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자의 모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순복했다. 유대전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피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상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버지와의 연합과 서로와의 연합은 또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세상에게 드러내서 믿음을 유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 경우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반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끝까지 견디지 못할 믿음이었다. 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빈번하게 언급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중 많은 경우에 이 믿음은 구원을 위해 끝까지 인내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표적을 보았을 때 믿었지만(출4:31) 도전을 받자 그들의 믿음은 무너졌다.(출5:21~23)
정경 예언 사35:3~76 성취 눅7:22~23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옥중에 있던 그를 방문하고 예수에게 돌아와 그가 메시아인지 물어보았을 때 예수는 정확히 이 본문을 언급한다.
요한에게 제기되는 질문과 이슈는 눅7:1~17절에서 묘사하는 예수의 사역의 특징에 토대를 두고 있다. 예수가 행하는 사역의 특징, 예수의 정체, 예수의 활동에 대한 반응에 초점을 맞춘다. 요한의 사역은 은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보다 더 강력한 능력을 가진 자가 오는 것을 예고했으며3:15~17에서 오실 이는 메시아로 밝혀진다. 예수에 대한 부정적 반응은 내러티브에서 이미 길게 묘사되는데 이런 반응은 누가의 청중에게 요한이 던지는 질문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구원을 위해 보냄받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어떻게 이런 반대에 직면할 수 있는가? 이는 누가가 요한이 던진 질문에서 그의 의도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오실 그이”를 요한이 언급하는 것은 예수에 대한 기대감을 가졌던 요한이 제기한 질문의 핵임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요한은 자신의 종말론적 기대와 예수가 보여준 현실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 분명하다. 예수의 정체에 대한 요한의 고민은 7:1~17과 관련성이 있다. 예수가 앞 장면에서 이방인 장교를 위해 은혜를 베풀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는 사건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가 행한 사역은 요한의 사역에 나타난 특징이나 심판을 집행할 오실 그분에 대한 요한의 기대와는 상당히 다르다. 과연 예수는 요한이 기대한 그이, 그 메시아가 맞는가? 요한은 예수의 활동에 나타난 특징이 그의 메시아 신분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강조할 내용처럼 요한의 의구심은 메시아, 그리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방문이 어떤 모습으로 실현될 것인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찬단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키질”이 요한이 예상하지 못한 흐름으로 진행될 것을 분명하지만 사실상 요한이 예고했던 키질에 관여하게 된다(3:17~18).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통해 독자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예수의 정체를 메시아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요한의 질문에 이어서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의 강력한 활동, 치유, 귀신을 쫒아내는 활동을 요약한다.
예수는 이사야 35:3~6에 근거하여 자신의 메시아 사역을 묘사한다. 3~4절 “약한 손”은 두려움으로 무력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방보다 크시며 열방이 압제를 계속하고도 무사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불균형을 바로 잡으시고 압제자에게 보응하기 위해 오실 것이다. “하나님이 오사”는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셔서 나는 하나님께 이를수 없다”고 외치는 심령에게 성경은 대답한다. “네가 하나님께 이를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네게 오신다.” 그처럼 하나님은 구원의 과정을 통해, 섭리의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으로 수천년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토록 그분과 연합하게 될 마지막 날까지 계속해서 오실 것이다. 5~7절은 연약한 자들이 고침받고 사막에 물이 솟아난다는 두가지 구원의 비유를 제시함으로 1~4절에 대해 부연 설명한다. 성경시대 사람들은 연약한 자들과 사막을 모두 죽음에 예속된 황무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생명 없는 것에 풍성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생각은 이런 비유들을 통해 잘 표현된다. 맹인과 연약한 자들의 압제로부터의 자유는 보다더 풍성한 생명을 더 강조한다. 압제로부터의 자유는 약속 전체의 일부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내적인 풍성함이 없으면 물리적 자유는 축복 뿐만아니라 저주도 될수 있다. 맹인, 못듣는 사람은 육체적 상태뿐만 아니라 영적 상태를 말하는데 자주 사용되어왔다. 그래서 선지자는 참된 가치를 보고 참된 인도함을 받는 날이 올 것을 약속한다.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는 베드로가 성전에서 저는 자를 고친 사건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된다. 핵심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로 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시는 것은 백성들이 예배와 교제를 위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예수가 언급하는 구원 활동의 목록은 그가 실행하는 사명의 특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강조하고 구체화하며 구원의 광범위한 범위를 의미한다. 예수는 주의 성령이 자신에게 기름 부은 목적을 행하고 있다. 예수가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도록 지시한 내용이 곧이어‘맹인이 보며’‘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을 언급한것도 이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자들과 함께 거론된다. 사회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면서 예기치 않게 구원을 영접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의 구원은 이런 가난한 자들에 국한 된것이 아니다.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을 짓는 비용을 지불할 만큼 부자이지만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외부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사역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탄생 내러티브에서 시므온은 예수가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누가의 내러티브에서 예수의 사역은 끊임없는 반대에 직면하고 결국 십자가의 처형으로 이어진다. 예수는 하나님의 목적, 시작된 종말론적 구원, 예수의 사명을 위해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 원하는 자들에게 복을 선언한다.
요한복음 4:25~26, 41~42
예수님께서는 사마이라 여인과 대화를 요청하시며 그녀에게 내가 주는 물은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며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바로 지금임을 드러내신 후 그년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많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라는 칭호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를 아주 많이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 자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더 자제되어야 했고 신중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가 말하는 내가 그라” 라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준 예수님의 계시는 요한이 전하려고 하던 “Ἐγώ εἰμι”의 계시의 절정이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자신에 대하여 모호한 대답을 주신 반면 여인에게는 영원한 생수이신 자신을 나타내셨다. 여인은 영생의 물에 더 관심을 갖던 이 여인은 자신이 마셔야 하는 육신적인 물통을 버려두고 가서 마을 전체를 데리고 온다.
요4: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여인의 요청“와서 보라” 하며 사마리아 마을 전체를 향한 초청의 말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준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손님으로 영접하는 것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마을로 초청하고 구주로 부르고 왕들이나 황제들을 받아들이는 방식 이상으로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고백한다.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은 마을 전체를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주로 믿도록 하였다.
13 설교 원고(30분)
예수님 오시기전 배경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은 포로귀환 후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고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며 유대인의 왕권을 다시 확립할 수 있는 미래를 고대하였다. 그들은 바벨론 포
로귀환 후 페르시아, 헬라, 로마에 계속적으로 지배를 받았다. 페르시아 통치 후 헬라제국은 헬라종교를 신봉할 것을 요구하였고, 급기야 주전 167년 안타오쿠스가 유대인들에게 제우스 신을 숭배하도록 강요며,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드림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은 더럽혀졌다. 이때 유대인 마카비는 무력과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하여 유다만의 독립 왕권인 마카비 왕조를 만들었고 이때를 기념하여 하누카, 빛들의 축제를 기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카비 왕조의 통치가 100년이 흘러가면서 독재로 인한 부패, 부도덕, 심지어 이교적으로 변하면서 그들 안에서의 내전으로 로마의 속국이되버렸다. 그 후세대 유대인들은 마카비 왕조의 부끄러운 멸망에도 불구하고 이시기를 메시아 시대의 보습으로 간주하고 메시아로 오실 자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하게 되는 옛 마카비 시대를 기대하였다. 로마의 통치로 들어가면서 유대교는 초기의 유대교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양한 문화들이 유입되면서 유대교는 분열되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고립되고 포로생활의 고된 상황속에서도 그 지역의 회당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이루었고, 서로 연합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 장로들의 유전으로 내려오는 구전 율법을 만들어, 이 구전 율법을 모세의 율법의 권위 위에 두었다. 또한 많은 유대인들은 제사장들의 타락과 도도함으로 분파를 나누어 다른 공동체를 세우며, 성전에 대한 형식적인 충성을 유지하는 자들을 향하여 공개적으로 비난을 일삼았다. 유대교는 온갖 종류의 분파로 분열되고 갈라졌는데, 그들 모두가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얻으려고 경쟁하고, 서로가 다른 집단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속박과 구약의 제도가 타락했으며 종교적 분열, 세력다툼이 가득한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오신 세상은 구약이 전혀 작동되지 않고 분파들의 이익 다툼이 가득한 이 땅에 오셨다.
본문 요한복음 8장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과의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그가 어디로 가는지,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예수는 누구인지 끊임없이 알고자 예수님께 논쟁하고 묻는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은 초막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요 7: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요7:32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의 대화를 나누는 시기는 초막절이다. 유대인들의 구전 율법인 미쉬나(Mishnah)에는 초막절을 지키는 풍습이 잘 기록되어 있다. 살펴보면,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 인근에 1주일 동안 기거할 초막을 종려나무나 버드나무로 지었다. 또 매일 할렐 시편(시 113–118편)을 부르며 118편 25절의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구절이 나올 때는 이 가지들을 흔들며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였다. 이 기간에는 매일 특별한 의식이 이루어졌는데, 첫 번째 매일 아침에는 하나님께 물을 헌납하는 의식이 행해졌고 또 하나의 성대한 의식은 매일 밤 제사장은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4개의 큰 촛불에 불을 밝혔고 참석자들은 이 불빛 아래서 춤을 추었다.
초막절 마지막날에 예수님께서 초막절 행사에 모인 무리에게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신 말씀은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또한 8장 21절의 바로 전의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세상의 빛이라는 칭호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족장들이나 메시아, 하나님에 대한 유명한 랍비들이 상용하는 율법에 기록된 칭호이다. 초막절을 화려하게 축하하는 행사중에서 온도시를 횃불로 화려하게 밝힐 때 예수님은 온 세상, 열방에 자신의 빛을 제공하신다고, 예수님의 빛을 받은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게 된다고 한다. 예수님의 증언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화가 나게 하였고 더욱 예수님에 대해 궁굼하게 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며 은유적으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지켜 보았을 때에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상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지금껏 살아온 환경은 페르시아 이후 헬라의 문화와 영향력 아래에서 율법에 불순종하도록 유혹 받아왔고 헬라주의적 공부와 생활방식을 수용하면서 많은 혼란가운데 살아왔다. 심지어 그들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헬라의 의복이 그들에게 부착되었으며 헬라의 체육관에서는 남성운동 경기가 유대의 윤리 관념에 반대되는 옷을 다 벗은 누드 상태로 진행되었으며, 사람들이 스포츠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어서 예배와 희생제사가 등한시 되었다. 유대인들에게 헬라주의적 영향력 아래 그 문화와 타협하라는 강력한 압력이 주어졌다. 타협과 정절을 유지하는 삶의 갈림길에서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의 성전을 더럽힘으로 마카비 왕조의 승리는 그들에게 강력한 메시아 상이 되었다. 위경를 참고하여 보면 그들의 의식을 잘 들여다 볼수 있다.
솔로몬의 시편17:21~24
보소서 오 주여 그들을 위해 그들의 왕 다윗의 아들을 일으키소서
오 하나님 당신은 정해진 시간에
그가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통치하도록 선택하셨나이다
예루살렘을 짓밟아 멸망시킨 이방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정결케하소서
그로하여금 유업으로부터 죄인들을 지혜롭고 의롭게 내쫒게하시고
죄인의 교만을 토기를 깨뜨림 같이 박살내게 하시고
그들의 모든 자원을 철장으로 산산조각 내게하소서
그가 그의 입의 검으로 무법한 이방인들을 멸망시키도록 하소서
(이와 같이 유대인들의 의식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환멸로 바울이 이방인에게로 가노라 하였을 때 죽이려고 함)
이시 솔로몬 시편의 다윗의 자손은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키며 그들의 왕 주,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
이다. 지금 로마의 속국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오면 예루살렘의 이방인들을
몰아내고 거룩한 백성들을 모아 열방을 심판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마카비 왕조와 같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들의 대적을 물리치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고대하였다.
이런 배경을 통해 우리는 왜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메시아 칭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는지, 메시아 칭호를 드러내지 않고 사역하셨는지 추측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예수님의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는 예수님의 증언에 반대를 하며 예수님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한다.
8: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라고 질문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들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모세오경에 장로의 유전을 가미한 장로들의 전통과 규범을 준수하면서 종교적 의를 이루는 외적 형식을 중시하는 바람에 외식에 빠졌다. 때문에 율법에 나타난 가난한 자를 돌보거나 하는 여러 율법의 정신을 상실하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을 말씀하신다.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의 때를 예시하는 말씀으로 그들과 갈등을 야기한다.
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예수님께서 오셨던 위로 가실 것이지만 그들은 죽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이 있는 곳에 있게 될 것이지만 그들은 죽어서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가신다는 어원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지만 “너희 죄가운데 죽겠고” 의 죽다의 의미는 신체적 생명이 떠나고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상황에 놓인다. 또는 지하세계로 내려가다. 멸망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당한다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이 올수 없는 곳으로 가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려 놓을 것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지 밝힌다.
8: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위로부터 왔고, 세상으로부터 오지 않는 반면 그들을 아래로부터 왔고 세상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수 없다.
먼저 위, 아래의 영역에 관한 것은 랍비들에게는 비밀주제로 간주했다. 그러나 초기 유대교의 묵시 사상에는 위, 아래의 개념을 생각할 때에 위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잇는 하늘의 영역이며 아래는 땅위의 인간의 영역의 대조로 볼수 있다. 또한 마가복음을 통해 볼 때 위의 개념이 천국은 하나님과 천사들의 처소, 하늘들, 혹은 언젠가 우리가 상을 받을 장소를 가리킨다. 반면 아래의 개념의 지옥은 마가복음에서 “곧 꺼지지 않는 불” 마태복음의 불과 어둠의 장소를 고려해 볼 때 우리는 거의 확실히 아래의 개념은 지옥의 외관이나 구존에 대한 문자적 표현이 아닌 형벌이나 고통의 장소로 해석하게된다. 지옥은 그 자체 만으로도 불쾌한 곳이다. 헬라인들은 아래의 개념을 사탄과 관련하여 지하세계 안에 있는 죽은 자의 어두운 신들을 생각했던 반면, 유대 백성들은 사탄이 일하고 있는 인간 세상과 연관시켰다.
예수께서 “아래에서 왔다”는 “지옥에서 왔다”는 뜻이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의도적인 반역 가운데서 타락한 도덕적 질서 속에 있는 이 세상에서 왔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과 그에게 반역하여 타락한 피조 세계인 세상을 대비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요한은 세상이라는 단어를 다른 복음서보다 가장 많이 사용하면서 위로부터 난자와 아래로부터 난자를 복음서 내내 강조한다.
세상은 지구 인구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좀 더 자주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항하여 타락한 인류를 가리킨다. 사도요한은 좀더 타락한 세상의 질서를 설명할 때
요한일서 2:15,16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타락한 세상의 질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주의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와의 유혹도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할 만큼 탐스럽기도한 것”이어서 세상의 많은 것은 세상의 타락이후 하나님의 뜻을 대항하는 것이 되었다.
사도바울도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분명히 다르다고 말한다.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하려 하심이라.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사실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믿음이 없을때는 세상의 지식으로 살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택하셔서 세상의 지식 가운데 종노릇하지 않도록,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도록, 세상에 속한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권세를 따르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인 사탄의 생각과 조종을 받는 것이다.
바울을 다음과 같이 권한다.
고전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말과 같이 세상의 물건을 다 쓰지 못하는 자들과 같이 세상의 외형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간구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시기 때문에 세상은 지금 그를 미워한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이다.
요15:18~19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실제로 예수께서 승천 후 사도요한이 요한복음을 쓰던 90년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유대인,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인들과의 충돌이 가장 빈번하였을 때였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걱정하고 염두하고 있는 당대의 독자인 그리스도인들은 지역의 회당에서 쫓겨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유대교의 회당에서 바리새인,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구성원들을 빼내 가는 것으로 보였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설움과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상속자로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의 이름의 능력으로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죄 안에서 죽는 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가운데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내가 그다”“에고 에이미”라는 용어는 “나는 메시아이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세에게 드러낸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에고 에이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에고 에이미”라고 친히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구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누가복음을 통해 세례요한도 옥중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인지를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물어보았다. 세례요한의 사역은 주의 오심을 준비하였다. 요한은 자신보다 더 강력한 능력을 가진자가 오는 것을 예고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며 은혜를 베푸는 것을 생각할때에 옥중에서 그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묻는다.
눅 7: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계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세례요한은 예수께서 행한 사역이심판을 집행 할 오실 그분이라고 기대한것과 상당히 다르다고 생가했을 것이다. 세례요한은 예수의 활동이 그의 메시아 신분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답변은 이사야 35장5,6절을 근거로 말씀한다.
이사야 35:5,6
5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세례요한도 예수께서 맹인을 고치시고 질병과 고통과 악귀들린자를 많이 고치시는 가운데 자신이 이사야를 통해 예언한 구원을 완성할 메시아 임을 증언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낮에 물동이를 이고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계시 하신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요4: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라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자신에 대해 모호한 대답을 주시니 반면 여인에게는 영원한 생수이신 자신을 나타내셨다. 영생의 물에 더 관심을 갖던 이 여인은 자신이 마셔야 하는 육신의 물통을 버려두고 가서 마을 전체를 데리고 온다.
요4:29 내가 행한 모든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여인의 사마리아 마을 전체를 향한 초청의 말은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주고 결국 사마이라인들이 예수님을 손님으로 영접하는 것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마을로 초청하여 구주로 부르고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고백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은 말을 전체를 예수님께 인도하여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믿게 하였지만
본문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구주로 알아보고 믿었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8: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자니라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관해 아무런 개념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정체를 묻는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절대 자신의 세상에관해서나 그들과의 관계하여 자신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듣과 아버지에게 가르침받은 것을 세상에 말하고 그것을 세상에 행하시는 분이시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만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도 자신 스스로 말하거나 행동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말씀들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나누었다.
고대사회의 보내는자, 곧 대리인의 개념은 확실하였다. 대리인은 자신을 파송한 사람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메신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널리 알려 졌다. 로마시대 시저가 총독이나 대변인을 보냈을 때 그 대변인은 시저의 권위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으며, 시저가 원하는 바를 수행할 책임잉 ᅟᅵᆻ었다. 이러한 관습은 잠언에서처럼 아주 먼 과거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했으며 결국에는 유대교의 율법아래에서 공식화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보내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권위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임을 드러내시신다. 또한 에수님은 어버지에게 배운것들, 아버지와 그의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들에 대해서 세상에 말씀한다.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아버지가 그를 혼자 두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과 요한의 청중에게 예수님은 아버지 없이 스스로 증언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항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은총이 항상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누구신지 온전히 밝혀지는 일은 인자가 들렸을 때 일어나게 될 것이다.
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후에 내가 그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예수님의 대적들은 그의 정체를 인식하기전, 예수님을 들어 올릴것이고 십자의 예수님은 그의 사명에 순종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들릴 때 그의 아버지 앞으로 들려 올라가서 그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누렸던 영광으로 돌아온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은 높아지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말씀들을 확증해준다. 십자가는 예수가 누구신지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게된다면 십자가로 인해 아주 분명하게 알게될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 조차도 마지막 날에는 그들이 십자가 위로 들려 올려져서 죽인 에수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전에는 눈이 널어서 자신들 주위를 비추고 있던 영광을 보지 못했던 자들도 언젠가는 무릎을 꿇고서 예수가 주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름이 전부이며 아버지의 뜻을 자원해서 철저하고 온전히 순복하여 행하는 것이 전부였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임재에 대한 깊은 사귐을 지니고 계시며 아버지께서 보내시니 모든 뜻을 알고 보내신 아버지의 모든 뜻을 따르며 순복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은 세상과 달리 예수님의 메시지를 결국 이해할것이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복함과 같이 그분을 위해 헌신을 각오하고 그분을 따라갈 것을 준비할 것이다. 아래로부터 난 것 곧 이세상의 모든 안위와 쾌락은 하나님을 떠난 것과 우리 하나님과의 친밀함 안에서의 모든 좋은 것을 비교할 때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예수님처럼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아 위에서 난자되어 아버지의 모든 뜻을 순종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다가올 삶의 영광은 그 어떤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게 된다. 앞으로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하여 십자가의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어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반응할수 있도록 하길 바란다.
14 설교원고 (20분)
예수님 오시기전 배경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귀환 후 페르시아, 헬라의 계속적인 지배를 받으며
유대인의 왕권을 다시 확립할 수 있는 미래를 고대하습니다.
페르시아 통치 후 헬라제국은 헬라종교를 신봉할 것을 요구하였고, 급기야 주전 167년 안타오쿠스가 유대인들에게 제우스 신을 숭배하도록 강요며,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드림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이때 유대인 마카비는 무력과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하여 유다만의 독립 왕권인 마카비 왕조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카비 왕조의 통치가 100년이 넘어가면서 독재로 인한 부패, 부도덕, 심지어 이교적으로 변하면서 그들 안에서의 내전으로 또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되버렸습니다. 그 후로 유대인들은 마카비 왕조의 부끄러운 멸망에도 불구하고 이시기를 메시아 시대의 모습으로 간주했습니다. 로마의 통치로 들어가면서 유대교는 초기의 유대교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양한 문화들이 유입되면서 유대교는 분열되었습니다. 그나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지역의 회당 지어 회당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이루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 외에 장로들의 유전으로 내려오는 구전 율법을 만들어 모세오경보다 더 권위를 위에 두었습니다. 또한 많은 유대인들은 제사장들의 타락, 도도함으로 성전에 대한 형식적인 충성에 대해 비난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온갖 종류의 분파로 분열되고 갈라졌고, 그 갈라진 분파들은 모두가 대중에게 지지를 얻으려고 경쟁하고, 서로가 다른 집단보다 우월하다고 다투었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속박과 구약의 제도가 타락했으며 종교적 분열, 세력다툼이 가득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신 세상은 구약이 전혀 작동되지 않고 분파들의 이익 다툼이 가득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본문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과의 논쟁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어디서 왔는지, 그가 어디로 가는지,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예수는 누구인지 질문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은 초막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요 7: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요7:37 상반절 명절(초막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의 대화를 나누는 시기는 초막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남자들은 1주일 동안 기거할 초막을 종려나무나 버드나무로 짖습니다. 그리고 매일 시편 찬송을 부르며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구절이 나오면 이 가지들을 흔들며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였다. 이 기간에는 매일 특별한 의식이 이루어졌는데, 첫 번째 매일 아침에는 하나님께 물을 헌납하는 의식이 행해졌고 또 하나는 매일 밤 제사장이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4개의 큰 촛불에 불을 밝혀 그 불빛 아래서 춤을 추었습니다.
8장 12절에서는 초막절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초막절을 화려하게 축하하는 행사 중에서 온 도시를 횃불로 화려하게 밝힐 때 예수님은 온 세상, 열방에 자신의 빛을 제공하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빛을 받은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게 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단어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족장들이나 메시아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증언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화가 나게 하였고 더욱 예수님에 대해 궁굼하게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시며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을 그렇게도 여러나라의 속국으로 살면서 메시아를 그렇게 고대하였으면서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유대인들이 지금껏 살아온 환경은 페르시아 이후 헬라의 문화와 영향력 아래에서 율법에 불순종하도록 유혹 받아왔고 헬라주의적 공부와 생활방식을 수용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헬라의 의복을 입어야 했고, 헬라의 체육관에서는 남성운동 경기가 유대의 윤리 관념에 반대되는 상태로 진행되었으며, 사람들이 스포츠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어서 예배와 희생제사가 등한시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헬라주의적 영향력 아래 그 문화와 타협하라는 강력한 압력이 주어졌습니다. 타협과 정절을 유지하는 삶의 갈림길에서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의 성전을 더럽힘 가운데 마카비 왕조의 승리는 그들에게 강력한 메시아 상이 되었습니다. 위경를 참고하여 보면 그들의 의식을 잘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시편17:21~24
보소서 오 주여 그들을 위해 그들의 왕 다윗의 아들을 일으키소서
예루살렘을 짓밟아 멸망시킨 이방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정결케하소서
그로하여금 유업으로부터 죄인들을 지혜롭고 의롭게 내쫒게하시고
죄인의 교만을 토기를 깨뜨림 같이 박살내게 하시고
그들의 모든 자원을 철장으로 산산조각 내게하소서
그가 그의 입의 검으로 무법한 이방인들을 멸망시키도록 하소서
(이와 같이 유대인들의 의식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환멸로 바울이 이방인에게로 가노라 하였을 때 죽이려고 함)
이시 솔로몬 시편의 다윗의 자손은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키며 그들의 왕 주,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지금 로마의 속국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오면 예루살렘의 이방인들을
몰아내고 거룩한 백성들을 모아 열방을 심판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마카비 왕조와 같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그들의 대적을 물리쳐 줄 메시아를 고대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을 통해 우리는 왜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메시아 칭호를 드러내지 않고 사역하셨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예수님의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는 예수님의 증언에 반대를 하며 예수님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8: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라고 질문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모세오경이 아닌 장로들의 전통과 규범을 준수하면서 겉으로만 종교적 의를 이루는 외식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때문데 그들은 진정한 율법의 정신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진정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때를 말씀하시며 그들과 대화를 하십니다.
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예수님께서 오셨던 위로 가실 것이지만 그들은 죽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이 있는 곳에 있게 될 것이지만 그들은 죽어서 그곳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가리니“ 의 가신다는 어원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지만 “너희 죄 가운데 죽겠고”의 죽다의 의미는 신체적 생명이 떠나고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상황에 놓인다. 또는 지하세계로 내려가다. 멸망하다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당한다는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이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려 놓을 것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지 밝힙니다.
8: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위로부터 왔고, 세상으로부터 오지 않는 반면 그들을 아래로부터 왔고 세상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수 없습니다.
먼저 위, 아래에 대한 개념은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단어와 함께 강조하는 것입니다. 위 아래의 개념을 마가복음을 통해 볼 때 위의 개념인 천국은 하나님과 천사들의 처소, 하늘들, 혹은 언젠가 우리가 상을 받을 장소를 가리킨다. 반면 아래의 개념의 지옥은 마가복음에서 “곧 꺼지지 않는 불”, 마태복음에서 ’불과 어둠의 장소‘를 고려해 볼 때 우리는 거의 확실히 아래의 개념은 지옥의 외관이나 구조에 대한 문자적 표현이 아닌 형벌이나 고통의 장소임을 알게됩니다. 지옥은 그 자체 만으로도 불쾌한 곳이지요. 헬라인들은 아래의 개념을 사탄과 관련해 지하세계 안에 있는 죽은 자의 어두운 신들을 생각했던 반면, 유대 백성들은 사탄이 일하고 있는 인간 세상과 연관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아래에서 왔다”는 의미는 창조주에 대한 의도적인 반역 가운데서 타락한 이 세상에서 왔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지구 인구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좀 더 자주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항하여 타락한 인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좀더 타락한 세상의 질서를 설명할 때
요한일서 2:15,16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타락한 세상의 질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주의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와의 유혹도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할 만큼 탐스럽기도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것은 타락 이후 하나님의 뜻을 대항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게 유혹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을 때는 세상의 지식으로 살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거룩하고 흠없게 하시려고 세상에 속한 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사도바울도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분명히 다르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사실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고전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말과 같이 세상의 물건을 다 쓰지 못하는 자들과 같이 세상의 외형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간구해야 합니다.
왜냐면 예수께서는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지금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15:18~19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실제로 예수께서 승천 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던 90년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유대인,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인들과의 충돌이 가장 심했을 때였을 것입니다. 유대교의 회당에서 바리새인,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구성원들을 빼내 가는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인들을 쫓아냈을 것입니다.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설움과 박해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런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상속자로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도록 힘과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 속에서 설움과, 어려움을 당하시는 우리 성도님 계시다면 힘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반드시 보고 계시고 선으로 역사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예수의 이름은 복음이고 능력인줄 믿습니다.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내가 그이다”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내가 그다”라는 용어는 “나는 메시아이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에게 드러낸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가 “에고 에이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바로 창조주 하나님인 “내가 그다”라고 친히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을 통해 세례요한도 옥중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인지를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물어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이 주의 오심을 준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도 또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며 은혜를 베푸는 것을 생각할때에 옥중에서 그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한때 예수께서 행하시는 사역이 심판을 집행하러 오실 그분이라고 기대한 것과 상당히 다르다고 생가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의 활동이 그의 메시아 신분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사야 35:5,6
5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세례요한도 예수께서 맹인을 고치시고 질병과 고통과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는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는 세상의 구주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사야를 통해 예언한 구원을 완성할 메시아 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낮에 물동이를 이고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계시 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내가 그라’ 하시니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자신에 대해 모호한 대답을 주셨던 반면 여인에게는 영원한 생수이신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영생의 물에 더 관심을 갖던 이 여인은 자신이 마셔야 하는 육신의 물통을 버려두고 가서 마을 전체를 데리고 옵니다.
여인의 사마리아 마을 전체를 향하여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하는 초청의 말은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마이라인들이 예수님을 손님으로 영접하는 것 이상으로 영접하고 마을로 초청하여 예수님을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은 마을 전체를 예수님께 인도하여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믿게 하였지만
본문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구주로 알아보고 믿었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절대 자신을 세상에 관해서나 그들과의 관계해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8:28 중,하반절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을 알리라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고대사회의 보내는자, 곧 대리인의 개념은 확실하였습니다. 대리인은 자신을 파송한 사람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메신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로마 시대 시저가 총독이나 대변인을 보냈을 때 그 대변인은 시저의 권위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으며, 시저가 원하는 바를 수행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보내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권위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임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로 아버지에게 듣고 아버지에게 가르침받은 것을 세상에 말하시고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 조차도 스스로 말하거나 행동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께 배워, 말하고 행동하며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말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은총이 항상 예수님께 거하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께서 누구신지 온전히 밝혀지는 일은 인자가 들렸을 때 일어나게 될 것이다.
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예수님의 대적들은 그의 정체를 인식하기 전, 예수님을 들어 올릴 것이고 십자의 예수님은 그의 사명에 순종할 것을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들릴 때 그의 아버지 앞으로 들려 올라가서 그가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누렸던 영광으로 돌아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은 높아지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말씀들을 확증해준다. 십자가는 예수가 누구신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게 된다면 십자가로 인해 아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 조차 마지막 날에는 그들이 십자가 위로 들려 올려 죽인 예수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전에는 눈이 널어서 자신들 주위를 비추고 있던 영원한 영광을 보지 못했던 자들도 언젠가는 무릎을 꿇고서 예수가 주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자원해서 온전히 순복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름이 전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임재에 대한 깊은 사귐을 지니고 계셨으며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이제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는 세상과 분명하게 달리하여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복함과 같이 그분을 위해 헌신하며 그분을 따라갈 것을 준비해야합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어버지께 배워 말하고 행동하여,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변함없이 위에서 난자가 되길 바랍니다.
아래로부터 난 것 곧 이 세상의 모든 안위와 쾌락은 우리 하나님과의 친밀함 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올려지실 때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감과 같이, 우리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되어 다가올 삶의 영광과 아버지의 말할 수 없는 은총 안에 살아가길 바랍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적인 관계 안에서 우리의 영적 정체성을 바르게 세우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에 드러내어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은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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