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후에 찾아온 진실한 만남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➃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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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e 5:1–11 NKRV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여러분, 혹시 가수 양희은 씨가 부른 <내 나이 마흔 살에는> 이라는 곡을 아십니까? 가사가 이렇습니다. 봄이 지나고 다시 봄 여름 지나도 또 여름
빨리 어른이 됐으면 난 바랬지 어린 날엔
나이 열아홉 그 봄에 세상은 내게 두려움
흔들릴 때면 손잡아 줄 그 누군가 있었으면
서른이 되고 싶었지
정말 날개 달고 날고 싶어 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어떻게 이겨 나갈까
무섭기만 했었지 가을 지나면
어느새 겨울 지나고 다시 가을
날아만 가는 세월이 야속해 붙잡고 싶었지
내 나이 마흔 살에는
한창 젊었을 때는 정신없이 살다 보니 서른을 지나 마흔을 향해 가는데 뭔가 속 빈 강정처럼 허무하다는 것 아닙니까? 젊은 시절에는 늘 여름인 줄 알았죠. 그런데 어느덧 인생의 가을이 왔음을 알고 가는 세월이 야속해 붙잡고 싶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어쩌면 뻔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바쁘게 바쁘게 지치는 일상을 견디는지도 모릅니다.
주일에 교회에 오시는 분들 특히 40대 중후반의 남자 성도님들을 보면 가끔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로 예배에 참여하시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아예 어느 날은 너무도 지친 나머지 교회에 올 엄두를 못 낼 때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말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사는 것 같아요. 직장생활하면서 무능하다는 소리 들을까 봐 ‘뒤늦게 뭐라도 배워야 하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올라오고 여성들의 경우는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차별을 겪으면서도 견뎌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주부들이라고 다를까요? 충분히 능력이 있으면서도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정주부로 사는 게 별 의미가 없어 결혼을 가능한 늦추고 결혼을 하더라도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있었는데요. 남자 대학생들에게 “결혼하면 가사를 분담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90% 이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 대학생들에게 주부가 하는 일 100가지 리스트를 보여주면서 이 중에 무엇을 하겠느냐고 재차 물으니까 대부분 “그때그때 맞게 하겠다” 이렇게 대답했다는 겁니다. 뭔가 아직은 의지가 약해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100가지나 되는 집안일에 주부는 지쳐가고, 또 남편들은 그들 나름대로 지쳐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흔을 지나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는 게 우리 인생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일상에 지친 한 자영업자를 만날 수 있는데,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베드로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가 1세기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살았다면 딱 이러지 않았을까요? 잘 아시다시피 베드로는 갈릴리를 주 무대로 활동한 베테랑 어부였습니다.
당시 성서 시대의 어부는 참 고된 직업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밤에 고기를 잡았는데, 당시 고기 잡는 그물이 ‘세마포’로 만들어져서 낮에는 그물이 물속에서 훤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들이 알아서 그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니까 어두운 밤에 그물을 내렸던 것이죠.
당시 어부들이 근무한 시간은 주로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였는데, 요즘처럼 기계로 움직이는 배도 아니기에 호수의 중앙까지 열심히 노를 저어서 가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갈릴리 호수라고 하니까 얼마나 크겠나 싶지만, 갈릴리 호수는 남북으로 길이가 21km, 동서로는 12km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라고도 부르지 않습니까? 호수 가운데로 가려면 아무리 짧은 단거리를 노를 젓는다고 해도 6km를 저어서 가야만 했던 것이죠.
게다가 당시 어부들이 제대로 된 작업복이 있었겠습니까? 그 흔한 우비도 없어서 갈릴리 어부들은 늘상 젖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물도 자주 엉켜서 수시로 물속으로 들어가 엉킨 그물을 정리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밤에는 또 물속이 얼마나 차가워요? 물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추워서 덜덜 떨어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혹독한 체험 삶의 현장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이른 아침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배를 대고 그물을 정리하던 부근에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밤새 칠흑 같은 어둠과 추위 속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물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의 귀에 예수님의 설교가 들어올 리가 있습니까? 그냥 허탈한 심정으로 그물을 씻고 말리는 거예요.
낚시를 자주 하시는 분들은 고기를 못 잡을 때도 있지만, 그것은 취미라서 ‘그런 날도 있지’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생업으로 하는 일 아닙니까? 식당으로 따지면 온종일 한 테이블도 없었던 거예요.
그렇게 밤새도록 야근을 해서 몸은 천근만근인데,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 그물 다 씻고 퇴근하는 길이 어떨까요? 피로감과 상실감만 가득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베드로가 가정이 있었잖아요? 그렇게 지친 몸과 마음으로 퇴근한 베드로가 가정에서 어땠을까 상상해보니까요. 딱 이 시대에 3,40대 아빠들의 모습이었을 것 같아요. ‘아 혼자 있고 싶다’ 이런 거죠.
그렇게 야근 후에 지친 모습으로 퇴근을 준비하는 남편들, 가족을 다 내보내고 홀로 100가지의 가사 일을 하는 주부들에게 예수님은 오늘도 찾아가십니다. 1절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게네사렛 호숫가’는 바로 갈릴리 호수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고, 그 근처에서 베드로가 배를 댁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별 상관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무리가 모였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뭐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씻으면서 멀리서 들리는 그 이야기를 한쪽 귀로 듣고는 있었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야. 저 모임은 종교모임이잖아’ 하면서 ‘다음에는 꼭 고기를 많이 잡아야 할 텐데’ 그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쪽 귀로 흘려듣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시는 거예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두 가지 명령과 베드로가 극복한 두 가지 태도를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먼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두 가지 명령 중 첫 번째는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 놓기”입니다. 3절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님께서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떨어뜨리신 이유는, 몰려든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서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덕분에 어떻습니까? 베드로만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그분의 설교를 자세히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사실 인근에 다른 배도 있었는데, 굳이 베드로의 배를 선택하신 이유가 뭘까요? 베드로 한 사람에 관한 관심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참 이상하신 분이에요. 그 많은 무리를 어떻게든 은혜를 끼쳐서 다 제자 삼으면 그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그런데 말씀을 들으러 온 무리가 아닌, 허탈하게 그물을 씻으면서 지칠 대로 지친 베드로에게 관심을 가지시더라고요.
어쨌든 베드로는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어,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하면서도 막무가내로 배에 올라탄, 예수님의 그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이런 만남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위대한 사도였던 베드로인데, 너무 어설프게 만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그때의 경험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모태 신앙인이었지만, 학창시절에는 예수님보다 교회 형, 누나들을 더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간 게 아니라, 형들과 농구 경기를 하기 위해 갔습니다. 당시에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 ‘슬랭덩크’ 제 학창 시절에 농구인의 피를 끓게 했던 것들이었거든요.
그러다가 스물일곱 살 여름에 청년들과 함께 간 금식 수련회에서 제대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저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고 기대도 없었던 그저 가자고 해서 갔는데, “어, 어 하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는지 아세요? ‘내가 그분을 만나야지’ 작정하고 만나는 것보다 베드로나 저처럼 “어, 어, 하다가 만납니다.” “어 어” 하다가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오시거든요.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그러셨고요. 니고데모와 삭개오에게도 그러셨습니다. 우연을 가장해 찾아오시는 거죠.
그런가하면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두 번째 명령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기”는 것입니다. 4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아니, 밤새 허탕 치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는데 다시 그물을 내리라니요? 당시 물고기들은 아침이나 낮에는 얕은 쪽으로 이동하고 밤이 되어야 깊은 쪽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제가 베드로였다면 “하던 설교나 마저 하시고 좀 내려주시죠. 저 이제 퇴근해야 합니다.” 이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상한 대답을 하는 거예요. 5절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는” 위대한 순종이 뒤따릅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죠. 6절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난 어획량, 동료의 도움을 요청해야 할 정도의 만선의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요. 4절 말씀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21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한 번 더 만선의 기쁨을 주신 적이 있는데요. 이때도 비슷한 제안을 하십니다. 요21:6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이 요한복음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셨을 때이거든요. 이때는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왜 하필 물고기를 잡는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거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을까요? 피곤한데 이왕이면 베드로를 좀 배려해 주시면 안 됩니까? 가깝고 얕은 곳이나 내가 편한 쪽으로 그물을 던지면 안 되나요?
창세기 13장 10절부터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아브람과 조카 롯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정든 고향을 함께 떠난 이 두 사람이 각각 재산이 많아지자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서 서로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모종의 합의를 하는데요. 각자 어디로 갈 건지를 정하게 되는 거죠. 이때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줍니다. 창13:10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물이 넉넉하고 꼭 여호와의 동산이나 애굽 땅과 같은 곳을 선택합니다. 롯 스스로가 “눈을 들어” 선택한 곳이죠. 세상 적인 눈으로 보니 너무도 좋은 명당인 거에요. 그러나 그곳은 소돔과 고모라 타락한 땅이었기에 훗날 유황불에 멸망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아브라함은 선택을 보십시오. 창13:14,15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너는 눈을 들어” 룻과 달리 아브라함의 선택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눈을 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서남북 어디를 바라보든지 어디로 가든지 이미 약속하신 자손의 축복을 주신다고 확인시켜 주시는 것을 보세요.
여러분, 이 두 사람 모두 눈을 들었지만 그 주체가 누구입니까? 룻은 자기 자신이 눈을 들어 좋은 땅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동서남북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가라는 곳으로 갑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중요한 것은, 누가 그 결정의 주체인가 하는 점입니다. 룻처럼 내가 눈을 들어 결정하는 ‘나 자신인가?’ 아니면 내 눈을 들게 하시는 ‘하나님이신가?’ 하는 점이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장소 이런 거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왜 하필 깊은 데냐? 그러면 어디가 깊은 데냐? 누가 봤을 때 오른편이냐?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큰 결정 가운데 누가 주체가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삶의 주체가 바로 나 자신이면 ‘어디를 선택해야 물고기가 많을까?’ ‘성공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고민하게 되겠죠. 그러나 내 삶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면 나는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의 복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 뭔가 확증을 보여주면 순종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에 의지해서 먼저 순종하게 됩니다. 그 결과를 아브라함과 베드로를 통해 보여주시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어떤 큰 결정을 앞두고 계십니까? 혹시 예수님께서 어떤 제안을 하시지 않던가요? “깊은 데로 가서” “오른편에서” “그물을 내려라”
부디 우리 모두가 내가 주체가 되어 계산기를 두드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는 인생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실 제가 예전에 이 본문을 읽을 때는 ‘그럼 이제부터 베드로처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는구나!’ 이렇게만 받아들였는데, 베드로에 대해 알면 알수록 참 귀한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베드로가 두 가지를 극복하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첫 번째는 “피로감”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야근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기 때문에 극도의 허탈감과 피로감에 정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순간에 “다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고 명령하신 거죠. 차라리 그렇게 말씀하실 거면 그물을 씻기 전에 하시지 다 씻고 난 다음에 그러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어떻게 호수 중앙까지 6km를 또 노를 저어서 갑니까? 수십 년간 낮과 밤이 바뀐 바이오리듬을 다 깨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이 육신의 한계와 내면의 상실감을 극복하고 순종하더라고요.
두 번째로는 “자신의 경험과 자존심”을 극복했습니다. 베드로는 말 그대로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 아닙니까? 이미 해가 뜨고 나면 세마포 그물을 내려봤자 물고기들이 그물 안으로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같은 동종업계에 있는 분도 아니고 전직 목수가 어부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니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아니 내가 오늘만 좀 실적이 이런 거지, 계속 이런 줄 아시나?’
다른 분야에서는 몰라도 물고기 잡는 데는 베드로 나름의 오랜 경험과 자부심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베드로가 이걸 극복한 것입니다.
요즘은 벼룩이라는 것을 주변에서 보기가 어려운데요. 이 벼룩은 지상에서 60cm 이상 뛸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자신의 몸에 몇십 배까지 뛰게 됩니다. 그런데 이 벼룩은 30cm 높이의 유리컵에 가두어 두면 벼룩은 유리컵 이쪽저쪽에 머리를 부딪치다가 나중에는 28cm까지만 뛰게 되는데요. 놀라운 것은 그 유리컵을 치워도 계속 그 높이로만 뛴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도 자라면서 일상에 치이고 자신의 한계치를 경험하다 보니까 ‘나는 28cm밖에 못 뛰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고 인생이 다 그렇게 흘러가는 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60cm 정도는 충분히 뛸 수 있어”라고 하시거든요. 이를 위해서는 나를 제한하는 유리컵부터 치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물을 다시 모아서 깊은 곳으로 가라고 하시거든요.
우리는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다고 하니까요. 아~ ‘베드로는 이때부터 큰 믿음을 가졌구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5절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마치 베드로가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문에는 “의지하여”가 없어요. 원문대로 해석하면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일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베드로가 “잡은 것이 없지마는” 하고 한 2, 3초 정도 망설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반신반의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그 부족한 믿음일지라도 반신반의하면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면 된다는 거예요.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신앙이 점프하는 것은 없습니다. 때로는 어리석어 보여도 말씀이 주는 도전대로 반신반의하면서 해보는 것이죠. 찬송가 545장 다 아시잖아요?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아브람처럼 베드로처럼 안 보이고 안 들린단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주저앉질 않습니다.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걸어가세 믿음 위에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버리고”
여러분, 베드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반신반의하면서도 노를 저어서 깊은 데로 가 그물을 내린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보인 행동을 보세요. 8절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말씀에 순종하여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면 ‘정말 대단하시군요. 앞으로 우리 어부 조합에 고문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래야 정상 아닌가요? 그런데 무릎을 꿇고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베드로의 가슴 속에서 이 고백이 먼저 터져 나옵니다.
예수님을 만난 죄인은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무릎을 꿇고 바다와 물고기를 다스리시는 신적인 존재 앞에서 두려움 아닙니까? 여러분, 지금 이 예배당에 우리 주님이 갑자기 나타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 같으면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아요. “아니, 주님 벌써 오셨나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 이 고백이 가슴이 저리도록 터져 나오는 경험을 하고 있다면 신앙의 단계를 잘 거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두려움에 자리에만 있게 하시질 않습니다. 10절 중반부
10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먼저 사람 낚는 어부라 되라고도 하시지도 않았고요. 베드로에게 당일 포획량 1위라는 성과를 주시기 위해 기적을 만드신 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코칭해 주시는 고문이 아니십니다. 내가 자신 있어 하는 분야에서 바로 그 삶의 자리에서 순종하길 원하시는 분이세요. 내 직업, 오랜 신앙 경력, 심지어 내 자식의 문제도 내가 잘 압니다. 그러나 바로 잘 알고 있는 그 자리에서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뭐 복잡한 생각을 하면 예수님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성경읽기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세계에 주님을 초청해서 주인으로 인정하는 방법이 성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깊은 데냐?”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분석하는 게 아니라, 먼저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직장, 재정, 자녀를 잘 관리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내 자아마저 빼앗기질 않길 원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자아가 더 무너지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물이 찢어지듯이 내 마음이 십자가 앞에서 찢어져야 합니다. 무너져야 합니다. 우리를 깊은 데로 떠밀어 내듯이 불안하기만 하고 아무런 역사가 없는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뭔가를 제안하셨을 때, “저는 아닙니다!”라고 반응하질 않길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베드로처럼 끌어내고 싶어 하십니다. 28cm만 뛰라고 우리를 이렇게 존귀하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에게 일어난 이 신기한 일은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양희은 씨의 노래처럼 바쁘고 허무한 마흔을 넘어, 쉰, 예순을 지나가는 피곤한 일상이라 할지라도 자기 중심성에서 빠져나온 분들은 더이상 눈에 보이는 가치만을 위해 살지 않더라고요.
오늘도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를 찾아오십니다. 이제 주님을 향해 마음을 좀 더 열어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을 탐구해 보십시오. 진실하게 마주해 보시고 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보십시오.
지난 이천 년간 수많은 사람이 경험했던 신기한 일이 바로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도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은혜와 사랑이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바로 이 찬양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 가사를 생각하면서 함께 부르겠습니다.
❙찬양 :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합심기도
우리 함께 기도하길 원하는데요. 여러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을 전직 목수로만 여겼다면 그는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베테랑 어부라고 할지라도 반신반의 하면서도 호수 중앙까지 노저어 가며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을 찢어지도록 수확하는 만선의 기쁨을 주시는 것 아닙니까?
오늘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제안을 하십니까? 베드로와 같이 반신반의하면서도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 한 번 해보겠다고 반응해 보시지 않겠어요? 오늘 주신 말씀을 가지고 한목소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 기도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인생이 이십 대, 삼십 대 언제나 여름일 줄 알았는데, 마흔을 지나 어느덧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남은 세월을 붙잡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밤새 그물을 내려보지만,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왜 이렇게 허탈함은 밀려오는지요?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저도, 우리 성도님들도 21세기의 베드로와 같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제 인생의 배에 올라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시는 제안에 한 번 해보겠다는 순종의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베드로의 그물처럼 더 찢어져야 하고 더 무너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를 죄인취급하시지 않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장차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손 내밀러 주심을 붙잡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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