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갈라디아서에 관하여

새벽기도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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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라디아서 2:16(신약 304쪽)
갈라디아서 2:16 NKRV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신약성경 갈라디아서에 관한 얘기를 나누려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신약성경 사도행전을 나눴습니다. 성경의 순서를 따르면 오늘은 신약성경 로마서를 나눠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갈라디아서를 먼저 나누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앞으로 우리가 나눌 신약성경의 책들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신약성경 로마서부터 유다서에 이르는 책을 가리켜 서신서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또 바울서신과 일반서신으로 구분합니다. 쉽게 말하면 바울이 쓴 편지가 있고 다른 이들이 쓴 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신서의 순서가 이와 같은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가장 내용이 많은 것이 앞쪽에 있고 또 전서와 후서로 같은 곳에 보낸 편지가 묶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깐 서신서가 역사적 순서를 따라 배열된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 서신서를 읽어보자면, 특별히 바울이 쓴 바울서신을 읽어보자면 갈라디아서가 가장 먼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가 가장 먼저 쓰였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갈라디아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이냐에 따라 생겨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크게 둘로 나눠지는데 북갈라디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남갈라디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맞다고 단정할 수 없을만큼 팽팽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갈라디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갈라디아는 우리로치면, 전라도, 경상도와 같은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본래 오늘날 중부 유럽에 있던 갈리아인 또는 골족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정착한 땅을 가리키는 말인데, 크게 두 패로 갈라져서 하나는 오늘날 프랑스쪽으로 갔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 터키 이제는 튀르키에라고 불리죠. 그곳으로 갔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갈라디아는 소아시아로 오늘날 터키 곧 튀르키에 쪽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튀르키에 남쪽이 맞느냐 또는 튀르키에 북쪽이 맞느냐에 관해 학자들 간에 의견이 갈립니다. 그래서 북쪽이 맞다고 하는 이들은 북갈라디아설을 주장하고 남쪽이 맞다고 하는 이들은 남갈라디아설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사도 바울은 그의 3차 선교여행을 통해 북쪽과 남쪽 모두를 방문하였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1차 선교여행에서는 남쪽을 2차 선교여행에서는 북쪽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보면 북갈라디아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갈라디아서가 데살로니가전서보다 늦게 쓰여졌다고 말하고 남갈라디아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갈라디아서가 가장 먼저 쓰인 바울의 서신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학자들이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가전서 사이에 있는 중요한 교리적 차이점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라는 이신칭의 또는 칭의에 관한 교리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뚜렸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갈라디아서는 뚜렸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를 가장 먼저 쓰인 것이라고 보면 처음부터 사도 바울이 이 칭의의 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고 반대로 갈라디아서가 가장 먼저 쓰여진 것이라고 말하면 사도 바울이 처음부터 이 칭의의 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학자들에게는 북갈라디아설과 남갈라디아설에 따른 논쟁이 중요하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바울서신에 관한 이야기를 신약성경 갈라디아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저는 남갈라디아설을 반영해서 말씀드린다는 것이 될텐데요. 이는 갈라디아서에는 바나바의 존재를 갈라디아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묘사가 됩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여행에만 동행했습니다. 후에 2차 선교여행에서 마가 요한을 데려가는 문제로 두 사람은 갈라졌고 그 후에는 동행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 갈라디아사람들이 바나바를 알고 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바나나와 함께한 1차 선교여행 때 그곳을 갔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에서 방문한 갈라디아지역은 남쪽지역입니다. 그래서 남갈라디아설을 따를 수 있고 그에 따라 갈라디아서가 가장 먼저 쓰인 바울서신입니다.
지역배경에 관한 얘기만도 복잡한 것이라서 서론이 너무 길어졌는데요. 본론에 해당하는 내용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가 있겠죠. 그것은 당시 거짓 교사라 불리는 이들로 인해 갈라디아지역의 교회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오해하거나 배척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사도 바울은 특별히 이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에 굉장히 분노에 차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거짓교사로 인함인데, 이 거짓교사도 사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기독교도였는데, 그들을 거짓교사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한 이방 지역의 교회에 찾아가서 이런 방식으로 얘기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구원을 이루기에 한 50프로 부족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진정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따라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거기에 더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다 이렇게 덧붙여 말하는 겁니다. 사실 바울은 진짜 사도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도 아니었고,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던 인물인데, 그런 그가 전하는 복음은 아무래도 50프로 부족하다고 말입니다.
문제는 이 말을 들은 갈라디아지역의 교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 관해서 의심을 갇고 그의 권위 곧 그가 사도인지에 관해서도 의심을 갇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얘기를 전해들은 바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나는 일이겠습니까?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짓 교사들의 등장도 문제지만 그들이 하는 얘기를 믿는 이방 지역의 교회들은 더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거짓 교사의 가르침은 잘못되었고 자신은 분명 예수님이 보내신 사도가 맞음을 얘기합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의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과연 율법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많은 경우에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데요. 여기에서는 좀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율법에 관한 문제에 또 그것을 행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거짓 교사로까지 말한 이유를 잠깐 설명하려고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실 거짓 교사들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율법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모세를 통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구원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받은 유대인들 또한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구원의 은혜를 지켜가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10계명을 비롯한 무려 613개가 넘는 율법 곧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이 그 구원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키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구원을 지켜나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문제는 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어겼을 때, 속죄함을 받을 수 있도록 제사 제도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율법과 제사를 통해 구원을 지켜간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그 제사라는 제도를 대체하는 속죄였음을 유대인 기독교인들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받은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율법의 준수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유대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지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도 율법에 정통하고 열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 예수님만으로 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님의 법을 따름으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법은 바로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사랑의 법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더 이상 과거의 율법에 억매여 살아갈 필요가 없다고, 그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법으로 완성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유대인들처럼 할례받거나 율법에 종노릇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각자가 예수님을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신앙생활을 했고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는지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심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은 열심으로 구원에 이를 것이라 착각합니다. 어제 같이 나눴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은 아니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음을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열심과 능력을 내보이거나 증명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속한 바 되어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관련해서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그 9가지 열매를 맺어야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원어인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그것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열매는 오직 한 가지 바로 사랑입니다. 단지 그것이 9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어 나타나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룰 것은 한 가지 사랑 밖에 없습니다. 많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성령의 법에 따른 사랑을 이룩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고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님 한 분만으로 족하며, 그 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랑의 삶을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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