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고난중에 기뻐합시다 (벧전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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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Handout
고백 : 고난 중에 기뻐합시다.
헌금 :
먼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주옵소서. 또한 우리의 가장 값진 물질을 봉헌합니다. 주님 받으시고 기쁘게 흠향하여 주옵소서. 이 드림이 우리의 예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본문 : 베드로전서 1:1-12 (1-9)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나라가 없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라가 없는 미얀마의 로힝야 민족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나라가 없습니다.
미얀마 주 정부가 그들을 자국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았죠.
나라가 없어지자,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을 핍박 받았고,
본래 살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난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방라데시 남쪽에 100만 명이 난민촌에서 살고 있고,
지금도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등으로 나무 배를 타고 떠나고 있습니다.
흩어졌죠.
여기저기 흩어진 나그네로 살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나라가 있어야 할까요?
정부가 있어야 할까요?
정치가 필요할까요?
로힝야 족과 같은 난민들을 떠올려보면 너무 쉽게 답이 나옵니다.
정치, 정부, 국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 중 하나입니다.
부정 부패가 만연하고,
비리와 갖가지 유착관계가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정치, 정부, 국가는 우리의 삶을 보호해주는 긍정적인 수단이 됩니다.
나라 잃은 로힝야 족을 떠올려 보십시오.
안정적인 정착지가 없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고 고통스럽고, 처절한 것입니다.
*왜 세상에 힘듦과 고통이 있는가?
나라가 없으니까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아직도 반란군들이, 자기 나라인양 날뛰고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지금도 인간의 반역을 허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란군들이 날 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반란군들이 지금도 여기저기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단번에 그들을 진압하시지 않아요.
오래 참으시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왜 세상에 고통이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인내심 때문입니다.
그들이 죄인이고, 그들이 반란군임에 틀림없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오래 참으시고,
자기 백성들이 온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이 세상을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반란세력은,
불신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난이 오기도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내 안에 반란군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한 것입니다.
자연만물이 신음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반란으로,
자연만물도 타락하고 황폐해졌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에 고통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천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며,
회개할 자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기다리시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은 여기저기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쓴 편지글입니다.
디아스포라 라고 하죠.
여기저기 흩어져서, 갈 길을 잃은 기독교인들에게 쓴 것입니다.
우리 1절과 2절을 함께 읽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여기저기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썼는데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쓴 것입니다.
집이 없고
여기저기 흩어져버린 것입니다.
로마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못 살고,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지역으로 쫓겨나버린 것이죠.
집 없는 사람은 안전하지 않죠.
자기 몸을 지켜줄 집이 없으니까, 폭력에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깨끗할 수가 없죠.
아무리 깨끗하게 살려고 해도, 더러워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편안하게 일상생활을 못합니다.
집이 없으니까, 사생활 보장이 안 되는 것이죠.
너무 불편한 것이죠.
집이 없으면 건강이나 정신적인 우울감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지 않는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면서,
왜 고통이 있는가?
절망하고 슬퍼했겠죠.
그러니, 베드로는 소망의 편지를 쓴 것입니다.
너희들이 소망 없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너희의 소망이다.
저 천국이 너희의 소망이다.
*오늘 본문에는
은혜라는 단어가 2번,
기쁨이라는 단어가 2번,
소망이라는 단어도 1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있고,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집 없고, 쫓겨났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데,
은혜를 부르짖고,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죠.
3절에서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찬송가 펴시고,
우리 ‘찬양’합시다.
‘찬송가 1곡’ 부릅시다. 하면서,
예배 드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우리 함께 찬양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은, 많으신 긍휼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했으니, 그의 긍휼을 찬양합시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죽었는데 부활하신 분입니다.
죽음이 그를 짓누르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고,
그의 생명으로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찬송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버지의 사랑을 찬송합시다.
라고 하면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통’이 무엇입니까?
고통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입니다.
힘들지 않으면 멈춰있다는 것입니다.
힘들어야 성장하는 것이죠.
씨앗이, 흙을 뚫고 나오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힘들기 때문에 성장하고 있는 것이고,
씨앗을 깨고,
흙을 뚫고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인 것입니다.
버릴 건 버리고,
붙잡을 건 붙잡는 시간이
고통스럽고 힘든 고난의 시간인 것입니다.
이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
이 시간을 쉽게 끝내려고 하지 않고,
이 시간을 통해서,
사람을 이해하고,
인간 내면을 이해하고,
인간 내면의 역동성을 이해하고 깨닫는 사람은,
매우 탁월하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 내면의 역동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관찰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정서와,
그 부정적인 정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극복해내는, 이 역동성에 대한 이해가,
우리 인생을 풍요롭고 감칠맛나게 하는 것이죠.
우리가, 가만히 놔두면,
영적인 질병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교만한지,
얼마나 거짓된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인 질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고통을 일으키는 질병이 악인 것이죠.
하나님이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악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안에 악을 몰아내기 위해, 고통을 느끼도록 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감기가 걸렸는데,
아프지도 않고, 고통도 안 느껴져서,
마음대로 몸을 혹사하다가,
몸이 더 망가져버릴 수 있는 것인데,
고통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고통은, 내 안에 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죠.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조기에 병을 치료하듯이,
조기에 악을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기적이고,
나만 알고,
음란하고,
거짓되고,
교만한,
내 안의 악을 제거해야, 우리 인생이 치료되고, 더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스럽지만, 고통이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고통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성장시키실,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기뻐하라고 합니다.
말씀을 보세요.
즐거워하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분명히 고통스러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소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현실은 아닌데,
반대의 감정을 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겪는다.
그래서 근심하고 있다.
그런데 기뻐하라
오히려 크게 기뻐하라
여러분에게 이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상을 얻게 할 것이기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금은 불로 연단하고 나면, 영원히 있을 것처럼 반짝 거리지만,
결국 없어진다.
그러나, 믿음은 고통으로 연단되고 나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순금이 된다.
그러므로 기뻐하라!
우리 7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 생긴다!
장차 오실 예수님께 칭찬받을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하라!
기뻐하라!
여러분, 부정적인 사람은 어떻습니까?
‘무슨 소리야,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뭘 기뻐하라는 거야.’
그런데 믿음의 사람은 어떻습니까?
상황이 아니라,
환경이 아니라,
말씀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이구나!
오직 말씀 하나로 만족하라는 것이구나!
라는 진리는 깨닫고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이 병들면 기뻐할 게 없습니다.
몸이 병들었는데 뭐가 기쁩니까?
점점 쇠약해져가는데,
점점 못 쓰게 되는데,
기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점점 더 뚜렷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찾으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이 더 뚜렷이 보일 때 기쁜 것입니다.
어린이 방에 장난감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장난감이 너무 많기 때문에
가장 귀한 것을 놓칩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라지고,
저것도 사라지면,
그제서야,
정말 귀하고 중요한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야 할 것은, 예수 한분입니다.
영원히 예수님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잃고,
고향을 잃고,
집을 잃어버린,
흩어진 나그네들
소망 없는 그들이 꼭 붙잡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있다가도 없어질 것,
썩을 것
더러워질 것
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
완전한 것
거룩한 것
확실한 것을 붙잡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에게 썩지 않는 것
더럽지 않는 것
쇠하지 않는 상속 재산을 이어 받게 하려고,
너희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 상속재산이 무엇입니까?
8절, 9절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예수를 믿는 것!
예수를 사랑하는 것!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거하며, 그분과 함께 사는 것!
이것이 너희 영원히 받을 상속 재산이고,
하늘에 간직된 상급이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이다!
*말씀을 적용하며 마칩니다.
여러분,
우리만 힘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고통 중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도 느끼지 않고, 자기 몸을 혹사하며,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아둥바둥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의미를 모르고,
희망을 잃고,
고통스러워 하며,
“진리”를 갈구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에 고통이 없고, 안 힘들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도 기뻐할 수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다!
이것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죠.
불신자들은 어떤 고통이 있나요?
삶의 의미를 몰랐던 고통,
삶의 희망을 찾지 못했던 고통,
도무지 살고 싶지 않았던 고통,
이런 무의미함의 고통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극복되는 것입니다.
지금이 끝이 아니다.
다가올 새로운 세상이 있다.
그 세상이 진짜다.
지금은 연습이다.
지금은 비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란군이 득세하여,
세상에 악이 있고 고통이 있지만,
다가올 새 세상이 완성되면,
죄가 없고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는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기쁨과 소망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이 예수를 주로 영접하라.
이 복음이, 우리와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죠.
고난 중에 기뻐합시다.
고통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의미 없는 고통은 없습니다.
우리 받는 고통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받는 고통인 것이죠.
모든 고통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우리 믿음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하며,
(우리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고통은 나만 바라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
괴로울 때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능력의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나를 믿는 믿음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말씀이 주시는 기쁨과 소망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고난을 이기는 비결,
고통 중에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비결인 것이죠.
이 시간,
이 말씀 가지고,
괴로울 때 주님 바라보겠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찬양합시다.
*기도합시다.
들은 말씀을 가지고 기도합시다.
고난 중에 기뻐하도록 기도합시다. 괴로울 때 주님을 바라보도록 기도합시다. 세상에서 시달릴 때 위로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도록 기도합시다.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순장과 리더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영육의 강건함과 은혜와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지혜로 충만케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오늘 진행되는 전도행사를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우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모든 전도행사를 하나님이 주관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관찰
1 파레피데모스(나그네, 거류민, 체류인)들, 흩어짐의(디아스포라 / 흩어져 사는, 흩어진), 폰투스,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2 에크렉토스(택함을 입은, 선택된, 뽑힌) 프로그노시스(미리 앎, 예측)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은혜와 평화가 더 많아지기를 기원하노라(플레쉬노 / 수동태 기원법 / 더 많아지다, 더하다, 번성하다, 증가하다).
3 하나님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많은 긍휼(엘레오스)에 따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아나겐나오 / 거듭나게 하다, 다시 태어나게 하다), 살아 있는 소망(엘피소 / 기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살아 있는 소망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다.
부활이 그들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였다.
그만큼 ‘죽음’이 가까운 인생을 살았다.
4 상속의, 아프싸르토스(썩어지지 않는, 죽지 않는 - 영원히 지속하는), 아미안토스(더럽지 않은 / 하나님 눈에 제의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흠과 오점이 없는), 아마란토스(쇠하지 않는 - 품질이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지키셨다(테레오), 하늘에, 너희를 위하여.
상속
썩어지지 않는 (영원히 지속하는)
더럽지 않은 (흠과 오점이 없는)
쇠하지 않는 (품질이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5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하여, 보호를 받았다. 이루어놓은 구원을 위하여, 마지막 때에 나타나게 될.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준비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보호를 받았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하여
6 너희가 즐거워한다(아갈리아오), 약간, 지금 뤼페오(근심하다, 슬퍼하다)해야 하지만, 온갖(포이킬로스) 페이라스모스(유혹, 시험)들로.
너희가 즐거워하고 있다.
비록 근심해야 하지만
지금
약간
온갖 시험들로
7 너희 아키미온(시련, 확실함, 진정성)은, 믿음의, 극히 값지다!, 파괴될 금보다, 불을 통하여 도키마조(검증하다, 시험하다, 증명하다)된, 얻을 것이다(휴리스코 / 찾다, 만나다, 발견하다, 얻다 / 수동태). 에파이노스(칭찬, 찬양)과 독사(영광)과 티메(값, 존경, 높임)을.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너희 믿음의 진정성은 정말 값지다!
믿음의 진정성이 드러났다.
고난을 통하여
금보다 더 값지다
그 믿음은 칭찬과 영광과 높임을 얻게 할 것이다.
얻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이다.
8 너희가 보지 못했으나, 너희가 아가파오(사랑하다, 아끼다)한다. 지금도 보지 못하나 믿는다. 또한 너희가 말할 수 없는(아네클랄레토스), 영광스러운(독사조) 기쁨(카라)으로 아갈리오(기뻐한다).
너희가 보지 못했다.
너희가 사랑한다.
지금도 보지 못한다.
너희가 믿는다.
너희가 기뻐한다.
기쁨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과거에 보지 못했듯이,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너희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너희는 믿고 있고, 심지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하고 있다.
9 얻었다(코미조 / 얻다, 받다, 돌려 받다), 믿음의 결말(텔로스 / 마지막, 결말), 너희 생명(프시케 / 목숨, 영혼)의 소테리아(구원, 구출)을.
믿음의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은 영혼의 구원, 생명의 구원이다.
10 이 소테리아(구원)에 관하여는, 그들이 에크제테오(찾다, 연구하다, 탐구하다)하였다, 그리고 엨스에라우나오(부지런히 살피다, 탐구하다)하였다, 선지자들이, 너희를 위한 은혜(카리스)를 프로페튜오(예언하다, 말하다, (공개적으로) 선포하다)하던.
이 구원에 관하여는
선지자들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공개적으로 선포하던
그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
11 에라우나오(찾다, 조사하다, 살피다)하였다, 누가, 또는 어느 시기에, 델로오(드러내다, 밝히다, 나타내다, 지시하다)할 것인지를.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증언하여, 그리스도의 고통과 이후의 영광을
10절에 엑스에라우나오 - 에라우나오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증언하여 드러내셨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이후의 영광을.
누구인지, 또는 어느 시기인지 연구할 때에
12 그것이 드러났다,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임이, 그들이 봉사한 것들이(디아코네오 / 수종들다, 섬기다, 일하다). 이제 그가 알렸다, 너희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파송된(아포스텔로 / 수동태) 거룩한 영으로. 에피쉬메오(열망하다, 탐하다)한다, 천사들도(앙겔로스), 파라큅토(들여다보다, 구부려 살펴보다)하기를.
선지자들이 수고한 것들이 드러났다.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임이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알렸다.
거룩한 영으로
천사들도 구부려 살펴보기를 열망하고 있다.
연구
주석
1절
디아스포라
이 단어는 독자들에게 아시리아 및 바빌로니아의 지역 강대국 아래에서 유배되어 지중해 세계와 그 너머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유대인들의 영향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유배 전과 유배에서 처음 돌아온 후 모두 유배된 백성을 다시 모으고 열두 지파를 재건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예: 사 11:11-12, 렘 31:8-14, 겔 37:21-22, 슥 10:6-12).
1:1에 언급된 다섯 지역은 모두 클라우디우스 통치하에 로마에 의해 재식민지화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인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강제로 보내진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논제에 대한 정황적 사례가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이 맞다면 베드로서의 독자들은 다른 곳, 아마도 로마에서 개종한 기독교인(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이었지만, 강제 이주로 인해 이질감을 느끼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세대의 망명자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소명을 올바르게 생각한다면 결코 이곳에 정착해서는 안 되며, 스스로를 여행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피터 데이비드는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쓸 당시 약 100만 명의 유대인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었고, 200만 명에서 400만 명이 이스라엘 밖에 살았다고 추정했습니다. 소아시아에는 바빌론과 이집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스라엘 밖에서 살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흩어진 나그네는, 문자적으로는 “택함 받은 흩어진 나그네”에 대한 헬라어 어구의 축약이다.
나그네(파레피데모스, parepidēmos)라는 용어는 항상 외국 지역에 머무는 일시적 거주자를 지칭한다. 아브라함은 스스로에 대해 헷 족속 가운데 거하는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파레피데모스, parepidēmos)로 말한다(창 23:4). 히브리서 11:13은 아벨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믿음의 영웅들이 땅에서는 그들 모두가 “외국인과 나그네”(파레피데모이, parepidēmoi)였음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연관된 동사가 이집트의 왕이 내린 한 포고령을 반포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내용은 방문객들은 알렉산드리아에 20일 이상을 머물러서는(파레피데메오, parepidēmeō) 안 된다는 명령을 담았는데,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번영한 도시의 사치스러운 삶에 매료되어 시골 지역에서의 본질적인 농업을 소홀히 하게 되는 까닭이었다(Epistle of Aristeas, 110. 참조, 1 Clement 1:2).
베드로가 그들에 대해, 적어도 구약성경 시대에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보존하며, 축복한 선택받은 백성에 의해 향유되었던 것과 동등한, 하나님 앞에서의 특권적 지위를 갖게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2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 위해 선택되었는데, 이 순종이 복음에 대한 초기 반응으로 이해되든(그래서 베스트 1982: 71),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지속적인 복종으로 이해되든(그래서 데이비드 1990: 4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목적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순종을 맹세 한 다음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립니다. 출애굽기 24:6-8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대로 독자들을 선택하셨다고 썼을 때,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을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택한 자들을 선택하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택함을 받은 자들을 나머지 인류로부터 분리하여 특별한 소명을 위해 따로 세우셨을 때 선택을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의 목적은 택함받은 자들로 하여금 성자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시고 그분의 피를 우리에게 뿌려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영향력 영역으로 데려가서 그 사람을 죽으신 분과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정화를 통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전유됩니다."
예수의 피는 (예레미야 31:31-34에 약속된 대로) 죄 사함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새 언약(마 26:27-28; 막 14:23-24; 눅 22:20 참조)을 비준(유효하게 함)하셨습니다.
순종은 우리의 책임이며, 뿌림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죄인인 우리의 죄를 덮고, 부정한 백성인 우리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며, 제사장과 왕으로서 우리를 봉헌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독자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고 영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도움이 필요했고, 베드로는 그 고난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의 독자들 역시 고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평안이라는 선물이 필요했습니다.\
성령의 성화 사역은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라는 어구 안에서 잘 드러나는데, 즉 성령이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점진적으로 역사하여 그들로 남아 있는 죄악들로부터 점점 더 자유롭게 하고, 그들로 거룩함과 믿음과 사랑 안에서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사역이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라는 어구를 베드로의 독자들의 전반적인 현재의 지위에 대한 언급으로 간주하는 것이 훨씬 낫다. 이는 엔(en)으로 하여금 그 단어의 평범한 의미인 “in”의 뜻을 갖도록 허용한다.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의 “택하심을 입은 흩어져 있는 나그네들”로서의 전체적 실존(whole existence)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사역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활동이, 영적인 대기(大氣)처럼 그들을 둘러싸고 있고, 그들은 그분의 그러한 활동 안에서 살아가고 숨쉬며, 모든 상황, 모든 슬픔, 모든 고난은 그분의 지속적인 거룩하게 하는 사역을 위한 도구가 된다.
이들이 사는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므로, 이들이 당하는 고난 역시 ‘성화’를 위한 도구가 된다.
구약성경에서 피뿌림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게 한 생명이 바쳐져 희생제사가 드려졌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상기시키는 행위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약성경 시대의 희생제사에서 피는 제단 혹은 시은좌에 뿌려졌다(레 4:17; 5:9; 16:14, 15, 19; 민 19:4). 단지 세 경우에 있어서만, 의식을 진행하면서 피가 사람들 위에 뿌려졌다.
(1) 시내 산에서 언약을 최초로 맺는 의식에서(모세는 이때 희생제물인 수소의 피의 절반을 모든 백성 위에 뿌렸다.
(2) 제사장으로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임명하는 자리에서(출 29:21; 히 10:22).
(3) 나병으로부터 치유된 자의 정결의식에서(레 14:6–7).
만일 베드로전서 1:2이 (1)의 의식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뿌림 얻음을 은유적으로 해석하여, 독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으로 처음 들어가게 되고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피뿌림”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을 가리킬 수 있다.
만일 제사장을 임직하는, (2)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독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뿌림에 의하여” 비유적으로 제사장으로 임직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이미 제사장으로 간주한다.
(3)의 경우, 곧 나병으로부터의 정화를 위한 피뿌림이 비교적 가장 적절해 보인다. 이 단락(레 14:6–7)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모호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의식은 어떤 종류이든 환자를 공동체로부터 추방하기에 충분한 심각한 모든 피부병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그 사람은 홀로 살아야 했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하였다(레 13:45–46).
그리하여 레위기 14:6–7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과의 교제를 훼손시키는 모든 종류의 오염으로부터의 정화를 대표하는 탁월한 예이다.
베드로는 그들로 그들의 미래가 계속적인 그리스도의 피뿌림, 즉 비유적으로 그들 위에 흩뿌려지는 희생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교제의 계속적인 회복, 그들의 죄악이 용서받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존전과 그분의 백성 가운데 환영받음을 하나님께 계속 상기시키는 것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기억나게 한다(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피의 계속적인 적용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참조, 요일 1:7).
3절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단지 공허한 소망이 아니라" 우리에게 살아 있는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축복(찬양)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불멸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 서신에서 희망에 대해 많은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구원'에 대한 실제 단어는 주로 미래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물의 어두운 면을 바라보거나 자신에게 일어날 최악의 상황을 바라볼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살핌과 사랑의 대상인 그는 자신에게 다가올 최선의 것을 바라보고 사물의 밝은 면을 바라볼 권리가 있습니다(잠 4:18-19 참조)."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구약성경에서는 결코 계시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이름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함께 찬양하기 위해, 그 찬송구를 변형시킨다.
아버지는 계획하고 지도하고, 아들은 응답하고 순종한다. 아버지는 “보내고”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온다(갈 4:4; 요 3:16, 18; 5:19, 22, 26–27, 30).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창조하고, 만유는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로부터” 온다(요 1:3; 고전 8:6; 골 1:16; 히 1:2).
소망은, 베드로가 “산”(living)으로 묘사한 바와 같이 늘 자라고 커가는 소망이다. 그러한 자라나는 소망이 거듭남에 대한 기대되는 결과라면, 아마도 신자가 다가오는 생에 대한 강렬하고 확신하게 기대를 얼마나 갖느냐가 영적 성숙을 향한 진보의 정도를 측량하는 유용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소망이 수많은 노년의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특히 뚜렷해진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4절
광야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의 유업을 기대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무덤 저편에서 우리의 유업을 기대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우리 유산의 세 가지 특징을 설명할 때 단어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각 그리스어 단어는 같은 글자로 시작하고 같은 음절로 끝납니다: 그것은 썩지 않는 물질(아프타르톤), 더럽혀지지 않는 순결(아미안톤), 퇴색하지 않는 아름다움(아마란톤)입니다. 아무도 우리의 유산을 황폐화하거나 오염시킬 수 없으며, 닳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프타르톤 - 아미안톤 - 아마란톤
신약성경은 일관적으로 지상적 유업 뿐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의 신자의 “분깃,” 곧 그/그녀의 미래적인 하늘의 보상을 가리키기 위해 “유업”(클레로노미아, kleronomia)이란 단어를 사용한다(갈 3:18; 엡 1:14, 18; 5:5; 골 3:24; 히 9:15).
그러나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유업”을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이라고 말했고(민 32:19; 신 2:12; 12:9; 수 11:23; 시 105:11. 참조, 행 7:5; 히 11:8), 또한 종종 “유업”은 그들의 “분깃”으로 각 부족이나 가족들에 속한 가나안 땅의 지분을 가리키기도 했다(민 26:54; 27:7–11; 36:3–12; 수 13:14, 23, 28 등).
독자들은 지상적인 가나안 땅의 가족의 유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의 기업(그들이 현재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땅과는 거리가 먼, 1절)을 얻기 위해 거듭났다. 따라서 유업이라는 새 창조와 거기에 속한 모든 복된 것이 그들의 것임을 나타낸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온다.
새로운 시대에 살아갈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살아있는 소망이다.
하늘의 유업은 “썩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이 경과해도 닳아 없어질 수 없고, 부패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오직 이 단어를, 하나님 자신(롬 1:23; 딤전 1:17), 하나님의 말씀(벧전 1:23), 우리의 부활의 몸(고전 15:52. 참조, 고전 9:25; 벧전 3:4)과 같은, 영원한 하늘의 실체에만 적용하여 사용한다.
이 유업은 또한 “더럽지 않다”(즉, 죄로 인하여 더럽혀지지 않는다. 히 7:26; 13:4; 약 1:27). 70인역은 종종 연관된 동사 “더럽히다”를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예배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부적절하게 만드는 의식적인 부정함(ceremonial defilement; 출 20:25; 레 11:24, 43, 44; 13:3, 8, 11; 민 19:13, 20)과 죄로 말미암아 땅이 더럽혀진 것(민 35:34; 신 24:4; 렘 2:7; 3:2. 참조, 민 5:13–29; 신 21:23; 호 5:3; 6:10)을 언급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더욱이, 그 유업은 “쇠하지 아니한다.” 지상의 재산과 달리(약 1:11), 그 유업은 결코 시들거나, 겨우 희미하게 자라나거나, 그 영광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참조, 벧전 5:4).
마지막으로, 그 유업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 “간직하신 것”의 동사 형태(완료수동태 분사)는 과거의 완결된 행위(하나님에 의하여)가 여전히 현재에까지 지속되고 있는 결과를 수반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 자신이 이 유업을 신자들을 위하여 하늘에 “저장” 혹은 “보관”하셨고 그 유업은 계속적으로 그곳에 존재하여 “여전히 그들을 위하여 보존되고 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것이 “너희를 위하여” 간직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대신에 “너희”로의 놀라운 치환(이곳이 베드로가 2인칭 복수대명사를 처음 사용한 시점이다)은 이 유업을 훨씬 더 개인적인 소유로 만든다.
이제 새 언약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유업”은 가나안 땅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지상의 유업보다 훨씬 더 뛰어남이 드러났다. 그 지상의 땅은 그들을 위해 “간직되지 않았고,” 포로기에는 빼앗겼고, 나중에는 로마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업을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구원의 모든 측면을 받는 수단입니다.
구원은 1:3-2:10의 주제입니다. 1:5, 9, 10, 2:2에서 구원(그리스어 소테리아)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을 주목하세요. 베드로는 이 서신에서 주로 우리 구원의 미래적 측면, 즉 우리의 영광을 언급했습니다.
베드로의 독자들은 핍박이나 고난이 더욱 강렬해진다면, 그들이 계속적으로 그리스도께 충실할 수 있을지 염려하였을 것이다. 베드로는 그들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은 존재들임을 확신시킨다.
보호하심을 받은(포루레오, phroureō)이란 표현은 “안전하게 보관되다, 신중히 주시되다”를 뜻하며, 종종 군사적 상황 안에서도 사용된다. 열 명의 신실치 못한 정탐꾼들에 동의한 사람들은 가나안 땅의 보물들이 “강력히 간직되어” 그들이 결코 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위의 상황들은 그 단어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막다” 그리고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다” 모두를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여기에서는 아마도 두 종류의 보호 모두가 의도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들이 그의 왕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지키고, 그들을 또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믿음을 매개로 그들을 보호하시는 능력을 계속적으로 사용한다”
사실상 하나님의 능력이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믿음에 힘을 북돋아주시고 계속적으로 유지시킴을 뜻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여기(4절)에서 그의 독자들에게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보상은 물질적, 유형적, 지상적이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여기에는 보상으로서의 현재의 물질적 번영에 대한 강조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육체적 건강의 향유 또한 덜 현저한데, 왜냐하면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까닭이다(고후 4:16). 박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해서도 덜 강조되는데, 왜냐하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 때문이다(벧전 4:14).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필수 징표로서 많은 자녀를 갖는 것도 신약성경 안에서는 중시되지 않는다. 결혼과 독신, 모두 그분의 은사이다(고전 7:7).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물질적 보상의 이 상대적인 결여 때문에 낙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믿음은, 물질적 필요에 대한 현재적 자족(빌 4:19), 현재의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벧전 1:8), 그리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에 간직된” 구체적이고 영원한 미래의 유업(벧전 1:4)과 같은, 새 언약상의 보상을 훨씬 더 위대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6절
여러분은 각각 믿음의 결과인 최종 구원을 받을 때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은 우리가 지금은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고 있지만, 미래의 그 날에는 크게 기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충실성에 도전하는 모든 종류의 시험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내면의 유혹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특히 외부로부터의 유혹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시련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 시련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독자들에게 명심하라고 촉구한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면 시련은 우리에게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this)라는 단어는 3절로부터 5절에 이르기까지에서 논의된 전체적인 미래의 소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함이 가장 좋다. 그것은 “구원”을 가리킬 수는 없는데, 만약 그럴때면, 헬라어 본문상으로 여성형 대명사를 필요로 해야 하지만, 현 본문상의 대명사는 남성형(혹은 중성형)이다.
문맥상의 사고의 흐름은 미래에 대한 소망 속에 기뻐함(3–5절)과 현재의 고난의 아픔(6–7절)에 대한 조합이 여기에서는 적절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기뻐하는도다”는 세속적 헬라 문화권의 저술가들에 의해서는 사용되지 않는 동사 아갈리아오(agalliaō)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단어는 항상 신약성경에서 깊은 영적인 기쁨, 하나님 안에서와 그분이 행한 일 안에서의 기뻐함을 나타낸다.
고난을 경험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날 때, “기뻐하게 될 것이고”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자기를 위한 기쁨이 사라지는 것이 고난이다. 그러나 고난은 ‘온전히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기쁨일 수 없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라고 덧붙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무한히 지혜로우신 목적의 관점에서 필요할 것으로서의 근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7절
시련은 불이 금을 연단하듯 믿음 연단합니다. 시련은 신앙을 정화하고 진정한 가치와 진정성, 즉 신앙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정결하게 하시고, 이러한 상황에서 그분을 신뢰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시련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을 하나님 한분으로 만들어 준다.’
시련은 ‘내가 믿어왔던 것’이 무너지는 경험이다.
건강, 의지, 자아, 지식, 그 밖의 모든 것들
헬라어 파루시아는 현존, 특히 오시는 분의 현존, 즉 그리스도의 오심을 의미합니다.
8절
우리가 주님을 뵐 때 기쁨을 경험하겠지만, 소망(3절)과 믿음(7절), 사랑(8절)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9절
궁극적으로 우리는 영혼의 완전한 구원(즉, 지금은 육체적 고통과 죽음에서 반드시 면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소망과 믿음, 사랑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기뻐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영광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이미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0절
베드로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기로 결단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의 경험이 결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도록 격려하기 위해 이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선지자'(10절)와 '천사'(12절)의 호기심은 신성한 계획의 신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 안에서 자신이 택하신 자들에게 곧 드러날 구원을 오랫동안 비밀로 간직해 오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고난과 영광을 모두 경험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예: 사 61:1-3).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고난과 영광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신비는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신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험에도 고난과 영광이 모두 포함되도록 의도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원래 청중은 주로 이방인 기독교인 그룹으로 구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방인 구원에 관한 예언만을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그는 3-9절에서 이방인 구원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은혜를 언급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지자들은 메시아 예언이 언제, 얼마나 많이 성취될 것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12절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영감받은 계시를 모두 자기 시대에 성취하지 않으시고 미래에 성취하실 것임을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 시대에 메시아의 고난에 관한 예언은 성취하셨지만 메시아의 영광에 관한 예언은 아직 성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들조차도 하나님께서 그 예언들을 언제 어떻게 성취하실지 기다리고 있습니다(참조, 히 1:5-2:18).
10-12절에서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독자들이 현재의 시련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정확히 알 수 없더라도 고난을 기뻐할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독자들은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을 다룬 예언에 대한 선지자들의 제한된 이해를 살펴봄으로써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현재 고난을 당하는 우리도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선지자들이 어렴풋이 이해했던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이 베드로 시대에 윤곽을 드러냈던 것처럼, 우리가 받을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약속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자.
베드로전서 개관
하나의 지역 교회가 아닌 로마 관할 아래 있던 소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공동체를 수신자로 하는 다소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내용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정황은 수신자 공동체를 향한 주변 사회의 공격이 현재적으로 예상되거나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벧전 4:12), 특히 이 짧은 서신 안에 “고난받다”라는 동사가 12회 정도 사용되는 바, 고통스러운 시련기를 보내고 있는 수신자들을 향한 위로와 격려와 권면적 가르침이 베드로전서의 기록 목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참조, 벧전 5:12).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은 수적으로는 소수자도 아니요 외인처럼 대우받는 것은 아니나, 사회 정서 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도를 넘어서는 현 시점에서 베드로전서를 연구하는 일은 교회를 향한 사회 일각의 공격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적절한 대응과 바람직한 삶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베드로전서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으로 공유할 수 없는 세상적 가치를 따르지 않음으로 주변세계와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갈등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요청되는 바른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다.
신약성경 곳곳에서 사용되는 “바벨론”이라는 이름은 로마에 대한 별칭이다(계 16:19; 17:5; 18:2를 보라. 그리고 로마의 “일곱 언덕”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계 17:9를 주목하라). 구약성경 시대의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과 반대되는 세속적 권력의 핵심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 시대의 로마는 복음을 반대하는 세계적인 정치 및 삶의 체계의 지상적 중심지였다. 로마를 “바벨론”으로 칭함으로써, 베드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혹은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교회의 심상을 이끌어 가는데, 이 이미지는 서신 전체를 통하여 사용된다(참조, 본서 벧전 2:10에 대한 주석).더욱이, 베드로가 인생의 말년에 로마에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박해는 주후 64년 로마에서 발발한 대화재 직후의 시기(이 화재는 네로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널리 알려졌으나 그는 그 화재의 원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며 비난하였고 사악하게 그들을 박해하였다)로부터 주후 68년 6월 9일 네로의 사망 전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전서의 “바벨론”이라는 이름과 베드로가 그의 말년 가까운 시점에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었다는 외적인 역사적 증거는 베드로전서가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 순환 경로는 소아시아에서의 모든 기독교적 영향력이 강한 주요 핵심부들은 편지로 닿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경유한 곳마다 (그 편지의) 사본들이 만들어져서 인근 도시들의 보다 작은 교회들에게 배포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후 62–63년에 소아시아의 모든 교회가 이 편지를 받아들었고 그 편지의 의도된 수신자들이었다면, 베드로가 유대 그리스도인들 혹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수신자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주어졌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30년 이상이 지난 이 시점까지의 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이 모든 교회 안에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존재하였음을 의미하였을 것이다.그러므로 베드로가 그의 독자들에게 적용할 유대적 용어들을 기꺼이 사용할 수 있었던 반면에(예를 들면 벧전 1:1에 있는 “흩어진 나그네”라는 어구를 주목하라), 이는 단지 이전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에게 고유한 용어를 새 언약 시대의 교회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안에는 베드로가 그의 독자들 가운데 상당수의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음에 대한 여러 시사점이 있다. 그는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벧전 1:18),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벧전 2:10)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개종한 유대인들에 대한 것일 리가 없다. 그는 그들의 삶이 유대인들의 특징일 수 없는 죄악들과 가득 찼었다고 말한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말한다(벧전 4:3). 그리고 그는 불신자들이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고 덧붙인다. 이는 (베드로전서의 수신자인)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에 1세기 유대교의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따르던 유대인들이었다면 불신자들이 이상하게 여길 현상은 아니었을 것이다.다른 한편, 의심할 바 없이 이 교회들에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유대인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심지어 오순절 성령강림 시에도,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출신의 사람들이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참조, 행 2:9). 그러므로 독자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혼합된 회중으로 간주되는 것이 가장 좋다.
베드로전서의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생을 통하여, 특히 그들이 고난받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성숙해지도록 격려하는 것이라고 주장될 수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지적하고, 이어 그것을 독자들의 삶에 적용함으로써, 그의 목적을 성취한다. 이 주제들은 그 본문들의 주해를 통해 상세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한 구절, 아마도 그 서신 중 다른 어떤 구절보다 더 나은 구절로 이러한 관심을 요약하는 구절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여기에는 고난(“고난을 받는 자들”)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그 고난은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진 것이며 “미쁘신 창조주께” 독자들의 영혼 혹은 삶을 계속적으로 의탁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라는 주제들이 발견된다. 더욱이,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또한 순종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 “선을 행해야 하는” 까닭이다.
1:1-12 개요
베드로는 구원에 관한 몇 가지 영광스러운 사실에 대한 개요로 첫 편지를 시작합니다.
I. 우리 구원의 근원 (1:1-2)
A. 우리는 아버지께 선택받았습니다(1:1-2a).
B. 우리는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1:2b).
C. 우리는 아들의 피로 깨끗해졌습니다(1:2c).
II. 우리의 구원의 보장 (1:3-5)
A. 증거 (1:3):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보장됩니다.
B. 영속성 (1:4): 우리를 위해 하늘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C. 능력 (1:5):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은 우리가 천국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보장합니다.
III. 구원의 기쁨 (1:6-9)
A. 약속 (1:6): 이 기쁨은 시련 속에서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B. 그 결과물(1:7-9): 우리의 시련은 두 가지 열매를 맺습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커집니다(1:7).
2.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키웁니다(1:8-9).
IV. 구약의 예언과 우리의 구원 (1:10-12a)
A.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1:10-11): 그들은 메시아의 장래 사역에 관한 모든 예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 그의 슬픔에 관하여 (1:10-11a)
2. 그의 영광에 관하여 (1:11b)
B. 그들이 이해한 것 (1:12a): 그들은 자신들의 예언이 죽고 나서야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V. 천사들과 우리의 구원 (1:12하): 그들은 이 놀라운 주제에 대해 더 많이 알기를 갈망했습니다.
나그네
사례1)
로힝야족은 지난 몇 십년 동안 버마인들이 주축이 된 미얀마 군부 측으로부터 강제로 동화 작업을 당해왔다. 그러나 로힝야족들은 스스로를 버마인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갈등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판국이다. 이는 1982년의 시민법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시민법에 따르면 국민들은 3개의 범주로 구분이 되는데, 크게 ‘완전시민’, ‘준시민’, ‘귀화시민’으로 나누었다. 완전시민은 전통적으로 미얀마에 살아왔던 민족들을 말하는 것으로, 버마족, 까렌족, 친족, 몬족, 샨족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준시민은 1823년 이전에도 자신들의 조상이 미얀마에 거주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으나, 최소 조부모계들 중 1명이 미얀마에 있었음을 증명하거나 1948년에 시민권을 이미 따놓은 자들이다. 귀화시민은 최소한 부모들 중 한 명이 완전시민이나 준시민들 중 하나이고, 부모가 1948년에 독립하기 이전부터 미얀마에 살고 있었던 자들을 의미한다. 로힝야족은 이 세 범주들 중 그 어떠한 것에도 해당하지 않았고, 이들을 눈엣가시로 여긴 군부 측에서는 이들을 쫒아내거나 강제로 동화시키려 들었다. 이로 인하여 80만 명에 달하는 로힝야족들 가운데 절반이 쫒겨났고, 나머지 사람들도 미얀마 내부에서 극심한 탄압을 받으며 살고 있다. 이같은 참상 때문에 로힝야족은 종종 ‘세계에서 아무도 원치 않는 자들’, 혹은 ‘세계에서 가장 탄압받는 소수민족’이라는 불명예를 얻기도 하였다.
로힝야족은 허가 없이는 여행도 떠날 수 없고, 토지를 소유할 수도 없으며 2명 이상 자녀를 가질 수 없다는 내용의 협약서에 서명도 강제로 해야 한다. 2012년 7월에 미얀마 정부는 아예 로힝야족을 미얀마 내의 소수민족 목록에 넣지도 않았는데, 이는 이들을 자국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저 방글라데시에서 넘어온 피난민 수준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같은 탄압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극심하여서, 지금도 280여 명이 사망하였으며 14만 명에 달하는 로힝야족이 라카인 주에서 도망쳐서 난민 신세로 전락하였다고 전했다.
방글라데시에 피신한 이슬람 소수민족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 송환 작업이 다시 추진되고 있다.
15일(현지시간)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미얀마 이민 당국 관계자들은 이날 방글라데시 남부 콕스바자르의 로힝야족 난민 캠프를 방문했다. 17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송환 대상 로힝야족과 면담을 진행하며 관련 서류 등을 확인하고 있다. 1차 송환 후보는 1천140명이며 이 가운데 711명에 대한 서류 절차는 마무리됐다. 나머지 429명은 신생아로 이들에 대한 서류 작업도 진행 중이다. 송환은 원하는 이에 한 해 진행될 예정이다.
방글라데시 외교부의 한 고위 관리는 "2017년 이후 미얀마 대표단이 로힝야족 송환 관련 면담을 위해 온 것은 처음"이라며 "몬순 우기 이전에 송환이 시작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방글라데시의 몬순 우기는 해마다 6월께부터 시작된다.
현재 콕스바자르 등 방글라데시에는 약 100만명의 로힝야족 난민이 체류 중이다.
로힝야족은 불교도가 다수인 미얀마에서 수년간 여러 탄압을 받아왔다.
특히 2017년 8월에는 로힝야족 반군인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이 대미얀마 항전을 선포하고 경찰초소를 공격하자 미얀마군이 ARSA를 테러 단체로 규정하고 대규모 토벌에 나섰다. 이에 미얀마의 로힝야족 약 75만명은 소탕 작전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급히 피신했고, 기존 로힝야족 난민이 주로 살던 콕스바자르에 정착하면서 거대 난민촌이 형성됐다.
대규모 난민 유입으로 난감한 상황에 직면한 방글라데시는 같은 해 미얀마 당국과 로힝야족 송환에 합의했지만, 이후 별다른 진전은 없는 상태다. 안전 우려 등으로 로힝야족 대부분이 송환에 응하지 않은 데다 코로나19 사태, 미얀마 군부 쿠데타 발생 등 주변 상황도 여의찮았기 때문이다.
이번 송환 작업에는 중국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고 외신은 전했다. 중국은 미얀마 군부는 물론 방글라데시 정부와도 긴밀한 사이다. 야오원 방글라데시 주재 중국 대사는 지난 14일 취재진에게 "(로힝야족) 송환이 곧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작업이 대규모 송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은 상황이다.
여전히 많은 로힝야족 난민은 주거 환경이 열악한 본국으로 송환되기보다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으로 밀입국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기 때문이다. 미얀마 대표단과 면담 예정인 로힝야족 이스마트 아라는 AFP통신에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엔 돌아가나…방글라 로힝야족 난민, 미얀마 송환 재추진、 김영현 기자)
선택 교리
선택은 구원받을 자를 향한 하나님의 결정을 뜻한다.
구원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다(행 13:48; 롬 8:28–30; 엡 1:11; 딤후 1:9).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한 자들이다(엡 1:4; 살전 1:4–5; 살후 2:13–14 등).
신학자들은 구원의 다양한 측면을 계획된 구원, 성취된 구원, 적용된 구원 등으로 분류했다. 선택은 계획된 구원이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셨고 선택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요 6:37–40). “선택”받은 자는(엡 1:4) 곧 아들을 “받은” 자다(요6:37, 39; 17:6, 9–12, 24). 선택받은 자는 구원에로 나아올 “양”이다(요 10:11, 15, 16). 그리스도의 양떼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되고 그 음성을 들을 때 비로소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요 10:26–27; 참조. 행 13:48; 롬 11:7; 살전 1:4–5).
하나님께서 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으셨는가에 대해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종교개혁 신학은 하나님의 선택을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으로 보고 이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구원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상정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자의 자아를 고려하지 않으신 채(롬 9:11, 16; 딤후 1:9) 자신의 지혜로운 목적에 따라(고전 1:18–31; 참조. 마11:25–27; 롬 8:28–29; 엡 1:9, 11) 사랑 안에서 선택하셨다(엡 1:4–5). 은혜에 따라 선택은 이루어지며(롬 11:5), 선택의 근거와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만 찾을 수 있다.
1) 하나님은 우유부단하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구원 사역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주도권을 가지신 채 일하시는 분이다.
2) 선택과 관련된 하나님의 주권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패와 죄의 노예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고전 2:14; 고후 4:3–4; 참조. 요 6:44; 8:43, 45; 롬 8:7–8). 이 세상은 언제나 만장일치로 하나님을 거역해왔다(시 14:1–3; 사 53:6; 마 23:37; 요 5:40; 롬 3:12). 성경은 구원받고 싶어하는 사람을 거부한다는 그림으로 선택 교리를 묘사하지 않는다(이는 선택 교리에 대한 오해다). 오히려 인간이 만장일치로 하나님을 거역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필수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모두 파멸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고 선택하셨다(엡 1:4–6). 선택을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자신이 영광을 받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구원 선택을 하시는 이유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 홀로 받기 위함이었다(고전 1:30–3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의 영광을 다른 이와 나누지 않으시는 분이다(사 48:11). 바울이 묘사하듯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자들만을 선택하지 않으신 이유다. 만약 세상 속 지혜자들만을 선택하셨다면 아마도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능력 때문에 선택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아예 제거하길 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나치시고 다른 이들을 선택하셨다(고전 1:18–31; 참조. 마 11:25–26).
신자들에게 있어서 선택은 가장 큰 즐거움의 근거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우리는 늘 하나님을 배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작정을 하셨고 우리에게 신적 은혜의 호의를 특별하게 베풀어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경배와 찬송은 하나님께만 올려드려야 한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시 3:8; 욘 2:9). 이런 고백이 모든 신자의 고백이며 천국에서 영원토록 울려 퍼질 행복한 노래가 될 것이다(계 7:10).
기업의 선택
기업 채용담당자의 입장에서 사람을 선택하여 채용하는 기준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기업 채용담당자는 다음과 같은 5가지 요인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직무적합도: 직무적합도란 지원자가 해당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과 경험을 갖추고 있는 정도입니다. 직무적합도가 높으면 업무를 빠르게 습득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채용담당자는 국문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통해 지원자의 학력, 경력, 자격증 등을 확인하고, 영문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통해 지원자의 외국어 실력과 글쓰기 능력을 평가합니다1.
회사적합도: 회사적합도란 지원자가 해당 회사의 비전과 목표에 부합하는 가치관과 성향을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회사적합도가 높으면 회사 문화에 잘 적응하고 동료들과 협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채용담당자는 자기소개서나 면접에서 지원자가 회사 선택 기준이나 입사동기 등을 얼마나 차별화되게 작성하거나 말하는지 확인합니다23.
성장 가능성: 성장 가능성이란 지원자가 해당 직무와 회사에서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잠재력과 동기를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성장 가능성이 높으면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스스로 학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채용담당자는 면접이나 인성검사에서 지원자의 문제 해결 능력이나 의사소통 능력 등을 평가합니다.
창의성: 창의성이란 지원자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방법을 제시하거나 실행하는 능력입니다. 창의성이 높으면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거나 개선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채용담당자는 면접이나 과제테스트에서 지원자의 사고방식이나 제안 내용 등을 검증합니다.
열정: 열정이란 지원자가 해당 직무와 회사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열정이 높으면 몰입하고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고통
고통은 여러 가지 이유로 찾아옵니다.
- 고통은 개인적인 죄와 실패의 결과로 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신중하게 예산을 세우지 않거나 낭비를 함으로써 재정적으로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처 주는 말이나 험담으로 인해 우정을 잃는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 음주 운전자가 사고를 일으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죄와 실패로 인해 고통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 고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토네이도나 허리케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 세계 일부 지역에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고난이 삶의 일부인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이 가득합니다.
- 우리가 죄를 짓거나 어리석게 행동할 때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이 발생합니다(베드로전서 4:15).
- 마땅히 받아야 할 고난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의 일부입니다(베드로전서 2:21).
- 고난은 성장을 촉진합니다-2 고린도후서 12:9-10.
- 고난은 시험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 요한복음 9:1-3.
-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2 고린도후서 1:3-5.
-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고통에 대한 '신학'이 필요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고난을 어떻게 사용하신다고 보십니까? 여러분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고난을 어떻게 사용하신다고 생각하시나요?
-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며 성령의 임재에 의해 제거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카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경험합니다.
-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 삶에 고통을 보내시는데 우리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분의 약속은 우리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 약 복용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불필요한 고통은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단순히 고통을 위해 고통을 견디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 고통은 우리 안에 인격을 형성합니다. 반면에 우리 문화에서는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실패하고 있거나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로 간주합니다.
- "문제를 해결"하고 싶거나 너무 빨리 답을 주려고 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경청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고통은 고통스럽지만 매우 가치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고통은 특히 고통이 설명되지 않고 줄어들지 않을 때 마음이 진정으로 숭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해줍니다. 내담자는 구원의 개념이나 구원자를 숭배합니까?
고통은 또한 모든 눈물이 닦여질 날에 대한 소망을 깊게 함으로써 마음을 정화합니다. 이 세상의 죄와 악에 대한 내담자의 불만이 커지면 천국에 대한 소망이 커집니다.
고통은 마음을 맑게 하고 정화할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우는 아이를 보면 우리는 부드러움을 제공합니다. 피해자의 상처를 보면 위로를 건넵니다. 인간의 고통은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행동에 활력을 불어넣어 결과적으로 타락의 어둠을 밀어낼 수 있게 해줍니다. 고통은 마음을 인간화하며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증가시킵니다.
세상에 고통이 있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학문적 접근을 통해 5가지만 이야기해줘라는 요청이군요.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신학적 접근: 이 세상에 고통이 있는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완벽하게 지으셨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에 책임이 없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철학적 접근: 이 세상에 고통이 있는 이유는 인간의 자유 의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더라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악과 고통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타인을 해치거나 자신을 손상시키는 선택을 할 때 발생합니다.
심리학적 접근: 이 세상에 고통이 있는 이유는 인간의 정신적 상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과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그것들과 충돌하거나 갈등하게 됩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궁금해하며, 때로는 불안하거나 우울하게 됩니다. 고통은 인간의 정신 건강과 행복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회학적 접근: 이 세상에 고통이 있는 이유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불평등과 차별과 갈등과 폭력 등 여러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고통은 인간의 사회적 정의와 평화에 영향을 미칩니다.
생물학적 접근: 이 세상에 고통이 있는 이유는 인간의 육체적 상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로서 신체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체에서는 질병과 부상과 노화 등 여러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또한, 환경에서는 재난과 오염과 기후 변화 등 여러 위협들이 발생합니다. 고통은 인간의 생명력과 건강에 영향을 미칩니다.
고통 인간이 육체적인 면과 정서적인 면 모두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성경의 설명과 논의들에 대한 개관을 제공한다.
서론
창세기 1–3장을 보면, 악이 유혹과 타락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다. 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와 인간 상호간의 소외, 깨어진 관계들, 육체적 고통과 정서적 고통, 고된 일, 죽음이었다. 그래서 성경 정경의 초반부는 고통을 낙원의 불법 침입자로 묘사한다. 이 타락 기사는 인간의 고통의 기원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출산의 고통과 죽음의 괴로움은 특별히 타락할 때 내려진 인류에 대한 본래적 저주와 연결된다(창 3:16–19. 비교, 롬 5:12–21).
행복이란?
행복은 일반적으로 만족을 특징으로 하는 심리적 상태로 이해되지만 윤리적 용어로는 잘 산다는 개념과 더 자주 연결됩니다.
행복은 삶의 조화 달성과 관련된 평화로운 만족감입니다.
어떤 윤리학자는 행복을 쾌락과 연결시키고, 다른 윤리학자는 쾌락이 그 자체로 목적으로 보일 때 그 결과는 행복을 훼손하는 자기 파괴적인 쾌락주의라고 대답합니다.
행복주의?
행복이 최고의 선이며 도덕적 의무의 기초라고 주장하는 윤리 이론.
신약성경은 고대나 현대가 아닌 방식으로 행복을 논합니다.
신약성경은 다양한 형태의 마카이로스(makairos)를 사용한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행복에 대한 근본적이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십니다.
축복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를 구별하는 요소는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번성하고 “지금” 보상을 받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신약성경은 행복이나 심리적 안녕을 사회적 기능, 좋은 느낌 또는 일반 은총으로 얻을 수 있고 고대 철학자들이 논의한 표준 자연적 미덕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습니다.
참된 성경적 평안과 기쁨은 사람이나 상황에 의해 신자에게서 빼앗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4:17). 그러나 그것은 물론 신자가 성령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배우고 행할 때 성령에 의해 옵니다(갈라디아서 5:22 참조). 따라서 그의 삶에서 평화와 기쁨의 결핍은 내담자의 죄 많은 실패의 결과입니다.
묵상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가?
그런데 왜 악이 있는가?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견디는 비결 중 하나는,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그러했다.
말씀을 듣는 것보다, 말씀을 가르칠 때 더 큰 위로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