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천국에 들어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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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가?
어떤 사람이 대학교때 전도되어 입술로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닙니다. 한번도 주일에 빠진 적이 없습니다. 교회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그는 자신이 확실히 구원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소위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죽으면 천국간다고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더 나쁜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친구들은 그 사람이 교회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랍니다. 그럼 이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일까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본론]
마태복음 21장 23절에 보면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이 가진 권위를 트집잡습니다.
무슨 권한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흔들고, 백성들을 선동하냐며 묻고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세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는데 오늘 말씀이 그 마지막 세번째 비유입니다.
그럼 이 비유의 청중은 누굴까요?
13장에 나온 하나님 나라 비유의 청중은 제자들이었지만 여기서의 청중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경고하시기 위해 이러한 비유를 들고 계신 것입니다.
2절은 이 비유가 하늘 나라,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마치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왕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이시고, 왕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결혼식 잔치는 하나님 나라 잔치를 의미합니다.
왕이 보낸 종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해 두고 오늘 말씀을 봐야 합니다.
여기서도 비유의 초점은 왕의 행동과 그 의도에 있습니다.
또한 세가지 비유 모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왕이 자신의 아들의 결혼식을 열어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왕이 초대하고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결혼식 초대에 거절하는 것은 곧 왕을 거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결혼식을 생각해봐도 똑같습니다.
아들이 결혼하는데 아버지가 초대한 사람이 오지 않으면 아들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럼 결혼식 초청은 어떻게 이뤄질까요?
그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식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면 초대장을 미리 나눠주고 의사를 물어 올 사람을 셋팅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 숫자에 맞춰서 음식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결혼잔치가 준비되면 그 초청을 수락했던 사람들만 결혼잔치에 다시 초대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2중 초청인 것이죠.
이것은 우리의 결혼식문화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아는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나눠주지 않습니까?
그럼 결혼식 당일 올지 안올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미리 초청장을 줘서 참석여부를 결정하기때문에 그 인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면 사람을 보내 다시 초청하는 것입니다.
3절은 결혼식 날짜가 가까이 오자 초청을 수락한 사람들을 초대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거절하는 것은 늦은 것입니다.
거절하려면 그 전에 했어야 맞습니다.
이 때 거절하려면 정말 설득력있는 불가피한 이유를 제시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왕의 초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3절에서 놀랍게도 사람들은 왕의 초대를 거절합니다.
왜 사람들은 왕이 초대한 잔치에 오려 하지 않았을까요?
왕의 초대를 받는다니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대통령에게 초대받으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거절하다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왕이 싫은 것일까요? 아들이 싫은 것일까요?
문제는 그들이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왕에게 큰 모욕과 수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동양사회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에게도 수치의 문제는 생과사를 결정지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잔치에 오려고 하지 않자 4절을 보시면 왕은 또다시 종들을 보내 값비싼 음식을 준비했다고 알려줍니다.
왕은 또다시 초대에 응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원래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은 왕이 어떤 왕인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솔직히 왕인데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아니면 올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왕은 또다시 기회를 준 것입니다.
우리같으면 어떻겠습니까?
결혼식에 초대했는데 못오겠다는 사람을 또 초대하겠습니까?
넌 이제 아웃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왕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다릅니다.
그만큼 왕은 오래 참고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이번에는 초대에 응했을까요?
5절입니다. 왕이 재차 초대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들은척도 안하고 자기 갈길을 갑니다.
이것은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집과 완고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밭으로, 한 사람은 장사하러 갑니다.
밭과 장사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둘다 단지 일상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불가피한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왕이 주최한 결혼식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왕에게 엄청나게 무례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언제 결혼식 초대를 받아도 안가려고 합니까?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을 때 특별한 핑계를 대서 안가려 합니다.
‘몸이 너무 아프다, 애가 학교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 출장갈 일이 생겼다’ 등등 특별한 핑계를 대곤 합니다.
그런데 매일 가는 회사때문에 결혼식에 못간다하면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가게 일때문에 결혼식에 못간다고 하면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핑계아닌 핑계를 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이야기를 다룬 누가복음은 사람들의 그럴듯한 핑계를 소개합니다.
첫번째 사람은 금방 밭을 사서 가서 살펴봐야겠으니 양해해주라고 말합니다.
두번째 사람은 소 다섯쌍을 샀는데 밭을 잘 갈 수 있나 시험해야 한다면서 양해를 구합니다.
세번째 사람은 장가들어서 아내를 맞이했다며 못가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의 핑계 역시 엉뚱한 핑계에 불과합니다.그냥 가고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런 양해조차도 구하지 않는다는 데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심지어 누가복음에서 초대하는 인물은 그냥 어떤 부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초대하는 사람은 왕입니다.
재차 거절하는 것은 왕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감과 수치심을 안져주는 것입니다.
앞서 첫번째 거절이 구약의 예언자들에 대한 거절이었다면 두번째 거절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에 대한 거절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종교지도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럼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6절입니다.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더 심한 일을 벌이고 맙니다.
그들은 거절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초대하러 온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여버렸습니다.
초대하러 온 종들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종들이 왕의 대리인 자격으로 왔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왕에 대한 노골적인 모독이자 반역입니다.
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며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거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붙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아들을 모욕했으니 하나님 아버지를 모욕한 것입니다.
자신의 메신저를 죽이고 반역을 꾀하고 있으니 왕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7절에서 왕은 군대를 동원해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 도시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단지 초대했는데 오지 않았다고 화가나서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종들을 죽이며 반역을 꾀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왕의 심판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기원후 70년경 로마 군대가 성전을 파괴하고 예루살렘을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왕의 권위를 무시하고 반역한 대가를 톡톡히 치룬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1막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 잔치로의 초청 이것이 바로 복된 소식,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그 잔치의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기 위해 우리를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특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 잔치의 풍성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청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마음속으로 자기 욕망에 눈이 어두워 그 복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여전히 마음 속으로 온갖 핑계를 대며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 잔치를 베풀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마냥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계속된 거절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8절부터 2막이 시작됩니다.
왕은 초청받은 자들이 결혼식 잔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종들에게 매우 파격적인 지시를 내립니다.
9절에서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무나 다 데려오게 합니다.
왕의 잔치에 아무나 초대하는 것은 매우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단지 화가나서 그런 것일까요?
사랑하던 여자에게 배신당해서 홧김에 아무하고나 결혼해버리는 식의 그런 왕인가요?
아닙니다. 왕은 원래부터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특권을 먼저 그들에게 준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부했고, 자격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그 기회가 돌아간 것입니다.
특별청약으로 아파트가 당첨되었는데 자격미달로 탈락하자 일반청약자들이 들어가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거절과 거부로 인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초청에 반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절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여기던 자들이 그 나라에 초청받아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세상의 꼴찌들, 즉 세리와 창녀같은 죄인들, 소외된 자들, 부정한 자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된 것입니다.
자격없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특권이자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우리에게 자격이 있어서인가요?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마치 5시에 부름받은 포도원품꾼과 같은 것입니다.
자격없는 우리를 아들의 나라로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반응은 무엇일까요?
감사와 찬송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또 있습니다.
10절을 잘 보시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심지어 악한 사람까지 초대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것 역시 전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악한자가 초청받으면 왕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이것 역시 왕과 그의 아들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부터 마지막 3막이 시작됩니다.
왕이 연회장에 초대된 손님들을 만나러 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한명 발견한 것입니다.
결혼식 잔치에 어느 누구나 초대될 수는 있지만 단 한가지 기준만은 충족해야만 합니다.
바로 결혼식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식이나 장례식갈 때 복장이 달라야하지 않습니까?
그게 예의인 것입니다.
왕의 아들 결혼식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이처럼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고 해서 그에 대한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결혼식 예복이란 엄청나게 특별한 예복이 아닙니다.
왕궁에서 나눠주는 그런 예복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입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 의하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즉 모시 옷이 결혼식 예복입니다.
그런데 그는 왜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일까요?
혹시 예복을 입을 시간이 없었던 것일까요?
12절을 보시면 그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입었는데 단 한 사람만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절에서 왕이 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와 있는지 묻자 그는 아무 말도 못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그 결혼식 잔치를 우습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함께 초대받은 사람들을 살펴보니 세상에서 꼴찌들, 찌질이들만 모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입던 옷 그대로 입어도 된다고 우습게 생각한 것입니다.
전에 찬양형제가 오후 5시에 와도 한 데나리온 주는 것을 사람들이 악용하면 어떻게 되냐고 물은적 있죠?
그럼 그 일꾼은 주인을 우습게 본 것일텐데, 바로 이 사람이 그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초대한 왕을 아주 우습게 본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열려있으니까 기준도 없을 것이라고 우습게 생각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싸구려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그 값을 치루고 자격을 얻을 수 없기에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잔치에 앉을 수 있는 기준은 확실합니다.
그 결혼식에 걸맞는 예복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결혼식에 참여하는 것은 왕과 왕의 아들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악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그 사람은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악한 사람인게 아닙니다.
왕의 초청에 올바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악한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가볍게 우습게 여긴 사람이 악한 사람입니다.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한 사람이 악한 사람입니다.
그럼 예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19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그렇습니다. 예복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회개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우리는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보았습니다.
열매를 맺는 사람은 오직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돌짝밭이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초청은 받았지만 예복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니지만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다면, 삶의 열매가 없다면 그 사람은 예복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제 13절은 예복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의 운명을 말해줍니다.
그는 손발이 묶여 그곳에서 쫓겨나 바깥 어두운 데에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바깥 어두운 곳’이란 영원한 심판의 장소인 지옥을 의미합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은 고통스럽고 비참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제 오늘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14절입니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
왕은 어느 누구나 자신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놨습니다.
어떻게든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이처럼 부름받은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초대를 거절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초대에는 응했지만 예복을 입지 않아 결국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은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초대에 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무서운 것은 아직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오면 진정한 손님이 누구인지 드러나듯이 주님이 오시면 우리 역시 그 분의 매서운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결혼식에 참석할 예복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도전하십니다.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운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그 분의 잔치에 초대해 주십니다.
거절할수도 없고 거절해서도 안되는 곳입니다.
그것이 그 분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오직 아무 자격없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벅찬 감격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곳에 초대된 것만으로 두 다리 쭉 뻗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오래다니다보면 마음이 많이 느슨해져 은혜에 둔감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무뎌집니다.
감격과 감사가 무뎌집니다.
이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살펴보십시오.
내 삶에 감격과 감사가 사라지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어느 새 예전 냄새나던 누더기 옷으로 변해버린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설교 처음에 삶은 세상 사람과 똑같은데 교회다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답이 무엇입니까? 그는 예복을 준비하지 않은 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냄새나는 누더기 옷을 입고 결코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냄새나는 누더기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옷은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옷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에베소서 4:24 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골로새서 3:12 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으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삶의 진정한 회개의 열매를 맺고, 믿음과 순종으로 예복을 갖춘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