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ok up! vs Don't look up!

재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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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보라는 사람들과 위를 보지 마라는 사람들간에 벌어지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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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대한 해석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Look up(위를 보세요)대 Don’t look up(위를 보지 마세요!)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Look up” “위를 본다”는 뜻은 하늘의 뜻을 살핀다는 말입니다. 주기도문의 형식을 빌려 말하면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길”원하는 자세로 삶의 현상들을 살피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하지만 “Don’t look up” “위를 보지 마세요!”란 그저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를 있는 모습 그대로만 살피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성경의 다른 표현으로 말씀한다면 “무엇을 먹을가?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만 고민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저는 3월 동안 수요예배를 통해 요엘 말씀을 살표볼 예정입니다. 요엘서를 살펴보면 당대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같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는” 삶이 바쁜 나머지 요엘 선지자의 메세지였던 “Look up””위를 보세요!”라는 메세지에는 귀를 닫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언제 하늘을 쳐다보기 시작했는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의 삶에 재난이 임했을 때 그나마 소수가 “Look up” “위를 보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렇기에 재난은 한편으로는 “Look up, 하늘을 볼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19 펜데믹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각국 보고로는 신뢰할만한 통계를 얻을 수 없습니다. 계발이 진행되고 있는 나라나 아직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나라의 경우는 아예 통계를 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가운데 많은 전문가들은 2022년도 코로나로 죽은 사망자의 숫자가 700만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20세기 초 홀로코스트에 희생당한 유대인이 600만 명이었으니, 코로나를 현대판 홀로코스트라고 말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코로나로 많은 교회와 현대인들은 “Don’t look up””위를 보지 마라!”에서 “Look up, 위를 보라!”는 태도로 변화되었습니다. 3년의 시간 세계는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까지 제한을 받을 뿐 아니라 함께 모임을 갖지 못하고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생활해야 하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경험했습니다.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재난에 대한 태도가 그저 이 땅의 일로만 취급하지 않고 사회학적, 인문학적, 생물학적, 그리고 신학적 접근을 통해 “위를 보는”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코로나는 거의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동물과 사람간에 전파되는 병원체에 의하여 발생하는 인수공통감염병은 또다른 모습으로 발생되고 있습니다. 인수공통감염병인 광견병, 말라리아, 페스트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감염병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감염병은 무분별하게 인간이 서식지를 넓혀나가는 과정을 통해 다양한 전염병으로 발전했습니다. 조류인프루엔자(A.I),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중증급성호습기증후군(사스), 그리고 코르나 바이러스에까지...그렇기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재난은 끝이 난 게 아닙니다. 그러한 재난의 반복을 통해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Look up”을 선포하고 있는 고대의 책이 바로 “요엘서”입니다.
요엘서는 2,000~3,000년 전에 쓰인 고대문서로, 당시의 큰 재난인 ‘메뚜기 떼 습격’을 겪은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이 전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엘서에는 불성실하고 불순종하는 인간이 등장하고, 그들과 끝까지 함께 일하려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소원과 열심이 가득합니다. 요엘서에 등장하는 “메뚜기 재앙”은 오늘날의 “재난”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대의 재난이나 현대의 재난이나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재난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요엘서를 통해 들을 수 있다면 현대에 일어나고 있는 반복적인 재난 가운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재난에 바른 이해와 태도를 통해 오늘을 하나님 앞에서 깨어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은 요엘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아들과 함께 케익을 사기 위해 함께 나왔습니다. 창현주유소가 있는 도로의 횡단보도 였습니다. 파란불이 켜져 아들과 손을 잡고 걸어 갔습니다. 그런데 우측에서 아주 빠른 속도록 큰 트럭이 뒤에는 포크레인을 싣고 속도를 줄이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전진해 왔습니다. 설마 설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마가 설마로 끝나지 않고 그 트럭은 사람들이 건너고 있는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자동차를 치고 소나무가 즐비한 언덕으로 올라가 멈추어 섰습니다. 충돌된 SUV차량의 뒷 자석은 종이처럼 구겨졌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를 발견하고 그 바로 앞에서 주저 앉은 노인은 그저 앉아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트럭 운전자도 소나무들이 차를 멈추게 해주어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 SUV 차의 운전자도 앞 좌석은 피해를 입지 않아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 건널목을 건너고 있던 노인도 간발의 차이로 트럭이 그 앞을 먼저 지나가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저와 아들도 재난의 현장 한 가운데 서서 놀란 마음을 쓰다듬고 생사가 오고갈 수 있는 그 찰라에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재난의 순간에 하늘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사가 편할 때는 그렇지 않은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성 때문일 것입니다.
요엘서 1장을 읽어 보시면 요엘 선지자가 “Look up” “위를 보세요!”라고 외칠 때의 남유다의 형편 아주 유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엘 선지자의 말에 반대적인 구호를 외치며 생활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Don’t look up” “위를 보지 마세요!” 무엇 때문에 위를 보십니까? 우리 주변에 먹고 마실 게 많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말입니다...
요엘서 1장 5절에 보시면 남유다 백성들이 그 당시 나름 평탄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동안은 위를 보지 않고 땅과 앞만 보며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요엘1:5
요엘 1:5 NKRV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본문 1장 2절의 말씀에도 요엘 선지자는 메뚜기 재난이 일어 났는데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유다백성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엘 1:2 NKRV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지금 요엘 선지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라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전대미문의 재앙에 대해 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말하라고 말합니까? 세대에 걸쳐 말하라고 말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그 자녀에게 그 자녀는 또 그 자녀에게...
왜 그래야 합니까? 이 일은 쉽게 생각하고 지나갈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잠시 멈추어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주님께 묻고 또 물어보셔서 사회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다양한 측면으로 자녀에게 그 현상에 대해 말해주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를 인간에게 옮긴 매개체로 박쥐를 자주 언급하는데, 문제는 박쥐의 종류가 너무 다양하고, 그 서식지도 지구 온나화로 북쪽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말 그대로 세계가 한 마을인 시대라서 한 지역에서 시작한 감염병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연과학적으로 또는 사회학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장을 설명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인수공통감염병을 만든 주요 원인제공자에는 분명 탐욕으로 물든 인간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재난을 하나님께서 아무런 까닭없이 일으키시지 않으십니다. 남유다 백성들의 죄악된 행동을 돌이키기 위해서 또는 심판의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재난을 사용하셨습니다. 코로나 19 또한 아무런 이유 없이 발생한 재난이라기 보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재난이고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재난을 경험하면서 우리 다음 세대는 이러한 재난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과 같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Look up, 하늘을 보고 하나님께 뜻을 구하고 그로인해 주어진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엘 1:3 NKRV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이러한 재난은 반복되어 다시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신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엘 1:4 NKRV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1:4). 사람들을 잔뜩 긴장시켜 놓고 하는 말이, 무서운 메뚜기 재앙이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닥친다는 것입니다. 팥중이가 지나간 자리에 메뚜기가 찾아오고, 메뚜기가 지나간 자리에 느치가 찾아오고, 느치가 지나간 자리에 황충이 찾아와서 온 유다 땅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러한 재앙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요엘 선지자의 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메뚜기가 많아야 얼마나 많다는 말인지 그들은 감을 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메뚜기는 식용으로도 쓰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메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의문이 드는 것은, 대체 팥중이는 무엇이고 메뚜기는 무엇이며 느치는 무엇이고 황충은 무엇이냐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학자들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학자는 팔레스타인에 약 80여 종의 메뚜기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무섭고 사나운 메뚜기 종류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김서택 목사님은 이와 같이 해석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장 어린 메뚜기부터 가장 늙은 메뚜기까지 시기별로 가리키는 이름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어린 메뚜기가 ‘팥중이’입니다. 팥중이의 특징은 무엇이든지 엄청나게 먹어 치운다는 데 있습니다. 팥중이의 별명이 영어로 ‘커터’(cutter)입니다. 마치 절단기처럼 모든 것을 잘라서 해치워 버린다는 뜻입니다. ‘메뚜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레베’로서, 흔히 쓰이는 메뚜기의 명칭입니다. 메뚜기는 그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느치’는 메뚜기보다 좀더 큰 종류로서 털이 많고 흉측하게 생겼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황충’은 가장 늙은 메뚜기입니다. 즉 여기에 나오는 이름들은 전부 메뚜기 종류를 가리키는데, 가장 어린 것에서부터 나이 든 것까지 다 망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견해를 따르든 중요한 것은 메뚜기 떼가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줄 만큼 많았다는 것입니다.
메뚜기의 성충들의 무리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몸의 색이 거무스름하게 변하는 현상이 얼어나게 되고 일종의 군단으로 변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색이 변하여 떼를 이룬 메뚜기들을 가리켜 “황충”이라고 부릅니다. 이 황충은 적게는 수십억에서 많게는 수천억 마리에 이르는 개체 수를 자랑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몸무게의 2배에 달하는 식물들을 먹어치우게 됩니다. 황충떼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완전 폐허가 된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냈을 때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셨던 10가지 재앙 중 한 재앙이 메뚜기 떼의 습격 재앙이었습니다.
1784년 남아프리카에서는 천억 마리의 황충이 3,000km2의 농지를 초토화 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메뚜기 떼의 번식이 이상 기후의 변화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에 발생한 이상 기후로 강수량이 많아지게 되었고, 이러한 환경이 메뚜기들로 하여금 알을 많이 낳게 만들었고 개체수가 늘어난 메뚜기들은 서로간의 간격이 매우 좁아져 그로인해 분비되는 신경 물질인 ‘세라토닌’이 평소보다 3배이상 많아지게 되어 식욕이 급격하게 상승하게 되었고, 그로인해 보이는 먹이는 전부 먹어치우는 무서운 포식자들의 떼로 변했다는 게 과학자들의 말입니다.
즉 현대 과학자들도 메뚜기 떼의 원인을 인간을 통해 변하게된 기후에 있으며 그 실제 원인은 탄소가스를 무분별하게 배출한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재난의 원인을 규명해 보면 결국은 탐욕으로 물든 인간에게 있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난을 볼 때 먼나라 이웃나라의 일로 보는 게 아니라 나의 죄악으로 파생된 일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경각심을 가지고 재난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상기후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뭄이 일어나고 북극의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고 너무 춥거나 너무 더운 현상등 세계 곳곳에서는 이상기후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지구의 평균 기온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태운 화석연료로가 온실가스의 증가를 불러일으켰고 그로인해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진 것입니다. 그로인해 지구의 생명체를 보고하고 있던 오존층은 파괴되고 그 파괴된 틈으로 좋지 않은 태양의 각종 해로운 성분들이 들어와 지구 생명체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무분별한 경쟁 구도 속에서 고도성장만을 외쳤습니다. 그러한 성장이 중심에는 인간의 탐욕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인간의 탐욕 때문에 자연은 병들었고 그 병든 자연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질병과 재앙을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몇년 전에 작고하신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의 탐심으로 발생한 기후 변화가 인류 멸종을 야기할 것이다!”
요엘서에 등장하는 메뚜기 재앙의 원인도 하나님의 뜻 “Look up, 위를 보세요!”라는 메세지를 거절하고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살았던 인간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재앙에 대해 요엘 선지자는 아주 실랄한 표현으로 남유다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요엘 1:6 NKRV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그렇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메뚜기를 의인화 하여 그들의 수가 많고 특별히 그들의 이빨이 사자의 이빨 같고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아서 보이는 것을 다 갉아 먹는 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입니까?
코로나 19는 한 지역에 발생한 전염병이 아닙니다. 코로나는 세계화의 물결로 이루어진 운송수단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세계 역사는 다양한 전염병의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전 세계가 동일한 전염병으로 고통을 앓았던 역사의 기록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1세기인 현대의 역사는 전세계 인구가 동일한 바이러스로 고통을 경험했고, 그로인해 마스크를 함께 쓰고 3년 넘게 생활했다는 것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두려운 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은 오늘 본문 2절의 말씀과 같이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라는 질문을 하도록 하는 전무후무한 재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힘겨운 때를 지나고 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탐욕으로 물든 가운데 국가 이기주의, 개인 이기주의, 자기중심성이란 올무에 빠져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Don’t look up! 위를 보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 없이 위를 보라고 말씀하시는데 세상은 “절대 위를 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엘 선지자는 땅 아래만 바라보고 먹고 마시고 취해 있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감각합니다. 자신의 배가 아파야 세상의 고통이 조금 느껴집니다. 수천만의 사람이 죽는 소식보다 내 아들의 엄지 손가락에 상처가 난 것에 더 아픔이 찾아오는 “자기 중심성”의 죄악의 올무에 빠져 절대 위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 할아버지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120년간 방주를 짓게 하실 때 세상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갔지만 노아 할아버지의 경고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절대 하늘을 보지 않고, 땅만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면에 이와 같은 외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Don’t look up! 위를 보지 마라! 시간 낭비다. 위를 보지 마라! 땅을 보고 사는 것만으로 족하다! 위를 보지 마라!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다!”라고 은연 중 우리에게 외치는 문화와 교육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재난의 원인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죄악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면 할 수록 재난은 더욱 빠르고 자주 반복적으로 인류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튀르키예의 지진으로 수십만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으로 젊은 군인들이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재난의 원인에는 저와 여러분들의 죄인 “자기 중심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자기 중심성의 죄악에 갇혀 있게 되면 절대로 우리는 위를 올려다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기 중심성의 죄악을 회계하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한 영혼이라도 이 땅의 것만 바라보지 않고 위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재난을 통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더이상 회계할 수 없는 곳으로 건너간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재난은 반복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난의 원인이 인간의 탐욕 즉 자기중심성이라는 죄악에 있기 때문에 그 죄악이 팽배해지면 팽배해질 수록 세대가 악해지면 악해질 수록 재난은 더 빠르게 반복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통해 304명의 젊은 학생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재난을 통해 그들 중 회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2022년 이태원에서 할로윈 파티를 즐기던 젊은 청년들 159명이 재난을 통해 더 이상 회계할 수 없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악해지면 악해질 수록 재난은 더 많아지고 그 재난의 반복 주기는 더욱 짧아질 것입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영혼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먼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 재난 앞에서 우리의 죄악을 회계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가족과 이웃과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들에게 재난의 참된 의미와 이를 통해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말해주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분명 세상은 “Don’t look up, 위를 보지 마라!”고 말하며 여러분들의 외침 “look up!” 위를 보시오!”라는 말을 일축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에게 재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함께 영상 하나를 시청하시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Don’t look up!”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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