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 시리즈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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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지난 주부터 시작해서 산상수훈에 가장 먼저 나와 있는 팔복 시리즈를 시작하였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말씀을 읽을 수록… 우와 내가 왜 이걸 선택했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고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 주석을 읽고 책을 읽으면서… 우와 내가 이걸 잘 전달해줘야지 하면서 말씀으로 통해 주실 은혜도 기대가 됩니다.
지난 주 설교를 제가 다시 들어보니 실수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팔복에 나타나는 이 성품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타는 성품이 아니라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나는 성품이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성령의 9가지 열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데 성령의 열매가 영어로 보면 fruits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기록이 되었는데,
제가 복수라고 이야기를 했더라고요. ^^
복수가 아니라 단수입니다.
지난 주 저는 팔복에 관한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복에 대한 설명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시민에 합당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복이 있도다. 마카리오이.. 라고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인가요?
지난 주에 제가 말씀 드렸던 세 가지 복의 정의는
첫째, 복은 복되신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본성, 그 분 자체를 누리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이 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
셋째, 메마른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에서 물을 마시면 만족감을 얻듯이.. 메마른 곳에서도 영적인 만족감을 누리는 것이 복이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에 대한 정의를 이 팔복에서 해주시듯,
진정한 복은 물질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상황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복되신 하나님을 누리고, 주는 것을 더 복이 있다 여기며, 메마른 곳에서도 영적인 만족감을 누릴 수 있다면 그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그렇기에 세상의 가르침과는 같지 않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가운데 이 가르침을 하실 때, 산상수훈의 내용들을 산에서 한번 하시고 끝내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3년 반동안 제자들과 다니시면서 가르치시면서 이 내용들을 반복해서 말씀 하셨고, 마태는 이 것을 취합해 정리해 놓으신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내용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완전히 다른 생활 방식을 요구하십니다.
세상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지요.
주님은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천국 시민의 기준을 정확히 세워 버리셨습니다.
회개하고 왕되신 예수님께 헌신하고자 드려진 제자들의 모습의 삶이 이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를 본받지 말라" 라고 (마태복음 6:8) 에 기록이 되었는데, 이 것은 산상수훈의 전체적인 어조를 요약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과 같지 말라, 세상을 본 받지 말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말씀 하고 계신 것입니다.
Romans 12:2 KRV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지난 주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저의 것임이요 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Matthew 5:3 KRV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절은 나머지 칠복을 받게 하는 key verse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상태, 즉 겸손을 맨 앞에 위치시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겸손이 모든 은혜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만은 하나님 나라에 있을 자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새들 중에서 작은 새들만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아마 독수리가 노래를 부른다. 혹시 독수리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 들어보신 분 있나요? 없을 것입니다. 타조의 노래도 들으신 분은 없으실 꺼에요.
그런데 카나리아나 굴뚝새나 종달새, 이 작은 새들은 얼마나 노래를 많이 하는지 아십니까?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내가 주님 앞에서 정말 작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갈망하고 그것을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행복임을 알기 때문에 기쁘게 행복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포기합니다.
대신 하나님의 왕국을 차지합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다스림, 그 분의 통치를 삶에 구석구석에서 느끼며 다스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심을 느끼는 삶, 고백하는 삶.
여러분 이런 복을 누리실 원하시지 않습니까?
이런 복이 누구에게 임한다고 하였나요?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 입니다.
토마스 왓슨이라는 청교도는 자신이 심령의 가난한지, 겸손한지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제가 읽어드릴테니, 여러분에게 얼마나 적용되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이 것 ppt로 준비했으니 넘겨주세요.
우리가 겸손하면 자기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자기집착에서 자유롭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된다.
그리스도가 놀라운 분이라는 사실에 흠뻑 빠져 있다. 겸손한 사람은 앞으로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라는 데 유일한 희망을 건다.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불평하지 않는다. 죄인은 그보다 더 어려운 환경을 당해야 마땅하므로 그만큼이라도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약점과 죄와 함께, 남들의 장점과 덕을 더 분명하게 본다.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영적으로 가난하므로 영적으로 채워지기를 구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모신다. 교회의 전통이나 나의 기호나 사상에 의해 그리스도를 조종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다. “이미 오래 포위되어 점령되기 직전의 성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에도 항복할 것이다. 마귀의 요새가 되었던 마음, 그리스도께 오랫동안 대항했던 마음은 일단 하나님께서 심령이 가난하도록 만드신 후 자신이 그리스도 없이 저주된 것을 보게 될 때에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조건이면 무엇이든 다 받아들일 것이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한다. 겸손한 사람은 주님에 대해 넘치는 감사가 있다.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로 주신 복과 행복 외에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러분 몇 개나 해당이 되십니까?
김성준 전도사님께서 빌립보서에서 말씀을 나눠주실 때, 우리는 겸손해져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벌써 낮은 존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우리가 낮은 자 임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합니다.
또한 동시에 겸손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James 4:10 KRV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James 4:10 NRSV
10 Humble yourselves before the Lord, and he will exalt you.
1 Peter 5:6 KRV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천국의 행복은 낮은 마음에 찾옵니다. 겸손한 마음에 찾아옵니다.
자신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자임을 알고 하나님만, 예수님만 성령님만 절대 의지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Matthew 5:4 KRV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주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되다는 말씀에 이어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는 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이것은 역설이죠.
보통 웃는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자가 죽었을 때 통곡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일까요?
애통하는 자는 누구이며, 그가 받는 복은 무엇일까요?
예전에 이산가족상봉 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북한에 남은 아들을 위해서 평생 기도하시며 혼자 사신 아주 나이가 많이 드신 어머니가, 50살이 넘어 머리가 다 희어진 아들 뺨을 만지며 “우리 애기, 우리 애기" 하는 이산가족 상봉의 모습을 보고 그 장면을 찍는 카메라맨이나 거기에 있던 모든 관계자들 모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50년만에 만난 이산가족들뿐 아니라 그들이 상봉하는 장면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울었죠.
이런 눈물은 기쁨과 감격이 눈물입니다.
또 어떤 눈물이 있습니까? 슬픔과 원한의 눈물도 있습니다. 가난해서 우는 눈물
병들어서 우는 눈물, 사업에 실패해서는 우는 눈물, 중요한 순간 실수해서 우는 눈물,
가정이 파탄 되어서 우는 눈물, 사랑하는 가족을 여의고 우는 눈물이 있습니다.
이러한 눈물이 복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눈물을 하나님 앞에 쏙아 놓을 때 복이 됩니다.
한국은 분단의 이별, 굶주림과 죽음, 가난 등.. 불과 60년전까만 해도 온 나라가 울부짖음이 가득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한탄의 눈물이 그 자체로 복된 눈물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하면 복된 눈물이 됩니다. 눈물이 하나님을 향하면 복이 됩니다.
제가 책에서 좋은 문장이 있어서 PPT로 준비해봤는데요, 함께 읽어봅시다.

모든 애통이 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절망적인 염세주의자의 울음은 복이 있는 울음이 아니다. 이기적인 야망이 좌절되어서 우는 것도 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우는 울음도 그 자체가 복된 것은 아니다. 죄를 짓고 후회는 하면서도 죄를 혐오하지 않는 사람의 울음도 복된 것은 아니다. 복된 울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울음이다. 슬픔과 부담과 아픔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면 그 울음은 복된 울음이다

여러분과 제가 복된 이유는 우리는 슬픔과 부담과 아픔이 있을 때,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면 그 울음은 복된 울음이 됩니다.
다윗은 원수들에게 쫓겨 다니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울며 기도했습니다.
시편 56:8 (KRV)
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아이를 낳지 못해 한이 된 되어 여호와 앞에 올라올 때 마다 한 없이 울었던 한나도
사무엘상 1:10 (KRV)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다윗도 한나도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울면서 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눈물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었는지는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우는 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나의 간증) 아빠가 풍을 맞으셨을 때 / 동생이 암에 걸렸을 때 /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때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빠가 풍에 회복되서? 동생이 암에 회복되서? 위로 받았을까요?
아니요 하나님 앞에 눈물을 가지고 오니, 하나님께서 위로하여 주십니다.
애통의 의미
그럼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우는 자가 복이 있다면 우리는 늘 울어야 하는가?
성경에서는 분명 기뻐하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예수님도 바울도 기뻐하기도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언제 기뻐하고 언제 울어야 할까요?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 때문에 기뻐하고
죄사함 때문에 기뻐하고,
삶의 목적과 의미와 의욕과 열정,
특별히 선교라는 하나님의 비전을 확실하게 주신 것에 대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로 분명한 기쁨이 있습니다.
반대로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죄에 대한 통회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항상 기쁠 수 있지만,
또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Arthur Pink 라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책을 쓴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할 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더욱 더 애통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라며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애통은 단순히 슬픈 감정이 아닙니다.
여기서 애통은 가슴을 치며 뼈를 깎는 고통을 동반한 슬픔입니다.
이렇게 애통할 때는 그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체면도 차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며 호소하며 절규합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가 죽었을 때 통곡하는 것처럼 애통하는 모습이 애통입니다.
또한 이 애통은.... 심령이 가난한" 결과로 터져 나오는 애통입니다. x 2
자신이 영적으로 완전 망가진 상태, 완전히 무너진 상태, 완전 망해버린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이고,
그 사실 때문에 아파하면서 통곡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마주하게 되면 나의 죄들 때문에 가슴을 치게 됩니다.
더럽고 추악하고 욕망 가득한 생각들을 했고,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쏟아내버렸고,
어떤 사람들을 무시하고 냉정하게 대하고, 마음에 상처 주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만났을 때 발견하게 되어 이에 대해서 안타까워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애통하는 울음을 귀하게 봅니다.
요엘 2:12 (KRV)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하나님께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면,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십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매일 하루를 마감할 때 자신의 하루를 살폈다고 합니다.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나는 무엇을 말했는가? 나는 무엇을 생각했는가?
“나는 남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그들도 매일 회개하지만 매일 싫어하는 일을 행하는 자신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자 안에는 ‘두 법'이 늘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고 싶어하는 내 안의 성령의 법과
육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육신의 법이 늘 대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Romans 7:21 KRV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다윗도 시편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Psalm 6:6 KRV
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보고 애통하는 모습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이렇게 자신을 살피며 애통하는 모습이 있나요?
이렇게 자신을 살피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66:2 (현대인의 성경)
2 내가 우주를 창조하였음으로 이 모든 것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크게 뉘우치며 내 말을 두렵게 여기는 자에게 은혜를 베푼다.
제가 기도를 하면서 늘 회개기도를 먼저 합니다. 기도 시간을 인도할 때도
주일예배 전에 기도할 때도,
예배 시작하고, 찬양 마치면서 기도할 때도, 회개 기도를 먼저 선포합니다.
이유가 있어요.
먼저 제가 저의 죄에 대해서 통회 자백하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합니다.
또한 예배 드리는 모두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를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애통하는 마음을 주셔야죠, 그런데 우리가 입을 벌려 회개해야.. 그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마음, 저도 그 마음 너무 갖고 싶습니다.
내 죄를 보며 통회 회개하고 싶습니다.
정말 애통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는 것이 진짜 복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신자는 자신의 죄를 인해서도 애통하지만,
타인들 속에서도 자신과 같은 죄를 발견하기때문에 애통합니다.
오늘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남들의 죄 때문에도 애통을 합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이렇게 하죠.
시편 119:136 (KRV)
136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다윗은 주의 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가 그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타인들의 죄들을 보고 비난의 도끼로 바로 내려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들을 보고 웁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삶이 무너진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저와 여러분을 보고 애통해 하셨습니다.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저희를 보고 우셨습니다.
영적으로 무너지고, 파산되고 망가져버린 상태를 보고 우셨습니다.
(누가복음 19:41) 에 보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지요.
Luke 19:41 KRV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왜 우셨나요? 곧 멸망할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영적으로 파탄 상태에 이른 그들을 보시며 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자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지요.
사도바울도 빌립보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죄악 가운데 빠진 것을 보고 애통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18 (KRV)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예수님도 바울도 사람들의 악함을 보고 비난하고 판단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 때문에 우셨습니다.
가슴 깊이 안타까워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나요?
교회의 문제는, 공동체의 문제는 이런 애통이 없다는 것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함께 하는 지체들을 판단하기만 하고, 지적하기만 하는 모습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애통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이런 정죄하고 판단하는 모습이 많은 것 같아요.
신앙생활 잘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 이래서 그렇지 저래서 그렇지 정죄합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전에 깨달은 사실이 있어요.
나의 정죄는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깨달은 것은
애통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모습, 죄를 짓고 있는 모습, 주님을 아직 몰라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이웃,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서 애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한 에스라가 그랬습니다.
그는 백성의 죄 때문에 통곡했습니다.
그 때에 많은 백성들이 함께 모여 심히 통곡했습니다.
Ezra 10:1 KRV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우리가 다시 심령에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사라진 애통이 살아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늘 죄만 짓는 내 자신을 보고 하는 애통
다른 사람들 또한 자신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하는 애통
이런 애통의 바람이 일어나야, 우리가 살아 있는 교회, 또한 살리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아랍 속담에 “햇빛만 받는 땅은 사막이 된다.” 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참 멋진 속담 아닙니까?
우리는 모두 햇빛만 비춰지는 삶을 바라잖아요, 그런데 그런 땅은 사막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슬픔은 인생을 맛깔나게 하는 양념이 됩니다.
때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우리를 새롭게 일어서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진정한 슬픔 속에 치료와 위로의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에는 치료의 효과가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그래서 전도서 7:2-3 에 이런 말씀이 기록 되어있죠.
Ecclesiastes 7:2–3 KRV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이 말씀은 슬픔 속에서 인생의 진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을 이끈 마틴 루터는 여행 중에 바로 옆에 있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새카맣게 탄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런 엄청난 인생의 비애를 경험한 후에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수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슬픔으로 인해 더 말씀을 파고 들었고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종교개혁이 이뤄진 것이죠.
눈물과 애통의 골짜기에 축복의 문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인생의 어두운 밤에 처절하게 부르짖음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 시간을 혼자 보내지 않고 하나님께 나와 눈물을 흘린 사람은 참된 위로와 기쁨을 맛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들을 위로하십니다.
Matthew 5:4 KRV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어떻게 위로의 복을 주시나요?

첫번째, 하나님께서 돌보시며 위로하십니다.

이사야 66:2 (개역개정)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두번째, 하나님께서 마음을 소생시키시며 위로하십니다.

이사야 57:15 (KRV)
15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세번째, 하나님께서 구원이 완성되는 날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며 위로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7 (KRV)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사랑하는 대학청년부 여러분,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눈물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신자는 이 인생의 눈물을 혼자 흘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갑니다. 그럼 그 인생은 복 된 인생이 됩니다.
또한 신자는 애통합니다.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애통한다고 하였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죄를 짓지 않을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되는 자신의 못난 모습을 보고 애통합니다.
또한 자신과 똑같이 죄를 짓는 다른 사람들, 사회의 악, 들을 보면서 애통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웁니다. 기도합니다.
이런 애통하는 모습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치료와 위로의 생수가 터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복있다고 하십니다.
적용
* 이제 찬양하고 말씀을 가지고 기도할 때, 이렇게 적용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아직도 내 심령이 가난해 지지 않아서, 겸손해지지 않아서 애통하는 마음이 없다면,
주여 나를 겸손케 하소서, 하나님 내가 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기도해서 내 마음이 겸손해지고 비워졌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죄 때문에 애통하는 모습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죄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다시 느끼게 하옵소서.
두번째로 적용할 때 이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2틀 전 수요일에 RV 선교팀 강의에 신장섭 장로님께서 오셔서 “영적 전쟁"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참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내용 중에 우리 대청부가 특별히 이번 년도 참 많은 선교를 감당하게 될텐데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가장 powerful 한 선교전략은
우리가 만날 북가주에 있는 두 캠퍼스의 죄와 학생들의 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죄를
우리가 끌어안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학교와 학생들은, 하나님을 대적한 죄, 음란, 강간, 히피 문화, 진리를 거부하고 온갖 사상을 가르치는 죄,
또한 아프가니스탄 난민은 시기, 미움, 살인, 학대, 또한 그들은 알라를 섬기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
저도 다 알 수 없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죄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럴 때 이번 RV 선교가 큰 열매가 있을 줄 믿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통해서, 애통하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를 위로하실 뿐 아니라,
진정 삶의 위로자 되시는 예수님을 그들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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