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5 viewsNotes
Transcript
2장 2부 교회 역사 속의 총체적 복음 사역
1. 초대교회부터 중세까지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복음에 열정으로 따랐다. 특히 구제에 관해 열심이었는데, 이는 야고보의 가르침, 요한의 가르침 등 사도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교회를 통해 계속 전수되었으며 클레멘트와 바나바 서신, 헤르마스의 가르침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 또 찾아볼 수 있는 것은 2~3세기에 기록된 변증가들의 활동에서이다. 당시 기독교를 공격하는 여러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를 변호하기 위해 기독교의 고귀함을 이야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나눔과 섬김이 드러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며 복음을 따르는 것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의한 구제에서 미래의 상급을 기대하며 자선을 하는 것으로 동기가 변하게 된다. 순교자 유스티누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에 대해 여러 묘사를 해준다. 동시에 아리스티데스의 기록도 이와 유사한 말을 하는데, 결국 기독교인들이 사랑이 넘쳐 남을 돕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변화를 맞이한다. 기독교는 강한 힘을 얻게 되었고, 곧이어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동시에 경제적 능력을 갖추며, 여러 지원을 받게 되어 교회 사역이 복음의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형식적인 행위로 변화될 우려가 생기게 되었다. 당시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자세를 고백록, 하나님의 도성 등을 통해 강조했으며, 바실레이오스는 복음의 의미를 더욱 사회적으로 적용하여 믿음과 사랑의 연합인 기독교 정신을 이어 나갔다.
중세로 넘어오며 교권은 강해졌으며 교회는 점점 더 세속화되었다. 이에 반하여 수도원 운동 으로 사회봉사와 기도 등이 일어났지만 초대교회의 동기와는 다르게 금욕과 구원의 공덕이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럼에도 예외는 있는데, 사랑의 사도인 프란치스코와 같은 사람들은 원래의 정신을 유지하였다.
2. 종교개혁 시대와 그 이후 유럽에서
1) 종교개혁자들 (루터, 칼뱅, 츠빙글리)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유럽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 선행의 개념에 관해 두 가지 견해를 밝혔다. 첫째는 공덕주의적 관점을 거부하고 사회적 책임을 갖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공로가 아니라는 것이며, 둘째로 진정한 선행은 회심 이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국가와 교회가 서로 협력과 견제를 하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가야한다는 성경의 신학적 도덕적 기준을 적용한다. 이러한 견해는 1540년대 제네바에서 사역에 반영되 실천되었다. 혼란한 제네바의 상황에서 칼빈은 종합구호원을 세워 가난과 질병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러한 칼빈의 견해는 정부에게 적극적인 구호 활동을 가능하게 했으며, 칼빈은 더 나아가 일자리 창출을 꾀하기도 했다. 또 프랑스 난민 보호소를 통해 오늘날의 자립원, 요양원의 모델을 보여주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곳에서 봉사하던 사람들이 교회의 집사였다는 점이다. 칼빈은 집사의 주요 업무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라 보았으며, 이러한 견해를 받은 집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실천하는 자리에 있도록 하였다. 제네바 교회 법령에 이러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있다. 칼빈은 집사도 두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재물을 분배, 보관, 관리하는 관리집사와 병자를 돌보고 심방하는 봉사집사가 그것이며 이들을 향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은 로마서 12장 8절 해석에 기초했으며 이를 통해 집사들이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행정을 수행하는 것이 아닌,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웃과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였다.
츠빙글리 또한 취리히에서 칼빈과 같은 관점으로 사역을 해나갔다.
2) 독일 경건주의 운동과 영국의 청교도와 존 웨슬리
17~19세기는 총체적 복음 사역이 종교개혁 이후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이는 의의를 가지는데,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약자를 위한 헌신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은 경건주의 운동이, 영국과 미국은 부흥 운동과 대각성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경건주의 운동은 슈페너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복음의 능력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시면 개인이 변화가 되고, 이를 통해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영국에선 개혁주의를 기반으로 한 청교도 운동이 일어났으며, 청교도들은 선행이 믿음의 열매임을 강조하여 생활 전 영역의 행위를 말했다. 동시에 진정한 회심을 말하며 이것이 드러나는 건 1장 27절에 기반하여 선행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선행이 구제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그것을 넘어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진정한 유익이며 진정한 구제라는 것을 말했다.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한 부흥운동이 18세기 영국과 미국에서의 운동이며 이것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핵심인물론 존 웨슬리가 있으며 그는 복음의 사회적 문제 해결능력에 집중하였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역은 총체적 복음 사역인 것이다.
앞서 말했던 영국의 사회운동에 대해 웨슬리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는 영국의 미개한 상황, 3부는 여러 사회적 환경이 개선된 영국의 상황인데, 2부에서 그 원인으로 부흥운동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웨슬리의 사회 운동은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감옥 제도의 개혁을 말했던 존 하워드, YMCA와 YWCA를 창설한 조지 윌리엄스,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엄 부스, 국회의원 안토니 애슐리 쿠퍼 등이 있다.
3) 영국의 양심 윌리엄 윌버포스
특히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에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당시 영국 경제의 기반이 되었던 비인간, 인격적인 노예제도를 기득층에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이 과정에서 뉴턴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윌버포스와 함께 사회 지도층들에게 양심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들은 20년간 150번의 논쟁을 하였으며 그 결과로 1833년 영국 국회는 노예제도의 종식을 선언하게 된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문제를 계속하여 개혁하기 위해 노력한다. 비도덕적 사회 관심을 폐지하는 운동, 복권의 폐지, 의료 복지, 어린이 노동법 시행 등 가난하고 힘 없는 자들을 위해 정부가 일할 수 있도록 사방으로 노력했으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해결하려고 애썼다. 그 외에도 학교 설립, 폭력 방지, 형벌 수정 등 모든 영역에 걸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적용하려 했던 총체적 복음사역을 펼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노력의 영향으로 국회의원의 1/3이 복음주의 기독교 인이었으며 이는 선교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3. 미국 역사에서(18-19세기 초)
영국이 청교도, 웨슬리, 윌버포스 등을 통해 총체적 복음 사역이 활발하게 일어날 때, 미국에서도 하나님께선 역사하셨다.
1) 1차 대각성운동과 조나단 에드워즈
먼저로는 1차 대각성운동이 있을 것이다. 그 중심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있었는데 그의 부흥 운동은 일반적 회심이 아닌, 총체적 복음의 영역으로 교회 갱신과 사회개혁이 그것이다. 청교도 이주 초기의 경건과 거룩은 시간이 흐를수록 세속화 되어갔는데, 이는 교회의 영적 약화를 야기했다. 교회안에는 진정한 신자보단 껍데기 신자, 형식적 신자가 많아졌는데 에드워즈의 교회도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선 에드워즈의 설교로 강력하게 역사하셨고 교회를 넘어 주변과 지역의 사람들이 말씀을 통해 변화와 회심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이는 1734년 시작하여 1742년 뉴잉글랜드 부흥까지 이어진 1차 대각성운동이다. 이 운동의 핵심은 성결이었고 말슴 묵상과 기도 등을 통해 내면의 영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러한 변화는 삶에 있어 전반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는 애드워즈의 설교가 사회문제또한 포함하여 지적하기 때문이었다. 1742년엔 회심한 성도들이 정직과 참된 경제생활에 대해 언약하기도 하였다.
애드워즈의 설교는 후천년설에 기반하며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가 역사에서 확장된다는 낙관주의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땅 위에서 성도의 선행과 섬김을 말하며 적극적인 사회 운동 참여를 이야기 했다.
2) 2차 대각성운동과 찰스 피니
찰스피니는 변호사로 일을 하다가 1821년 성령을 체험하고 복음 전도사의 사역을 시작한다.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놀라운 역사를 많이 보여주었는데, 한 지역에서 5000여명의 회심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생동안 50여만 명을 회심시켰다고 하며 오벌린 대학교의 교수와 교장으로 헌신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역은 2차 영적 대각성운동에서 빛을 발하게 되는데, 이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은 다음과 같다. “진실하게 회심한 사람은 사회적 채임을 지는 일에 참여한다.” 피니는 에드워즈의 외손자 티모시 드와이트의 영향을 받아 1802년 회심하게 되었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뒤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총체적 복음 사역을 펼치게 된다.
2차 대각성 운동은 영혼 구원을 넘어 대학의 설립과 사회 정화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를 통해 사회 전반적으로 도덕성이 향상되었다. 그 결과로 감옥제도, 공공교육제도, 세계 평화, 노예제도 폐지와 같은 문제점들에 주목할 수 있는 배경을 제시해주었다.
피니는 “회심과 개혁의 불가분성의 원리”를 주장하였으며 이는 완전주의 적 부흥운동에서 제시되는 그의 신학적 관점이다. 이는 웨슬리의 제2의 축복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성결운동인데, 여기에 더해 영적 변화와 사회 개혁을 연결시켜 중생한 사람은 참 믿음으로 선한일을 추구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피니의 이해는 회심이 이웃을 위한 선행과 사회개혁, 또 사회적 책임을 위한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며 이 회심은 결국 총체적 회심이란 것에 있다. 그는 이기적인 마음이 죄의 핵심이라고 보았으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의 품성을 회복하는 사건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회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회심한 사람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서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죄악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이를 거스르는 것이며 교회도 그러한다면 성령은 교회를 떠날 것이라 주장했다.
피니의 신학은 선택교리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알미니안계열이며, 개혁신학을 하는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화가 개인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가르친다는 점, 또 거기에서 부흥의 의미를 개인적 영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죄악에서 돌이키는 총체적 회개, 총체적 성화로 보게한 의미가 있다. 결국 피니의 2차 대각성 운동은 개인적 차원의 부흥운동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이민자의 적응과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료혜택 등 사회 봉사의 차원으로 발전했다. 그 과정중에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선포와 사회봉사, 또 노예제도 폐지, 여성 인권, 교육, 감옥과 병원제도의 개혁 등 사회적 행동에 노력하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 C.C.콜은 2차 대각성 운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며 정리했다. 1) 국내외 선교기관의 조직, 2) 기독교 문서 사역의 확대, 3) 교회교육 기관들의 확장 및 갱신, 4) 생활의 개혁, 5) 사회악을 개혁하는 운동의 전개
3) 그 밖의 교단들과 선교단체들의 사역들
이 외에 구세군, 나사렛 교회 등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역을 목표로 하는 신흥 기독교 단체들로 부터 사회적 운동에 적극적인 기독교 단체들이 세워졌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복음전도와 자비 사역에 열심을 내었다.
나사렛 교회는 감리교회 목사였던 피니어스 브레시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빈민지역 사역에 감리교 총회와 논의했으나 거부당하자 1895년 나사렛 교회를 시작했다. 여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