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냅시다.
Notes
Transcript
< 2월 넷째주 청년부예배 >
신앙고백: 사도신경
찬 양: 생명과 바꾼 주의 사랑을
대표기도: 맡은이
성경봉독: 야고보서 2:14-17(신약 372쪽)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말씀증언
반갑습니다.
올 한해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엔 어떤지 모르겠는데요. 사실 저는 감정변화가 크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감정변화를 잘 나타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마치 술주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민망하고, 부끄럽게 생각되는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아주 기쁠 때도 아주 슬플 때도 그것을 애써 참거나 아니면,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다 싶을 때가 있었는데요. 제가 목사 시험에 합격했음 알았을 때 무척 기뻤어요. 그런데, 그 기쁨을 내 안에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오히려 그 기쁨을 내 안에서 막 삼키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봐요. 영화나 드라마 이런 거 보면,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감정을 소리 지르는 형태로 표현하잖아요. 저는 그런 것들을 절대로 못 할 것 같아서 그것이 때로는 그렇게 부럽게 느껴지곤 해요.
그러나 다행히도 제가 사이코패스는 아닌지, 저에게도 들뜨는 순간들이 있어요. 감정을 억제한다고 하지만,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지요. 그러한 순간들이 오면, 저도 모르게 그 이야기를 주변에 계속해서 떠들곤 해요. 저는 최근에 그러한 순간들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주변에 하도 많이 하고 다녔더니, 내가 굉장히 들떠있나보다는 생각을 스스로 했을 정도였습니다. 어쩌면, 여기 계신 어떤 분들도 제 얘기를 들으셨을지도 모르는데요. 저는 최근에 CHAT GPT라는 인공지능 기술에 크게 흥분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해당 분야에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실 저는 해당 분야를 전혀 모릅니다.
단지, 최근에 이에 관한 이야기를 온라인 매체들로 접하면서, 실제로 이 기술을 사용해보았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인공지능 이른바 A.I 기술은 상당히 고차원적인 기술이지만, 최근 이 기술을 많은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글 아이디와 인증 절차만 거치면 말입니다. 그래서 복잡한 A.I 기술은 몰라도 인터넷을 사용하고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저와 같은 사람도 이 기술의 놀라운 성취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요. 제가 놀랍다고 여긴 것은 주로 이런 거였어요. 글을 써주는 기능이요. 예를 들어 CHAT GPT에 접속해서, 기도문을 써달라고 하면, 기도문을 써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설교를 써달라고 해도 설교를 써줍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분량에 맞게 말입니다. 가령, 1,000자로 써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줍니다. 10분짜리 설교를 써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줍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이제 의심의 눈으로 제 설교를 바라볼 수 있겠죠. 혹시!!! 아쉽게도 이번 설교는 제가 직접 작성하였습니다. CHAT GPT가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맞지만, 아직은 제가 그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하지만 기대 이상의 내용을 제공해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늘 저같이 지식이 빈약한 목사는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힘듭니다.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큰 노력이 필요한데, 앞으로 A.I 기술이 발전되면, 이제 그러한 노력을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심지어 신학교육을 받지 않아도 그럴듯한 설교문을 작성할 수 있는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고요. 그러면 더 나아가 설교를 하는 일이 더 이상 목사의 일이 아니거나 사람들은 그것을 꼭 목사를 통해 기대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련해서 이러한 상황이 발전되면, 오늘날 글을 쓰는 많은 종류의 일이 또는 그것에 종사하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그 일에서 밀려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기술이 발전하면서 확실히 깨닫는 것이 있어요. 우리는 결코 그들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예를 들면, 인간보다 강력한 힘을 기계가 낼 수 있고, 인간보다 더 다양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결과를 일찍이 알파고가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창의력과 창작의 영역까지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기술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 영역에서도 인간은 경쟁에서 밀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기술의 발전은 우리를 무능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들지 몰라요. 약간 그런 느낌이에요. 게임을 하다 보면, 이른바 고인물이라고 부르는 게임의 전문가들이 있잖아요. 그들을 이기기는 거의 불가능한데, 그와 같은 절망감들을 경험하고 나면, 아무리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흥미를 갖고 계속해 나가기가 쉽지 않아요. 어떤 수로도 그들을 이길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죠.
그렇게 최근에 저를 흥분케 했던 기술에 관해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다가 깨달았어요. 어쩌면, 인간의 희망은 혹은 아직 기술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이것이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에 관해서요. 어떤 이는 살면서 책 한 권 쓰지 않았어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죠. 그러면 이건 어떤가요? 그는 거처가 마땅치 않았어요. 대부분 시간을 떠돌아다녔어요. 그리고 그의 죽음을 보고 모두 그와의 관계를 부인했어요. 심지어 가장 가까웠던 이들조차도 말이죠. 누군지 짐작이 되나요?
네, 바로 예수님이시죠. 성경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사실 예수님은 어떤 글도 써서 남기시지 않았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다’라고 말씀하셨죠.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를 따르던 몇 안 되는 제자들은 모두 그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죠.
그런데, 오늘날 그분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으로 여겨지시는 분이지요. 세상의 부도 지식도 권력도 없어 보였던 그가 오늘날 왜 그렇게 특별한 분으로 우리에게 등장하는 것일까요? 저는 것이 그분의 삶에 있다고 봅니다.
또한 이것이 우리를 절망에서 건지고 새로운 희망을 줄 이야기라고 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점점 더 인간보다 더 나은 기술을 상대로 경쟁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앞으로 우리는 기술에 계속 패배하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인간에게 찾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A.I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삶에 있습니다. 삶의 진실함은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의 말과 행동에 같으므로 나타났기 때문에 세상의 부와 지식과 권력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 오랜 시간 가운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보자면, 아무래 대단한 것을 소유한다고 할지라도, 그에 걸맞는 삶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눈에 보여지는 것들은 언젠가 녹슬고 썩어 없어집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요. 어떤 부도 권력도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삶은 시간이 지나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서,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오늘 성경도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다시금 오늘 성경말씀을 같이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17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신약성경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쓴 편지입니다. 그는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목회자였는데, 당시에 그는 교회의 중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신앙생활에서 꼭 새겨야 할 지침입니다. 그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을 통해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에서도 삶을 잘 살아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인간으로서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도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이고, 신앙인으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도 삶을 잘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 살아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믿는 바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에 중요성을 자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엉뚱한 것으로 우리의 신앙의 진실함을 나타내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에 합한 삶이 없다면, 그것은 언젠가 썩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바라건데,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믿음 안에 견고히 서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기,
- 믿음에 따른 삶을 살아내기를 위해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