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2 저녁]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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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151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본문 마 26:36-46
오늘날 개혁주의를 따르는 우리는 지키지 않는 절기이지만, 초대교회의 교회력을 따르면 지금은 사순절 기간이다. 사순절이란 ‘넉 사’에 ‘열 순'을 해서 40일을 의미한다. 무엇으로부터 40일을 지키는 것인가?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기까지의 40일이다. 더 정확하게는 이 40일 중에서 6번의 주일은 빼야 하니까, 대략 46일간의 여정이 되겠다.
오늘날 너무나도 분주해지고 약속시간과 장소조차 카톡으로 주고 받는 시대라보니, 우리는 더이상 뭔가를 준비한다는 것의 소중한 의미도 잊어버렸고, 그 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일 조차 잃어버렸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절을 맞이하기까지의 40여일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일은 참으로 귀하고, 그렇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다가 마침내 맞이하게 되는 부활절의 의미는 참으로 뜻 깊을 수 밖에 없겠다.
기독교 역사에서 사순절 전통은 훌륭한 일을 많이 해왔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 사순절 기간동안 주님의 낮아지심과 주님의 고난당하심을 묵상하며 때로는 금식도 하고, 때로는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적인 일들을 절제도 하며, 사랑의 구제와 섬김을 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점점 사람들이 이 사순절을 미신처럼 여기기 시작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사순절을 없에버렸지만, 그럼에도 사순절의 의미는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유익이 있다. 이 기간동안 잠시 세상의 즐거움들을 절제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라. 그렇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할 때에 비로소 영광과 기쁨의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난 2월 말부터 2023년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설교 일정을 되돌아 보니까 올해 첫 주일 저녁설교이더라. 그래서 어떤 본문으로 말씀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오늘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면 참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잡히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 무리에게 입구에 앉아 있으라고 명하시고, 그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주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함께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이 세 제자는 변화산 사건의 증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고통스러운 기도를 증언해 줄 증인으로 세우셨다. 이 사건은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다루고 있는 기사인데, 모두 동일하게 주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몹시도 괴로워하시고 슬퍼하셨음을 기록한다. 주님은 압도적인 슬픔과 괴로움을 느끼신다. 그것은 단지 십자가의 고통, 수치와 수모, 아픔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었다. 이는 택하신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신 철저한 죄인으로서 공의로우신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를 느끼기 시작하셨고, 의로우신 분이셨으나 이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죄인으로서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당하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보면 ‘...그분이 이 세상에 사셨던 전 생애동안, 특별히 생의 마지막 기간에 온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다...’고 해설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내려오신 순간부터 그분의 모든 생애 전체가 고난이었다. 그분의 삶 가운데 고난이 아닌 부분이 전혀 없었다. 영광 중에 계셔야 할 그분께서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오셨고, 하늘에 계셔야 할 분께서 육체를 입어 사람과 같이 되셨으니, 무한하고 크신 분께서 유한하고 작은 인간의 몸을 입고 사시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다.
그렇다면 나신 이후에는 어떠한가? 태어난 직후에도 분봉왕 헤롯이 두살 아래의 아이를 모두 죽이라 명하여 죽음의 위협을 피해 마리아와 요셉의 손에 의해 애굽으로 도망가셔야 했다. 또한 공생애 시작부터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고, 죄악되고 오염된 환경 속에서 날마다 죄인들과 교제하는 것 자체가 고난이셨다. 고귀하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셔야 했던 이유가 전부 택한 백성들의 죄 때문이 아니었던가.
특별히 그분께서 받으신 고난은 택하신 모든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서 임하는 고난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 모두에 짊어지셨다. 우리는 흔히 주님의 고난을 몸의 고난이라고만 생각하지만, 마태복음 26장-27장에서 나타나는 주님의 고난은 육체적인 고난보다 영적 고난을 더욱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의 이 시점에서 주님은 택하신 모든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과 같은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사, 그 진노의 무게를 감당하고 계셨다.
그렇기에 지금 겟세마네 기도는 매우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왜 주님은 기도하셔야만 했는가? 왜 주님은 기도할 수 밖에 없으셨을까? 기도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는가? 왜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수 밖에 없으셨을까?

첫째로, 주님은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취하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를 뒤흔들던 이단 중에 영지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신성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셨으나 인간과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일 뿐,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사람의 모습을 하신 하나님이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주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취하신 분이셨다. 따라서 우리와 동일한 두려움을 느끼셨고, 고통과 슬픔을 느끼셨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짊어진 화목제물로서, 그 진노의 무게를 느끼셨다. 그 진노가 얼마나 맹렬한지, 그 진노가 얼마나 강력한지, 그 진노가 얼마나 순수한지, 그 모든 것들을 십자가를 앞두고 고스란히 느끼셨던 것이다. 주님은 죽으시기 위해 오셨지만 우리와 동일하게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신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우유 급식을 했었다. 그렇게 부모님 주신 돈으로 우유를 마시다가 한달 우유값을 속된 말로 삥땅을 치고 오락실에 쏟아부었던 적이 있다. 첫 달은 그렇게 안걸리고 잘 넘어갔는데, 문제는 두 번째 달이었다. 학교 담임선생님이 집으로 전화를 한 것이다. 모든 학급 친구들은 다 우유급식을 하는데 진영이만 우유급식 신청을 안했는데 혹 무슨 일이 있으시냐. 그런데 하필 그 날이 아버지 생신이었다. 온 친척들이 우리 집으로 다 모이기로 한 날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오락실에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누가 귀를 딱 잡아 땡기길래 보니까 아버지셨다. 그 뒤에서 한숨쉬시며 처다보시던 어머니.
그렇게 집으로 끌려간다. 그런데 집에 가니 이미 친척들이 다 와 있다. 부모님은 친척들 돌아가시고나서 보자고 하신다. 생신식사라고 온갖 맛있는 음식들이 있는데, 그게 목으로 넘어가겠는가? 친척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시고 나면 나는 엄청나게 혼날텐데. 두렵다. 식사가 점점 끝나가고 이제 과일과 차가 나올 때 쯤이면, 심판의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당시 아버지는 육군 대령이셨다. 눈에서 레이져가 나오셨다. 차를 다 마시고 과일을 다 드시고는 곧 가실 것 같은 분위기이다. 생각같아서는 하루 주무시고 가시면 얼마나 좋으랴. 친척들이 가시면 나는 엄청 혼날텐데. 두렵다. 혼날 순간이 다가옴을 느낄수록 점점 더 극심한 공포가 찾아온다. 어린 마음에도 잘못한 일에 대해 혼날 것을 두려워한다.
지금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하실 순간을 앞두고, 이제 예수님의 공생애 그 막바지 순간이 임박했음을 아시고, 주님이 기도하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왜 기도하셔야만 했는가? 그 십자가 고난의 잔이, 택하신 백성들을 위한 완전한 희생제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어야 할 그 순간이 임박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셨기 때문이다. ‘그래, 사람도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데 주님이야 오죽하셨을까. 나도 대충 주님의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해할 수 있어’ 라고 우리가 주님이 당하신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겪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대부분 나 자신의 잘못 때문이지만 주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고, 또한 주님이 느끼시는 공포와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에 대해 우리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택하신 모든 백성들의 죄의 무게를 내가 대신 짊어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주님만이 고스란이 그 무게를 담당하실 수 있다. 주님께서도 37-38절을 통해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라고 말씀하신다. 이 단어들은 지금 주님께서 느끼시는 감정의 고통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준다. 주님은 아주 극렬하게 상심하셨고, 매우 깊은 좌절을 맛보고 계시며, 극심한 슬픔 가운데 계신다. 이는 어느 인간도 감히 상상할 수 없고, 겪어볼 수 없는 가장 밑바닥의 상태에 휩싸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감정들 때문에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고 계시다.
그 십자가 고난의 길이 얼마나 두렵고 험하며, 수치스럽고, 모욕적이며, 고통스럽고 괴로운 길인지를 아셨기 때문에 주님은 할 수 있거든 그 길을 피하려 하셨다. 39절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도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취하셨으니 고통을 느끼시는 것이 당연하고, 그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 본연의 감정일 것이다. 마가 역시 그의 복음서에서 기록하기를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누가 역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십자가의 화목제물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기 위해 내려오셨지만, 육신의 연약함, 인성이 계속해서 이 끔찍한 순간을 피하고 싶어하고, 가능하기만 한다면 이 저주의 순간으로부터 놓임받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의 욕구대로 이끌리지 않으셨다.이것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두번째 이유이다.

둘째로, 주님은 순종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기 위해 이같이 기도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기 위해서 이와 같이 기도하셨다. 39절 하반절을 보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원문의 의미를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내가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오직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주님은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앞세우신다. 주님의 인성은 계속해서 그 순간을 피하고자 하셨다. 두려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앞둔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린다. 계속해서 마음 한 켠에서는 연약한 인성이 부르짖는 고뇌와 고통을 느끼셨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동일한 내용으로 기도하시길 세 번이나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의 잔을 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53:4-5 에 의하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본래 하나님을 떠난 패역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 진노와 형벌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만큼 거세고 두려운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달리신 십자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을 우리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그 죄값을 대신 치루시되, 자신의 피로 지불하신다. 그 십자가 형벌의 육체적인 고난은 정말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 바로 철저한 죄인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분리되어 버려지는 고통이다. 영원 전부터 단 한순간도 끊어진 적 없던 삼위하나님의 친밀한 교제와 연합이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끊어지고 단절되는 고통을 느끼셨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 아니겠는가.
주님께서는 장차 닥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을 알고 계셨다. 눈 앞의 제자들은 그 순간을 대비하지 못하고 잠에 취해 기도에 실패하였을지라도 주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셨다. 이는 연약한 육신의 본성을 잠재우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어드리는 기도를 하시기 위함이셨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어찌나 처절했는지, 얼마나 격정적이었는지, 평행본문인 눅22장에 의하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할’ 정도였다. ‘더욱 주께서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실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같은 제목으로 세 번 씩이나 기도하신 이후에 주님은 어떤 행동을 하시는가? 그분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주님을 잡으러 오기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자신의 의지로 한발 앞서 고발할 자들을 만나려고 친히 내려가신다. 주님은 잠자던 11명의 제자들을 깨우시고 한 자리로 모으셔서 가룟 유다와 군대를 만나러 가신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주님 앞에 도착하게 된다. 이후 주님의 모습 속에는 침착하고 안정을 찾은 모습들만 나타난다. 왜냐하면 주님의 몇 시간 동안이나 지속되던, 땀이 핏방울 흐르듯 처절하게 부르짖던 이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성부께서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거두어 가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고통을 온전히 담당하신 주님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매인 뱀의 후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을 떠나 살던 우리였기에 그 영광스럽고도 친밀한 사귐에서 떨어져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우며, 얼마나 괴롭고, 비참한 것인지, 우리의 감정이나 이성, 논리 등으로 납득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그 비참함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 다 알 수 없다. 비록 우리는 이를 알 수 없지만, 성경 속에서 그 죄의 무게가 어떠한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최후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는데, 바로 겟세마네 동산 주님의 모습에서이다.
지금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장소가 어디였는가? 우리가 겟세마네라고 알고 있는 이 동산의 이름의 어원은 ‘올리브에서 기름을 얻기 위해 올리브를 기계틀에 넣고 짜내던 착유기’ 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님은 39절을 보니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리셔서’ 기도하신다. 이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완전히 쥐어짜지는 것이다. 지금 주님은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택한 백성들의 죄의 무게와 하나님의 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계셨다. 그래서 완전히 무너진 모습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처절하게 기도하신다. 죄와 심판과 진노의 무게에 완전히 짓눌려진 채로 납짝 엎드려 부르짖고 계시다. 지금 주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느끼시는 고통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죄인으로서 느끼는 고통이다.
이 우주 만물이 시작되기 전,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영원한 교제를 누리시던 성부와 성자의 친밀했던 사귐이 끊어져버렸다. 왜냐하면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고스란히 짊어지셨으며, 지극히 공의로우신 성부 하나님은 죄를 가까이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에게 버림받은 비참함, 괴로움, 고통을 고스란히 당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무게는 점점 더해져서 지금은 영의 고난을 받고 계시지만, 시간이 몇 시간 채 흐르지 않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난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 무엇보다 죄인을 향해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진노를 예수님께서 홀로 다 담당하실 것이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라. 만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 죄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당하게 하셨더라면, 이 세상 모든 택하신 자들의 죄 말고 내 개인적인 죄의 무게만이라도 담당하게 하셨다 할지라도,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그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차라리 지옥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했을런지 모른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앞에서 버틸 자가 없을 것이다.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는 맹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지극히도 사랑하셔서 이 모든 죄의 속량을 위하여 자신의 독생하신 아들을 아끼지 않고 보내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에 성부께서 자신에게 내어주신 자들을 위하여, 그분의 신부이자 그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찢으시되 골고다 언덕에서 온전히 내어 주시지 않았던가. 미국의 다우드 목사는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혹히 못박히신 갈보리 언덕과, 그 언덕 위에 처참하게 세워진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였다. 그 가운데 깊은 감동을 받아 1874년에 이와 같이 작시를 했다.
오 갈보리 오 갈보리 주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보배로우신 나의 주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주의 고난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저 한없는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릴 것 밖에 없다. 벌레 만도 못한 나를 위해 왜 한없이 고귀하시고 거룩하신 주께서 낮아지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죄의 무게를 견디시고,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부르짖으셨는가? 한낱 죄인 중의 괴수들인 우리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리스도께서 수모를 당하시고 채찍질을 당하시고 나무위에 달려 죽으셨는가?

결론 : 우리 주님과 같은 분이 또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주님의 성육신과 고난과 죽임당하신 본문들을 묵상할 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이처럼 강렬하게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주께서 당하신 모든 수모와 고통과 죽으심이 본래 내가 당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온갖 손가락질과 저주와 모욕을 당해야했고, 내가 채찍질 당해야 했으며, 내 손과 발이 못박혀 장대위에 높이 매달려 사람들의 수치 가운데 죽임 당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무리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살이 찢겨졌고, 오직 그 무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피가 쏟아졌다. 그 무리가 누구인가? 창세전부터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바 된,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 곧 저와 여러분이다. 세상 수 많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 중 도대체 어떤 신이 이와 같이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고 말하는가? 세상 어떤 존재가 우리를 이 정도의 사랑으로 품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오직 우리 예수님 밖에 없다. 아무리 둘러 보아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땅 위에 내 주 같은 분이 없으시다. 그 누구도 이 위대한 사랑을 베푸실만한 존재도 없고, 이 위대한 희생을 치룰 존재도 없다.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며 나를 채워주는 이, 자기를 온전히 죽여가며 나를 살려주는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우리를 위해 이와 같이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감사와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한다. 특별히 이 사순절 기간 동안, 그 의미를 기억하며 더욱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묵상함으로 크신 은혜를 누리시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찬양) 내 주 같은 분 없네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자. 주여, 그렇습니다. 무엇 때문에 주께서 그 모진 희생과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바로 이 자리의 저 때문임을 겸손히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영원 멸망당했어야 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무죄하신 당신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임당하셔야만 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그 위대하시고 아름다운 사랑을 더욱 생생하게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 벌레만도 못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도저히 가치를 메길 수 없는 고귀한 피가 흘려져야만 했음을 기억하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그 위대하신 사랑을 이 시간 깨닫기를 원합니다. 주여,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그 위대하신 사랑, 그 찬란한 사랑, 그 영원한 사랑에 압도되게 하셔서 그 사랑의 빛 앞에 내 눈이 멀어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구속한 주만 보이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어떠한 언어를 총동원하여도 주님의 크신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은혜와 사랑 주심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평생에 오직 주님의 사랑을 늘 묵상하게 하시고, 특별히 이 사순절 기간동안에 더욱 주님의 그 사랑을 갈망하며, 그 사랑을 깨달으며, 그 사랑을 듣고, 그 사랑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 사랑이 우릴 온전히 덮으시고, 그 사랑이 우릴 채워주시며,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시어, 자나 깨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사랑의 흔적을 나타내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의 향기를 발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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