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2_주일예배_마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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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과 누룩

Matthew 13:31–34 NKRV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 /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비유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이해할 때, 손에 잡히기도 어려울 정도로 작은 씨앗이 큰 나무로 자란다, 다시 말해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 엄청나게 확대 확산된다는 데 초점을 맞춰 이해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아주 작은 데서 시작되지만 창대한 결과로 귀결된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일종의 성장 과정으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상식적으로 봐서 잘못된 이해는 아닙니다.
그러나 겨자씨의 비유는 그 하나의 작은 씨앗이 단순히 확대되고 성장한다는 그 사실과 더불어 또 다른 성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씨앗은 일단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그 땅을 점령하고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나간다는 데 또 하나의 본질적인 초점이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겨자씨는 가장 귀찮아 했을 정도로, 그 작은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놀라운 생명력을 발휘해 땅을 차지해나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 비유는 결국, 하나님 나라는 꾸준히 성장해나갈 뿐 아니라, 일정한 구역의 온 땅을 금새 차지할 정도로 확산해나가는 겨자씨와 같이 어느 순간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가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질적인 전환'의 성격을 말합니다. 처음 다른 작물 틈새에 끼여 싹을 틔웠을 때에는 말 그대로 다른 작물에 끼인 잡초와 같은 존재에 불과했지만, 그대로 두었을 경우 밭을 아예 겨자 밭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씨앗이 나무로 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질적인 전환을 함축하고 있지만, 그렇게 자란 나무가 온 밭을 뒤바꿔 놓는다는 사실은 질적인 전환의 성격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겨자씨 비유의 본질은 이어지는 누룩의 비유를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누룩은 아주 작은 분량만으로도 엄청난 양의 밀가루의 성질을 바꿔버립니다. 어떤 밀가루를 부풀리는 데 그 밀가루 만큼의 누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반죽해 놓은 밀가루보다 훨씬 적은 분량만으로도 충분히 밀가루의 성질을 뒤바꿔 놓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 질적 전환을 일으킨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이 비유들의 초점이 단순히 성장을 말한다면, 겨자씨는 겨자씨 모양 그대로 바윗덩이 만큼 커지는 것이 마땅하고 누룩은 누룩 곰팡이 모양 그대로 몇 배로 커진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되는 씨앗과 누룩의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변화되고 자기가 발을 붙인 대상을 변화시켜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씨앗과 누룩의 역할입니다. 그것도 아주 미미한 존재에서 거대한 존재로의 탈바꿈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비유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교회를 일구어나가고자 하는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큰 성과를 대할 때, 그 결과 자체에만 주목하고 그 결과를 불러일으킨 근본 요인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살피지 못하는 잘못을 종종 범합니다. 말하자면 온 밭을 뒤덮은 큰 나무 숲을 보면서 그것이 아주 작은 씨앗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쉽사리 연상하지 못하고, 먹음직스럽게 부풀려 구어지거나 쪄진 빵을 보면서 그것이 아주 작은 소량의 누룩 혹은 효모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얼른 연상하지 못하는 격입니다. 만약 누룩이나 효모가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딱 반죽한 분량만큼 그대로 익은 개떡에 불과하다는 것을 쉽사리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실 상식적으로 아는 바와 같이 무성한 숲을 이룬 나무는 작은 씨앗에서 비롯되고, 먹음직스럽고 보드라운 빵은 누룩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씨앗과 누룩은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인'입니다. 달리 말하면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실마리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우연한 계기이거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어떤 것이 아니라, 꼭 있어야 할 어떤 것입니다. 그 자체로는 신통치 않아 보이는 것이지만, 어떤 조건을 만날 때 놀라운 결과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겨자씨 하나로는 어떠한 음식도 만들 수 없고, 누룩 자체만으로는 그저 곰팡이에 불과하지만, 겨자씨가 땅을 만날 때 누룩이 밀가루와 결합할 때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사실 이와 같은 비유 혹은 같은 취지의 말씀을 성서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가장 쉽게 우리는 요한복음 12장 23절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또 다른 강조점을 지닌 비유이기는 하지만,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밀알 하나가 어떻게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가, 어떻게 질적인 전환을 이루어내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비유입니다. 하나의 씨앗이 씨앗으로서 성격을 간직하고 있는 한 그 씨앗은 놀라운 결과를 필연적으로 빚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수확할 만큼의 씨앗을 뿌려야 예상했던 수확량을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한 줌의 씨앗은 한 되, 혹은 그 이상의 수확을 거두게 합니다. 또 다른 예를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보게 됩니다. 창세기 18장의 소돔과 고모라 성에 관한 이야기는 의인 10명이 없어 멸밍하고 말았다고 전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 성에 의인 10명만 있었어도 그 성은 다시 거듭날 수 있고 따라서 멸망을 면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곳을 변화시킬 수 있는 누룩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드온의 300 용사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드온 앞에 3만 명의 용사가 모였지만, 10만 이상의 미디안 병사를 무찌르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데는 단 300명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전합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유다가 멸망했을 때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에 구원의 새 희망을 불러일으키리라고 역설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씨앗과 누룩의 비유에 비견됩니다. 씨앗이 씨앗으로서 성격을 잃지 않는 한, 누룩이 누룩으로서 성격을 잃지 않는 한, 그것은 지금 예를 든 경우에서처럼 전혀 새로운 결과를 빚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최소한의 외형적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도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로서 내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내적 조건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이요, 그것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바로 그 믿음과 희망으로 충만해 있고, 그 믿음과 희망으로 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면, 우리는 우리 교회의 규모와 상관 없이 충분히 씨앗으로서 누룩으로서 몫을 할 수 있다고 자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딱 한 가지만 더 비유를 들면서 오늘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일본 어느 섬의 원숭이 이야기입니다. 이 원숭이들은 고구마를 즐겨 먹는데, 처음에는 씻어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 무리의 원숭이들이 고구마를 씻어먹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에 그것이 떨어져 있는 그 주변의 모든 원숭이의 보편적인 행동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법칙이 사람의 행동양식, 사회적 관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전혀 낯선 것이었지만,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한 가지 방식을 따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에 그것이 보편적 양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옷을 입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복→양복 / 양복→생활한복). 우리가 간직한 희망, 그리고 그 희망에 따른 우리의 삶의 방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연일 신문이나 TV 보도를 접할 때 불행한 소식을 더 많이 접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간간히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미담 또한 접합니다. 바로 그 불씨가 꺼지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아마도 누구나 예외없이 기쁘고 즐거웠던 시간보다 고통스럽고 슬펐던 시간들이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의 삶을 지탱시켜 왔던 요인 / 이유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그라들지 않은 한 우리는 그래도 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고 이 교회 공동체가 그 희망의 씨앗으로, 그 희망의 누룩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축복을 누리기를 이 시간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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