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팀목 식구(食口)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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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2–47 (NKSV)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43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에베소서 4:16 (NKSV)
16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식구 이야기

2005년 제 26회 청룡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황정민이 남긴 유명한 수상 소감이 있습니다. 일명 밥상 수상소감인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솔직히 저는 항상 사람들한테 그래요.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왜냐하면 60명 정도 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이렇게 멋진 밥상을 차려놔요. 그럼 저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스포트는 제가 다 받아요.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명 수상소감 중 하나로 꼽힙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밥상에 함께 하는 사람으로 묘사하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밥상에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찬송가 559장의 3절 가사를 보면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함께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 하루.” 그런데, 요즘은 가족이 함께 밥상에 둘러 앉아 밥먹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혼밥을 하는 지 모릅니다. 그래서 같이 밥먹을 사람을 찾는 소셜 다이닝도 있다고 합니다. SNS로 같이 밥먹을 사람을 찾아서 맛집 탐방도 하고 좋은 음식으로 건강도 챙기고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대화도 나눈다고 합니다.
식구(食口)라는 단어는 한자어 그대로 밥식 자에 입 구자가 합쳐진 것입니다. 즉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household라고 하는데, 즉 같은 집에 살면서 끼니를 함께 해결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요즘은 식구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40대 중반 이상 되시는 세대에게 이 식구라는 말의 의미가 더 잘 와닿으실 것 같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으면 식구가 됩니다. 형제 자매 뿐 아니라 나그네도 밥을 먹으면 함께 식구가 됩니다. 그렇게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가족이라는 개념을 넘어서서 새로운 관계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식을 나누는 것이 관계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영어에서도 친구를 나타내는 companion, company와 같은 단어는 친구, 벗을 뜻하는 데, 라틴어로는 pancarke를 의미하는 panis와 함께 라는 ‘con’이 접두사로 붙어서 ‘빵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con + panis = 빵을 나누는 사람들.

식구가 된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후 베드로의 설교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고 합니다. 이 서로 사귀는 교제와 함께 빵을 떼는 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46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라고 초대교회 예수 믿은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세가지 장소가 있는 데, 첫번째는 성전이었고, 두번째는 회당, 세번째는 집이었습니다. 성전이 제사를 위한 장소이고 회당이 학습과 모임의 장소였다면, 집은 축복과 기도, 식사 의례를 위한 장소였습니다. 집에서 이루어 지는 식사는 하나님이 확증하신 언약의 살아 있는 표징이었습니다.그 중 절기식사(festival meals)는 특별한 기도의 내용과 의례행위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중 유월절 식사 같은 것은 정성을 다해 소중히 지키는 전통이 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전통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시고, 제자들과 이러한 식사 기도를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식탁의 학습은 성인을 위한 식탁 사역의 모델이 되었다. 예수는 사회에서 버림 받은 사람이나 고위 관리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는 사역을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는 기도하셨고, 가르치셨고, 병자를 고치셨고, 죄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공공 건물의 빌린 방에서 그리고 신자들의 집이나 공동주택에서 계속해서 모였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탄생한 초기 공동체는 1세기 내내 빌린 방을 계속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핍박을 피해 동굴에서도 모였던 것 같습니다. 비잔틴 이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행했던 예배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좋은 소식이 선포되었고, 가르침이 주어졌고 화해가 제시되었다. 초기 공동체를 다양한 공간에 떡을 떼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와 성령의 임재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시작된 사도행전의 모습은 현대 교회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는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창2:18 “18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이는 결혼에대한 말씀으로 먼저 우리는 적용합니다. 그렇지만 존스토트 목사는 칼빈에게는 이 의미가 결혼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개역개정의 말씀과 같이 사람의 외로움을 하나님께서는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리하여 교제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제하시듯이 사람도 교제를 나누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교제를 필요로 하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1세기 교회의 모습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인 교제가 예수 안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교회에서 사람들 때문에 낙심하고, 실망합니다. 좋은 공동체를 만나서 행복하기도 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교회도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크고 작음의 문제는 아닙니다만, 대부분 교회가 대형화되면 많은 사람들 속에서 교제가 사라지거나 지속되지 못하여 교회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중이 아닌 그저 사람들이 모인 군중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에서 예배를 참석하였지만, 교제가 없는 “고독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교회 공동체에 참여했지만, 관계의 문제에 봉착하여 해결되지 못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주 “친해지길 바래"를 시작으로 공동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하니, 목사인 저도 적지 않은 마음의 부담이 생겼습니다. 너무 빠른 것은 아닐까? 사실 나도 교회 안에서 관계 속에서 상처를 주기도하고 받기도 한 연약한 사람인데, 높은뜻 안성교회 공동체가 잘세워져야 할 텐데라는 걱정으로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계획은 그런데 서로가 돕는 사람이 되고, 짝이되어 교제를 나누는 목적과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중성 - 먼저, 신학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언약의 공동체, 즉 자신들이 은혜로 사는 것임을 알며 부활의 변혁적 사역에 참여하고 있음을 믿는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둘째로, 사회학적으로는 교회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느정도 흠이 있는 , 그리고 간혹 자신들을 둘러싼 문화가 주는 기존의 가정들과 한계들에 의해서 제약을 받는 개인들의 집단이라고 합니다.

코이노니아의 기반

오늘 저의 관심은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입니다. 사귀는 일, 이는 개역개정 단어가 여러분에게 더욱 익숙하실 것입니다. 교제 입니다.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 교제, 서로 사귐
. 로버트 뱅크스의 “1세기 교회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식사 모임에 초대된 한 푸불리우스라는 빌립보에 사는 마케도니아 로마인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식사 자리에 초대되었는데, 그들의 모임의 따뜻한 환대와 놀랍게도 당시의 계급을 뛰어 넘어 배치된 식사 자리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실 이는 당시 전통적인 공동체의 모습과 달리 지리적, 인종적, 자연적, 법적인 연결점이 아니 다른 기반으로 모인 것이 바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 =자발적 동반자 정신을 가진 소그룹 모임입니다. 이러한 단어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쓰인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 중에 하나가 바로 심포지움(symposium)입니다. 심포지엄 식사는 잘 계획된 사교모임으로서 식사와 식사 후 토의와 연회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모임의 식사 모임이 세상의 심포지움과 같은 연회문화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존스토트 목사님은 코이노니아 즉 우리의 교제는 주관적인 경험에서 흔들리는 것이 아닌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객관적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물을 받아 지리적, 인종적, 자연적 법적인 한계를 뛰어 넘어 새롭게 만들어진 공동체로 인식합니다.
에베소서 2:14–19 (NKSV)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17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18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로버트 뱅크스는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공동체의 그림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정, 가족, 식구라는 이미지라고 합니다. 바울은 형제, 자매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고, 디모데를 향해 아들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이는 혈연관계를 뛰어넘고, 당시 신분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는 환대와 섬김이 있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요한1서 1:3 (NKSV)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교제 코이노니아는 삼위일체적 교제입니다. 존스토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를 연합시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대한 우리의 공동참여이다. 이는 주의 만찬 , 성찬에서 가장 생생하게 표현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식구됨은 우리를 가족되게 하여 주신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에서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이는 우리의 모임이 하나님께 근거를 둔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 16:3)

우리의 양식

하나님께 기반을 둔 공동체가 될 때 우리의 먹고 마심은 참된 양식을 향하여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생명되신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앞서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 공동체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오병이어를 먹이시고 나서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생명의 빵이 되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설교를 예수 믿고 사는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를 생명의 빵이라고 생각할 때 예수님을 믿고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바로 생명의 빵을 나누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영생이 있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고 사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 금요 설교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양식을 삼아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가 먹고 마시고 나누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세상의 교제와 다른 하나님 나라의 교제가 이루어 질 줄로 믿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께서 설명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예수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4:25–32 (NKSV)
2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26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27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28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29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30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31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버팀목 식구들

코이노니아는 목양적 관점에서 중요합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홀로 두지 않으시고 교제하는 존재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때로는 다투기도 하면서 성장하듯이, 교회에서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6
16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버팀목 식구들이 된다는 것은 높은뜻 안성교회의 목양을 시작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양은 목사와 전도사들에게만 맡겨진 것이 아님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각 몸이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몸이 건설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5 (NKSV)
15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여기에 쓰여진 헬라어는 감독이 돌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는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돌보는 목양적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존스토트 목사님은 코이노니아의 상호책임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11–12 (NKSV)
11 내가 여러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신령한 은사를 좀 나누어주어, 여러분을 굳세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2 이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로"라는 말은 공동체에서 교제에 있어서 서로 상호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35 (NKSV)
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저는 이것을 내 입장에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사랑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삶을 나누고 은혜를 받은 것 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듣고 그 은혜를 나누는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름답게 성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세상을 섬기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상을 향한 봉사를 꿈꾸는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세계에서 큰 영적 부흥은 대규모 집회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 시작은 작은 소모임의 교제와 기도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역과 봉사, 선교와 구제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한 부르심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영역에 들어갈 때에 우리는 결코 그 일만을 위한 사역 단체나 조직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버팀목 식구들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돌보고, 선교와 구제 즉 샬롬 미션을 위해서 꿈을 꾸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이것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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