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 그리고 십자가] 용서하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눅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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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3월 12일 주일 청년부
시리즈 : 가상칠언, 그리고 십자가
제목 : 용서하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
본문 : 누가복음 23장 43절 *신139
결단찬양 : 욥의 고백
[도입]
저는 이 청년 공동체에 함께 속해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니 이 공동체에는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를 보게 됩니다.
단순히 듣기 좋으라 말하는 것만은 아니고, 진짜 보면 볼수록 상대를 향한 배려와 사랑이 확실히 몸에 베어있는 사람들이란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하게 확신으로 다가 옵니다.
물론 사람 개개인에게 있는 기질일 수도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여러분들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또 점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 모습에 따라 그 사랑이 커져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왜냐하면, 청년일 때 경험한 것보다 아빠가 되고보니 그 사랑이 또 커져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때 생각해보면 유모차가 어딨겠습니까? 공기청정기가 어디 있겠냐는거예요. 그런데도 할머니, 할아버지 잘 자라셔가지고 저희 부모님들을 낳으셨고, 또 그 부모님이 저희를 키운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조선시대때 까지 가지 않더라도, 부모님이 우리를 키웠을 시절만 생각해봐도 차이가 어마어마 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아엘이를 키우며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게 어딨어 그냥 다 대충해서 키우는거지.’ 라는 말을 참 많이 들은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아이를 위해서 수유쿠션을 사서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기도 했고, 수유의자는 기본이고 유모차도 개월에 따라 계속 달라지며, 심지어 유모차는 무슨 차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옵션을 추가하면 더 좋아지고, 더 좋아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실 아엘이가 이런 옵션들을 원하는건 아닙니다. 말은 커녕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친구가, ‘아빠, 저 유모차 골라서 이거랑, 이거 옵션으로 넣어서 사줘!’ 라고 말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해주고 싶은 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아이를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채워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본문 속으로]
저는 이런 제 모습과, 또 요즘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개독교라 욕먹는 이 시대에 대항하는 최후의 보루같은 사람이구나를 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너무 귀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도 여러분 모습이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워 보일 것임에 확신이 찹니다.
그런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선물을 또 마련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 입니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마련해 주셨으며,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이 용서와 구원에 있어 함께 은혜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본문 : 한 행악자 = 비방]
먼저, 상황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양 옆으로 어떤 이들이 함께 했습니까? 마태복음 27장 38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마태복음은 현재 예수님께서 강도 두명과 함께 나란히 십자가형에 처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5장 27절을 보면,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마가복음 또한, 강도 둘이 십자가형에 함께 처해 있음을 알게 했으며, 요한복음 19장 18절은,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요한복음은 강도가 아닌 ‘다른 두 사람’ 정도로 표현하며, 오히려 예수님께 더욱 초점이 가도록 설계했음을 알게 합니다.
자 그럼,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누가복음 23장 32절을 보니,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누가복음은 ‘행악자’라 표현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강도라는 어쩌면 행악자라는 표현보다 더 약화된 표현인 강도라 사용하였으나, 누가는 행악자라는 조금 더 깊고 무거운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과 함께 달린 자들이 단순 강도가 아니었음을 알게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둘 다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너무나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9절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한 행악자의 태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앞에 두고, ‘네가 구원자라고 떠들던 자 아니냐?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 봐라!’ 라는 겁니다.
희망과 소망따위는 하나도 없는 태도 아닙니까? 어쩌면 너무 두려워, 그 두려움을 감추고자 비방하며 소리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확실한 것은 그의 눈이 바로 앞에 계신 주님을 차마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 헛것에 눈이 멀어 진리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가 확실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 진리를 눈 앞에 마주할 때 놓치며 또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안에 내가 중심’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크리스천이 담배를 피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담배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담배를 금하는 것은 ‘오래 살아서 전도 열심히 해야지’의 개념이 아니라,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크리스천이 그래도 돼?’ 라는 생각이 들게 하며, 결국 하나님을 위함이 아닌, 내 욕심, 내가 중심이 되는 삶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비방한 행악자는 여전히 ‘내 중심’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본문 : 다른 한 행악자 = 용서를 구함]
그러나 다른 한 행악자는 달랐습니다. 그의 행동은 누가복음 23장 40절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그는 비방하던 행악자를 나무라기 시작합니다. 동일한 상황 속, 그의 태도는 비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방하는 자를 나무라며 계속 말을 이어갑니다. 어쩌면 그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또 평소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41절의 기록이 이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결코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비방한 행악자와 어떤 차이가 있어서 완전히 상반된 반응을 보입니까? 그는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을 낮췄습니다. 자신이 높아졌던 비방한 행악자와는 다르게 철저히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말로는 참 쉽지만, 참 어려운 일이 ‘내려놓음’ 입니다. 나 자신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삶, 습관 또는 버릇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려놓음은 곧 용서와 구원까지도 이어져 가는 핵심이 됩니다.
[본문 : 그러나 예수님이 먼저 용서하고 싶어 하셨다(feat.삭개오)]
하지만 오늘 본문 43절을 한 번 더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분명 행악자의 내려놓음과 고백을 통해 용서를 받은 것 같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싼 똥, 내가 치우는 꼴’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오히려 용서를 구하는 우리보다, 용서하기를 누구보다 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행악자는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해달라’ 정도였으나, 예수님은 지금부터, 당장의 구원을 부어주셨습니다. 내일과 같은 미래가 아닌, 마냥 용서하기를 기다렸다 바로 그 기회를 잡는 것처럼 당장의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사실 그 누구보다 우리를 용서하고 싶어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삭개오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 이였습니다. 군중 속에 나아가기도, 돌무화가나무 위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의 열심이 있기 전에, 누가복음 19장 5절을 보니,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그의 열심 전에 예수님의 열심이 먼저였음을 보게 됩니다.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삭개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우연적 만남이 아닌 필연적 만남을, 아예 작정하고 여리고에 오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작정하여 찾아오신 예수님을 통해 이제 삭개오의 삶은 변화됩니다.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그리고 자신이 속여 얻은 재산은 4배로 돌리는. 마치 희년에서 물질로서의 자유를 누리듯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행악자에게도, 또 삭개오에게도 먼저 용서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리고 행악자도 자신 앞에 계신 주님을 보았고, 삭개오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신의 낮아짐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구원받은 자로서 삶의 변화가 주어졌습니다.
낮아짐은 결코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겸손해지는 것이 결코 불편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욕심과 또 자존심에 낮아진다는 것을, 겸손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나눠준다는 것을 꺼려합니다.
나를 깬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먼저가 아닌 주님이 먼저임을 기억하십시오. 이미 주님은 우리를 위해 수치를 겪으셨음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행악자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은 자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6시간 남짓입니다. 6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그는 변화되었고 구원받았습니다. 잘은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는 십자가 위에서도 용서를 위해, 구원을 위해 힘쓰신 주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실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오늘날 우리 삶 가운데에 함께 하셔서 여전히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고, 또 용서하시길 누구보다 원하시고 또 우리가 구원받은 자 되길 너무나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아니 한 주간, 먼저 수치를 겪으시고 낮아지신 주님을 바라보는 모두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Ⅰ 나를 찾아오신 주님, 용서하고 싶어 하시는 주님을 구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Ⅱ 예수를 닮아 낮아짐과 겸손한 삶 사는 우리 되게 하소서
[찬양 후 기도제목]
Ⅲ 주를 바라보는 청년 공동체 되게 하소서
Ⅳ 고난주간을 기다리며 더욱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청년 공동체 되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 충만하심이
우릴 먼저 용서하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 고백하는 자들과
이에 예수처럼 닮아 가고자 노력하겠노라 다짐한 자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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