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2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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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우리 친구들, 다들 한주간 잘 지냈나요? 오늘도 함께 이자리에서 만나 말씀을 나누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를 누리며 나아가는 우리 모든 친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핫한 드라마가 하나 있었습니다. 제목이 뭐냐면 더 글로리라는 제목이었는데요, 워낙 연기들을 잘 하시는 배우들이 많다보니 여러 유행어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 드라마가 핫했던 이유는 학교폭력에 대한 이야기와 그것을 복수하는 복수극이었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인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생기다보니 드라마 뿐만 아니라 현실 사회에서도 이러한 학교폭력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조치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복수극에 흥미를 갖고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죄에 대해 벌을 받는 것에 통쾌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어요? 현실에서 그렇지를 못하다는 뜻이겠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나쁜 죄악들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아니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얼마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말이죠. 그러면서 일곱번이면 되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앞선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에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5절부터 17절의 말씀인데요, 제가 읽어줄게요.
마태복음 18:15–17 NKRV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그를 그냥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하고 권면하여 그를 다시금 공동체 속에 속할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용서하라고 하신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가 21절의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여기서 왜 일곱번이라는 수치를 언급한 것일까요? 사실 이러한 용서에 대해서는 이미 유대인들의 선생인 랍비가 정해준 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세번정도만 용서할 것을 이야기했죠.
그러다보니 베드로는 이것보다도 좀더 크게 일곱번을 언급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문화에서 일곱은 완전한 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랍비들의 이야기보다도 더 과장해서 7번의 용서를 할지를 물은 것입니다.
사실 이 베드로의 이야기만 해도 꽤 파격적인 것인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놀랍습니다.
뭐라고 하시냐면,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곱번을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그럼 계산이 빠른 친구들, 우리는 몇번 용서해주어야 하는 것이죠? 일곱번을 70번 하니까 490번이겠죠. 그러면 우리는 한 친구를 490번 용서해줄 수 있는 것이겠죠?
우리 친구들도 어느정도 눈치를 챘겠지만, 당연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대답은 490번까지만 용서해줘!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수없이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아까 7이 완전수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완전수를 70번, 더 완전한 수만큼 하라는 것이니, 결국에는 무한대로 용서해주라는 뜻과 같다라는 거에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용서라는 것은 그냥 언제든 계속 한계 없이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엄청나게 놀랐을 거에요. 아니 일곱 번도 엄청 대단한 건데, 어떻게 매번 계속 용서를 할 수 있겠어? 라고 생각을 했을거에요.
어쩌면 예수님이 좀 너무하시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라면 연진이 괴롭힐때마다 용서해줄 수 있겠어요? 절대 쉽지 않죠.
그래서 예수님은 이어지는 비유를 통해 이 무한한 용서에 대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신의 종들을 불러 자신의 재산들을 결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만 달란트 빚진 종이 한명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하자면, 만 달란트가 어느정도 금액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달란트는 주로 무게를 셀 때 사용하는 단위인데요, 우리는 흔히 달란트 잔치 라고 하면서 몇달란트 몇달란트 하니까 어쩌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가 않을 수 있을거에요.
그런데 사실 달란트는 엄청난 가치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달란트를 은으로 가정한다면, 은 한 달란트는 얼마냐 6천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달란트는 무게 단위니까, 금속류, 금, 은, 동과 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라고 볼 수 있구요, 데나리온은 그 당시 통용되던 화폐입니다. 당시 한 노동자가 하루 일하면 한 데나리온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한 달란트는 얼마에요? 한 노동자가 6천일 동안 일해야 얻을 수 있는 금액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달란트라는 것의 무거운 가치를 짐작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종이 진 빚이 얼마라구요? 만 달란트라는 것입니다. 결국 평범하게 일해서는 절대로 갚을 수가 없는 금액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야 저사람 대체 뭐했길래 저정도 빚을 지나? 라고 생각을 하겠지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금액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굳이 만 달란트라는 금액을 설정하신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빚을 그냥 만 달란트라는 단어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로 치면 999조 같은 느낌이겠죠.
자 그런데, 만 달란트 빚진 종에게는 그렇게 큰 금액을 갚을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의 몸, 그리고 가족들의 몸, 그리고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만 달란트를 갚으라고 말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신체포기각서를 쓰게 생긴 것이었죠.
그러자 종은 주인에게 엎드려 절하며 제발, 다 갚을테니 살려주세요!라고 애원합니다. 아마 눈물콧물 다 쏟으면서 애원을 했을거에요.
그러자 결국 그 주인은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불쌍해서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줍니다.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에서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집니다. 탕감받은 종이 이제는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종에게 찾아간 것이죠.
아까 데나리온이 어느정도라 했었죠? 한명이 하루 일하면 받는 금액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백 데나리온이라면 어느정도에요? 100일 일하면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결국 그 자신이 꾸었던 만 달란트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금액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에이 기분이다. 너도 풀어줄게! 라고 할법하잖아요?
그런데 그 종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백 데나리온 빚진 종이 전에 자신이 했던 것처럼 갚겠다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애원했음에도 탕감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자 이 상황을 보면 친구들은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와 저게 사람인가 라고 생각이 들겠죠.
그런데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첫번째 종이 다른 종을 가두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자신이 받아야 할 돈이 있고, 그걸 못갚으니까 옥에 가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해할만한 행동이에요.
그런데 왜 우리가 그 종을 이렇게 비판할까요? 왜냐, 그 종이 먼저 더 큰 금액을 면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종 주변에 있는 동료들도 같은 생각으로 그의 행실을 이전에 종의 빚을 탕감해준 주인에게로 전달해줍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바로 대노하게 되고, 그 종을 불러 꾸짖고 탕감했던 그 큰 빚을 다시 갚도록 하게 합니다.
여기서 34절 마지막에 옥졸들이라고 나와있는데요, 사실 이것은 고문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결국 그 첫번째 종은 자신의 악한 행동으로 인해 옥에 갇히는 것 뿐만 아니라 고문까지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 그 곳에 있던 제자들을 포함하여, 여러분들도 그래 꼴 좋다 하면서 시원하게 생각을 하게 될거에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지막 35절의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의 그러했던 마음은 싹 변하게 됩니다.
대체 35절이 어떤 내용이었길래 그랬을까요?
다시 한번 함께 읽어볼까요?
마태복음 18:35 NKRV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렇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예화를 드신 이유는 그냥 권선징악을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들어 말씀하신 것이었죠.
다시 말하자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첫번째 종, 자신은 탕감받았음에도 다른 이들은 탕감해주지 않은 악한 종이 바로 너희가 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라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결국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그저 어떤 임금과 종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이야기였습니다.
23절 앞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죠? ‘그러므로 천국은’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종의 엄청난 빚을 탕감해준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만 달란트라는, 어떻게 짐작해볼 수도 없는 이 금액의 빚을 우리는 하나님께 지었던 것입니다. 바로 원죄라는 빚이었죠.
여러분, 원죄는 어떻게 생겨난 거에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서 생겨났죠. 그럼 그들이 왜 그 열매를 먹었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죠. 그럼 어떻게 유혹을 했었죠?
창세기 3:4–5 NKRV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죄를 저질렀던 거에요. 하나님 앞에 반역의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반역의 죄는 어느 나라에서건 가장 크게 처벌을 하는 중죄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최고 권력자인 왕을 없애거나 교체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큰 형벌을 주어서 본보기로 삼아 왕을 바꾸려는 생각조차도 못하도록 만들었죠.
그런데 그 죄를 우리는 누구에게 범한거에요? 하나님께 범한거에요. 그러니 만 달란트와 같은 큰 빚을 하나님께 지었던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 죄를 어떻게 하셨죠? 예수님을 통해서 탕감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로마의 대역죄인들이 달리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으로써 모든 형벌을 받으셨죠.
결국 우리는 정말 받을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누리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평생을 감사하면서 살아도 모자란 자들이겠죠.
그런데 그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한다는거에요? 백 데나리온 빚진 자들에게 다가가서 왜 안갚느냐고 소리치고 있다는 거에요.
다시 말하자면, 우리도 이미 탕감받은 죄인이면서, 다른이들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들을 탓하고 벌주기 위해 노력한다라는 것이죠.
가장 단적인 모습이 어디서 등장했죠? 간음한 여인을 벌주고자 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모든 이들이 사라졌죠.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죄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가장 큰 죄인인걸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너희가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으니, 마음으로부터 너희의 이웃을 무한정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의 마음은 시원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왜죠? 아까 말했던 것처럼, 더 글로리의 연진이 같은, 그런 죄인들을 어떻게 용서하느냐는 것이죠.
그들을 용서하면 세상에 정의란 없는 것 같은 마음이 들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옛날에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탄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밀양이라는 영화인데요, 거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도연씨가 맡은 배역이 자녀를 살인자에게 잃고 정말 어려움을 겪다가, 교회에서 신앙으로 모든 슬픔과 아픔을 극복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를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한 마음까지 생겨서 그를 찾아가죠.
그런데 그 사람을 만나니까 그 살인자가 뜻밖의 말을 합니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당신에게 용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일로 인해 주인공은 정말 힘든 삶을 보내게 됩니다.
자, 이런 일들도 벌어지고 하는데, 어떻게 모두를 다 용서할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들게 될거에요.
그렇죠. 이 땅에 정의가 세워지려면 그들이 다 벌을 받아야 정의가 세워진다라고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어요. 정의를 세우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일일까요? 애초에, 정의라는 것이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정의를 판단하고 세우시는 것은 모두 우리가 아닌 하나님의 역할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가 없으신 완벽하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분명히 그의 정의를 이 땅에 세우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았을 때에는 아닌 것 같아보여도, 주님은 분명히 모든 죄악에 대해서 반드시 보응하시고 그의 공의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분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정의를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여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서로를 무한정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또 내가 그러한 죄를 지은 대상이 되었다면, 아까 밀양과 같은 사람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나아가 잘못을 고백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죄의 형벌은 주님께서 정하시고 내리신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의 관계 안에서의 깨어짐은 스스로 행해야 함을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에 등장하는 제사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레위기 6:2–7 NKRV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그는 또 그 속건제물을 여호와께 가져갈지니 곧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
이 본문은 남의 물건에 피해를 준 죄를 사함 받는 속건제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도 분명히 하나님은 그 손해를 끼친 것을 보상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의 사함은 하나님께 있지만, 분명히 그 죄책에 대한 보상도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죠.
그럼 이제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보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일곱번씩 일흔번, 즉 무한한 용서를 해야 함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정말 많은 화가 나고 어려운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갚아줘야만 될 것 같은 마음이 들 때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마음을 대신하여 반드시 공의를 세워주실 것임을 기도하고, 우리는 그들을 향해 사랑을 다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 죄 속에 휘말려 마음대로 행동했던 이들도 우리를 통해 주님이 주신 사랑을 깨닫고, 또한 우리 역시도 그들의 나아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함께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며, 언제나 주님 주신 용서와 사랑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하늘고 하임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찬양할까요? 함께할 찬양은 주만 의지해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모든 것 주께 맡기며 살아가겠다고 이시간 함께 고백하며 찬양하겠습니다.
말씀을 놓고
우리가 용서할 죄, 용서 받아야 할 죄를 놓고
우리의 앞으로의 삶을 놓고/하임공동체를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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