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하다는 착각

마태복음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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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하다는 착각
어릴적부터 교회를 다니신 분들은 이런 이야기 많이 들어보셨을 거에요.
예전 목사님들은 주님께 열심히 헌신하면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성에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대충 교회만 다닌 사람은 나중에 천국가서 집도 없이 개털모자쓰고 거지같이 다리밑에 있을 거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이것을 일명 ‘천국상급론’이라고 말하는데요.
열심히 신앙생활한 사람과 그렇지 않고 그냥 대충 신앙생활한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서 차이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면 신앙생활을 좀 더 열심히 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옳은 생각일까요?
요새 넷플릭스에서 ‘나는 신이다’라는 사이비 교주들을 다룬 프로그램이 뜨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사이비들은 공동체 내에서 사람들끼리 충성경쟁을 시킵니다.
충성한 만큼 계급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계급대로 천국에서 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하위 계급에 있는 사람은 천국에 가면 빌라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최상위 계급은 성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전통 교회에서 가르치는 천국상급론을 약간 비틀었을뿐 핵심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천국상급론이 아니더라도 우리 마음에는 은근히 이런 보상심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 섬기면 하늘에 마일리지가 쌓여서 이땅에서 혹은 천국에서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은밀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공로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면서도 그 구원 다음에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교회내에서 과도한 충성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세상에서도 경쟁으로 쉼이 없는데 교회에서도 쉼이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오히려 세상보다 경쟁이 더 치열합니다.
그럼 과연 이런 신앙이 옳은 것일까요?
천국은 이처럼 이 땅에서 얼마나 헌신하느냐에 따라 받는 상이 달라질까요?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갖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먼저 1절의 시작은 ‘하늘 나라’가 아니고 ‘왜냐하면’입니다.
우리 한글 번역에는 이 부분이 빠져있습니다.
이 말은 이 비유가 앞에 나온 예수님 말씀의 이유를 설명해준다는 것입니다.
19장 30절입니다.
그러나, 첫째가 된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20장 16절에도 보면 또다시 나오는데 이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어떻게 첫째가 꼴찌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꼴찌가 첫째가 될 수 있는 지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왜 순서가 역전될 수 있는지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첫째, 꼴찌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을 알려면 19장 30절 앞에 나온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봐야 합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이 어떤 대화를 나눈 것인가요?
먼저 부자 청년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 후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자신들은 모두 다 버리고 예수님을 일찍이 따랐는데 우리는 무엇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어차피 영원한 생명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여기고, 추가로 무슨 보상이 주어지는 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을까요?
먼저, 19:28절에서 주님 다시 오시면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이 땅을 통치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엄청난 특권입니다.
또 29절에서는 예수님을 위해 집이나 가족, 땅을 버린 사람은 백배 보상하고 영원한 생명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백배가 어떤 의미일까요?
동일한 말씀이 적힌 마가복음에 보면 여기서 ‘백배’는 내세가 아니고 현세에서 받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후에 받는게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백배 보상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 잘 믿었더니 집이 백채로 늘어나고, 자식이 백명으로 늘어나고 그런가요?
아니죠.
그러므로 여기서 백배 보상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처럼 이 땅에서 제자로서 누리는 풍성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30절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첫째가 된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보상이야기를 하신 후에 곧바로 제자들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비유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하나님 나라는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과 같다’는 표현은 지지난주 설교했던 13장에서도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하나의 하나님 나라 비밀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포도원 주인비유이기 때문에 핵심은 포도원 주인의 행동과 그 의도에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의미하고, 일꾼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일꾼들이 받는 한 데나리온은 영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행동했길래 그가 마치 하나님 나라같다고 말씀하실까요?
2절보시면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들을 고용하기 위해 장터에 나갑니다.
마치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있는 인력 시장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 당시 일꾼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해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새벽 6시에 나가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합의하고 일꾼들을 데려옵니다.
한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로서 노동자 하루 품삯정도 되는 돈입니다.
지금 우리로 따지자면 얼마일까요?
공사장 잡부 일당이 10만원정도니까 그 정도 금액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루 일당치고는 나쁘지 않은 돈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아홉시에도 또 나가서 장터에 있는 일꾼들을 데려옵니다.
그 일꾼들은 6시에 일을 못나가서 빈둥거리고 서 있습니다.
주인이 6시에 일꾼들을 부족하게 데려간 것일까요?
아무튼 포도원 주인은 이번에는 얼마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애매모호하게 말합니다.
일꾼들 입장에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정확한 금액은 말하지 않았어도 얼토당토않게 줄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여섯시 아홉시에만 일꾼을 구한게 아니라 열두시, 세시에도 나가서 일꾼을 구합니다.
심지어 오후 5시에도 나가서 일꾼을 구합니다.
아니, 구할려면 한번에 구하지 왜 이렇게 자꾸 일꾼들을 데려오는 것일까요?
이쯤되면 자기가 필요해서 일꾼을 구한게 아니라 일꾼들에게 어떻게든 일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럼 여기서 또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이들은 왜 5시가 될때까지 일을 구하지 못한 것일까요?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가 7절입니다.
‘아무도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입니다.
인력시장에 가보면 맨 먼저 불려가는 사람들은 젊고 튼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계속 고용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일꾼들은 신체적으로 열악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5시까지 남은 사람들은 정말 일꾼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한 사람들입니다.
나이가 많거나, 너무 왜소하거나,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졌다거나 그런 사람들인거죠.
이들이 바로 세상의 꼴찌들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마감 한시간 남겨놓고 그들을 써준다고 하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처자식 다 있고, 어떻게든 일을 해야 먹여살릴건데 한 시간만이라도 일할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7절을 잘 보면 5시에 부른 일꾼들에게 주인이 얼마 주겠다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이 일꾼들도 일을 시켜준 것 자체가 감사하니까 그것을 물어볼 엄두도 못 냈을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왜 주인이 임금을 말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8절부터가 이 비유의 핵심부분입니다.
주인이 관리인을 시켜 일꾼들 품삯을 주게 합니다.
그런데 새벽 6시부터 일을 시작한 일꾼에게 돈을 먼저 주는게 아니라 오후 5시에 일을 시작한 일꾼에게 돈을 먼저 줍니다.
이것은 왜 그런 것일까요?
여기에는 주인의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를 보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점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9절을 보시면 맨 마지막에 한 시간 남겨놓고 일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원래는 얼마를 받아야 하나요?
한 데나리온의 12분의 1을 받아야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10만원이라고 치면, 1만원도 채안되는 돈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시간 일하고 10만원을 받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얼마나 주인에게 감사하겠습니까?
분명 꼴찌 일꾼은 일하면서도 1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주인이 얼마나 줄까하고 걱정했을 것입니다.
몇 천원 받아가지고는 자식들한테 통닭 한마리도 못 사가는데 어떻하지? 이런 걱정을 하면서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10만원을 받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주인이 얼마나 좋은 사람입니까?
문제는 새벽 6시부터 일한 첫째들입니다.
10절입니다.
그런데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2시간 일한 첫째들에게도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입니다.
한 시간 일한 꼴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줬다면 당연히 그들도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겠죠.
왜냐하면 더 많이 일한 사람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게 경제 원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은 그 사람들에게도 딱 10만원만 줍니다.
그러니 짜증이 난 것입니다.
11-12절입니다.
그들은 받고나서,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 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여기서 투덜거린다는 말은 주인을 원망하고 비방한다는 의미입니다.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직장생활하다보면 똑같이 일하고도 여러가지 이유로 불공정한 대우를 받을 때가 종종있습니다.
그럴 때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상사에 대해 욕이 나옵니다.
하루 종일 땡볕에서 12시간 일한 사람과 1시간 겨우 마감때 와서 일손 도운 사람하고 일당이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의 분노에 공감하시나요?
주인이 나쁜 놈인가요?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왜 그들이 불만을 가진 것일까요?
한 시간 일한 사람이 받는 돈을 먼저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자신들이 제일 먼저 10만원 받고 집에 갔다면 불만이 있었을까요?
만약에 꼴찌들이 1만원정도 받고, 자신들은 그대로 10만원받았으면 불만이 있었을까요?
그래서 13절에서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어차피 그는 10만원 받기로 계약을 한 것이고, 주인은 그렇게 줬을 뿐입니다.
결국 그의 불만은 남들과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하였다.
주인의 말을 들어보니 이제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 것입니까?
주인은 꼴찌들을 긍휼히 여긴 것뿐입니다.
그들이 마지막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하고 몇 천원벌어가면 어떻게 되나요?
가족들 다 기다리는데 통닭 한마리도 못 사갈까봐 주인은 관대함을 베푼 것입니다.
주인의 목적은 자기 필요가 아니라 일꾼들의 필요를 채우려 한 것입니다.
반면, 첫째들은 남과 비교해서 자신들 이익에만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꼴찌들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들도 주인이 불러주지 않았다면 임금을 한푼이라도 가져갈 수 있었을까요?
불러준 주인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주인에게 분노한다면 누가 악한 것일까요?
또한 과연 첫째는 자기 노동의 댓가만 받고, 아무 것도 누린게 없을까요?
새벽 6시에 부름받은 일꾼은 자신이 일을 시작했을때 얼마를 받을 지 잘 알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신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돈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줄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불러준 자비롭고 관대한 주인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좋은 상사, 좋은 사장을 만나는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월급이 좀 적더라도 좋은 상사, 좋은 회사는 모든 것을 커버하고도 남는 것입니다.
첫째 일꾼은 그런 모든 것을 누렸기에 손해본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이 비유를 주신 이유를 제자들과 연결시켜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자들이 기대했던 보상은 첫째 일꾼들이 기대하던 임금과 같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임금을 계산하는 ‘저녁’이란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그 마지막때에 제자들이 받을 것은 한 데나리온, 즉 영원한 생명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들이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영생말고 또다른 보상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질 것은 영생, 구원밖에 없습니다.
구원이 절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기에 다른 어떤 보상도 더 큰 가치를 가질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영생, 구원의 절대적 가치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생말고 다른 보상을 구할 때 이 비유의 첫째들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께 헌신하면 구원말고 뭔가 다른 보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천국에서 성에 살고 싶은 마음, 이 땅에서 백배 보상받으려는 마음에 열심히 헌신하다가는 천국에서 꼴찌로 전락하고 말것입니다.
물론 천국에 꼴찌 자체가 없기때문에 이 의미는 주님께 책망을 들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14,15절을 자세히 보면 첫째들이 돈을 받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열린 결말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의 태도로 인해 그들이 영생,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헌신하나 안하나 다 똑같으니까 아에 헌신하지 말아야 할까요?
이 비유는 우리가 자격이 없는 꼴찌의 태도로 주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높아지려하지 말고 어린 아이처럼 낮아지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불러주신 주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낮아지고 섬기며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입니다.
또한 어차피 구원받으면 같은 거니까 죽기 전에 믿는게 제일 이득일까요?
물론 예수님 옆에서 마지막에 구원을 받은 강도나 모든 것을 헌신한 제자들의 구원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일 먼저 부름받은 첫째 일꾼처럼 이 땅에서 선하신 주인, 즉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앞서 100배 보상이라고 말씀하신 풍성한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믿은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또 한가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세상관점으로 볼 때 주인은 인건비를 최소화하지 못한 어리석은 경영자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장사하다가는 다 망하고 말죠.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통념이나 상식, 경제정의를 초월하는 혁명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철저히 꼴찌들에게 냉정한 잣대로 공정과 정의를 말합니다.
한시간 밖에 일 안했으니 만원도 안되는 돈을 줘야 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세상이 말하는 정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작은자, 꼴찌들에게 자비롭고 관대한 정의를 보이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깊은 주의를 요하게 됩니다.
우리가 배운 세상의 공평과 정의, 상식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세상에서 꼴찌 취급을 받는 자들에게 냉정한 세상의 시선이 아닌 포도원 주인과 같은 따뜻한 눈길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비유가 일꾼의 비유가 아닌 포도원 주인의 비유인 이유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천국에서 혹은 이 땅에서 주님께 더 많은 것을 보상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무엇인가 보상받으려는 마음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할 뿐입니다.
꼴찌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하다보면 자기의가 점점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와 감사로 시작했던 신앙생활이 어느 순간 율법주의화 되어 버립니다.
자신의 잣대로 남을 쉽게 판단하고 비교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감사의 마음은 사라져버리고 불만과 원망만 가득해 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나를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꼴찌로 전락할 위험성을 막아줄 유일한 치료제입니다.
이렇게 선한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한 데나리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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