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말씀만으로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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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 119:9(구약 890쪽)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설교에 앞서 영상 한 편을 먼저 보았으면 합니다. 짐 엘리엇이라는 미국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입니다. 영상 시청 후에 오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 영상: 7분 43초
오늘은 우리 교단에서 정한 청년주일입니다. 청년주일은 1953년 교단 총회에서 매년 3월 둘째 주일로 지킬 것을 결의했습니다. 그로부터 올해 70번째 청년 주일을 맞이합니다. 청년주일은 청년선교의 의미를 되새기는 차원에서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청년을 세우는 날입니다.
한편,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이 그날만 어린이들과 어버이들을 위한 날이 아님을 아실 겁니다. 특정한 날을 기념하는 것은 그 대상을 평소에도 주의 깊게 살피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청년주일도 이날만 특별히 청년을 위하는 날이 아닙니다. 평소에도 우리가 청년들 더 나아가서는 신앙의 다음 세대들을 주의 깊게 살피자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 바로 이 청년주일을 기념하는 것이 될 겁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청년부에서 오늘 오후 예배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러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선 청년을 위해 무엇을 설교하면 좋을지 또 성경은 청년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면서 과연 청년은 누구를 말하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누구를 가리켜 청년이라고 말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의 청년기본법에 따르면 만 19세 이상 34세 이하인 사람을 청년으로 규정합니다. 저는 이 기준에 따르면, 청년은 아닙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 우리 대부분은 여전히 마음만은 청년에 버금갈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통념으로 볼 때 대략 청년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20대에서 30대 좀더 넓게는 40대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세대에 속한 사람들에 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군가는 대학생이고 누군가는 취업을 준비하고 있고 누군가는 사회 초년생으로 직장에서 일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있겠지요. 그러니 아마도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취업과 결혼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이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청년들의 많은 관심이 경제적인 문제에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가에서 내놓은 올해 청년정책들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가령, ‘청년도약계좌’라는 것이 있는데요. 월 70만원을 5년 동안 내면 5,000만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요. 또 “청년 일자리 지원제도”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있는 청년들을 고용하면 정부가 2년간 최대 1200만원을 기업에 지원하는 것인데요.
그 외에도 여러 정책들이 대체로 청년들의 경제적 수익을 늘려주거나 지출을 줄여줄여는 방식으로 정부가 지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해하기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에게 경제적인 문제 더 정확히는 돈에 관한 문제가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청년들의 문제만이 아님을 또한 생각합니다. 어쩌면, 모든 연령층을 두루 관통하는 문제라 생각합니다. 물론 세대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이제 입사하여 돈을 벌기시작한 이들과 한창 돈을 벌고 은퇴를 준비하는 이들은 다를 것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돈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현재 자본주의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경제적인 문제는 평생의 고민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저는 이에 관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귀기울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과 마주했습니다. 다시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119편 9절(구약 890쪽)말씀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현재 우리 대부분이 사용하고 있는 한글 개정개역판 성경을 기준으로 청년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91개가 나옵니다.
청년이란 단어가 포함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보다가 제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구절들은 ‘청년’을 호칭으로 그러니깐 어떤 대상을 가리키고 부르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시편 119편 9절과 전도서의 두 개의 구절을 포함한 단 3개의 구절은 청년을 향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도 시편의 구절에 눈길이 간 것은 사실 이 구절이 썩 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니, 우리가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이 말씀은 과연 의미있고 가치있는 말씀인가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결국, 오늘 시편의 이야기는 이런 거 아닙니까? ‘청년들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십시오.’ 사실 신앙적으로 이 말씀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아멘’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이 말씀은 어떨까요? 마치 강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을까요? 앞서 얘기했듯이 이 시대의 청년들은 경제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의 말씀은 뜬 구름 잡는 듯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아 결코 좋게만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불행하게도 청년을 향한 오늘 시편의 교훈이 오늘을 사는 청년들에게 오히려 외면받을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의 그와 같은 고민들이 설교의 제목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주의 말씀만으로 괜찮습니까?”
이것은 오늘 시편 말씀에 관한 저의 의구심을 담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님들께서 예상하실 수 있듯이 이 의구심이 부정적인 결론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질문 답이면서 오늘 설교의 결론에 관해 먼저 답해보자면 이렇습니다. ‘괜찮다. 아니, 주의 말씀으로 충분하다’ 저는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오늘 성경본문인 시편 119편 9절로 돌아가서요. 여기서 청년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아르’입니다. 나아르라는 히브리어는 ‘젊은이 또는 청년’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종이나 하인’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이에 관해서는 청년을 뜻하는 것이 되지만, 계층이나 계급에 관해서 주인에게는 하인이 되는 것이고 상관에게는 부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히브리어 나아르는 어딘가에 종속되는 개념입니다. 자신보다 윗 사람이 있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겸손의 표현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소인’에 가까운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나아르는 특정한 연령에 해당하는 사람을 뜻한다기 보다는 자기보다 높은 대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 왕은 그 유명한 일천번제를 드릴 때에 자신을 하나님께 ‘작은 아이’라고 표현하였고,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로 부르실 때 자신을 ‘아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가 모두 나아르입니다. 이렇게 나아르는 특정 세대와 계층을 넘어서 하나님을 우리의 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이들을 일컫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9절에 나오는 청년은 특정한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시편 119편에 나오는 주의 말씀은 히브리어로 다바르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1400번이 넘게 사용된 단어인데, 그 의미에 있어서도 넓게 사용됩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할 때, 주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다바르는 단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외에도 하나님과 관계된 사건이나 역사를 포함한 말입니다.
그러니깐 히브리어 다바르는 하나님에 뜻에 관계된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기록된 말씀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여러 일들을 포함합니다. 그러니 오늘 시편에 나오는 주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종합적으로 말해보자면, ‘청년들이여, 주의 말씀을 따르십시오’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주의 뜻을 따르십시오’라는 말이 됩니다. 결국 오늘 시편의 교훈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잘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는 얘기를 한 두번 듣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모르는 얘기도 아닌데 문제는 그렇게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죠. 또 사실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떡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신앙생활만으로 우리의 삶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부분을 명쾌하게 풀어내기가 참 어려웠어요. 우리가 돈을 벌고 또는 그 일들을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 것도 어쩌면 돈이 너무 좋아서라기 보다는 따지고보면, 신앙생활을 잘하려는 것 같거든요. 돈을 버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생존을 위해 하는 것이잖아요. 결국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무슨 소용이 있고, 또 신앙생활 자체가 가능이나 하겠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참 이상한 말씀을 하세요. 같이 성경을 찾아봅시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4장 3절에서 4절 말씀(신약 4쪽)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우리가 잘 아는 성경의 이야기인데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실 때, 40일간 굶주린 상태였는데, 사탄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와 같은 능력을 충분히 행하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와 같은 유혹을 떨어내시면서, 말씀하시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말이죠.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떡이 필요없다는 얘기가 아니지만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는 먹고사는 일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 먼저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이러한 말씀도 하시잖아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이유를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또 성경을 찾아 봅시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 25절에서 30절 말씀(신약 9쪽)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일컬어지는 예수님의 보석같은 말씀인데요.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위한 가르침으로 주신 말씀이에요. 결국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는 얘기이지요.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시금 보게 돼요. 먹고사는 일이 우선순위가 아님을 말이지요. 그리고 이 말씀의 결론이 앞서 말씀드린,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이지요.
먹고사는 일이 우선순위가 아닌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하나님은 공중의 나는 새뿐만 아니라, 작은 들풀까지 관심하시고 돌보신다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하고 출세해야 먹고사는 일이 보장되거나 안정될 수 있지만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출세여부에 관계없이 모두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면서도 사실 그렇게 살기 쉽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거든요. ‘믿음이 작은 자들아’ 우리의 믿음이 작고 연약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따르는 일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힘겨운 것이죠.
그리고 저도 목사이지만, 이런 고민 즉 먹고사는 문제를 염려하곤 합니다. 사실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많거든요. 주중에 심방을 하면서 노년에 이른 우리 집사님, 권사님들을 만났어요. 나이가 들면서 몸이 쇠약하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병원에 출입하면서 젊은 시절에 벌어놓은 돈을 대부분 병원에 주고 온다는 거예요. 반대로 말하면, 젊은 시절에 돈이라도 벌어 놓았기 때문에 지금 병원이라도 갈 수 있는 것인데요.
저도 언젠가 그와 같은 시기가 올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목사가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까요? 물론 돈벌려고 목사를 하지도 않지만요. 막상 병원에 자주 출입할 시기가 왔을 때, 병원비에 걱정하는 내 삶이 얼마나 초라하고 염려가 되는지 몰라요. 그러니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시고 돌보신다고 성경에 나와 있음에도 마음 한편에 그늘이 지고 서늘한 느낌을 받는 것이죠. 그러다가 ‘믿음의 작은 자야’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퍼특 정신을 차리는데요. 계속해서 마음이 왔다갔다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을 보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곤 하는데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주목한 신앙의 선배가 ‘짐 엘리엇 선교사’였어요. 설교의 시작에 보았던 영상을 기억하시나요? 그것이 ‘짐 엘리엇 선교사’에 관한 영상인데요. 다시금 요약하자면 이래요.
1950대에 미국의 짐 엘리엇 선교사는 4명의 동료들과 아마존 유역에 있는 아우카 부족이 있는 곳으로 가요. 그런데 그곳에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우카 부족의 창에 찔려 죽게 돼죠.
이런 소식이 알려지면서, 미국의 유명한 일간지인 타임지와 라이프지는 이 이야기를 분노에 차 보도해요. 한마디로 What a Waste! 곧 이것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말하죠.
왜냐하면 짐 엘리엇은 명문대학을 수석졸업할 촉망받는 인재였는데, 앞서 말한 매체들에서는 참으로 어이없고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렀다고 본 것이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로치면 노벨상 후보와 같은 뛰어난 역량을 지닌 인재가 젊은 나이에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당시 미국의 분위기도 그와 다르진 않았죠. 그러나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했다고 해요. ‘낭비라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의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준비했었습니다. 내 남편은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니 이후로 다시는 내 남편의 죽음을 낭비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생각해요. 오래사는 것보다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영상을 보셔서 아시지만, 놀랍게도 짐 엘리엇의 죽음은 정말 낭비가 아니었죠. 그의 죽음 이후에 그의 가족들이 다시금 아우카 부족에게 갔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 가운데 목회자가 세워지기까지 했어요.
물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목숨을 내걸며 선교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는 기적을 경험하고 그 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의지를 다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좋은 선배들을 통해서 경험하고 알게 되는 일이 중요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살아내는 것은 힘들지만 그것을 살아내는 선배들을 통해서 우리는 도전받고 또 그 일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라건데, 오늘 우리 성도님들께서 우리 청년들의 훌륭한 신앙의 선배가 되어주십시오. 우리 성도님들을 통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우리의 삶이 충분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말입니다. 또 청년 여러분 당신들은 선배의 본을 통해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만으로 우리의 삶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와 같은 삶을 이루는 저와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