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9_주일예배_암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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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기근

본문: 아모스 8:11-14
Amos 8:11–14 NKRV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만일 우리들이 단 하루라도 '말'이 없이 지낸다면 어찌 될까요? 몸이야 밥만 먹으면 목숨을 유지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너와 나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말' 없이는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말이란 자기주장의 수단이요, 의사소통의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도의 영적.정신적 경지에 있는 수도사들은 오히려 '말'의 허망함을 강조하고 '침묵의 명상'을 통한 영적.정신적 깨달음과 교류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상적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말'이 사라지면 일상의 삶 자체를 유지하기 어려워집니다. 오히려 지독한 고문이 되겠지요. 오늘 아모스의 말씀은 조금 이상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기근이 내릴 터인데, 밥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의 기근'입니다. 자연적 재해로 인한 '기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말씀의 기근'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찾아 헤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젊고 씩씩한 남녀까지 쓰러지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모스가 활동하던 때는 북 이스라엘이 가장 번영하던 때였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최고의 절정에 다다른 시기로, 통치자들과 권세가들은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고 하던 시절입니다. 거짓 예언자 아마지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소위 '예언자'라 자칭하던 사람들까지 권세가들과 더불어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다'면서 꿍짝을 맞추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 번영을 구가하던 시절, 그 번영의 혜택을 누린 지도자들이 향락에 빠져 있던 시절, 하나님께서는 시골의 농부 아모스를 불러 자신의 뜻을 선포하십니다. 8장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에게 환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은 '다 익은 과일 바구니'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바로 그와 같은 상태에 이르렀으니 이제 어찌할 도리 없이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온갖 속임수와 못된 짓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힌 세도가들을 질책하며, 이어 오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기근'을 내린다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우선, 이것은 인간은 빵으로만, 물질적 조건으로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인간의 삶이 무가치해지고, 그것은 결국 죽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이와 같은 원칙적인 해석만으로 충분히 해명된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기근'은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는 상황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는 상황, 이것은 하나님께서 깊은 명상의 세계에 들어가, 우리 인간들더러 자신의 뜻을 깨달으라고 기다리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조차 아예 부르지 않는 상황도 아닙니다. 아예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는 상태라면, 하나님의 침묵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침묵은 인간을 일깨우는 심판으로서의 의미도 지니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있든 없든, 잘 되었든 못 되었든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은,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찾으려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에서 동으로 찾아 헤맨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애쓰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애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모스서를 들여다 볼 것 같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가운데 '종교적 생활'을 결코 방기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꼬박꼬박 지켜야 할 절기들을 잘 지켰고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활이 '익은 과일'처럼 정점에 이르러 이제 더 이상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마침내 하나님 말씀의 기근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은, 그러한 종교적 생활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잘못된 상태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순례절이 싫어 얼굴을 돌리고, 축제때마다 바치는 분향 냄새를 역겹게 여기고, 제물들을 거들떠 보기도 싫어지고, 노랫소리와 악기 소리마저 귀찮아진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인간들의 상황에 기가 막혀 말문을 닫아 버린 상황입니다. 결국 오늘 아모스가 전하는 상황은, 물질적으로도 축복을 받고 종교적 신앙생활도 별 문제 없이 할 바를 다 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 때에는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일까요? 끝없이 어떤 대의의 목적을 추구하며 내달리고 있는 것 같으나, 지금까지 자기가 지켜 왔던 기득권과 생활양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해 만족할 만한 어떤 것을 찾아 나서지만, 끝끝내 만족감을 누릴 수 없는 무한한 욕망을 향해 달리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자신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고, 애써 부르짖는 하나님마저도 그 욕망을 위한 후견인에 지나지 않는 상황입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과의 대화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주장과 요구 사항만을 늘어놓는 독백과 자기고집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재난보다도 더 심각한 재난입니다. 아모스는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대의를 향해 달리는 겉으로 드러난 진지한 모습과 달리 사실상 자기만의 세계에 더욱 집착합니다. 무엇을 해도 만족스럽지 않고, 무엇을 해도 신나지 않기 때문에, 만족스럽고 신나게 해 줄 만한 뭔가에 탐닉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상숭배가 시작됩니다. 자기만의 세계를 절대시하는 우상, 자기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에 대한 우상을 추구합니다. 돈만을 절대시하는 것, 명예만을 절대시하는 것, 지식을 내세우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우상숭배입니다. 심지어는 '신앙생활'마저 우상숭배로 전락시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허해지는 삶을 살기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기과신을 위한 신앙생활, 자기의(자기의 정당성)을 위한 신앙생활, 그것은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모스가 경고했던 형식뿐인 종교의식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14절의 말씀은 말씀 기근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합니다. 사마리아의 우상을 의지하고, 단의 신과 브엘세바의 신을 두고 맹세한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와 같은 신들을 애초부터 섬기는 이방인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바로 야훼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를 숭배하면서도 특별히 개개인의 사적인 용무를 위해서, 옛부터 믿어 오던 지방신들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각자의 우상을 따로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돈과 명예와 지식 등 따로 우상을 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질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턱이 없습니다. 자기 눈 앞에 있는 우상과 훨씬 더 쉽게 교통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삶은 곧 죽음이며 재난이라고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사회는 정말로 자기만족의 세계에 갇힌 삶을 누리기에 아주 좋게 되어 있습니다. 거의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보이는 신세대들의 행태만이 자기만의 세계에 탐닉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곁 사람에게 눈길을 돌리거나 삶의 또 다른 멋과 맛을 추구하지 못한 채 살아온 기성세대들도 그 나름의 자기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살 만하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니까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해 왔던 세대와 그 혜택을 누리는 세대 사이에 심각한 장벽이 놓이게 된 것이 오늘 우리 현실입니다. 이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이 양자를 뛰어넘을 수 있는 참다운 가치기준의 제시, 곧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자기만의 세계, 자기만의 말의 논리에 매여 있는 삶은 죽음입니다. 더 이상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 서로 말이 통하고 서로가 서로를 아는 세상, 그것이 참다운 삶입니다. 그 삶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끊이지 않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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