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삶과 보리 추수의 시작

룻기 강해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91 views
Notes
Transcript
룻기 1:19-22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기독교인에게 고통이 생겼을 때
우리에게 고통이 생긴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
우리는 분명히 무언가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삶 속에서 슬픔과 고통이 생겼을 때 반응은 무언가 달라야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달라야하는 것 같은데 말이죠.
세상의 사람들은 삶 속에서 고통과 슬픔이 생겼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요? 여러가지 모습이 있겠지요.
그것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회피할 수도 있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이겨내라는 글들을 보며 억지로 극복하려다가 지치기도 하죠 .
우리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는 그 슬픔 속에서 그 슬픔이 우리의 신앙을 잃게 만들거나,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낙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을 흔들 정도의 그 슬픔이 생겼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어떤 반응과 어떤 모습을 가져야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똑같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신앙을 잃을 수도 없잖아요. 우리는 슬픔과 고통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자세를 고민해봐야 하는거죠.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ppt)
“떠들며” (19절)
히브리어 용례상 반가워하며 맞이하는 의미
여인들은 10년만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반가워하고 있다.
(ppt)
“이이가 나오미냐” (19절)
“정말 나오미 맞아?” 와 같은 의미
반가움에 물어보는 표현법

1. 나오미의 애가(20-21절)

애가는 단순히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구절이 아니다.
만약 이 구절들을 불평으로 해석한다면 나오미는 신앙도 없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여자에 불구하다.
성경에서 애가의 역할은 하나님을 믿어도 단단히 믿는 자의 하나님을 향한 애통한 마음의 기도이며, 노래이다.
(ppt)
911사태와 미국 기독교인들의 애가
20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는 온 인류 역사상 충격적인 일들 중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일명 9.11 테러라고 하는 과격 이슬람 단체가 미국에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tv를 틀어놓고 자고 계실 때였습니다. 미국의 무역센터 건물에 비행기 하나가 들이박는겁니다.
저는 그런 광경을 처음 보았는데 이것이 가짜 뉴스가 아니고 kbs 뉴스에서 나오는거죠.
제1무역센터, 제2무역센터, 펜타곤기지까지 모두 테러를 받고 총합 3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이후 미국 전역은 미국 역사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국민적 충격과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전역이 슬픔으로 빠져있고 애도와 추모의 물결이 일어나는 동안 미국 교회는 그 슬픔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겁니다.
미국은 100년을 넘는 기간을 세계 최고 강대국으로 지내왔습니다.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최고였죠. 풍요기였습니다.
그렇게 승리의 길만을 걸었던 미국은 그런 슬픔을 겪어본적이 없는겁니다.
미국의 교회들은 이러한 슬픔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목사님들은 어떤 설교를 해야하는지, 성도들은 어떻게 추도해야하는지...그 엄청난 충격과 슬픔에 대응하는 방식을 경험해보질 못해서 못하는 겁니다.
그 이후 뒤늦게 미국의 신학자들은 슬픔과 고통에 관련된 신학을 발전시킵니다. 그러나 늦은 대응이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에 있었던 슬픔과 고통의 신학사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종교적인 모습의 함정으로 빠졌을 때 고통과 슬픔에 대한 태도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로 빠지게 된다.
내가 무언가 죄를 저질러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시고, 벌을 주시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너무 한쪽 관점을 살펴본 종교적, 율법주의적 모습이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우리에게 명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우리의 삶을 항상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사실이다. 물론 정말 크게 보았을 때는 아담과 하와가 초래한 원죄가 있어서 이러한 결핍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근본적인, 본질적인 문제이지 어떤 사람의 구체적인 죄가 있기 때문에 슬픔이나 고통이 생긴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의 삶은 원인을 파악하기 힘든 고통과 슬픔으로 둘러쌓여있다.
사실 시편에는 기쁨과 찬양의 시보다 애가의 시가 더 많다. 신학자들이 분류하는 분류법으로 본다면 찬양시는 41개인데 반해, 애가는 54개로 본다.
이것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확실한건 우리의 삶은 기쁨만큼 슬픔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2. 애가 주해(20-21절)

(1) “전능자”, “마라”
“나오미”의 이름의 뜻은 “나의 즐거운 자”라는 의미이다.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말한다.
(ppt)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그 이유는 자신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즐거운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 “쓰게 하셨기 때문”이다.
“마라”라는 말의 의미는 “쓰다”라는 의미이다. 나오미는 즐거움보다는 그 삶이 이제는 “쓴 인생”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이라는 표현보다 “전능자”라는 표현을 쓴다.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표현보다 모든 상황의 권력자이신 “전능자”라는 표현이 더욱 와닿는다.
마치 하나님-나오미 사이의 관계를 한발짝 물러서 무서운 느낌의 “전능자”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다.
(ppt)
(2) “비어 돌아오게 하심” (21절)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가 자신의 인생이 쓰다고 표현한 이유가 21절에 나옵니다.
바로 자신의 인생이 “비어버렸기 때문”이다.
나오미의 인생을 돌아보면 정말 텅 비어버렸다. 남편과 두 아들로 가득했던 가정은 그들의 상실로 텅 비어버렸다.
10년 전 더 젊고 파릇파릇했던 자신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는 모든 집안의 남자를 상실한 과부의 삶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던 나오미의 삶은 이제 모든 것이 없는 삶이다.
슬픔과 고통을 대하는 나오미의 태도 : 솔직함과 겸손함
나오미가 슬픔과 고통을 대하는 태도는 숨기고 포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오미는 자신이 당한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께 솔직한 고백을 해낸다.
그녀는 그녀의 텅 빈 삶을 보았을 때 생기는 쓴 느낌 그대로 하나님께 쏟아놓는다.
그녀는 그녀의 삶의 모든 상실을 하나님에게 다 쏟는다.
이러한 태도가 과연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태도이다.
자신의 주변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결과들을 하나님께 쏟아놓으며 맡기는 나오미의 “겸손함같지 않은 겸손함”이다.
우리는 흔히 겸손하다는 표현을 오해한다. 자기를 낮추고 언제나 “아니에요 아니에요”하는 그런 모습을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겸손일 수 있다. 그러나 진짜 겸손함의 의미는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의 의미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겸손함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텅 비어버린 삶과 그것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마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내어놓은적이 있는가?
그런 감정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이 죄는 아닐까 고민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죄가 아니다. 성경의 정말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겸손한 자들이 자신의 감정조차 하나님께 다 털어놓는 많은 부분을 알 수 있다.
시편도 그러하며, 욥기도 그렇다. 사무엘상의 한나도 그랬다.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도 자신의 애통한 마음을 하나님께 맡겨버린다.
그 모든 것을 맡기는 모습이 바로 겸손함이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채우신다.(22절)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고통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참된 겸손함을 앎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생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텅 빈 삶을 주시고 고통만을 주시는 분이신가?
우리는 22절을 주목해야 한다.
(ppt)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먼저 나오미는 룻과 “함께” 돌아왔다. 나오미의 인생이 텅 비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그 큰 슬픔으로 인해 하나님의 그림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그림은 나오미의 삶에서 텅 비어버린 남편과 아들들의 자리를 대신하여 나오미에게 평생을 충성하기로 헤세드의 사랑을 베푼 “룻”을 채워주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그들을 베들레헴에 이르게 하신다.
“보리 추수”는 단순한 시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룻기의 저자가 텅 빈 나오미의 삶 속에 가득한 열매를 추수하게 하실 것을 기대하게 하시는 문학적 장치이다.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고통을 주시며 그것을 즐기시는 하나님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고통을 주시며 텅 빈 삶을 주시면서도 그것을 고통스러워하는 자녀에게 새로운 삶의 채움을 허락하신다.
앞으로 룻기를 계속 들으면 나오미의 삶이 어떻게 채워지는지 알게 된다.
나오미의 삶은 남편과 아들들이 비어버린 삶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채우심은 그것 이상의 것들이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은혜로 나오미의 삶을 가득 채워버리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룻기에 담겨져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1. 슬픔과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우리는 슬픔과 고통을 대할 때 그것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지나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책망과 처벌을 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대부분의 고통과 슬픔은 죄에 대한 결과는 아닙니다.
나오미에게 일어났던 비극은 나오미의 죄에 대한 결과가 아닙니다.
원인을 알기 힘든 슬픔과 고통이 우리의 삶에 항상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슬퍼하는 감정없이 억지로라도 기뻐해야할까요?
확실한 것은 나오미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슬픔과 고통을, 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 모두 맡겼습니다.
슬픔의 겸손입니다. 하나님께 모두 맡기는 것이죠. 우리가 슬픔과 고통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지요. 슬픔과 고통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나아가본적 있으신가요?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이 마음을 토해내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린적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시는거죠.
부모님은 그런 분이잖아요. 자식이 힘들 때 자식이 숨기려고 하고, 도움받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을 너무 마음아파하시죠. 부모님이 원하는 자식의 모습이 아니에요.
그게 더 어른스러워보이고, 더 성장한 것 같은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어른스럽고 성장을 했더라도 슬픔과 고통은 어른같은 사람들도 무너뜨리거든요.
부모님이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나아와 그 마음을 하나님께 나누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채우심의 믿음

그러나 우리가 그 감정을 하나님게 가지고 나아가 토해내면 마음이 개운해지는 그런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저 고통을 주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시죠.
하나님의 가득히 채우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시고, 그것을 계획하시는거죠.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죠. 경험해본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그것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죠 .
그러니까 은혜란 말입니다.
우리가 예측 가능하게 오는 무언가 좋은 것은 그냥 행복입니다. 전에도 경험해본적 있는 행복이죠.
그런데 우리가 정말 이해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게 오는 하나님의 채우심은 은혜입니다. 기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겸손히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녀들에게 고통 속에서 주시는 채우심인거죠.

3.

그리스도는 무엇을 하셨는가?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