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질 끌면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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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의 자기 변호 2. 재판 중 3. 자꾸 미루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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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자기 변호

수요일은 성경 한권을 정하고 목사님들께서 돌아가면서 강해 설교를 하시기에 수요 설교에는 제목이 붙지 않습니다. 아마 다른 목사님들도 그러실텐데, 저는 제목이 없으면 설교문을 작성하는 것이 참 어색해서, 공개하지는 않지만 제목을 붙이는데요.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결정을 미루면 위험하다"라는 제목을 붙여 보았습니다. 어떤 결정을 미루면 위험한 것인지 함께 말씀을 통해 살펴 보고, 더 이상 미루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벨릭스 총독 앞에 바울이 섰습니다.
이 당시 법정에 서서 변호하는 사람들은, 재판장을 높여주는 헌정사를 먼저 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10절을 보면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것은 “예전부터 이렇게 우리를 위해 힘써주고 계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재판장이 되어 그 일을 잘 감당해 오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저의 변호를 잘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수백년 동안 내려왔던 관습대로 바울은 벨릭스 총독에게 헌정사를 바치며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인 11-21절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첫째, 바울이 성전에서 누군가와 변론을 하며 예배 드리는 곳을 소란스럽게 했다.
둘째, 바울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셋째, 바울이 유대인의 성전을 더렵혔다.
이 세가지의 죄목으로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이 세가지의 죄목이 사실이 아님을 하나씩 조목조목 반박하며 변호합니다. 사실 바울에게는 이 세가지의 죄를 저지르기에 충분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첫번째 죄목. 바울이 성전에서 누군가와 변론하며 예배 드리는 곳을 소란스럽게 했다.
일단 예루살렘에 올라간지 12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2일 중 7일은 회당에서 정결 의례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처럼 누군가와 변론하거나 싸우며 소란을 일으킬 시간 혹은 설교나 연설을 통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만한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죠.
바울은 정말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회당에서 정결 의식을 하던 사람들이 진작에 그를 고소 했을 것이라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신을 고소한 이들을 데려와 진짜로 물어보라 말합니다.
하지만 벨릭스는 바울을 고소한 사람들에게 바울이 누군가와 변론하며 소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19절에 기록이 되었는데, 바울을 고소한 사람 아무도 그 법정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3장 30절을 보면 루시아가 벨릭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있는데, 기소한 사람. 원고들이 직접 와서 고발 할 것이라 적혀 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바울을 재판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자리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벨릭스는 바울이 고소 된 죄목 중 첫번째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 죄목. 바울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바울은 자신은 이단이라하는 도를 전파하고, 이단의 무리를 이끌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나는 히브리의 하나님을 섬기며, 히브리 성경을 그대로 다 믿는 사람이다.
나의 소망은 히브리의 하나님께 있고, 나는 부활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을 믿는 사람이다.
당시 유대교 신학자들의 다수였던 바리새인들은 바울과 똑같은 견해를 전파해왔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도 있었으나, 주된 신학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의 의견과 나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바울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이러한 내용을 밝힌 이유부활의 유무, 최후의 심판 등은 신학적 분쟁으로, 신학자들이 토론을 하여 풀어나갈 문제이지 로마라는 나라가 개입할만한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벨릭스에게 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세번째 죄목, 바울이 유대인의 성전을 더렵혔다.
바울은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전에서 정결 의례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정결 의례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17절을 보면 바울은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왔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성전을 더럽힌다는 의미는, 성전에 헌금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하게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갖고 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민족을 구제할 것은, 여러 교회들이 모아 전달해준 연보. 구제금 헌금이었습니다.
바울이 정말로 유대인의 성전을 더럽힐 생각이 있었다면,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헌금을 모아 전달해준 교회들을 배신하고 헌금을 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거액의 돈을 내어 네 명의 나실인을 후원했습니다.
바울이 헌금을 냈다는 것은 그가 성전을 더럽히지 않았음을 증명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재판 중

바울의 말을 들은 총독 벨릭스는 바울의 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울에게 무죄를 선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판결을 정식으로 연기 시킵니다.
22절을 보면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암플리우스라는 하나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 것은 다른 이유를 들어 최종 판결을 정식으로 보류한다! 라고 선포하는 원칙이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의 무죄함을 알았으나, 이상하게도 루시아를 핑계삼아 옳은 판결을 내리지 않습다다. 그리고 백부장에게 명령합니다.
23절.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죄인으로 고소 된 사람의 판결을 유보하고 그를 지켜주라 말합니다. 지키되 자유를 주라는 말은 “자유를 마음 껏 누리도록 지켜주라.”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정말로 죄가 있고 문제가 있는 죄인이었다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을까요?” 심지어 벨릭스는 바울을 향한 이 판결을 무려 2년이나 연기시키기 까지 했습니다.
무죄를 선언하면 깔끔하게 끝날 일을 왜 2년이라는 시간을 지연시켰던 것일까요?
벨릭스는 이 일대를 다스리는 총독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는 정치가입니다.
바울을 살려주고 2년이나 판결을 질질 끌은 것은 27절 하반절의 말씀처럼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죠.
만약 그가 “바울은 무죄다! 고소된 내용을 하나도 입증 할 수 없다!”라고 판결했다면 그를 고소한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섰을 것입니다. 그 일대가 시끄러워졌을 것이고, 바울을 고소한 사람들은 유대인이었지만 그래도 힘. 영향력이 있던 사람들이었기에, 벨릭스가 정치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그가 “바울에게 유죄를 선포한다!”라고 했다면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서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다른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사실 벨릭스는 유대인들에게 인정받는 리더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괴롭히고 재산을 강탈한 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로마에 끌려가 큰 벌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벨릭스는 섣부르게 바울에 대한 판결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저는 바울의 무죄를 알았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판단을 유보하는 벨릭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가 매주 외우는 사도신경에 등장하거든요.
그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을 매주 외우고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총독 빌라도 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빌라도이죠.
빌라도 역시 벨릭스처럼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소 된 내용 중 그 어떤 것도 맞는 것이 없음을 알았죠.
그리고 실제로 빌라도는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개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죄가 없다"라고 외치기 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제사장과 종교인들 그리고 그들에게 넘어간 수많은 군중 앞에 자신의 판결을 뒤집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 처형을 하라 명령했습니다.
물론 벨릭스는 바울을 처벌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죠. 하지만 벨릭스와 빌라도에게는 정말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것은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하는 일을 올바르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확실한 것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유보하고 미루는 행위를 똑같이 했습니다.
결정권을 갖고 있는 자가 최종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바른 지도자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결정권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굉장히 큰 힘이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한창 총신 신대원이 불의한 일로 시끄러울 때 모든 전도사님들을 대표하는 원우회장이었습니다.
참 힘들고 모진 시간이었지만 그 때 저는 누군가를 대표한 자리에 있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그 말이 모두를 대표하는 말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의한 상황으로 인해 많은 기자들에게서 연락이 왔고, 저는 저의 생각을 밝혀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말이 기사화가 되어 나가는 것을 보며 결정권자의 역할이 참 어렵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벨릭스의 이 판단 유보가 어느 정도 이해는 됩니다.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최종 결정권자는 결정을 하고 그 것에 대해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최종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바른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후 벨릭스는 자신의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불러 예수님에 대해 묻습니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의와 절제 그리고 장차 다가 올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벨릭스를 굉장히 불편하고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이 최종 판단을 유보하고 책임지지 않는 벨릭스를 향해 진정한 리더는 정의와 공의를 삶으로 실천해야 한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성경이 말하는 의의 정의를 전했을 뿐인데, 벨릭스는 그 것을 듣고 지금 자신을 향해 한 말씀이라 받아드렸습니다.
벨릭스의 마음에 불편함이 생겼습니다.
연이어 바울은 절제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벨릭스는 이 말을 듣고 더 불편해졌습니다. 바울을 만나러 나올 때 함께 온 그의 아내 드루실라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20살이 되지 않은 드루실라는 벨릭스의 세번째 아내였습니다. 그리고 벨릭스는 드루실라에게 두 번째 남편이었습니다.
드루실라가 맨 처음 결혼을 약속했던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유대교를 받아드리지 않자, 드루실라는 파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리아의 작은 영주에게 시집을 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드루실라가 살고 있는 지방에 방문했던 벨릭스는 그녀에게 반했습니다.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부던히 애를 들였고, 결국 드루실라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인이었던 드루실라를 향한 마음을 절제하지 못해 정말 부끄러운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죠.
바울은 그에게 “드루실라를 빼앗아 온 것이 불의하다. 절제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절제에 대한 정의를 듣고 벨릭스 혼자 찔렸고, 불편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장차 올 심판에 대해 나눴습니다.
자신을 잡아 온 사람에게, 없는 죄를 만들어 바울을 죄인으로 낙인 찍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 “나중에 다가 올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 누구보다 심판. 판결에 대한 무게를 아는 벨릭스 였기 때문에 이 말이 굉장히 큰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이 땅에서는 자신이 판결자이지만, 죽음 이후 자신의 죄를 판결한 누군가가 있다는 그 말은 벨릭스에게 불편함을 넘어 두려움을 심어주었습니다.
“너는 최후의 심판의 날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라는 바울의 말은 벨릭스를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벨릭스는 더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바울을 돌려 보냅니다.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라고 말하며 바울은 돌려 보냅니다.
그는 분명히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으로 인해 마음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찔림을 없애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또 이 순간 “판단을 유보하고 책임을 회피 합니다.”
무죄 임을 알지만 눈치 보느라 무죄 선고를 하지 않았던 것처럼,
루시아가 오면 판단하겠다며 책임을 회피했던 것처럼,
지금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판단을 유보하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자꾸 미루지마라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벨릭스의 모습에서 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벨릭스처럼 말씀을 통해 분명 깨닫는 것이 있는데, 그대로 살지 않고 자꾸 바쁘다 혹은 다른 여러 이유들을 대면서 삶으로 살아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곁으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신 이유“말씀 앞에 나의 삶을 돌아보고 깨닫고 돌아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깨닫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 것을 반드시 삶에 적용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정말 잘 알고 있지만 때때로 저는 그 성령님의 일하심을 스스로 제한하고 막아 버릴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하나님의 진리. 말씀 앞에 나를 돌아보고, 깨닫게 하시는 은혜대로 삶에서 적용함 살아가고 계셨나요?
(쉬고)
은혜를 삶에 적용하여 살아가는 것을 자꾸 미루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줄 아시나요?
첫째, 자꾸 미룰 수록 마음이 자꾸 완고해집니다.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갑니다.
말씀을 듣고 일어나는 반응을 자꾸 뒤로 미루면 둔감해집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말씀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잘 알 수는 있겠지만, 신앙인의 모습으로 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안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완고해진 마음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완고해지고 딱딱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벨릭스가 바로 그랬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부끄러웠습니다. 마음이 정말 많이 찔렸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였습니다. 찔린 순간 그는 바울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성령님의 도우심을 그는 반드시 구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는 변화를 무시했고, 성령님의 일하심을 제한했습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벨릭스와 같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듣거나 묵상할 때 드는 생각이 있다면, 찔리는 순간이 있다면 우리는 재빨리 그 순간을 주목해야 합니다. 부끄럽다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삶의 모습을 다 알고 계시거든요.
찔린 그 것을 하나님께 재빨리 가져가 고백하는 용기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을 주목하여 하나님께 드릴수만 있다면 우리는 말씀 앞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진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자꾸 미룰수록 정신이 산만해집니다.
벨릭스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깨달았고, 자신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그 결정을 또 유보해습니다. 필요한 결정을 또 질질 끌었습니다.
자신의 불의를 알았고, 절제하지 못하는 삶을 알았고, 그 결과가 장차 올 심판대에서 자신을 죄인이라는 판결이 내려질 것임을 알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더 권력을 키우고 돈을 불리는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결정해야 할 사안을 두고 판단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기 위해, 또 그 사실을 잊기 위해 다른 일들을 벌렸고, 그렇게 산만한 정신을 갖고 살았습니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판단을 유보해도, 책임지지 않아도 어떤 것도 그의 삶을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결정을 했을 때 다가올 보여지는 상황이 더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을 위해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진리를 붙잡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우리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분명하고도 확실한 나의 입장을 갖기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깨닫게 하시는데로 살겠다는,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며 살아보겠노라는 확실한 나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혹 벨릭스처럼 알지만, 깨달았지만, 마음을 주셨지만
여러 상황과 문제들로 인해 결단하지 못하고 계셨다면,
그래서 마음이 완고해지고 단단해져버렸고, 정신이 산만해져버렸다면,
우리 이 시간 반드시 그 마음을 고백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 미루지 않겠노라고, 주시는 말씀대로 매일을 살아내지 못하고 또 넘어지겠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주시는 마음대로 삶을 살겠노라는 그 결단이 이 시간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으로 만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깨달은 것, 찔리는 것을 하나님 앞에 갖고 나오기만 하면, 우리에게 그대로 살아낼 수 있는 힘과 평안함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쉬고)
우리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마음을 외면하지 않기를 함께 고백하며 기도하는 이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깨닫는데로 살아내기 위해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도와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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