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 은혜가 더 큽니다!(눅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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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 하나님은 나를 환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기도 :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3월 19일 주일 예배로 우리를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우리의 생명은 주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을 다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우리를 사용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령 하나님,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이 삶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연약한 종을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찬양 : 찬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본문 : 눅 15:11-32 (20-24)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하나님은 죄로 인해 멀어져있던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인사)
우리 서로 인사하며 환영합시다
“하나님이 집사님을 환영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멀어져있던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순수한 사람, 만나면 힘이 나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 주변에 예수님 닮은 사람,
예수님 같은 사람만 가득하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러나 세상에는 아무리 순수한 사람, 신선한 사람, 산소같은 사람도
각자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고 죄가 있어서
100% 순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항상 순수하십니다.
항상 신선하십니다.
항상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 마음이 순수해지고,
우리 마음이 밝아지고,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셨습니다.
죄인도, 세리도 다 환영하셨습니다.
세리는 나라의 배반자 아닙니까
창녀들은 음란한 여인들 아닙니까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 앞에 나아왔습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순수하신 예수님, 신선하고 산소 같은 우리 예수님 곁에 다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외모로 차별하고, 가진 것으로 차별하고, 지위와 권력으로 차별합니다.
그게 세상이죠.
우리가 백화점만 가도, 돈 없는 사람은 차별받습니다.
파레토의 법칙이 있는데요.
10명 중 단 2명이, 백화점 전체 매출의 80%를 쓴다는 것입니다.
2명만 제대로 잡으면 되요.
2명만 제대로 붙잡으면 백화점이 먹고 사는 것이죠.
나머지 8명은 안 와도 그만입니다.
그게 세상이죠.
그래서 세상 사는 우리 마음은,
점점 불순해지고,
점점 탁해지고,
점점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빛과 소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밝고 활기차면, 그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이 어둡고 무기력하다면, 같은 문제도 너무도 크고 벅차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길의 빛이십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의 등불입니다.
염려가 많고, 근심이 많고, 괴로울수록 우리가 말씀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고통 당하고, 낙을 잃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가까이 나아오는 것은 기뻐하고 잔치를 벌여야 하는 일입니다!
‘정말 잘 왔다, 정말 잘 왔어.’ 하면서 환영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누가복음, 15장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아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반대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수군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수군거렸다’는 것은 불평했다, 원망했다, 투덜거렸다 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같이 음식을 나누어먹을 수 있는가?’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친한 친구라는 의미입니다.
친한 사이만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니까, 예수님과 누가 식사를 하는 것입니까?
죄인들, 세리들이 예수님과 식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수군했습니다.
‘도대체 예수는 왜 저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가?’
‘저들은 나라와 민족의배신자들인데, 저들은 죄인들인데 왜 저들과 같이 웃고 떠드는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식사 모임에 세리와 죄인들을 초대하지 않았죠.
그들의 모임은 편협했고 배타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나라는 매우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식사모임은 어땠습니까?
누구나 와서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의 모임은 너무도 열려있었죠.
누구나 환영받았고, 누구나 초대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협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기에 불편했던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의 나라는 커다란 나라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이 초대하시고 영접해 주십니다.
누구나 초대받아 식사 자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나라는 작고, 좁고, 편협했지만, 예수님의 나라는 크고, 넓고, 광활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배척받고, 세상에서는 차별대우를 받을 수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주인공이 되고, 손님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나의 초대를 받으라.’
‘누구든지 나와 더불어 식사할 수 있다.’
이게 예수님의 마음이었던 거죠.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천국에 세리가 들어갈 수 있느냐?’
‘어떻게 죄인들이 천국에서 하나님과 먹고 마실 수가 있느냐?’
화가 났던 것이죠.
2절에 예수님이 죄인들을 열렬히 환영하고 영접했는데, 이 ‘영접했다’는 말은, ‘프로스데코마이’,
내가 ‘정말 간절히 기다렸다’, ‘내가 정말 너 보고 싶었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간 옆 성도들과 함께 이렇게 고백합시다.
“하나님이 당신을 정말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정말 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의미가 ‘프로스데코마이’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프로스데코마이가 되나요?
옆에 계신 성도들, 집사님들 ‘프로스데코마이’가 됩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이 별로 ‘프로스데코마이’가 안 되었어요.
별로 보고 싶지 않았고,
접촉하고 싶지도 않았죠.
별로 ‘프로스데코마이’가 안 되었죠.
여러분, 우리가 은혜가 사라지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작아지면, '프로스데코마이’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수군수군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이런 사람을 받아줄 수 있냐?’
‘어떻게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다닐 수 있냐?’
라고 생각하면서, ‘프로스데코마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식사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하죠.
우리는 값없이 초대받은 죄인들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 깨끗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처럼 때묻고 더러운 세리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 식사하는 식당인 것입니다.
식당 주인이 초대했는데, 손님이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를 왜 합니까?
하나님이 초대했는데,
예수님이 초대했는데,
왜 저 사람 이 식당에서 밥 먹냐, 왜 수군수군거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식당 주인이 초대했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우리는 식당 주인이신 예수님의 마음처럼, 죄인을 영접하고 기대하고
‘프로스데코마이’,
환영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하십니다.
옆에서 수군수군하는 바리새인을 직접 면박주지 않습니다.
‘야, 내가 식당주인이야. 내가 초대했어. 너희가 무슨 상관이냐?’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훈계를 하십니다.
그게 오늘 본문 말씀이죠.
잃어버린 둘째 아들을 찾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먼저, 11-12절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 아들이 과한 요구를 합니다.
‘아버지, 죽을 때 받을 상속분을 주십시오.’
국어사전에 ‘분깃’이라는 단어는 ‘몫’이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받을 재산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죽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이죠.
죽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죽기 전에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죽기 전에 재산을 나누어주고, 자식들이 부모를 모시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니까,
둘째 아들이 모실 생각이 없죠.
바로 떠났습니다.
물려받은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가까운 평택, 이천이 아니고,
아주 먼 일본이나 대만, 외국으로 가버렸다는 것이죠.
그러니 불효자입니다.
오늘날로 예를 들면,
부모님이 생명보험을 들었는데
자식이 이것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부탁을 합니다.
‘아버지 제가 부탁이 있습니다.’
‘그래, 부탁이 뭐냐?’
‘아버지, 보험 들으셨죠?’
‘그래, 들었지’
‘그 보험금 미리 저한테 주십시오’
여러분, 생명보험금은 가입자가 사망해야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더러 지금 죽으시라고 하는 것과 같죠.
아버지더러 당장 돌아가시고, 보험금 달라고 하는 것이죠.
또다른 예로,
여러분 자녀들이 장성해서 사업하다가, 찾아와서 부탁을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유산을 지금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사업이 좀 안 좋아졌습니다.’
‘요즘 물가도 오르고, 경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아버지 유산 미리 받으면 사업에 숨통 좀 트이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식이 불쌍하니까,
어차피 줄 돈, 미리 준다고 생각하고 적금 빼서 나누어주었는데,
아들이 그 돈으로 사업체를 살릴 생각은 안하고,
술 마시고, 노름하고, 쾌락에 빠져 살다가
홀라당 다 날려먹고,
다시 아버지께 돌아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얘야, 니가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감사하구나! 잔치를 열자!’ 할 수 있을까요?
‘내가 다시는 너 안 볼거야.’
‘다시는 찾아오지 말거라.’
이러지 않겠습니까?
이런 아들을 ‘프로스데코마이’, 정말 간절히 기다렸다. 내가 너를 정말 환영한다.’ 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을 환영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정말 만나고 싶으셨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부모자식 이라도 이런 환영은 없습니다.
마지못해,
그래 내가 용서할게, 집에 들어오너라.
이정도지,
목욕시켜 주고, 안아주고, 옷 갈아입혀주고, 반지 끼워주고, 잔치 열어주는 이런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인을 마지못해 받는 분이 아니라, 열렬히 환영하십니다.
‘내가 정말 너 기다렸다.’
‘니가 와서 너무 좋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극진히 대접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교회가 이런 곳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이런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 하나님이 초대하는 식사 자리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이 예배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자격 없지만,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에 힘입어서 하나님과 식사하고 대접받는 것이죠.
*세상 종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깨달으면 바뀐다’ 고 가르치죠.
그러나 기독교는 만남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서로 만나는, 교제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삶이 바뀌고, 믿음 안에서 서로 교제할 때,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이죠.
세상 종교는 깨달으면 삶이 바뀐다고 말하죠.
가르침대로 살면 바뀐다고 말하죠. 그게 세상 종교입니다.
그러나 깨달으면 바뀌나요?
깨닫기만 하면 자녀가 예뻐보이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에너지 전쟁입니다.
에너지가 얼마나 축적되어 있느냐 아니냐의 전쟁입니다.
사람관계도 마찬가지죠.
에너지가 얼마나 축적되어 있느냐 아니냐의 전쟁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에도, 에너지가 얼마나 축적되어 있느냐 아니냐의 전쟁입니다.
에너지의 문제죠.
에너지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냉장고도
에너지가 있을 때 작동하지,
에너지가 없으면 무용지물이에요.
에너지가 냉장고를 살아나게 하고, 에너지가 냉장고를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으로는 바뀌지 않아요.
전기가 끊어진 냉장고가,
‘아, 내가 이 기능이 안 되는구나.’ ‘아, 지금 전기가 안 들어오는구나!’ 깨달으면 냉장고가 작동하는 게 아니라,
전기가 실제로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에너지를 받아야 그 기능이 되살아나고
에너지를 만나야 작동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만남의 종교입니다.
만나야 바뀌는 것이죠.
‘너가 오기를 정말 기다렸다.’ ‘어서와라, 같이 식사하자.’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죽어 있던 우리 기능이 살아나고,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죠.
우리 내면의 문제,
인간관계,
불안, 염려, 근심은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혼자 잘 살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없이 잘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이 통제가 안 되죠.
전기가 끊어진 냉장고처럼, 제멋대로 꺼지고, 제멋대로 멈추고, 그 안에 음식은 썩어서 냄새가 날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떠난 인생은 제멋대로 인생입니다.
제멋대로 움직이다가, 제멋대로 멈추고, 꺼지다가
결국 그 안에는 썩어 냄새가 나는 인생인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그랬던 것이죠.
13-16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그렇게 당당하게 집을 나가더니, 비루하고 냄새나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허랑방탕하여 제멋대로 살다가,
이젠 제멋대로 정착해서,
썩어 냄새나는 인생이 된 것이죠.
아버지를 떠난 인생이 이렇습니다.
결국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가진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에는 궁핍해져 고통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재산, 우리 마음의 재산, 우리 인격의 재산을 다 낭비하는 것입니다.
점점 더러워져가고,
점점 세속적으로 변하고,
점점 비참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과 각종 모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비참해져,
배가 고픈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나 받아줄거야.’
‘아버지는 풍족한 품꾼들이 많아.’
‘내가 그 품꾼이 되어야겠다.’
여러분, 이것이 은혜입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이 은혜이고,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은혜이고, 예배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래야 합니다.
하나님 떠난 인생의 비참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아야하는 것이죠.
그런데요.
아들과 아버지 사이는 너무도 멉니다.
이 아들이 아무리 걸어도, 아버지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가 않는 거에요.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중략)..
분명히 깨닫고 돌아가는데,
아직도 거리가 멉니다
여러분, 거리를 좁히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니에요.
2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 먼 거리를 좁히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아버지가 측은히 여기고
아버지가 달려가고
아버지가 목을 안고
아버지가 입을 맞춘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열렬히 환영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회개해도, 하나님과의 이 먼 거리를 좁힐 수 없습니다.
누가 좁힙니까?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 아버지의 측은한 눈빛, 아버지의 신속한 발걸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만남의 장소가, 바로 함께 예배하는 예배의 자리인 것이죠.
만나야 변하고, 만나야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명령하십니다.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기라.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가 잔치하자!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
그런데 둘째 아들이 돌아온 일은 동네 부끄러운 일이지, 잔치할 일이 아닙니다.
결혼식도 아니고, 돌잔치도 아니고, 환갑도 아니고,
죄인이 돌아온 건 부끄러운 일이죠.
여러분은 자녀들이 죄 짓고 돌아오면 잔치를 여십니까?
더 야단치시죠?
니가 그렇게 잘못을 저지르고도 낯짝도 두껍게 돌아왔냐?
야단 치시죠?
그런데 야단 치시는내용이 없어요.
22-24절을 보십시오.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야단치시는 내용이 없어요.
‘정말 잘 돌아왔다!’
‘프로스데코마이’
‘내가 너를 정말 기다리고 기다렸다.’
야단 치시는 내용이 없어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다.’ 라고 하면서,
‘우리가 잔치하자’
“우리가 먹고 즐기자”
“우리 함께 즐거워하자”라고 하시면서 잔치를 열고 있죠.
*다시 본문 2절 말씀으로 돌아가보면,
바리새인들이 수군수군거렸죠.
‘어떻게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저렇게 환영할 수 있느냐’
‘저거 부끄러운 일 아니냐?’
‘저렇게 죄 짓고 돌아온 이들과 함께, 어떻게 잔치를 열 수 있느냐?’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맞다, 너희들의 말이 맞다.
이들은 둘째 아들이다.
불효막심한 죄인이다.
이들은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그런데, 너희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는 사랑이 그들이 지은 죄보다 크다는 것이야.
상처보다 은혜가 크고,
아들이 지은 죄보다 아버지의 사랑이 더 크다는 거야.
그러니, 아버지 자식들이 돌아오는데, 잔치해야 하지 않겠냐?
여러분, 기독교는 만남의 종교인데,
이 아버지의 크신 은혜를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지은 죄보다 더 큰 사랑,
내가 아버지께 드린 상처보다 더 큰 은혜를 깊이 깊이 만나 변화되는 종교인 것이죠.
함께 고백합시다.
“아버지의 사랑이 내 죄보다 큽니다.”
“아버지의 은혜가 내 죄를 덮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상처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큰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분노합니다.
‘어떻게 저런 아들을 다시 받아줄 수 있냐?’
‘나는 당신에게 한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당신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을 위해서 이를 대접을 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당신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원어로 보면, ‘아버지’라는 단어가 없고, 모두 다 ‘당신’입니다.
‘당신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내가 당신을 어떻게 섬겼는지 아냐?’
‘아버지’라는 단어를 한번도 안 쓰고, ‘당신’, ‘당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가 난 맏아들은, 아버지를 ‘당신, 당신’ 이라고 하면서,
집에 안 들어와요.
화가 나서 거리를 두고 있어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를 때에, 우리 마음에는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에게, ‘당신, 당신’하면서, 화를 내는 것이죠.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 화가 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억울함이 생기고,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기쁜 만큼, 남의 행복도 기뻐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내가 안 기쁘면, 남의 불행해야 한다는 것이죠.
남의 행복도 시기가 나는 것이죠.
은혜가 없는 것이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은 열렬히 죄인을 환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잘 왔다.’
‘정말 잘 찾아왔다.’ 라고 하시며,
우리를 환영하시고, 끌어 안으십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야 우리 인생이 새로워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정죄합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냐?’
세상은 교회를 비난합니다.
‘어떻게 교회 안에 이렇게 죄인들이 가득할 수 있냐?’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영접하고 사랑하실 수 있냐?’
맞습니다.
우리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상처보다 더 큰 사랑,
죄보다 더 큰 은혜 때문에,
세상 어디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환영받고 대접받는 곳이죠.
그게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보다 더 큰 것입니다.
우리를 환영하시는 그 은혜가, 우리의 잘못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교회가 이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왜 교회에 있어?’
‘왜 저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거야?’
차갑고 냉랭한 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이 교회 나오게 되어서 정말 감사하다.’
‘저 사람이 예배하러 나와서 정말 기쁘다.’
따뜻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저지른 잘못에만 집착하면, 우리는 사람을 비난하고 미워하게 되지만,
아버지의 사랑에 집중하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풍성하신 사랑을 닮아서,
아버지처럼 비난 받아 마땅한 사람 역시,
따뜻하게 품는 열방교회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들은 말씀을 가지고, 다 함께 합심하며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정죄, 비난, 차가운 마음을 회개합시다.
먼저, 아버지의 사랑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 안에 비판과 비난의 마음이 가득하다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합시다.
교회가 회복되고, 우리 가정이 살아나고, 우리 순모임이 살아나고, 우리 나라와 사회가 회복되는 길은, 정치로 경제로, 갖가지 시스템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으로 회복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고, 민족이 사는 길, 우리 가정과 우리 다음세대가 사는 길, 아버지의 사랑으로 채워 달라고 기도합시다.
특별히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2주간 일정중에 아프시지 않도록, 영육간에 강건함을 위해서, 선포하시는 말씀 사역 위에 뜨거운 성령의 은혜가 부어지도록,
교회 안의 병약한 환우들과 치료가 필요한 여러 지체들 위에 그리스도의 피묻은 치유의 은혜가 풍성하게 해달라고,
우리 함께 합심하며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첫째 아들처럼 남을 비난하며 서로를 미워하고 헐뜯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의 죄보다 더 큽니다. 아버지의 은혜가 우리의 잘못보다 더 위대합니다. 우리 안에 이 사랑을 회복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가정과 이 사회와 이 나라 이 민족이 변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맡기신 물질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바른 예배자의 자세로 자원하여 드립니다. 이 물질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을 전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옵고 이 모든 말씀,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 함께 찬송가, 310장 찬송하겠습니다.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화 감동 교통 역사하심이,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힘입어 살기로 결단하는 모든 주의 백성과 가정과 나라와 이 민족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관찰
11 또한 그가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에코(소유하다)하고 있었다, 아들 둘을.
아들은 그의 소유였다.
그 사람은 ‘익명’의 사람이다.
이 사람의 성격이나 다른 내용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두 아들’이 있다는 것이다.
12 네오스(새로운, 젊은)이가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여, 당신은 주소서(디도미 / 명령), 나에게, 에피발로(두다, 붙이다)할 부분을(메로스), 그 우시아(재산, 부, 소유) 중에서, 그런데 그가 나누었다(디아이레오), 그들에게(복수) 비오스(생계, 생활)을.
네오스
15:12 그 둘째가
15:13 둘째 아들이
디도미
15:12 분깃을 내게 “주소서”
15:16 “주는” 자가 없는지라
15:22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15:29 염소 새끼라도 “주어”
13 그 후에, 많은 날이 지나지 않아, 전부 모아서, 젊은 아들이 아포데메오(떠나다, 타국에 가다, 여행하다)하였다, 마크로스(공간이나 시간적으로 떨어진, 먼) 코라(땅, 나라)로, 그리고 그 장소에서 디아스코르피조(뿌리다, 흩다, 낭비하다) 하였다, 그의 우시아(재산, 부)를, 아소토스(허랑방탕하여, 무모하게) 살았다.
많은 날이 아니다.
금방 떠났다.
타국으로 떠났다.
공간적으로 멀고
시간적으로 떨어진 곳이다.
그 장소에서, 그의 재산을 흩뿌리고 다녔다.
허랑방탕하여 무모하게 살았다.
14 다파나오(허비하다, 쓰다)하고, 모든 것들을, 리모스(기근)이 이스퀴로스(강한, 능력있는)하게 들었다, 그 코라(땅, 나라)에, 그리고 그가 휘스테레오(부족하다, 궁핍하다)되어지기 아르코(시작하다, 다스리다, 주관하다)하였다.
모든 것들을 허비하였다.
그리고 그 나라에 기근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를 궁핍함이 다스리기 시작했다.
15 그가 그 나라의 시민 중 하나에게 붙었는데, 그가 그를 들로 보냈다(펨포). 돼지를 먹이게 하였다.
아그로스
15:15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두 아들 모두 ‘들’에 있었다.
한 아들은 먼 타국의 들에 있었고
한 아들은 아버지 나라의 들에 있었다.
16 그가 에피쉬메오(열망하다, 음욕을 품다, 탐하다)하였으나, 그 배를 가득 채우고자, 쥐엄 열매로, 돼지들이 먹는, 누구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디도미)
탐하였다.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로 그 배를 가득 채우고자.
그는 열망하였다.
그러나 그 열망이 채워지지 않았다.
누구도 그 열망을 채워주지 않았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더 이상 지불할 대가가 없을 때에 ‘그 고통’이 드러난다.
17 그 스스로 와서 말하기를, 얼마나 많은가 일꾼들이, 내 아버지에게, 그들은 아르토스(빵, 떡)들이 넉넉하다, 나는 그런데 이곳에서 기근으로 아폴뤼미(죽다, 파괴하다, 잃어버리다)한다.
아버지 집의 양식이 넉넉한 일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나는 이곳에서 기근으로 파괴될 상황이다.
18 일어나 내가 가서, 아버지에게로, 내가. 그리고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죄를 지었다. 하늘과 당신 앞에서.
아버지여
15:12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15:18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5:21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나는 특별대우 받을 자격(악시오스 / 합당한, 마땅한)이 없다, 당신의 아들이라고 불려질(칼레오 / 수동태). 당신은 행하소서(포이에오 / 행하다, 세우다 / 명령), 나를, 당신의 일꾼들 중에 하나로.
나는 특별대우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의 아들이라고 불려질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은 나를 일꾼들 중에 하나로 여기소서.
그런데,
맏아들은 어땠는가?
그는 자신이 ‘특별대우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염소 새끼라도 주어 벗들과 즐기게 하신 일이 없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그는 자신에게는 애정을 주지 않고,
자기 동생에게만 애정을 주는 것 같아, 아버지를 원망하였다.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 스스로. 아직도 마크란(공간적/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먼)의 거리가 있는데, 아버지가 그를 보았다. 그가 측은함이 가득해졌다(수동태). 달려가, 그가 그의 목 위에 달려 들어, 그에게 그가 입맞추었다.
마크로스
15:12 먼 나라로 가
마크란
15: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들은 스스로 돌아갔지만, ‘그 거리를 좁히는 일’은 그 스스로 하지 못했다.
거리를 좁히는 일은 “아버지”가 하였다.
아버지는 멀리서 “그를 알아 보았다.”
그 마음에 측은함으로 가득해졌다.
달려갔다.
그의 목 위에 달려 들어, 그에게 입맞추었다.
이것이 “아버지”가, 먼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한 일이다.
21 그의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늘과 당신 앞에서. 더 이상 합당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아들이라고 불려질.
19절의 반복이다.
22 아버지는 그의 종들에게 이르기를, 서둘러서, 너희는 내오라!(명령), 으뜸가는 예복을. 그리고 너희는 입히라!(명령), 그에게. 그리고 너희는 주라!(명령), 반지를, 그의 손에. 그리고 발에 신을.
아버지는 그에게 첫째 가는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반지를 손에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령한다.
합당하지 않은 아들에게, 합당하지 않은 대우를 하는 아버지이다.
23 그리고 너희는 운반하라(명령),기름진 송아지를. 너희는 잡으라!(명령), 우리가 먹고 즐거워지자!(유프라이노 / 수동태 / 즐거워하다, 기뻐하다, 즐기다)
24 왜냐하면(호티), 이 나의 아들은 죽었었다가, 다시 살아났다(아나자오), 잃어버렸었다가(아폴뤼미) 만나게 되었다(휴리스코/찾다,만나다/수동태), 그들이 유프라이노(즐거워하다, 기뻐하다, 축하하다 / 수동태)하기 아르코(시작하다, 주관하다, 다스리다)하였다.
유프라이노
15:23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15:29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15:32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르코
15:14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24 그들이 “즐거워하더라”(시작하더라)
연구
이 비유의 독자는 누구인가?
Luke 15:1–3 NKRV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모든 세리와 죄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예수님은 길 잃은 죄인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요점을 더 설명하기 위해 “아주 부도덕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계시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 창녀’와 자기 자신을 ‘아버지와 자식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충격적이다.
유산상속을 맏아들은 2/3, 둘째는 1/3
맏아들은 이미 2/3를 받았다.
(1) 아버지는 사후에 집행되는 유언장(헬. 디아테케)이나 생전에 증여(헬. 도레마, 라틴어. 도나시오 인터 비보스)의 두 가지 방법으로 재산을 처분할 수 있습니다. 구약법에서 아버지의 사망 시 재산 처분은 민 27:8-11, 36:7-9 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생전에 재산의 일부를 증여로 처분할 가능성은 구약법에서 다루고 있지 않지만, 창 25:5-6("아브라함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이삭에게 주었습니다.
Sirach 33:20 NCTB
너는 아들이건 아내건 형제건 친구건,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에게도 권력을 양도하지 말아라. 너의 재산을 아무에게도 주지 말아라. 나중에 그것이 아쉬워 후회할 것이다.
네가 자식들의 손을 바라보는 것보다 자식들이 네게 구하는 것이 낫다.
(2)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정산을 시작하고 아버지에게 자신의 재산 (적어도 일부)을 처분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아마도 매우 불규칙하고 확실히 놀랍도록 주제 넘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비유의 어떤 부분도 임박한 결혼의 전망 (참조, B. Bat. 8 : 7)이나 삶의 상황을 개선 할 목적으로 이민 계획과 같은 작은 아들의 행동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암시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이야기의 끝에서 아들을 죽고 잃어버린 것으로 묘사합니다.
(3) 15:12은 아버지가 "재산을 둘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주장하고, 15:31에서 아버지는 큰아들과의 대화에서 "내 것은 모두 네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반면에 비유의 계속은 큰 아들이 재산에 대한 주요 통제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15 : 22-24에서 하인을 명령하고 살찐 송아지를 도살하고 잔치를 조직하는 것은 아버지입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생전에 생산물에 대한 청구권보다는 자본재를 장남에게 할당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재산에 대한 지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했을 것입니다.
11-12절
나는 당신의 ‘재산’은 원하지만, 당신과의 ‘관계’는 원하지 않습니다. - 탕자의 비유
12절
법은 이러한 가능성을 허용했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상속 재산으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아버지에 대한 도덕적 의무가 남아 있었을 수 있습니다.
상속받은만큼, 도덕적 의무도 함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상속은 받았으나 도덕적 의무는 행하지 않았다.
작은 아들이 자신의 몫을 완전히 받았을 때 아버지는 나머지 상속 재산도 큰 아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사용권을 유지하면서 31 절에서 그의 발언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아버지가 이미 큰 아들에게 넘겨준 재산에 손을 대지 않고는 탕자를 아들로 다시 불러들일 수 없다는 뜻이 된다.
15절
이방인과 연합하는 행위는 ‘유대인들에게는 극악’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방문화에 동화된 유대인’
15-16절
랍비 전통은 "돼지를 기르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격언을 공식화한다.
(탈무드)
'돼지를 기르거나 아들에게 그리스 철학을 가르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16절
평범한 고대 이야기라면 청중에게 아버지를 무시하고 버리지 말라는 교훈을 남기고 여기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17절
하인들의 ‘풍족한 생활’에 대한 비유는, 아버지의 “자비롭고 은혜로운 성품”을 반영하고 있다.
아버지의 성품이 위대할수록, 둘째 아들의 범죄는 더욱 부각된다.
그는 각성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지혜로워졌다.
고용된 종들. 이것은 고용된 노예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일당을 받고 일하는 자유로운 현장 노동자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18절
하늘과 ‘당신’(아버지)이 ‘평행’하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단어로 ‘하늘’을 썼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곧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더 높은 지위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돈을 낭비하고 아버지에 대한 법적 또는 도덕적 의무를 무시하고 나쁜 청지기처럼 행동함으로써 죄를 지었습니다.
20-24절
반지는 인장 반지로 식별되지 않으며 겉옷은 아들의 가난한 상태 (15 : 15-16)를 고려할 때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복장 규정이 아니라 단순히 기본적인 필수품이었을 수 있습니다.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15:20-24의 상징적 행동은 단순히 "아들로서의 어린 아들의 명예 회복을 의미합니다.
25-32절
탕자가 자비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독선적인 형의 환영을 받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해 보세요. 많은 탕자들이 형의 환영을 받기 때문에, 독선적인 기독교인들의 환영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께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용서와 자비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그들의 유일한 선택은 먼 나라의 돼지우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23절
아버지는 마치, ‘잃어버린 양’을 찾은 것처럼, ‘잃어버린 데나리온’을 찾은 것처럼, 매우 ‘귀중한 것’을 되찾은 것처럼 ‘아들의 귀환’을 환영하고 있다.
사실 이런 아들의 귀환은 ‘잔치’를 벌일 만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아버지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조용히 넘어가든지, 조용히 받아들여야 했을 문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환영할 일이고, 잔치를 벌일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28절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마을 전체가 축하하는 동안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면 가족 내 분쟁이 공개적인 가십거리가 되고 축하하는 가운데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고대 청중들은 아버지가 이 아들을 훈계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잔치를 열였는데, 아들이 그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큰 죄다!
29절
아버지에게 호칭("아버지" 또는 "선생님")으로 인사하지 않은 것은 불쾌감을 주었습니다.
‘보십시오’
첫째 아들은 ‘아버지’라는 호칭을 생략한다. 이런 행동을 하는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30절
가족 재산에 계속 기여할 수 있었던 어린 아들의 몫이 이제 사라져서 아버지가 더 가난해 졌다는 의미에서 아버지의 생계가 파괴되었습니다.
31절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정하게(τέκνον) 말하며, 그가 끊임없이(πάντοτε, 대조 οὐδέποτε, 29절) 그와 함께 있으며, 아버지의 모든 소유는 그의 것임을 확신시킨다. 이 말은 이미 아들에게 약속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아들이 농장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합니다. 아들이 아직 그 열매를 누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버지가 그것을주지 않으려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예수의 가르침의 삼분의 일 이상이 비유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수의 비유들의 특징들
일반적으로 예수의 비유들은 친근한 것(예, 팔레스타인 마을들에서의 삶)으로 시작해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는 덜 친근한 것으로 이동한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비유들은 다시 친근한 것으로 돌아가서 현재에 대한 결과를 암시한다(Knowles, “Everyone who Hears,” 287).또한 예수의 비유들은 청중에게 충격을 주기 위한 예상치 못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누가복음 15:12에서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게 자신의 유산을 미리 준다. 이것은 이 비유의 원래 청중에게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아직 살아 있는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재산을 넘기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었다(집회서 33:20–24).비유들에는 청중의 능동적인 참여를 요하는 애매한 특징들도 있다. 명시적인 질문(“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나 한때 그 비유를 들었던 청중에게 대답을 요하는 암시적인 질문이 항상 있다.
예수님의 비유
격언적 비유 :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겠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
확장 비유 : 예수 전통에서 확장 비유는 한쪽 끝에는 분명한 격언적 비유가 있고 다른 쪽 끝에는 분명한 내러티브 비유가 있는 포물선 연속체의 중심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확장된 비유에는 격언적 비유에 매우 가까운 비유와 내러티브적 비유에 매우 가까운 비유가 있습니다.
이야기 비유 : 예수 전통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는 확장된 비유가 아니라 내러티브 비유입니다. (구전성, 평범성)
이 같은 식탁(식사)의 교제는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간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묵상
“아버지, 아버지가 죽고나서 받을 보험금을 미리 저에게 주세요.”
“아버지, 아버지가 가진 아파트 소유증서를 미리 저에게 주세요.”
이런 사람을 향해 시선을 응시하며 한없이 바라보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어떤 면에서 ‘선한 아버지와 악한 아들’에 대한 비유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게 하였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죄인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마땅하다.
그러나 그 비유의 아버지는 ‘돌아온 악한 아들’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론내린다.
아버지가 잔치를 열였는데, 아들이 그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큰 죄다!(28절)
이것은 둘째 아들의 죄도 부각되지만, 첫째 아들도 아버지에게 큰 수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둘째 아들’이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아들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사랑’이 훨씬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의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나, 그를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이 부각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옳은 평가를 내렸지만, 그의 마음은 아버지와 같지 않다.
아버지와 다른 마음
우리는 어떤가?
판단은 맞는데, 긍휼이 없는 경우는 없는가?
판단은 맞는데, 하나님의 뜻과 다른 행동은 없는가?
긍휼과 자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우리에게 후하게 나누어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이 비해 ‘인색’하지 않는가?
거래적이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태도나 자세에 따라, 다르게 사랑을 주지 않는가?
그런데, 아무도 하나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첫째 아들도, 둘째 아들도 그러하다.
이 이야기는 명확한 대상에 대해 지칭하지 않고 있다.
바리새인일지라도 ‘자신의 죄성’을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둘째 아들’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세리와 죄인일지라도 ‘자신의 자격’을 논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첫째 아들’로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너가 첫째 아들이다, 너가 둘째 아들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선택은 본인의 상태에 달렸다.
본인이 겸손하면, 아버지의 사랑에 감격할 것이요,
본인이 교만하면, 아버지의 사랑에 화가 날 것이다.
“거리가 먼 두 아들”
둘째 아들은 “공간적 거리”가 멀었고,
첫째 아들은 “심리적 거리”가 멀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공간을 아버지가 메꾸셨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마음과 멀어져 있었다.
그 공간을 아버지가 메꾸셨다.
만남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만남의 종교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우리가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변화가 없다.
만남이 핵심이다.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하나님을 만나는 법은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일반적으로 추천되는 방법들입니다:
기도: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고, 인내하며, 구원을 구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며,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방법입니다.
성경 연구: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책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읽는 것은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고 그의 의지를 배우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에 가면 신앙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과 만날 수 있으며, 예배와 찬양, 기도 등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자연: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길 중 하나입니다.
이외에도 하나님을 만나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으며, 각자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서론 / 예화
먼 거리를 채우는 이미지
JTBC, 아이를 찾습니다
평범한 일상이었던 성민의 가족은 성민의 실종 이후 모든 게 무너진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굳이 경험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이 될 것이다.
성민이 사라진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를 포기할 수도 포기하지 않을 수도 없는 현실은 성민의 부모를 낭떠러지 끝으로 몰고 갔다. 남편은 직장을 잃고, 아내는 정신을 잃었다. 더 나빠질 것도 없을 만큼의 빈곤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성민 아빠는 아이가 돌아오면 이 고난이 사라질 것 같다. 다시 직장을 잡고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예전의 행복했던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포기하고 싶기도 하다. 11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아이에 대한 희망 하나로 버티기엔 너무 무겁고 가혹했다.
이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절망으로 다 놓아버리려던 어느 날,
기적처럼 아이가 찾아왔다. 하지만 잔인한 시간은 성민의 가족에게 행복을 돌려주지 않았다.
친엄마라고 믿었던 사람이 유괴범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버거운 성민은 처음 보는 친부모님과 열악한 환경의 집까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11년 만에 돌아온 성민을 알아보지 못하는 성민 엄마와 혼란스러운 성민 사이에서 생계까지 위태로운 성민 아빠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의심과 두려움이 가득한 성민과의 거리감을 좁히기에 11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적응할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서로에 대한 원망과 오해의 골은 깊어지고, 성민의 가족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자살해버린 유괴범에게 원망조차 할 수 없는 성민 아빠는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하는지, 가혹한 운명이 원망스럽다.
조현병이 심해진 성민 엄마의 실족사로 성민과 아빠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져 버리고, 성민은 가출을 한다. 그토록 찾았던 아이가 돌아왔는데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만 남기고 다시 이별하게 된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아픈 마음을 그리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충분히 현실적이어서 안타까웠다.
성민이 떠나고 빈 껍데기만 남은 듯 눈동자가 텅 비어버린 성민 아빠, 성민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걸까 성민이 원망스러운 걸까.
오늘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만 보아도 살짝 미소 짓는 그 모습이 너무 멋져서 행복해지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오늘은 느낌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말 한마디에도 세상에 때묻지 않고 신선한 산소 같은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오늘은 더욱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순수하다 못해 여린 마음을 가진 그런 사람 내 마음까지도 맑아질 것 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마음 비단결 같이 너무 곱고 아름다워서 바라만 보아도 기쁠 것 같은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세상이 거짓되고 모순투성이라도 그 사람은 진실되고 믿음이 가는 그런 사람과 세상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내 모든 것 털어 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오늘은 왠지 만나고 싶습니다.
그 눈빛 너무 말고 그윽한 빛이어서 다가설 수 없지만 살짝 미소라도 보내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처럼 설레임의 마음을 가져다주는 사람 바라만 보아도 행복해질 것 같은 그런 사람을 오늘은 만나서 은은한 커피 향을 마시며 긴긴 이야기꽃을 피웠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희망의 마음을 가져다주는 사람, 이끼낀 마음에 화사함으로 다가오는 사람, 오늘은 그냥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렇게 그리움이 밀려오는 날 두 손을 꼭 잡고 한없이 같이 걷고 싶은 사람 오늘은 왠지 만나고 싶습니다.
함박웃음 지으며 금방이라도 내게 올 것만 같습니다.
오늘도, 마음 고운 그 사람을 기다려 봅니다.
파레토의 법칙은 19세기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1923)가 발견했어요. 영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소득 통계를 조사하던 파레토는 당시 영국 인구의 약 20%가 영국 전체 부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답니다. 그 외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확인되었고요. 일본 곤충학자 하세가와 에이스케는 곤충 세계에서 이와 비슷한 현상을 찾아냈어요. 에이스케가 개미를 관찰한 결과 개미의 종류와 무관하게 일개미 중 70% 정도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자기 몸을 핥거나 하릴없이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꿀벌도 일벌 중 20% 정도만 열심히 꿀을 모으러 다녔다고 해요. 신기하게도 열심히 일하는 20%의 꿀벌을 따로 떼어놓으니 이 무리 중 20%만 열심히 일을 하고 나머지 80%는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대요. 1940년대 말 루마니아 출신 경영 컨설턴트인 조지프 주란(Joseph Moses Juran ·1904~2008)은 이런 현상이 기업 경영에서도 나타난다며 이를 '파레토 원칙(Pareto principle)' 또는 '2080 법칙'이라고 불렀어요. '기업에서 발생하는 문제 중 주요한 20%를 해결하면 나머지 80%는 저절로 해결되더라'는 게 주란의 말이었습니다.
이후 파레토 원칙은 사회 곳곳에서 다양하게 관찰되었어요. 한 기업을 관찰하니 전체 직원의 20%가 전체 업무의 80%를 처리하고, 기업이 내놓은 제품 중 20%가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범죄 현황을 분석하니 전체 범죄자의 20%가 전체 범죄의 80%를 일으켰다고 하고요. 우리나라도 현재 소득 상위 20%인 사람들이 우리나라 전체 소득의 70% 정도를 벌고, 납부된 소득세의 90% 정도는 소득세를 많이 내는 상위 20%가 낸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기업들은 파레토 원칙을 경영 전략이나 마케팅 기법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VIP 고객을 위한 특별 매장이나 별도의 휴식 공간을 제공하는 것도 파레토 원칙을 바탕에 둔 것이에요. 통계적으로 보면 백화점 전체 매출의 80% 정도가 전체 고객의 20%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그래서 백화점은 이 20%에 해당하는 VIP 고객에게 여러 혜택을 주어 이들이 더 많은 돈을 쓰도록 해 매출을 늘리는 마케팅 전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파레토 원칙은 씀씀이가 큰 손님이나 단골손님이 기업이나 가게 입장에서 아주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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