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약을 탄 포도주와 신 포도주(막15:3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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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3월 8일 수요일
제목 : 몰약을 탄 포도주와 신 포도주
본문 : 마가복음 15장 33-41절 *신83
결단찬양 : 은혜 아래 있네
[도입 : 반복이 주는 무딤(feat.십자가)]
이곳에 모인 우리의 이유는 다 다르지만, 확실한건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 받은 자녀라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인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자로써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은 날마다 커지고 단단해지는 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삶에서 드러나는 신앙은 무뎌질 때가 많습니다. 1년이고 2년이고, 때로는 10년을 넘게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확고해지고 확실해지는데, 그에 비해 우리가 듣는 말씀이나 성경의 사건들에 대한 감격이 반감되고 또 반감될 때가 있다는 거죠. 그게 찬양의 기쁨이든, 성경공부의 감격이든, 어떤 것이 되든 말입니다.
그런걸 보면, 한 동안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라는 말이 나돌았던 것이 어쩌면 인간의 습성이기에 크게 확산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삶 속에 정작 중요한 것들을 귀히 여기지 못하고, 때로는 무뎌진 마음 밭에 그것들을 내던져버리는 모습이 우리일 것입니다.
아엘이랑 놀아주다보면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게 왜 재밌을까?’ 사실 별 것도 아니고 또 크게 자극적이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엘이는 행복해 합니다. 2번이고 3번이고 반복한다해도 말이죠.
그렇다해서 이들이 모든 것에 질려하지 않는다거나 흥미를 잃지 않는 성향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같은 행동을 한 20번 정도 반복하면, 불과 2-3분 전만해도 재밌어하던 그 장난감도 집어 던지는 무시무시한 폭력성(?)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확실한건 어른이나 아기나 반복되는 삶 속에 소중한 것, 즐거웠던 것, 인상깊었던 것들이 무뎌지고 익혀져 간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측면에서 저와 우리 성도님들이 함께 생각해볼 것은, ‘과연 내 삶에 무뎌진 성경사건, 또 단어, 영역 등은 무엇이 있을까?’ 를 고민해봐야 한다는거죠.
누군가는 찬양의 은혜를 잊은 것 같다 말할 수도, 누군가는 말씀 묵상의 감사를 잊은 것 같다 말할 수 있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포인트는, 많은 이들이 너무 익숙해서 감격이 반감된지는 오래고 무뎌진 모습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있을 가능성이 큰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물론 아닐수도 있지만, 제게는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십자가’를 주제로 설교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막상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며 제 마음 밭에 무뎌진 십자가를 발견하며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십자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특히 저는 십자가하면 유독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사실 마음이 아파서 잘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그렇게 마음 아파하면서도, 막상 제 삶 속에서 그런 십자가의 고통과 주님이 겪은 그 아픔이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반복되는 ‘십자가’ 주제의 설교를 통해 ‘그래, 그렇지. 이제 곧 이런 내용의 설교 내용이 나오게 될껄? 봐바 맞지?’ 와 같은 반응을 보이며, 십자가를 보편화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이 십자가를 우리는 마치 스킵(skip) 버튼을 눌러가며 ‘아니까 넘어가자’ 의 태도로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도입 : 무뎌진 십자가를 삶의 가장 가까운 곳으로 꺼내다]
물론 우리는 그런 자세가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십자가를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은연 중에 또 익숙함에 십자가를 보편화 시키고, 일반화 시키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날마다 묵상하고,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때론 우리의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겪기도, 또 때로는 십자가의 승리에 감사하며 기뻐함이 우리 삶이 되어야 하는데도, 우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우리 삶에 무뎌진 이 십자가’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그리고 그 무뎌진 십자가를 다시 꺼내어 보려 합니다. 우리 마음 밭에 나뒹굴던 그 십자가를 꺼내 다시 먼지를 닦고 마음 밭 중심부에 두어 날마다 쳐다보며 기억하며 나아가는 정비의 시간이요 결단의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본문 : 몰약(쓸개)을 탄 포도주]
먼저 저는 이 십자가를 나누기 전에 예수님의 행동에 특이점을 보았습니다. 사실 지금껏 그저 넘어갔던 내용이기에 더 눈에 띄었던 것도 있지만, 이제는 그저 넘어갈 수 없던 내용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지는 않았지만, 23절을 보니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포도주가 등장하는데, 몰약을 탄 포도주가 등장합니다. 몰약이 무엇일까요? 이는 나무에서 나오는 진을 가지고 만든 것인데, 이 효능이 상당합니다. 주로 두 가지의 경우로 사용되는데, 하나는 방부제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진통제로 쓴다는 겁니다.
저는 두통이 자주 오는 편인데, 약에 내성이 생길까 걱정되어 되도록 약 없이 버티려고 합니다. 약 없이 버티려는 마음이 들 때 주로 ‘하나님, 지금 두통으로 미칠 것 같습니다. 이 고통이 속히 가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늘 고통이 싹 가시더군요.’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왠지 능력의 사람이었음 좋았을 법 했지만, 계속 아픕니다.
버티다 버텨 결국 약을 먹습니다. 그럼 놀랍게도 두통이 해결이 됩니다.
아플 때 진통제를 먹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며, 또 필요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행동을 하고 계십니까? 분명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중에 고통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진통효과가 든 몰약, 그 몰약이 든 포도주를 마다하시는 겁니다.
조금만 아파도, ‘아프다, 아프다.’ 꽥꽥 소리지르는 것이 우리인데, 정작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태도는 진통제를 마다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해 내십니다.
그렇다하여 그 십자가의 못 박히신 고통이 결코 가볍다 여길 수는 없습니다. 심히 아팠을 것입니다. 수없이 갈겨대는 채찍질에 온 몸이 성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살점은 뜯어져 나갔고, 이 십자가형을 연구하는 한 의사가 말하길 십자가형은 결국 정맥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고, 근육 또한 밖으로, 그리고 창자의 일부로 밖으로 튀어 나오게 되어 서서히 목숨을 앗아가는 최악의 형벌이라 말합니다.
아무리 상상해도 그 고통이 공감되지도 이해가 되지도 않지만,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을까 고민해보다, 손과 발에 박은 못이 약 7인치 정도 된다는 내용을 기반으로 못의 형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7인치면 17.78cm 정도의 길이인데, 우리 성경책에 주보 한 장씩 있지 않습니까? 이를 긴면으로 돌돌 말면 20cm 정도가 되니, 이런 못이 우리 손과 발에 박힌다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지 않습니까?
소리 내지 않고 견디는 것이 불가능할 일입니다. 너무 아플 겁니다. 차라리 너무 아파서 빨리 죽어버렸음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형은 한 순간에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아닌, 서서히 죽음으로 인도해가는 형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진통제 하나 없이 느껴져 오는 모든 고통을 서서히, 그리고 계속해서 겪고 계십니다.
도대체 왜 그리 미련하게 행동하실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받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지 않고 온전히 당하길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미련해 보였지만,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고스란히 그 고통을 견디십니다.
[본문 : 신 포도주]
그렇게 고통의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 주님은 외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죽음을 앞둔 주님께서 주 앞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외침이었을 겁니다.
기력은 점점 잃어가고 사경을 헤매는 것같은 몽롱함 속에, 조금만 더 지나면 목숨이 끊겨 고통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시점이 다가오는 와중에 예수님은 또 한 번 우리 눈에 미련해보이는 행동을 보입니다. 36절을 보니, “한 사람이 달려가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주님은 몰약이 든 포도주, 즉 진통제는 마다하셨지만, 신 포도주는 허락하십니다. 신 음식은 먹을 때 기력을 회복케 하는데, 아니, 지금 죽음으로 고통의 끊김이 코 앞인데, 오히려 기력을 회복할 신 포도주를 허락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도대체 주님은 무슨 생각이시길래, 조금만 더 버티면 끝인데 왜 그런 행동을 하십니까?’ 반문을 가지며 미련하다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주님의 행동은 결코 실수 하나 없으셨고 미련함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고통을 더하게 하려는 로마 군인들의 신 포도주를 순순히 받으셨고, 충분하고도 온전하게 그 십자가의 고통을, 그 십자가의 아픔을 고스란히 당하셨습니다. 더 긴 시간 아파해야 하고, 고통을 느껴야 함을 잘 알고 계심에도 받아들이신 것이죠. 주님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십자가의 성취를 향해 나아가신 겁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십자가 너무 중요한데, 도대체 왜그리 십자가, 십자가 합니까? 아니요. 십자가가 뭔지 논쟁하기 전에, 십자가에 왜 달리셨는지 이유를 먼저 다루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최악의 형벌을, 진통제 하나 없이 오히려 생명선을 연장 시켜가며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시고, 아픔을 견디시며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 충분히 자신의 위대함과 뛰어남을 드러낼 수 있었을 텐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민에게 보여주고 자랑하시며 능력의 뛰어남을 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이유 모두를 제쳐두고, 주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보여주신 것은 그저 ‘우리’ 입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를 향한, 우리 때문에. 이 십자가는 역사의 한 사건으로 치부될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 때문에’ 십자가가 있음을 우리는 인지해야 합니다.
[본문 : 십자가로 변한 삶 1. 우리와 함께 하심을 성취하다]
우리를 위해 또 때문에 허락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십자가로 말미암아 변화 시키셨습니다. 먼저는 ‘임마누엘’의 성취가 이루어 졌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을 보면, 이 임마누엘에 대한 뜻이 등장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주의 사자가 두려움 가운데 있는 요셉 앞에 나타나,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그리고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며, 그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임을 알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예수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시며,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 눈 앞에 놓인 실상은 어떻습니까?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신 주님의 모습은 어디 갔습니까? 그 모습은 어디가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겁니까?
아니요. 오히려 이 십자가의 못 박힘이 하나님의 계획이였으며, 임마누엘의 성취였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십자가의 버려짐을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버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셨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를 버리시면서까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결국 이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 임마누엘을 이룬 사건이자 성취가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버림받은 것 같은 예수님은 오늘 날 우리와 여전히 함께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버려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시어 지금까지도 우리와 여전히 함께 하고 계심을 우리는 봅니다.
바라옵기로는, 우리 삶 속에 늘 함께 하시기 원하여 어제와 내일, 또 오늘과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우리 모두 되길 소망합니다.
[본문 : 십자가로 변한 삶 2. 죄에서 완전한 자유를 성취하다]
또 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삶은, ‘죄에서 완전한 자유’를 성취함이 이루어 집니다.
이보다 완전한 자유는 없습니다. 이 자유는 ‘조금 쉬고 싶다.’, ‘서로 노터치 하자.’의 개념이 아닙니다. 세상의 자유는 결국 자유를 누린 만큼 댓가가 따라 옵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유에는 후폭풍이 반드시 다가 옵니다.
하지만 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는 세상이 말하는 자유와는 아예 다른 개념입니다. 육신이 자유해짐이 아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로 대신한,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음이 자유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보면, 많은 이들이 자유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설교하자 3,000명이 은혜를 입어 회개 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b,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들은 그렇게 죄 사함,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얻었고, 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결론 : 십자가를 바라보라]
이제 우리는 우리 삶 속에 먼지 쌓여 무뎌진 이 십자가를 다시 꺼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가져다 준 우리의 삶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를 우리 입으로 고백하며, 날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십자가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재정하시고 승인하신 유일한 정기적 기념 행위인 주의 만찬은 그분의 탄생이나 삶 혹은 그분의 말씀이나 행위를 극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죽음을 극화했다.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에 부여하신 중심적 중요성을 이보다 더 명료하게 지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의 죽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안전하다. 만약 십자가가 우리 종교의 중심이 아니라면 우리의 종교는 예수님의 종교가 아니다.”
존 스토트 목사의 기록처럼 결국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게 됩니다. 십자가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무뎌진 우리의 삶 또한 우리는 십자가의 가치를 한 없이 떨어트리는 우리의 나약함이 됩니다.
제 딸이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한다는 것은 사실 말하지 않아도 저희 집에선 이미 정의가 내려진 사실입니다. 저번주 아빠가 집을 들어오지 않자 아엘이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아빠가 안와서 울기 시작한건지 그 친구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건 그 친구가 한 시간을 울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 아내는 영상통화로 아엘이에게 제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엘이가 울음을 멈추었고, 손까지 들어 인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친구에게 있어 아빠는 멀리 있지만, 보기만해도 위안이 되고 마음의 안정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십자가가 이런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난 속에 힘들어 할 때, 예수의 십자가를 보며 우리가 위로가 되고 마음의 안정이 생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어려워 ‘힘들다, 힘들다.’ 한탄하며 살아내기보다 우리를 위해 임마누엘을 성취하시고, 모든 죄에서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하신, 부활의 영광으로 우리게 영원한 생명 주신 주님을 날마다 바라보며 걸어가는 자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고통 당하신, 그 십자가는 결국 슬픔이 아닌 승리입니다. 기쁨입니다. 선포입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거절하시며 신 포도주는 허락하신, 그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를 날마다 꺼내 귀함을 더욱 묵상하며, 이제 곧 다가올 고난주간을 기도로 준비하는 모두 되길 소망합니다.
[결단찬양]
은혜 아래 있네
[기도제목]
1)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감사하며 나아가게 하소서
2) 무뎌진 십자가를 날마다 꺼내어 묵상하며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이어진교회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