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스터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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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안식일
창조, 안식일
창세기는 크게 2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1장 4사건에 대해서 나온다. 4사건은 무엇인가? 창조 - 타락 - 홍수 - 바벨탑 이다.
12-50장 4인물이 나온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요셉 이다.
그래서 창세기는 외우기 쉽다. 4사건 4인물이다. 1-11장 4사건에 대해서, 12-50장 4인물에 대해서, 4족장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런데 4사건가 4인물을 비교해서 보면 4사건은 총 몇장인가? 11장이다. 4인물은 38장이다. 이것으로 보아 창세기에서 조금더 핵심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히 4인물에 대해서이다.
4사건을 보더라도 창조에 대해서는 1-2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타락에 대해서는 3-5장까지 이고 홍수사건에 대해서는 6-10장까지 이고 마지막 바벨탑 사건은 11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4사건중에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어디인가? 보통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하면 창조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4사건중에 하나님이 가장 길게 말씀하신 사건이 무엇인가? 홍수이다. 그러기에 홍수가 중요하다.
창세기의 구조에 대해서는 기억하길 바란다.
또, 창세기1장2절 의 말씀에 의하면 태초에 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셨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혼돈이(무질서)가 질서로 변한다. 공허 했었다. 그런데 충만해지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두운 상태였는데 빛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혼돈에서 질서로, 공허에서 충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바꾸었나? 이것은 창조의 도구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창조의 도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창조의 순서는 어떻게 되는가?
첫째날 : 빛(어둠)
둘째날 : 궁창(하늘과 바다)
셋째날 : 땅과 바다를 구분하고 땅에서 자랄 수 있는 풀과 채소를 만들었다.
여기까지만 알면 나머지는 쉽다. 첫째날 빛과 어둠을 만들었고, 둘째날 하늘과 바다를 만들고, 셋째날 땅과 식물을 만들었다.
그런데 넷째날은 첫째날과 관련이 있다. 첫째날은 빛을 만들었다. 넷째날은 큰 광채, 작은 광채를 만들었다. 해, 달, 별을 만드신 것이다.
둘째날은 하늘과 바다를 만드셨다. 그래서 다섯째날은 하늘에는 새, 바다에는 물고기를 만들었다.
여섯째날은 땅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물과 사람을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계획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고 만드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창조의 순서를 보면 우리가 발견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무엇을 만들고 나서 무엇을 만들었나?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먼저 만드셨다. 그리고 그 환경에서 살수 있는 생명체를 만드셨다. 그런데 이게 당연한거 아닌가? 지극히 당연하다. 바다가 있어야 물고기가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바다를 먼저 만들고 물고기를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바다를 만드시고 기분이 너~무 좋으셔서 그만 동물들을 만드셨다. 하늘과 바다만 있는데 사자, 코끼리, 기린 이렇게 동물들을 만드셨다. 그런데 그때야 하나님이 땅이 없다는 것이 생각나셨다. 그래서 동물들한테 “숨 좀 참고 하루만 기다려 그러면 내가 내일 땅 만들어줄께!” 이렇게 하셨나? 절대 이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어떠십니까? 제가 말한게 너무 당연해서 유치하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에게 이러한 유치한 믿음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고 지극히 당연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냐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공부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게 목적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성경을 알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그것을 알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만드시기전에 그 생명이 살아 갈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드셨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 되신다면 우리의 삶도 환경을 만드시고 생명을 만드셨듯이 우리에게 혹여나 어려움이 생겼다면 어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그렇게 만드신 것이 절대 아니다.
만약에 둘째날 하늘과 바다를 만드시고 바로 새를 만드셨다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에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고 나오고, 넷째날 다섯째날 여섯째날에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고 나온다. 4째날 이후부터 저녁과 아침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하루의 개념이 된다. 그 이유는 4째날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기때문에 4째날 이후의 하루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의 하루의 개념과 동일 할 것이다. 그러나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에는 해와 달과 별이 없다. 그래도 성경에는 밤이 되고 낮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기에 그때의 낮은 100% 밝은 빛이다. 밤은 100%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둠이다. 그렇다면 그런 곳에서 살수 있는 동물이 있겠는가? 절대 살 수 없다.
그래서 창조의 순서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 1:1 (NKRV)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래서 태초의 상태는 혼돈, 공허, 흑암 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하신 것이 무엇인가? 수면위를 운행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운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는 “라하프"라는 단어이다. 이 라하프 라는 단어는 3가지 상황일 때 사용된다.
독수리가 한 점을 중심으로 빙빙 돌 때
헬리콥터가 마찬가지로 한 점을 중심으로 돌 때
어미 닭이 알을 품고 돌릴 때
그러니 이 라하프라는 단어는 목적과 의지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그 때에 수면 위에서 “라하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 것인가? 생각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시다. 믿으시는가? 그러기에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 하시기에 고민해서 결정하시나 즉흥적으로 결정하시나 그 결과는 같아야 한다. 그러야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것 아닌가? 그래서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께 필요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민하고 생각하시는 것이다. 그냥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그냥 단번에 생각해도 된다. 그런데 1:2을 보면 하나님이 뭐 하고 계신 것 같아 보이시는가? 고민하고 계시는 것이다. 어떻게 만들까 어떻게 하면 조금더 잘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게 “라하프"라는 단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 심사숙고해서 창조하셨다. 인정하는가?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만드신으로 번역된 원어는 “포이에마"이다 이것은 걸작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걸작품인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정말 이 땅을 만들면서 우리를 만들면서 심사숙고해서 창조한 귀한 작품이 우리인 것이다.
창세기의 원독자는 누구라고 했는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들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 노예로 일평생을 살다가 출애굽을 한 것이다. 이들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이들이 자존감이 높았겠는가? 노예로 일평생을 살았다. 누군가의 감시속에서 일평생을 살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자존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넌 나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너를 만들기 위해 내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창조했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원독자는 누구라고 하였나? 이제 막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하나님께서 창조기사를 보며 어떤 생각을 가지겠는가? 지금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은 무엇인가? 지금 네가 어떤 상황이고 환경이던 그 안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으신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아들에게 감탄하듯 이런 말을 한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하심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냥 그렇게 대충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내가 결정 할 수 없었던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오랜 고민끝에 놀라운 계획하심으로 이자리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의 성, 우리의 부모, 우리가 태어난 나라, 우리가 태어난 때,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혼돈하고 무질서했던 곳 그곳을 포기하지 않고 그곳을 품고 있었다.
혹시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으신가? 놀라운 사실은 그 때도 하나님이 우리를 품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던 그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품고있었듯이, 우리도 품고 계셨다는 것이다.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정말 신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한번도 내 삶속에서 실수하신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내 삶에서 언제나 최고의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 방법은 창조의 방법과 동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창조 사건을 통해 우리가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창세기 1:28 (NKRV)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복을 주시며 로 번역된 원어는 “바라크" 이다. 그런데 이 뜻이 하나님이 주어로 사용되면 안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뜻이 바로 ‘무릎꿇다' 그래서 파생된 단어가 높이다, 찬양하다, 송축하다 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크'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주어는 반드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28절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28절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말씀하시되" 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해석 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창조자가 피조물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그래서 학자들이 번역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릎을 꿇는 것, 이것만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라고 해서 복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구약성경에만 ‘바라크'라는 단어가 289번 사용 되었다. 하나님이 주어로 일 때는 복으로 사람이 주어일 때는 찬양, 경배로 번역이 되었다.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여기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가 ‘바라크’ 이다.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 이미 복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유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창세기에서 말하는 복을 잘 못 생각해서 그냥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이 복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무릎꿇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 이건 설명하기 쉽지는 않다.
예를들어 제가 목사이다. 그래서 성도님들은 저의 목사의 권위를 인정해준다. 그런데 제가 무릎을 꿇고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은 정말 존귀하신 분이 십니다. 여러분은 존재 자체로 기쁨이 되는 존재입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면 여러분들 기분이 어떠한가? 제가 이렇게 하면 자존심이 상하는가? 기분이 나쁜가?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어놓고 무릎을 꿇고 말했다는 것은 아담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너무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어 놓고 그냥 크게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을 존중하며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담이 너무나 완벽해서 그렇겠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아담도 약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도 아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을 존중하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아는가? 우리를 너무나도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우리의 인생을 함부로 하지 않으신다. “너! 이거해! 저거해!” 절대 이렇게 하시 않으신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순서를 보며 우리 또한 그냥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안식일
우리는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가? 안식일에 대해서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온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안식의 개념은 하나님이 6일동안 만드신 모든 세계는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회사에서 근무시간에 모든 일을 완벽하게 끝내면 야근을 합니까? 안합니까? 야근을 하는 이유는 일을 다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일곱째날 안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곱째날에 안식하지 않고 사람이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완벽한 안식을 하기 위해 유대 랍비들이 일을 정의하였다. 그래서 예로 꿀을 찍어 먹으면 일이 안된다. 그런데 꿀을 다 먹어가서 도구를 사용해서 바닥을 긁으면 이것은 추수 행위로 간주되어서 일한 것을 된다.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라 주머니에 씨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씨가 2개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3개부터는 씨를 운반한 것으로 여겨져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된다. 이렇게까지 해서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이것은 동일하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달라졌다. 15절이다.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창조인가? 아니다 구원이다. 출애굽이다. 이제 목적이 달라진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 하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의 말은 반역이다.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일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죽으신 그 다음날이 안식일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안식하셨다.
그러니 지금 패턴이 동일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모든 구원 사역을 마치지고 안식하셨다. 이 말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구원도 완벽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의 완성은 십자가 사건 이후의 안식이 아니다.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의 부활사건까지 이다.
레위기에 의하면 대속제일이 나온다. 대속제일은 한해의 죄를 용서받는 날이다. 그래서 대속제 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하루에 3번들어간다. 첫번째는 향을 피우러 들어간다. 그리고 제사장 자신의 죄를 가지고 숫송아지를 잡는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간다. 이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너 작년 한해 동안 너무 죄를 많이 저질렀다. 그래서 내가 너를 용서 하지 못하겠다" 하시면 대제사장은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죄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대 제사장이 살아서 지성소를 나오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대 제사장의 죄를 용서 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죄 용서 받은 대제사장이 다시 지성소로 들어간다. 이 때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염소를 잡는다. 그리고 나서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간다. 이 때는 대제사장이 누구를 대신해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인가?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는 온 이스라엘 백성이 긴장을 한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살아나오나 안나오나에 집중을 한다. 대제사장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 받지 못했다, 반대로 대제사장이 살아나오면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한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십자가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끝났다면 우리의 죄는 용서 받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다시 살아 나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 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구원의 완성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이다.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러기에 우리가 안식일에 모이지 않고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모여 그 날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에 모이는 것은 창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기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