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움켜쥐는 삶

금요기도회 사도행전 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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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10–12 NKSV
10 신도들은 곧 바로 그날 밤으로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다. 두 사람은 거기에 이르러서, 유대 사람의 회당으로 들어갔다. 11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12 따라서, 그들 가운데서 믿게 된 사람이 많이 생겼다. 또 지체가 높은 그리스 여자들과 남자들 가운데서도 믿게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세상과 부딪히는 복음

지난 주 우리는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복음의 진보와 더불어 복음과 세상의 부딪히는 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몇년 전에 아버지 학교 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계획과 형상을 회복하고 싶어서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믿는 아내들이 남편들을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고 싶은 전도 차원에서 많은 분들이 아버지 학교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찬양시간에 건전한 가요도 많이 불렀습니다. 그때 참 많이 부른 노래가 가수 강산에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흐름을 따라서만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뿌려진 복음은 전통적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을 정면으로 도전하였고, 지난 시간 로마제국의 스스로 주님이라고 부르는 황제의 교만한에도 도전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산다는 것은 사실 역동적인 삶입니다. 세상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세상이라는 강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삶입니다.

더 고상한 베뢰아 유대인들

데살로니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바울이 성경을 가르쳐 주는 것을 통하여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데살로니가 시청 관원들이 소동하여 시끄러워지자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로부터 서남서 방향으로 72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지금의 베리아(Verria)로서 그리스 중부 마케도니아 주의 상업중심지라고 합니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로마로 통하는 비아 에그나티아로부터 떨어진 길을 통해서 가게 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머물러 교회를 굳건하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석금까지 주고 풀려난 성도들은 바울과 그 일행의 안전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베뢰아에 도착하였습니다. 베뢰아에 도착한 바울은 여기서도 유대 회당을 찾았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규례대로 전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 유대 회당에서 회당장에게 손을 들고 말씀을 강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앞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는 고난 받고 죽임 당하였으며, 부활하였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 내용을 듣고 베뢰아의 유대인들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아마도 데살로니가에서 예수믿는 유대인들이 베뢰아로 바울을 보낸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17:11 (NKSV)
11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그들이 더 고상한 사람들인 것을 알았을 것 같습니다. 고상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개역개정에서는 더 너그러워서 라고 말합니다.
유게네스(εὐγενής)= ‘고상한 태도' , ‘개방적인 태도'=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자세
감사하게도 베뢰아에서 만난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편견 없이 정중하게 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좀 더 자유로운 사고를 하였고, 좀더 열린 자세로 뉘우쳤으며, 사도들의 말을 잘 알아차렸고, 말씀의 능력을 인정하였고, 자신들의 이전 생각과 맞지 않을 지라도 진리로 생각되는 말씀에 찬동하였습니다. (매튜헨리 주석 p 555)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의 마음 밭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아주 기꺼이 받아 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것은 단순한 성경 공부를 넘어서 그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열어 하나님께 나아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신 것은 안전이 중요하다는 것 보다는 복음 전도 사역을 계속 수행하라는 예수님의 뜻이듯이 베뢰아에서 주님을 바울에게 계속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고상한 성품은 가문도 학벌도 출신도 아닙니다.오직 하나님의 말씀앞에 어떤 마음으로 서 있는가 입니다. 그리하여 “덕과 경건이 참으로 고상한 것이다"라는 말과 같이 말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다.

간절하게 말씀을 수용하였다는 말은 맹목적인 믿음으로 경솔하게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때로는 강단에서 설교한 목사의 설교를 절대화 하여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로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듣는 것도 좋은 믿음생활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 생활은 그 들은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삶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안식일 마다 모여서 일주일에 한번 말씀을 들었던 것도 잘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데살로니가에서 이방인들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살전1:6-7“6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매 주 안식일에 바울의 말씀을 들었는데, 베뢰아 사람들은 날마다 바울이 전한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아나키노 (ἀνακρίνω) = 상세히 조사하다, 연구하다, 심문하다
베뢰아 사람들은 들은 말씀에대해서 날마다 상세히 조사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심지어 아나키노라는 헬라어는 심문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을 열린 마음으로 날마다 연구하여 바울이 말한 말씀이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결국 최종적인 말씀의 해석자는 설교자도 아니고, 성경 교사도 아니고 바로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번째로 저는 주일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지 내 삶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마다 가스펠 프로젝트를 통해서 모든 세대가 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아마도 전도사님들 마다 본문을 풀어내는 해석이 다를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그 말씀이 정말 그러한 가 말씀이 내 삶에 믿음의 사건이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두번째로 예믿삶을 통해서 하고 있는 말씀 읽기 운동입니다. 성경 신구약 66권을 읽는다는 것은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놓치기 쉬운 경건입니다. 모든 스마트폰은 스마트폰 중독을 막기 위해서 스크린 타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차세대 자녀들도 우리말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지키지 못할 율법과 피비린내 나는 제사법과 어찌보면 무시무시한 죄의 형벌 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린양 되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구원자이며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길 소망합니다.
세번째로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함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생명의 삶을 통해서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묵상과 성경 연구는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전도단의 성경연구학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말씀을 연구하여 성경에대한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가 성경을 연구하고 조사하고 심문하는 목적인 남들이 모르는 성경지식을 알고 자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은 그 성경 본문이 원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본래의 메시지 즉 케리그마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말씀이 지금 나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 오는가 입니다. 이는 성경의 조명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인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이 모든 역사를 이뤄가는 분은 예수님 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청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잘못된 관점으로 해석된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 복음의 관점으로 구약이 예수를 통해서 성취 완성되었다는 것을 바울이 전하였고, 그들은 그것을 말씀을 통하여 더 자세히 알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묵상하는 그리스도인

시편 1:1–2 (NKSV)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2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성경 연구와 말씀 묵상은 다르게 느껴지지만, 그 둘은 너무도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날마다 말씀 묵상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 많은 사람들은 너무도 막막하게 생각합니다. 이는 묵상을 성경공부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반대로 너무도 자의적으로 말씀을 묵상하여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와 전혀 다른 묵상과 적용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묵상을 위해서 묵상집을 사용하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는 생명의 삶을 통해서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삶은 각 세대별로 묵상 할 수 있고 또한 가정예배 운동으로 가정예배순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 성경을 읽을 때 배경이 되는 이야기들을 참고하여 묵상이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가이드라인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삶으로만 묵상을 해야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묵상집을 통해서 도움을 받는 것을 권장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예수전도단의 설립자 이신 오대원 목사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David. E. Ross)은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을 통해서 묵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묵상은 대화이며, 기도이며 예배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핵심입니다. 신약에서는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바울의 말로서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에대해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의 메시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성경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 말씀이 지성뿐아니라 마음 속으로 돌어오게 되는 지성과 마음과 의지를 다해 하는 여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세가지 단계를 말합니다.
열라 , 초점을 맞추라, 채우라
묵상에관한 더 자세한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이 것을 자세히 나누지 않아도 금요기도회에 오신 분들은 이 세 단어의 의미를 아실 것입니다. 말씀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주님께 초점을 맞추어 주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 묵상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말씀에 묵상하다는 어원을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묵상하다는 히브리어 어원은 하가 입니다. 하가(הגה)= 묵상하다, 슬피울다 그런데, 이 단어가 쓰인 구약 성경을 한구절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사야 31:4 (NKSV)
4 주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자가 으르렁거릴 때에, 힘센 사자가 먹이를 잡고 으르렁거릴 때에, 목동들이 떼지어 몰려와서 소리 친다고 그 사자가 놀라느냐? 목동들이 몰려와서 고함 친다고 그 사자가 먹이를 버리고 도망가느냐?” 그렇듯, 만군의 주님께서도 그렇게 시온 산과 언덕들을 보호하신다.
힘쎈 사자가 먹이를 잡고 으르렁 거리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묵상을 한다는 것은 명상이 아닙니다. 비워내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먹이를 잡고 으르렁 거리듯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먹어 생명을 채우는 것이 묵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앞에 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말씀을 꼭 붙잡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도록 내 삶이 주님의 말씀으로 해석되도록 몸부림 치지 않으시겠습니까?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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