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Notes
Transcript
크고 두려운 날이란?
크고 두려운 날이란?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오늘 본문 요엘서 2장 31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다같이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엘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요엘서는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먼저는 재난이 일어날 것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 재난이 요엘서 1장에 등장하고 있는 메뚜기 떼 재난이었습니다. 수 천만리 또는 수억마리의 메뚜기 떼가 눈에 보이는 푸르른 식물들을 다 갈아 먹었습니다.
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사막에 주로 서식하는 이 메뚜기 떼는 하루에 150킬로미터를 이동하고, 1제곱킬로미터 안에 8천만 마리가 모여서 떼로 이동합니다. 이들이 날아오면 하늘이 새까매집니다. 이 메뚜기 때가 초토화하는 면적만 약 3천만 평에 다다른다고 합니다. 그 피해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 라고 합니다. 메뚜기 떼가 하루에 먹어 치우는 작물만 인간 3만 5천 명이 하루에 먹는 양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메뚜기 떼는 포도나무를 멸했고, 무화과 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 버렸다고 말합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존하고 있었던 생산수단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메뚜기 떼에 피해를 입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제적 피해를 상당히 보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엘서는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이러한 재난이 먼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엘서에 나타난 메뚜기 재난은 총 네차례에 걸쳐서 일어났습니다. 팥중이가 먹고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었다고 말하고 메뚜기가 먹고 남겼던 것을 느치가 먹었다고 말씀하고 느치가 먹다 남긴 것을 황충이 먹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이는 재난은 지속될 것이고 또 반복될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코로나 19도 생각해 보시면 다양한 모습으로 지속 됐었고,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변종에 변종을 거듭하여 알파, 베타, 감마, 뮤, 오미클론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난을 통해 크고 두려운 날의 존재를 사람들이 예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실제 당시 유다 백성들도 메뚜기 떼 재앙을 통해 불가항력적으로 찾아온 재난을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슬피울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켰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난은 재난일 뿐이라고 말하며 재난 뒤에 숨겨진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갖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엘 선지자는 재난 가운데에서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건강, 물질, 권력이라는 부유함을 가지고 재난을 재난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던 것입니다.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재난이 있는 가운데에서도 취하고 잠들어 있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코로나 19가 한참 극심할 때인 2020년에 많은 부유한 사람들은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한적한 산속이나 섬 아니면 요트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로 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먹고 마시고, 온라인 쇼핑을 즐기며 재난의 때가 지나가기를 바라며 즐기던 여흥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재난을 왜 허락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재난 보다 더 극심한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성경은 재난을 허용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재난의 원인을 자기 중심성의 파묻혀 살고 있는 인간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요엘서의 앞에 위치하고 있는 호세아서의 주제인 ‘영적인 간음’과 요엘서의 뒤에 위치하고 있는 아모스서의 주제인 ‘사회의 정의’가 실추된 내용을 지탄하고 있는 책이 바로 요엘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유다 백성들이 이방 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영적인 간음’을 행하고 ‘사회의 정의’가 실추되어 저울을 속이고, 약자들에게는 더 큰 피해가 가도록 세팅되어 있는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 감추시지 않으셨던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용하신 메뚜기 재난입니다.
여러분 오늘 날 일어나고 있는 재난의 모습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원인이 하나님께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 중심성에 파 묻혀 살고 있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의 탐욕 때문에 재난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수공통전염병의 열쇠의 저자인 데이비드 쿼먼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바이러스를 가진 많은 종류의 동식물이 사는 열대림과 다른 야생의 풍경을 침략한다. 우리는 나무를 베고, 동물을 죽이거나 우리에 가두어 시장에 보낸다. 우리는 생태계를 교란하고, 바이러스를 그들의 자연 숙주로부터 풀어놓는다. 그럴 때 바이러스에게는 새로운 숙주가 필요한데, 종종 우리가 새로운 숙주가 된다.”
동물에게 있는 바이러스는 생존을 위하 어떠한 몸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숙주인 셈인데 동물간 옮겨 다니며 이런 저런 동물을 숙주 삼았던 바이러스가 이제는 인간의 몸을 숙주 삼아 그 안에서 자라고, 변형되고, 진화하며 사람들의 몸을 병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탐욕을 부리지 않고 인간의 영역과 자연의 영역을 구분할 수만 있었다면 무리한 벌목으로 자연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인간은 동물들을 숙주 삼았던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삼림이 파괴되면 이산화 탄소의 농도도 올라가고 이산화 탄소의 농도가 올라가면 오존층의 파괴로 지구의 전체적 온도가 상승되어 빙하가 녹고 저지대 국가에는 헤일과 쓰나미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연과 생태계 그리고 인간은 서로서로 밀접한 관계 가운데 엮어져 있는 운명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서로 상호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가 한 표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표를 보시면 어떤한 문제가 한 가지 문제에만 연결돼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원인이 되거나 결과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010년대 초 저명한 정치학자이자 전직 외교관인 키 쇼어 마부바니 현 싱가포르국립대학교 기콴유공공정책 대학원장은 “지구상에 거주하는 70억 명의 사람들이 더 이상 100개가 넘는 배(나라)에 각가 따로 살지 않는다. 대신 모두 같은 배 위의 193개 선실에서 산다”며 이런 현실을 배에 비유해 잘 포착해냈다.
“75억명의 사람들이 지금 바이러스에 감염된 유람선에 함께 모여 있다면 바이러스가 퍼지는 복도와 공기 통로는 무시한 채 우리의 개인 선실만을 청소하고 문질러 닦아봤자 과연 소용이 있을까?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다. 지금처럼 배를 타고 있는 이상 인류는 전 세계를 전체적으로 돌봐야 한다.”
남유다 백성들이 저질렀던 영적인 간음과 부도덕한 사회의 모습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취했을 때부터 인류에 바이러스와 같이 퍼져 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례 없는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새롭게 ‘리셋’해야 합니다.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 더 바람직하고 유연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재난 앞에
인간은 인간과 서로 연결 되어 있고 자연 생태계 또한 인간과 연결 돼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는 이간 사회와 그 환경은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만 방역을 잘 한다고 코로나 19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함께 방역을 하고, 백신을 나눌 때에야 재난의 끝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꿀벌이 사러졌다는 기사를 자주 접합니다. 꿀벌이 사라지면 꿀벌을 통해 종자식물에서 수술의 화분이 암술 멀리에 옮겨 붙는 일이 줄어들게 되고, 그로 인해 곡식 생산량이 줄어들 수 있고, 곡식 생산량이 줄어들게 되면 식량난으로 국가간에 분쟁이 일어날 수 있고, 분쟁이 일어나면 많은 사상자를 낳을 수 있다는 게 바로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인류가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백신이 제 3세계, 특히 아프리카에는 거의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거대 제약사들이 백신 구매가 가능한 나라들에는 백신을 공급했지만, 구매가 어려운 가난한 나라에는 인도적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로 연결된 세계이기에 모두가 백신을 접종을 해야지 코로나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류는 그러한 선택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중심성이란 죄의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백신 접종률이 낮은 지역에서 코로나 19 변종들이 발생했고, 잘사는 나라에도 그 변종 바이러스는 퍼져 나갔습니다.
요엘서는 이처럼 자기 중심성의 죄아을 통해 영적인 간음을 저지르고 사회적 약자에게 강압적이었던 남유다 백성들에게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라는 말씀을 하기 위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엘서 1장에 메뚜기 떼 재앙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요엘서 2장에는 어떠한 재난의 모습이 등장합니까? 많은 신학자들은 요엘서 1장에는 재난의 전조인 자연 재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요엘서 2장은 재난의 실체인 하나님의 심판이 담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요엘서 1장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설명하며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을 고발했다면, 2장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고합니다. 요엘서 1장에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라며 설명하고, 2장에선는 1장의 내용을 토대로 “그래서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거예요”라고 예언합니다.
요엘서 2장에 도래한 크고 두려운 날을 가리켜 요엘서 2장 1절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대한 묘사는 요엘 2:2 에 잘 묘사 됐습니다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이 날이 이후에도 대대에도 없다”는 표현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요엘 1:2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크고 두려운 날의 전조 현상이었던 메뚜기 재앙을 묘사할 때도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전무후무한 전대미문의 현상이라는 뜻이겠지요. 쉽게 넘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인을 쉽게 넘겼습니다. 결국 많은 학자들이 요엘서 2장에 임한 크고 두려운 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했습니다. 그것은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 백성들이 4차례의 공격을 통해 멸망받게 된 사건인 것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기원전 605년, 602년, 597년, 586년에 유다를 네 번 침공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네 차례 공격이 요엘서 1장에 나오는 네 번의 메뚜기 재앙과 닮았다고도 합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초기에 바벨론을 향해 친선 정책을 펴치다가 나중에는 돌아섭니다. 당시 유다 주변의 암몬, 페니키아, 모압, 에돔 같은 국가들이 동맹을 맺어 바벨론에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에 대해 바벨론에 맞서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기원전 588년, 시드기야 9년에 유다를 전격적으로 침공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합니다. 유다 왕국은 1년 6개월간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기원전 586년에 완전히 멸망합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자신 앞에서 처와 자식들이 죽음을 맞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그의 두 눈은 뽑히게 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이정도 처참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백성들이 경험한 비극은 이루말할 수 없는 처참한 비극이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요엘 시대에 그랬듯이 지금도 하나님은 현재의 재앙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이 코로나 19팬데믹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종식되고 나면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불가항력적 재난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날을 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대비해야 할 크고 두려운 날이 언제입니까? 바벨론과 같은 나라인 북한이 한국을 무력으로 통일하려고 하는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크고 두려운 날 즉 여호와의 날은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환의의 날이고 또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심판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처하게 될 크고 두려운 날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의 때인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이르기 전에 반복적으로 있게 될 재난 앞에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자세로 크고 두려운 날을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하나님께서는 지속 반복적인 재난 앞에서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이 변화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먼저는 요엘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말씀에 옷을 찢기 보다 마음을 찢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성이란 죄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고자하는 발로에서 시작된 죄가 원죄인 자기중심성의 죄입니다. 이 죄는 저와 여러분 모두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은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종교적 행위와 노력으로는 절대 자기 중심성이란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전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가 왜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까? 나만 천국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현재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공식을 알고 그 공식을 자신의 삶에 대입하며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중심성의 죄가 살아 있는 곳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는 하나님 중심 즉 타인 중심으로 변하게 됩니다. 자신의 일에만 집중되었던 삶을 벗어 버리고 공동체의 안정과 공공의 선을 외치는 삶으로 변하게 됩니다. 자신의 자녀만 잘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자녀도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의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 교회만 이라고 외쳤던 구호를 버리고 세계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자녀들이 예언을 하고, 청년들이 환상을 보고, 아비들이 꿈을꾸는 이 말씀은 재난 앞에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마음으로 회개하고 입으로 주님을 영접한 자들에게 부어주실 성령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중동 일대의 신인 해와 달은 파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거듭된 재난 이후에 찾아오게 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저와 여러분드르 안에 숨겨져 있는 자기 중심성이란 우상을 타파하시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시어 오늘도 수 많은 재난으로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 자들을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고
그들에게 여호와의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반드시 마음을 찢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을 권면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