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 못한 인생일지라도
Notes
Transcript
만남
만남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김성주 씨가 작년 연말, 모 방송사의 방송연예대상에서 올 해의 예능인상을 수상했는데요. 그날 수상 소감이 저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ppt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거룩할 성(聖)자에 기둥 주(柱)라고 하면서 본인의 이름이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목회를 하시는 부친께서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라는 의미의 이름 때문에 평생 고난의 길을 갈 줄 알았는데, 상을 받게 되어 감사하는 말과 함께, 울음을 꾹 누르며 평생 시골에서 목회하시다가 몇 해 전 소천하신 아버지 목사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본인의 말대로라면, 예전에는 상을 받아도 특별히 수상 소감을 하지 않았다던 그였지만, 그날 ‘십자가’라는 의미로 작명해 주신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표할 때, 제가 목사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뭉클함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성공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김성주씨의 이름처럼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대가를 치렀으면 그에 상응한 보상을 원하는 게 우리 인간의 마음 아닙니까? 취업이 돼도 걱정, 못해도 걱정이고, 한 직장에 충성해서 승진하거나 임원이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직장이 있다면 이직하는 것이 훨씬 현명해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는 성공했다는 수준까지 올라가지만, 대다수는 성공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와 같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성공을 누리며 살아갈까요?
실제로 방글라데시는 전체 인구 1억 6천만 명 중에 약 5%만이 부자라고 합니다. 그 많은 인구 중에 약 800만 명 정도가 그 나라 전체 부의 80%를 소유하고 있는 셈이죠. 즉 부자는 엄청난 부자이고 나머지는 정말 가난한데, 이런 양극화는 아무리 사회가 발전해도 좁아지질 않습니다. 이런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성공은 둘째치고 살아남기조차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삭개오’ 또한 그런 사람 중 한 명 아닙니까? 그는 성경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성공한 사람으로 등장하는데요.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에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큰 부를 축적한 부끄러운 삶을 살아 온 사람, 그를 소개하는 첫 성경 구절이 이렇습니다. 1, 2절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당시 여리고는 요단 지역에서도 노른자 땅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기후가 온화했고 오아시스가 많아 고대부터 문명이 발달하였고 상업과 무역이 활발한 도시였고요. 상업과 무역이 활발했기에 많은 자금이 운용되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군대가 난공불락으로 여길 정도로 견고한 성읍이었잖아요? 성 전체가 포위되어도 2년 치 식량이 있었다고 그래요.
삭개오는 그런 부유한 도시에서 말단 세리도 아니고 세리장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세관 업무를 보던 곳이 세 군데 있었는데, 그 중 여리고 지역의 책임자였던 셈이죠. 세리들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자였다고 합니다. 세관 업무를 통해 부를 축적했던 것이죠.
당시 세관 업무는 지배국인 로마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누구는 얼마, 또 누구는 얼마씩 세금을 내라”는 식으로 개별 지정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여리고 지역은 세금으로 이만큼을 내라고 전체 금액만 정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리장은 세리들을 통해 관할 지역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 정부로 보낸 후 남은 돈은 자기가 착복했던 것이죠. 로마는 중간에 세리들이 얼마를 가져가던 관심이 없었습니다. 할당 금액만 채우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세리들은 더 많은 세금을 걷어 남는 금액을 착복해야 돈을 더 벌겠죠? 그래서 세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였던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삭개오는 가장 잘 사는 도시에서 세리 장을 했으니 그가 얼마나 부자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을 아십니까? 김성주 씨의 이름이 ‘십자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삭개오는 ‘순결하다’ ‘깨끗하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는 이렇게 살아달라는 소망을 담잖아요? 삭개오의 부모는 아들이 순결하고 깨끗하게 자라주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부모의 바람대로 순결하고 깨끗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죄인 취급을 당하는 처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과 악수하는 행위조차 용납을 못 했는데, 세리들은 로마의 앞잡이가 되었고 게다가 동족의 돈을 갈취해 가니 죄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순결함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더 치열하고 비열하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에 담긴 소망을 버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한 전혀 순결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이 우리 안에는 없을까요? 거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 타협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접대도 하고 때에 따라서 진심을 감추고 거짓말도 해야 합니다. 계약을 따내려면 불공정한 방법이라도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회사가 요구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게 현실 아닙니까? 그러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잖아’ 그렇게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오늘이 교단에서 정한 청년 주일인데요. 우리 교회를 비롯해서 한국 교회 안에서 청년 대학생들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기들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캠퍼스의 낭만 이런 거 모릅니다. 학자금 때문에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2개 3개 하면서 대출금 갚느라 학업은 둘째치고 제대로 잠도 못 잡니다. 대학만 가면 취업이 보장되던 시대는 다 옛날얘기죠. 오히려 대학을 졸업만 하면 곧장 이 경쟁 구도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졸업을 미루기도 합니다. 얼마 전 2030세대들 가운데 “내 인생의 목표는 물질적으로 풍족해지는 것이다”라고 응답한 사람이 72%나 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삭개오가 세리 장이 되기 전 20대 시절에 똑같은 생각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김성주 씨나 삭개오의 이름대로 십자가를 지고, 또 순결하게 살라는 말이 얼마나 큰 부담이 됩니까?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 이번에 과장이 되면, 부장이 되고 임원이 되면’ 이러면서 고군분투하며 애쓰고 또 애써야 하는 것이 이 시대의 모든 삭개오의 모습 아닌가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영혼이 있는 사람이기에,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이기에 내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죠. ‘아, 이게 전부가 아닌데…’
삭개오는 자신의 이름값을 못 한 채, 성공을 부여잡기 위해 살다가 ‘이게 전부가 아닌데…’라는 생각을 할 바로 그때쯤 예수라는 분의 소문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본문은 누가복음 19장이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중에 여리고를 들리신 때입니다. 그런데 한 2~3년 전에 ‘레위’라는 말단 세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라는 분을 따라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눅5:27,28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여러분, 세관 업무 하다 말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레위가 퇴직금을 받았을까요? 직장에서 무단으로 이탈하면 당연히 상부에 보고가 될 테고, 그것을 세리장인 삭개오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심지어 레위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풍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을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해서 세리와 죄인을 동일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 취급 당하던 세리 레위를 예수님께서 부르셨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신 이후에 많은 세리들이 예수님께 나왔고, 심지어 누가복음 7장 29절을 보면 “모든 백성과 세리들이 이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할 정도로 세리들 사이에서 회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예수라는 분이 누가복음 15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모두가 의롭다고 했던 바리새인은 오히려 책망하시고 남들에게 죄인취급 당하던 세리라고 할지라도 자기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기며 회개하는 자들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놀라운 가르침을 주시는 거예요.
자, 이런 일련의 말들을 듣고 보고 있던 삭개오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요? ‘아! 어쩌면 나사렛 출신의 저 예수라는 분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건가? 부자가 되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이런 공허함이 점점 부풀어 오를 때, 마침 그분이 자기가 사는 ‘여리고’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꼭 한번 봐야겠다.’ 바로 이랬던 것이죠.
오늘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마리아의 여인과 니고데모에 이어, 우리가 잘 아는 ‘삭개오’에 대해 다시 주목해봐야 할 두 가지 포인트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데요.
우리가 삭개오에 대해 주목해야 할 첫 번째는 ‘그의 외모가 아닌 내면을 주목하기’입니다. ‘삭개오’라고 하면 그 앞에 붙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바로 ‘키 작은’ 삭개오 아닙니까? 그는 키가 참 작았습니다. 그냥 작은 게 아니고 상당히 작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성경학자는 150cm 정도 되었을 거로 추측을 하던데요. 웬만한 초등학생들보다도 작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놀림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삭개오의 외적인 조건에 대해 신경을 씁니다. 세리, 부자 그리고 키 작은 삭개오. 그런데 우리가 다시 봐야 하는 것은 그의 외모가 아닙니다.
저도 외모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아요. 제가 좀 말랐잖아요? 제가 부목사 때부터 심방만 가면 권사님들이 뭐 좀 많이 먹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저 우리 교회 와서 2kg 살이 쪘어요. 뭐, 말라서 까칠할 것 같다. 말라서 성격이 별로일 것 같다. 외모만 보고 그런 오해하지 마세요~
아무튼 우리는 ‘키작은 삭개오, 키작은 삭개오’ 하니까 정말 키가 작아서 돌무화나무 예전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뽕나무’라고 했었죠. 그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가 키가 작아서 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당시 여리고는 ‘종려의 성읍’이라고 불릴 만큼 종려나무가 많았습니다. 신34:3
34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그래서 지금도 여리고에 성지 순례를 하러 가면 좌우로 종려나무가 가로수처럼 펼쳐져 있다고 합니다. 종려나무는 높이가 거의 30m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돌무화과나무는 그에 비해 아주 낮은 나무였습니다. 사진-돌무화과나무
종려나무 위로 올라가면 예수님이 더 잘 보이지 않겠어요? 그는 왜 더 큰 종려나무가 아닌 돌무화나무 위로 올라갔을까요?
당시에 돌무화과나무, 즉 뽕나무 열매는 그냥 두면 떫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서 시대의 목자들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열매에 작은 구멍을 뚫고 올리브기름을 넣어 배양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당시에 목자들은 이중 직에 종사했던 것이죠. 그렇게 목자들이 올라가서 배양을 하면 당도가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뽕나무 열매의 배양은 나팔절이 되는 10월 전에 반드시 마쳐야만 했거든요. 그 시기가 지나면 떫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시던 당시 여리고의 목자들은 돌무화과나무 열매들에 일일이 구멍을 뚫고 올리브기름을 발라주는 배양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제주도에서 밀감을 한창 수확할 때와 비슷한 흔한 풍경이었던 것이죠.
여러분, 삭개오는 지금으로 말하면, 여러 명의 회계사를 거느린 회계 법인 대표 아닙니까? 당시 여리고의 최고 VIP였습니다. 헤롯왕의 겨울 궁전까지 있던 대도시의 VIP가 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상당히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목자들이 올라가서 작업을 하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면 자신을 배양하는 일꾼 중에 하나로 볼 것이라 여겼던 것이죠. 돌무화과나무는 사람들로부터 체면도 지키고 예수님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던 셈입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도 예수님에 대해 들었고 궁금하지만, 돌무화과나무 사이에 숨고 싶은 내면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내 자존심, 사람들의 평가, 살아온 삶의 방식과 신념, 진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내 모든 것들을 지배당할까 하는 부담 때문에,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고수하면서 예수님을 멀찍이 보길 원하는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과 같이 죄인 취급당했던 세리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면 좋겠는데…’ ‘나도 저들처럼 어떤 일말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런 호기심이 그를 돌무화나무에 올라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오는 데는 여러 방해물이 있습니다. 우선 일상이 너무 바빠요. 그래서 주일마다 교회에 가느니 차라리 쉬자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그런 마음을 떨치고 오신 이 시대의 삭개오와 같은 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방해물은 삭개오의 마음에도 있었고 우리 모두에게도 있는 ‘나에게 과연 예수님이 꼭 필요할까? 지금도 그럭저럭 잘 살아왔는데, 아니, 이 나이에 거듭나야 한다고? 불편해지지 않을까?’ 이런 마음 아닐까요?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아니야. 이 정도면 괜찮아. 잘 살아온거야’ 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우리 안에서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죠.
어쩌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찾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빠서가 아닌, 더 본질로 내려가면요.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이만하면 됐어. 더 깊이 들어가면 안 돼’ 이런 내면의 자세가 우리를 돌무화과나무 위로 숨게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제가 삭개오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그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의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보여준 행동입니다. 4절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6절도 보십시오.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가 여리고의 VIP라는 체면 때문에 돌무화과나무에서 몰래 예수님을 바라봤던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그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니까, 사람들을 앞질러서 달려갑니다. 헉헉대며 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있는데, 그 예수님께서 내려오라고 하니까 급히 떨어지듯이 내려와 주님을 영접합니다. 심지어 즐거워했습니다. 그걸 사람들이 다 봤을 것 아니에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 때,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잖아요?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이 아버지의 눈에 들어오자마자 그를 보고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을 보면, 중동의 기품 있는 중년 남자들은 절대로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기 위해 중년의 세리장이 달려가서 그것도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급하게 내려와서는 즐거워합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거죠. 어린아이는 엄마 아빠를 보면 즐거워하면서 뛰어가서 안기잖아요? 지금 삭개오가 꼭 그런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영화처럼 한 번 상상해 봤는데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돌무화과나무 가까이 오시자, 그분이 얼굴이 조금 더 잘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제 바로 아래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요. 예수님의 얼굴이 아닌 정수리가 보이는 거예요. ‘어! 이건 아닌데’ 아니 잘 보려고 나무 위로 올라왔는데, 정작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약간 난감해하고 있는데, 그 순간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시더니 당신의 얼굴을 위로 젖히시면서 나무 위의 자신을 바라보십니다. 그러시면서 “거기 키 작으신 분 내려오세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죄인아, 내려오라” 이러지도 않으셨습니다. “삭개오!”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불렀는데, 예수님은 그의 진짜 이름을 불러 주신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 빨리 내려오게, 내가 오늘 그대의 집에 가야겠네!” 이럴 수가! 예수님은 여리고를 그냥 지나가시는 길이 아니라, 숨어서 멀찍이 바라보려고 했던 나에게 찾아와 잃어버린 이름을 불러 주시고 심지어 죄인의 집에서 하루 머물러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삭개오가 그 순간 잃어버렸던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 삭개오 바로 그 이름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삭개오가 만난 돌무화과나무가 곧 교회이다”라고 했습니다. 교회란 그런 곳이죠. 바로 숨어서 예수님을 살피고 있는 나에게 다가오시고 얼굴을 들어, 내 이름을 불러 주시는 곳. 바로 그런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예배당에 오셨을 때, 그런 경험이 있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삭개오에게 주목해야 할 두 번째 것은, 결단의 내용이 아닌 동기를 보기입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이름을 불러 주신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고백합니다. 8절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제가 볼 때는 삭개오의 성격이 불같은 것 같아요. 아니 은혜받았다고 갑자기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주고 심지어 불의하게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뭐가 궁금해요? ‘그래서 얼마를 갚았대?’ ‘삭개오의 재산이 얼마나 된 거야?’ ‘누가 그 돈을 받았을까?’ 돈에 집중합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인가, ‘와 나도 삭개오의 이웃이었으면 좋았겠다. 옆집부터 나누어 줬겠지’ 이런 철없는 생각한 적도 있었거든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경에서 언급하는 그의 태도입니다. 8절 다시.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서서 주께 여짜오되” 왜 이 표현이 삭개오 이야기에서 중요한가 하면, 고대 중동에는 ‘마즐리스’라고 해서 우리나라로 치면 응접실이나 사랑방 같은 곳이 있습니다.(이미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이 마즐리스는 벽으로 쭉 둘려 있는데, 벽에 저렇게 방석 같은 게 있어서 빙 둘러서 앉게 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입구에 가장 먼 쪽 벽의 한가운데 집주인이 앉습니다. 그리고 집주인 양쪽 옆에 가장 귀한 손님이 앉고 점점 멀어질수록 낮은 신분의 사람이 앉는 거예요. 집주인과 가장 가까이에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귀빈인 것이죠.
그런데 간혹 대화 중간에 집주인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오게 되면, 주인은 일어나서 그 귀빈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의 오른쪽 바로 옆자리에 그 손님을 앉힙니다. 이 말은 당신은 나의 존귀한 손님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나와 긴밀하게 얘기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를 내어주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귀빈이라도 할지라도 집주인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삭개오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앉혀드리고 자기는 서서 앞에서 이야기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예수님이 이 집의 주인이시고 이제 저는 당신의 종이라는 뜻 아닙니까?
이 모습을 지켜본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놀랐을 것입니다. 삭개오의 이 모습은 앞의 18장에 나오는 부자 관원에게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좇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돌아가 버린 그 부자 관원의 모습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눅18:22,23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여러분, 누가복음의 저자가 두 부자의 모습을 굳이 대조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인가?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분이신가? 그것에 대한 답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재산의 절반을 내놓는 것은 심했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물론 은혜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삭개오처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분량에 맞게, 사랑을 받은 만큼 그 사랑을 나누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나누는 일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특징인 줄로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내 인생에 어떤 분이신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달랐기 때문에 부자 관원은 ‘선한 선생님’(눅18:18)이라고 하면서 그냥 돌아가 버렸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어 드리고 서서 “주여!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이시고 저는 종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듯이 마침표를 찍는 말씀을 하십니다. 9절, 10절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이 구절을 ‘재산을 절반이나 내놓았으니 구원을 받았지’라고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 이미 구원은 그의 마음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로 부름을 받은 레위를 통해, 세례를 받은 여러 세리들을 통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그는 이미 삶이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었습니다. 돌무화과나무 위에 숨어서 지켜보던 그를 향해 얼굴을 들고 “삭개오!”라고 그의 진짜 이름을 불러줬을 때 그 구원은 완성된 것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주여 보시옵소서” 삭개오는 그렇게 자신의 삶에 주인을 만난 것이죠. 그는 순결하고 깨끗하다는 자신의 이름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전히 여러분들을 78억 인구 중에 하나로 본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일대일로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해서 추상적으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순결하지도 깨끗하지도 못했던 이름값 못한 인생일지라도, 결코 죄인 취급하지 않으시고 내 이름을 부르시는 분,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고 계시는 분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 성공하라고 안정감을 누리고 너나 잘하라고 세상은 그렇게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비록 떠밀려 살아가는 인생이며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여전히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고 온전히 만나 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순결하고 깨끗한 자인 변화된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주인의 자리에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 내가 주인삼은
❙합심기도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예배의 장소가 바로 여러분들의 돌무화과나무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세요. 우리의 과거 이런 것 묻지 않으십니다. 그냥 이름 불러 주시면서 친구가 되고 싶어 하십니다. 이미 예수님을 만난 분들에게는 여전히 함께하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이제 좀 내 삶의 주인의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주여, 보시옵소서” 오늘 주신 말씀을 가지고 한목소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 기도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생이 이 정도면 괜찮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너무 지치고 허무할 때가 있습니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도 예배가 무너지고,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 우리는 삭개오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 속에서 여리고성에서 삭개오를 만나주셨던 것처럼, 오늘 이 시간 삭개오와 같이 숨어서 예수님을 살펴보고 있는 분들이 계신다면 얼굴을 들어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돌같이 굳은 마음 제거하셔서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을 심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사랑받은 만큼 사랑을 나누는 이 시대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반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