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9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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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이 되려거든 종이 되어라
으뜸이 되려거든 종이 되어라
하늘고 친구들, 오늘도 함께 이자리에서 만나 말씀을 나누게 되어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다들 한주 잘 지냈죠?
우리 오늘도 함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함께 누리는 오늘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스포츠 좋아하시나요? 뭐 축구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고, 요즘 슬램덩크를 통해서 농구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아마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야구를 되게 좋아합니다. 중학교때 즈음으로 해서 야구에 대해 알게되고, 깊이 빠지게 되었는데요,
야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6년도 WBC 1회대회 였구요, 매력을 알게 된 것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프로야구에 가장 핫하고 잘하는 팀이 인천에 있던 SK 와이번스 였기 때문에, 저도 그 당시에 인천에 살았었구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거의 10년이 넘게 SK와 SSG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여튼 그렇게 야구를 엄청 좋아하기 때문에 뭘 기다렸냐면요, 최근에 있었던 WBC를 기다렸습니다.
제가 국제대회를 통해서 야구의 매력을 알았기 때문에 국제대회가 주는 즐거움을 너무나도 다시한번 느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지난 두번의 대회, 2013년과 2017년에 예선탈락을 해서 이번에는 다르겠지라는 마음으로 몇달동안 기대하면서 이번 WBC 대회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마 모든 친구들이 알겠지만, 그리 좋지 않은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죠. 그래서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국가대표 선수들과 그들의 경기력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리들을 하곤 했습니다. 물론 저도 그런 마음이 들기는 했죠.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 선수들을 그렇게 뭐라고 했을까요? 결과적으로는 예선탈락을 했기 때문이겠죠. 내가 아는 한국 야구는 그정도가 아닌데, 이기지도 못하고 져서 돌아오고 말았으니, 그러한 분노와 아쉬움의 마음들에 휩싸이고 말았을 거에요.
어쩌면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점수대가 있는데, 그것을 넘어선다면 너무나도 기뻐하고, 반대로 그것보다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화가나고 슬퍼하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사실 일상 속에서 누군가를 딛고 위에 서고, 이겨내고 하는 것을 기뻐하고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지고 무너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분명 우리는 이런 경쟁과 줄세우기 이런 것들을 그렇게 좋지 않다고 생각을 하며 살아갈거에요.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결국에 자신이 누군가를 이기면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만의 모습은 아닙니다. 옛날 역사만 보아도 모든 사람들은 가장 앞에 서기를 좋아하고, 누군가를 이기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삼국지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죠.
그렇다면 이러한 경쟁심리, 이기고자 하는 마음들은 어쩌면 인간에게 당연한 것일까요? 더 뛰어난 사람이 남고, 열등한 사람은 도태되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일까요?
오늘은 말씀을 보면서 그 질문들에 대해 성경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함께 나누어보도록 해볼게요.
자. 오늘 말씀 처음을 보면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죠. 여기서 세베대의 아들이 누구냐면, 예수님의 제자들 중 두 사람인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 두 형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들을 데리고서 절하고 무엇을 구했던 거에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그러자 어머니는 말합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결국 무슨 이야기에요? 인사 청탁을 하는 장면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습니다. 뭐 농담으로 인사 청탁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기대하고 있는 어떤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죠.
혹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예전에 제가 여러분들께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의 존재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했었어요. 다들 기억하시나요?
아마 기억하지는 못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자면,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는 그냥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해줄 그런 구원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어떤 구원자냐, 바로 지금 로마의 압제하에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다시금 다윗의 나라와 같이 일으킬 그런 정치적인 구원자였습니다.
마치 이전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금 군대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지배에서 구원해줄 사람을 기대했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헛된 기대를 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황폐화 된 후에,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계속적으로 회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이러한 말씀만 보아도 유대인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스라엘의 국가를 세우실 것이라고 믿게 되었을 거에요.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분명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하시는 것들을 보면서, 그가 정말 주께서 보내신 메시야라고 생각을 했었죠.
하지만 제자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기대한 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들과 달랐습니다. 바로 다른 유대인들이 원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게 다시금 독립을 선사해 줄 독립군 대장과 같은 메시야를 원했던 것이죠.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이러한 부탁을 한 것입니다.
‘분명히 이후에 이 메시야께서 이스라엘을 새로 세우실 텐데, 미리 이분에게 이야기를 해놔서 내 아들들이 그 나라에서 총리자리라도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한 것이죠.
그러자 예수님은 2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할려는 이 일을 너희가 할 수 있겠어? 라고 말이죠.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와 요한이 생각한 ‘예수께서 행하실 일’이 실제로 행하실 예수님의 일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오늘 말씀 바로 위에서 본인이 행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이고, 부활하실 것까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 뜻을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죠. 아마도 이 이야기를 비유적인 것으로 이해했거나, 아예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야고보와 요한의 말을 보면 분명히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으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진정한 뜻을 야고보와 요한이 알았더라면 할 수 있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내 옆에서 같이 싸워줄 수 있느냐’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물론 너희가 그 일을 행할 것이지만, 너희가 원하는 내 좌우편의 자리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들이 얻을 거야. 라고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서 너희가 물론 그 일을 행할거야! 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야고보와 요한, 이 두 제자들이 결국에는 주의 일을 행하기 위해 고난을 당할 것임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야고보는 이후에 순교하게 됩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그리고 요한의 경우에는 순교를 하지는 않지만 전승에 따르면 밧모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마신 잔을 함께 마셨던 것을 확인할 수 있죠.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좌우편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은 오늘 말씀 후반에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에 대한 말씀을 미리 하셨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4절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을 제외한 열명의 제자들이 이 다른 두 제자가 예수님께 인사청탁을 하는 것을 보고 화를 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들은 화를 냈을까요? 이들이 인사청탁을 하는 죄악을 범했기 때문에?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요, 사실 이들의 분함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기보다도 먼저 예수님께 이야기를 했다는 것에 분노를 한 것이었죠. 선수를 뺐겼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 속의 그 생각들을 다 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첫 말씀은 25절 하반절의 말씀인데요,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이방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고관들이 권세를 부리는 것을 너희가 알거야’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이냐면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의 경우를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택함받지 못한, 지옥에 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지 못한, 세상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시고 이방인이라고 하셨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할 것 같아요.
결국 세상의 사람들은 그들의 백성들을 자기 맘대로 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권위로 갑질을 한다는 뜻으로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갑질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는 것을 보면 말이죠.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핵심 말씀은 26절과 27절에 등장합니다.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세상의 사람들과 반대된, 너희 택함받은 사람들은, 세상의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라고 하시는 것이죠.
너희는 너희가 지금 하는 것처럼 남보다 올라서려고 한다면 남들을 섬기는 사람이 될 것이고, 최고의 자리에 서려고 하는 자는 너희중에 가장 낮은 종의 자리에 서게 될 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처음 들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최고가 되려고 하는데 오히려 낮아질 수가 있느냐는 것이죠.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줍니다.
바로 택함받은 사람들이 향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남들을 즈려밟고 올라서는 사람들이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받혀주고,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 남들을 섬기는 자들이야말로 최고의 자리에 서게 된다라는 것이죠.
아까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가 바로 이러한 자들에게 주어진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는 이 모습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듣던 제자들 역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구절에서 쐐기를 박으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등장하는 인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신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에요.
내가 이야기해도 잘 모르겠지? 너희는 내가 세상의 왕으로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나는 섬기려 왔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낮은자가 높아지고 높은자가 낮아지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이땅 가운데서 스스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높은 사람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소외를 받는 죄인들, 병자들, 여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발을 씻는 섬김을 행하셨고, 결국에는 말씀하신 그대로 자신의 목숨을 모든 피조물의 대속물로 주시는 가장 큰 섬김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행하시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정말 낮은 자리에서 높아지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어요. ‘에이 그렇게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모습은 예수님이니까 하실 수 있는 것은 아닌가요?’
하지만 그 모습은 이땅 가운데서도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바로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말이죠.
실제로 초대교회 공동체에는 이러한 섬김의 모습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 중 한명인 바나바는 자신의 모든 밭을 팔아 그 돈을 성도들에게 나누었구요, 다른 성도들 또한 서로의 것을 서로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은 없는 이에게 나누고, 자신에게 없는 것은 다른 이의 헌신을 통해 채우는 그러한 모습들이 초대교회에 존재했다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이 교회 공동체에도 이러한 모습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모습이 반드시 이러한 재정적인, 경제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의 마음을 그들의 허전한 마음 가운데 채워주고, 그들이 외로울 때, 그 빈자리를 우리 공동체가 함께 채워주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모습..
어쩌면 이러한 모습들이 서로를 섬기고 서로에게 낮은 모습으로 나아가는 모습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하임 공동체는 어떨까요? 우리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학교라는 곳에서 서로의 모습이 점수라는 수치로 나타나기에 세상적 환경에 정말 말그대로 바로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 하임공동체는 달라야 합니다. 내가 저사람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해서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부족함을 내가 가진 것으로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는 모습들이 우리 공동체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 하임 공동체 우리 재학생들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저도 아니구요, 우리 졸업생들도 아니구요, 여러분 재학생 본인들일거에요.
여러분들이 힘들 때, 외로울 때, 가장 근처에서 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재학생 공동체라는거에요.
그러니 우리 하임 공동체 서로서로가 항상 서로를 위해 돕고 섬길 수 있는 그러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주중에도 모이고 하죠? 저도 저번주에 한번 방문했었는데, 어찌보면 짧은 30분이라는 시간이지만, 함께 모여서 서로를 위한 나눔을 하는 모습들을 보니 너무나도 귀하더라구요.
아마도 주님께서도 여러분의 이 모습을 보고 기뻐하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가 바로 이런 모습이에요. 막 신학을 잘 깨우치고 이단들을 몰아내고 이런 것이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서로를 섬기고 서로를 사랑으로 감싸는 이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이것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방식대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방식대로 서로를 위해 섬기며 주님과 함께 높아질 수 있는 우리 모든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찬양은 주안에 우린 하나입니다. 서로를 축복하면서 함께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놓고
공동체를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