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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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7장의 주제는 율법입니다.
율법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세 가지로 다룹니다.
하나는 신자가 율법에서 해방된 사실
둘은 율법의 목적과 기능
셋은 율법의 한계와 연약함
1-6절은 율법에서부터의 해방을 다룹니다. 특히 율법으로는 거룩하게 될 수 없고 오직 예수님과 연합함으로만 거룩하게 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7-13절은 율법을 변호합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며 선하다는 것을 옹호하면서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해 주고, 죄를 심히 죄 되게 해 주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14-25절은 율법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하지만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해 주는 능력은 없다는 점에서 연약합니다.
본론
본론
따라서 7장은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부터의 해방(7:1-6)
율법을 변호(7:7-13)
율법의 한계(7:14-25)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바울은 성도들이 율법에서 해방된 사람임을 결혼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1절은 율법의 일반적인 원리를 말하며 2-3절은 결혼 비유를 통해 율법의 일반적인 원리를 예증하며 4절은 결혼 비유를 신자들에게 적용하며 5-6절은 율법 아래 있는 불신자와 율법에서 해방된 신자를 대조합니다.
율법의 일반적인 원리(1절)
율법의 일반적인 원리는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법적인 권리와 책임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적용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법과의 관계가 끝이 납니다.
결혼 비유(2-3절)
바울은 율법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구속력이 있다는 법의 일반적인 원리를 결혼 관계에 적용합니다.
롬7:2-3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바울은 유대의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결혼법의 몇 가지 요점을 기초로 결혼 비유를 듭니다.
첫째, 결혼을 통해 아내는 남편의 권위 아래 들어갑니다.
둘째, 결혼 관계는 죽음으로써만 끝이 납니다.
셋째, 부부 중 한쪽이 사망했을 때 다른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은 합법적입니다.
넷째, 결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결혼의 열매 곧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입니다.
결혼 비유의 신자에 대한 적용(4절)
4절은 이 결혼 관계를 신자와 율법, 신자와 예수님과의 관계에 적용시킵니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율법과 결혼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통해서는 결코 거룩함이라는 아들을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율법과의 관계를 청산할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결혼한 아내가 죽습니다. 그것이 율법과의 관계가 완전히 청산됩니다.
사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마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런 다음 아내인 신자들은 예수님과 결혼합니다.
신자와 예수님이 결혼한 목적은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인 거룩함을 맺기 위한 것입니다.
즉 신자들은 율법을 통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율법의 통치와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 7장과 6장을 비교해야 합니다.
6장은 죄에서부터 자유를 다루고 7장은 율법에서부터의 자유를 다룹니다.
자유의 영역? 죄에 대하여 죽고 율법에 대하여 죽음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함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자유 후의 신분? 의와 하나님에게 종이 됨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됨
자유 후의 결과?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음과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음
신자들이 죄에서 해방된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입니다. 율법에서 해방된 것도 똑같습니다.
신자들이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신자들을 대표하여 몸으로 죽으시고 신자들을 대표하여 몸으로 부활하신 객관적인 사실에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죽음과 부활에서 연합함으로 율법에 대해 죽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결혼 비유를 통해 신자들은 원래 율법과 결혼한 자였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곧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결혼 관계를 통한 연합으로 신자에게는 많은 특권(근거?)이 따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신자의 이름이 됩니다.
예수님이 서 있는 위치에 함께 동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은 바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천사들의 섬김을 받습니다.
만물을 상속받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결혼을 통해 연합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무궁무진한 특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결혼을 통한 연합의 목적은 바로 거룩함의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불신자와 율법에서 자유하게 된 신자의 대조 (5-6절)
5절 율법에서 해방되지 못한 불신자의 상태
6절 율법에서 해방된 신자의 상태
롬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첫째, 율법 아래 있는 불신자의 상태는 ‘육신에 있을 때’라고 표현됩니다.
육신은 몸의 부드러운 부분, 즉 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눅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육신은 온몸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육신은 인간 전체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육신은 죄악 된 인간 본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처럼 원어로 ‘사륵스’라고 기록되어 있는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 ‘육신, 살, 육체’ 등의 말로 번역되는데 그 의미는 ‘살, 온몸, 인류 전체, 인간의 죄악 된 본성’ 등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5절의 육신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육신’은 지금까지 말한 살, 온몸, 인간 전체, 죄악 된 인간 본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문맥상 이 말은 불신자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7, 8장에 열 번 이상 나오는 이 ‘육신’은 기본적으로 성령 안에 있는 사람과 반대되는 말로 사용됩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라는 말입니다.
즉 ‘육신’이라는 말은 성령 아래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율법 아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인류 전체, 곧 불신자를 의미합니다.
둘째, ‘육신에 있을 때’, 즉 불신자의 상태에 있을 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의 자연적인 욕구인 식욕이나 성욕, 명예욕 등은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욕구가 지나칠 때 ‘죄의 정욕’이 됩니다.
예를 들면 반드시 성공해서 복수하고 말 거야라는 생각입니다.
죄의 정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충동질합니다.
그런데 이런 죄의 정욕은 율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의 정욕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격동되어 불일듯하게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어 하고, ‘만지지 말라’고 하면 더 만지고 싶어 합니다.
율법 자체가 ‘보지 말라’ ‘만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거나 문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율법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정욕을 일으킵니다.
하지 말라고 하니 더 하고 싶잖아!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안에 역사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참으로 죄의 무서운 성질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줍니다.
즉 거듭나지 못한 사람 속에 있는 죄의 충동은 너무 강해 율법마저 그를 구할 수 없고 율법은 오히려 죄의 충동을 더욱 격발한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 바울은 율법에서 해방된 신자의 상태를 이렇게 말합니다.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첫째, 신자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율법의 형벌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죄의 형벌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신자에게는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둘째, 신자는 이제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불신자들이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자들이라면 신자들은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5-6절은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불신자의 모습과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난 신자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2. 율법을 변호함(7-13)
율법이 죄와 사망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7-13).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지만 우리를 거룩하게 하거나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14-25).
1-6절에서 바울이 율법에 대해 설명한 것을 들은 유대인이라면 바울은 율법 폐기론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런 질문을 할 것을 예상하고 이에 답하고 있습니다.
첫째 질문은 7절의 ‘율법이 죄인가’하는 것입니다.
둘째 질문은 13절의 ‘율법이 내게 사망이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원인이 율법인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먼저 율법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첫째,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롬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알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율법의 역할이 죄를 드러내는 것임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탐욕은 십계명 중 열번째 계명에서 보여준다. 마음속으로 짓는 죄는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야고보 사도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율법이 보여 주는 것은 사람이 행동으로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단순히 행동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내어도 직접 빼앗거나 훔치지 않으면 죄로 처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기준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차원이 더 높습니다.
행동의 차원만이 아니라 마음의 차원에서 행한 것도 죄로 간주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닫게 된 것도 바로 마음으로 짓는 죄의 문제를 깊이 깨닫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예수님도 산상 설교를 통해 십계명을 내적 차원에서 적용해 설명하셨습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을 단순한 행동만의 살인이 아니라 마음의 살인 차원으로 해석하셨습니다.
마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을 이렇게 적용하셨습니다.
마5:27-28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처럼 율법은 사람들에게 죄가 무엇인지 바르게 가르쳐 줍니다.
둘째, 율법은 죄의 발판으로 이용됩니다.
롬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롬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 말씀은 죄가 율법을 악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유명한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열어 보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열어 봅니다.
열어 보지 말라는 말을 듣기 전에는 별로 상자에 관심이 없던 것인데, 열어 보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열어 보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하지 말라, 먹지 말라, 만지지 말라’고 하면 사람은 반발심으로 더 많이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죄가 율법을 이용해서 더 많은 죄를 짓게 만듭니다. 이것이 죄가 율법을 기회로 삼아 우리 안에 온갖 탐심을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과 죄와의 관계는 율법이 오기 전과 율법이 오고 난 후의 상항의 대조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율법이 오기 전의 상황-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고 나는 살았더니
율법이 오고 난 후의 상황-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둘째 질문인 율법이 내게 사망이 되었는가에 대한 답변(13절)
율법이 내게 사망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율법이 사망의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가?
바울은 율법이 저대로 사망의 원인이나 책임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율법과 사망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율법은 죄가 죄로 드러나며,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역할을 할 뿐 사망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죄의 죄 됨은 죄가 율법을 악용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율법을 발판으로 사용해 더 많은 죄를 짓도록 하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율법은 죄의 원인도 아니며 사망의 원인도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이 선함을 옹호합니다.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첫째, 율법은 거룩합니다. 율법이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율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 줍니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만큼 율법도 거룩합니다.
둘째, 율법은 의롭습니다. 율법이 의로운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공평하다. 공정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공정하거나, 불공평한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셋째, 율법은 선합니다. 율법이 선한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선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선함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율법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가볍게 여겨야 할지, 무엇을 목숨을 다해 먼저 해야 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생을 얻는 길인지 가르쳐 줍니다.
율법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율법의 요약이 십계명입니다. 하나님만 예배하고, 우상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고, 안식일을 지키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십계명을 둘로 요약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에 문제가 없습니다.
3.율법의 한계(14-25절)
율법에 한계가 있는 이유는 불신자 속에 내주하고 있는 죄 때문입니다.
죄가 불신자의 주인으로서 불신자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주인처럼 지배하는 곳에서 율법은 불신자를 의롭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지도 못합니다.
이는 마치 약도가 시각 장애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약도가 시각 장애인의 눈을 밝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지만 율법이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14-25절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4-20절은 율법 아래 있는 불신자의 주관적인 상태
21-25절은 율법 아래 있는 불신자의 객관적인 상태
율법 아래 있는 불신자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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