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63-66문. 제5계명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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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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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 권위를 사랑합시다.
신앙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578장(언제나 바라봐도) / 579장(어머니의 넓은 사랑)
기도: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수요일 밤, 주님 앞에 모두 나아와 함께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듣는 우리 마음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맺는 좋은 밭이 되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음세대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시고, 믿음의 세대, 신앙의 위인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출 20:12, 벧전 2:17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벧전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부모님을 사랑합시다.
부모님의 권위를 존중합시다.
*우리가 권위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권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많기 때문입니다.
권위가 무엇입니까?
우리 삶을 통제하고, 우리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죠.
그러니, 권위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제한, 삶의 제한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는 생명의 권위이고, 사랑의 권위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권위는,
없었던 생명체를 존재하게 했던 권위입니다.
생명의 권위이고, 사랑의 권위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선악을 아는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권위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죽지 않도록 하는,
생명의 권위이고, 사랑의 권위였던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의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이다.
그게 마가복음 10장의말씀입니다.
인자는 예수님입니다.
인자가 오신 이유는, 권세를 부리고, 남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자가 오신 이유는, 도리어 섬기기 위해서 오신 것이고,
자기 목숨을 버리심으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권위는
생명의 권위 이고, 사랑의 권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우리를 살리시는 권위이고, 우리를 영원히 복주기 위한 권위인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권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권위죠.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사랑해야 하고,
그 말씀을 따르 살아야 하죠.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권위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권위가 있는 것은, 이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유목민 사회입니다.
계속해서 옮겨다닙니다.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니고,
그 지역을 떠나 학교에 따라, 직장에 따라, 결혼에 따라, 계속해서 이주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동네에 지혜로운 장로가 있어서,
그분의 말을 듣고 따르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는 SNS나 뉴스,
유명한 연예인이나 유투버들의 말이 더 권위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지혜를 찾기 위해 동네 장로님을 찾아가거나, 이장님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핸드폰을 켜고 스마트폰에서 지혜를 찾죠.
그 동네에서 오래 사셨고, 그 지역에서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계속해서 옮겨다니고,
계속해서 이사하고,
계속해서, 직장과 생계를 따라,
마치 양치기가 양떼들의 먹을 거리를 찾아 다니는 것처럼,
먹을 거리를 찾는 현대판 유목민들이기 때문에,
옮겨간 그 지역에 맞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모든 지역을 통합하는 절대적 진리를 믿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 스스로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 땅의 토양이 비옥한지, 살만한 땅인지를,
자기 스스로,
자기가 정보를 검색하고 판단해서 하게 되었죠.
이제는 노인을 의지하는 시대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인을 존경하지도 않고,
낯선 노인들에게 인사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노인들이 과거보다 더 오래 더 건강히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유목민 사회에서,
자녀들과는 더 멀어지게 되고,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는
고독하고 외로운 시대가 된 것이죠.
노인은 지혜의 결정체나, 지혜의 유산이라기보다는,
국가나 가정이 부양해야 할 의무나 짐처럼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이죠.
*또 오늘날은 어떤 시대입니까?
시대가 계속 발전한다고 믿는 시대입니다.
정말 시대가 발전했죠.
산업사회를 넘어서,
정보화 사회를 넘어서,
이제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죠.
우리가 네비게이션만 해도,
인공지능이 해주는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죠.
과거는 유물이고, 구식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과거를 답습하는 것을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학을 가거나,
대학원을 가거나 하면,
무조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야 합니다.
기존의 학자들이 연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새로운 것을 찾아내야, 이 사람 연구 잘 했다. 공부 잘했다. 라고 말하는 시대이지. 예전에 했던 학자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똑똑하다고 말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과거는 뛰어넘어야 할 것들이고,
더 발전시켜야 할 것들이기 때문에,
과거를 살았던 노인들보다는
오히려 앞으로 개척하며 더 발전하며 살아가는,
젊은 세대가 더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지요.
과거보다 미래를 지향하며,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진보주의적 시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권위’라는 말을 들으면, 고리타분하고 부정적으로 들리는 것이죠.
아직도 과거에 집착하는
고장나서 멈춰버린 자동차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는 과거보다 발전했고,
더욱 성숙해진 것 같기도 해요.
예전보다 사람에 대한 권리도 발전했고,
노예제도 같은 구시대의 악습도 많이 사라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니에요.
말씀은 과거에도 권위가 있지만, 지금도 권위가 있고, 앞으로도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하는 것들은,
계속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진리는, 계속해서 권위있게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죠.
*또 오늘날은, 합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말은 따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모님들이 자식은 이렇게 키워야 된다.
자식 양육은 이렇게 해야 된다 말해도,
그 말 듣지 않고,
TV에 나오는 전문가들,
심리학자나
상담가들이 하는 말,
육아전문가들이 하는 말을 더 듣습니다.
‘야, 이 박사님이 이렇게 해야 하는 거래.’
‘이 교수님이 이렇게 하라고 조언했어.’
전문가들의 말을 더 듣지,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모의 말을 듣고 순종한다는 것은, 이미 지간 옛 시대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정말 최신의 정보와 최신의 데이터를 통한
지혜를 배울 수는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존경하는 마음’은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존재케 했고,
우리를 지탱케 하였던,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은 잃어버린 채,
최신의 지식과
최신의 뉴스에만 집착하여,
어른들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그분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전수해 주어야 할 것은,
너의 감정을 잘 고려하고,
너의 감정을 잘 배려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를 잘 돌보았어. 와 같은 ‘하향식 사랑’도 필요하겠지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여기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덕분이야.
라고 하는 ‘상향식 존경’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른들을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야만 존경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그분들을 존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소요리문답 제63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제63문 : 제5계명이 무엇입니까?
답 :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하신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원어로 보면, 너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공경하라 입니다.
아버지만 공경하라고 되어 있지 않고,
어머니도 공경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존경과 공경의 대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1750년에 기록된 함무라비 법전에는
어머니에 대한 관심은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아버지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죠.
그런데 성경은 특이하게도
아버지 뿐만 아니라, 어머니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공경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입니다.
레위기, 19장 3절에서도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어머니가 같이 등장하고 있는데,
심지어 여기서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
원어로 읽으면,
‘너희 각 사람은, 그 어머니와 그 아버지를 경외하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먼저 언급된 것이죠.
당시 고대 사회에서 여자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사람이기 보다도 재산이나 소유물로 취급되었죠.
여성들의 인권이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성경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 역시 경외와 공경의 대상임을 명확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렇다면, 이 명령은 구체적으로 부모들만 공경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소요리문답 제64문은, 이 명령이 부모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제64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제64문 : 제5계명이 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제5계명이 명하는 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 그리고 동료와 같은, 각각의 여러 지위와 인륜관계에서 각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고 각 사람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윗 사람은 아랫사람을 존중하고,
아랫 사람도 윗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같은 지위에 있는 동료들,
각각 여러 지위와 인간관계의 사람들이,
서로의 명예를 존중하고,
각 사람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유교의 수직성은 기독교가 어느 정도는 공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유교는 수직성만 강조합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해야 하는 의무만 강조하죠.
신하는 왕을 존경해야 하고,
자식은 부모를 존경해야 하고,
종은 상전을 존경해야 합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해야 하는 의무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수직성만 강조되고 있죠.
그러나 수직성만 강조된다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유교가 말하는 가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아랫 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랫 사람은 윗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고, 함부로 험담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노아와 세 아들 이야기를 압니다.
분명히 아버지 노아가 실수했습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술 취하여 벌거벗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잘못을 덮어주었습니다.
노아의 명예를 지켜주었지요.
그래서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고,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지 않은 함은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9장 25절입니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분명 아버지가 실수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의 실수보다도,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주지 않은, 함의 잘못을 더 크게 부각시키고 있죠.
우리가 윗 사람의 명예를 지켜줘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명예를 지켜줘야 합니다.
부모의 실수와 잘못을 함부로 들추어서는 안 됩니다.
회사 직원들은,
직장 임원과 경영자의 명예를 지켜줘야 합니다.
그들의 실수와 연약함을 이해해주고
또 그들을 존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들만 존경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까다로운 상사에게도 존중하라고 가르치고 있고,
심지어 상사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8-19절입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사환들이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들에게만 순종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사람들에게도 순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 슬픔을 참으라고 합니다.
부당하다는 것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인내하라고 합니다.
요즘은 조금만 부당하게 대우를 받아도,
바로 건의가 올라오고,
블라인드 같은 온라인 어플에 글이 게시가 되고 그런 시대인데,
성경 말씀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살면서 겪는 부당함도,
참을 줄 알아야 된다.
부당한 고통도 견딜 줄 알아야 한다.
왜 견뎌야 하는가?
그것이 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은혜로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것은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아름답답니다.
부당한 고난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견디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기 때문에 참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부당한 고난에 대해서 갚으시고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
까다로운 상사
까다로운 윗 사람,
까다로운 부모님에 대해서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 허물을 덮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른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만약 우리 아이들이 학교나 밖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어떻습니까?
부모님 마음에 심란하고,
화가 나고,
억울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당연히 화가 나고,
마음이 심란하고,
그럴 수 있는데,
그런데, 우리 아이들에게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십자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인내하고 견디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진정, ‘겸손’하고, ‘권위를 존중’하는 아이로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가 부당한 대우를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경험했을 때, 아이가 선생님의 실수를 용납하고,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선생님의 잘못을 덮어주고, 품을 수 있도록 돕는다면,
그 아이는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도 감동할 만한 아이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는 본능적으로,
부당함에 분노합니다.
권위보다는 부당함에 주목합니다.
내 아이가 당하는 부당함
내 아이가 당하는 억울함을
어떻게는 풀어줘야 한다는 것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가
선생님의 권위도 존중하지 않고,
선생님께 부당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것을 폭로하거나
그래서 선생님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권위를 존중하고, 권위를 사랑해야 한다고 훈련된 부모는,
아이가 힘들고 어려운 일, 부당한 일을 당한다면,
이 일 때문에 기도하고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부당함 가운데서,
아이가 선생님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고,
권위를 존중하는 아이가 되도록 도우려고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권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은혜를 부모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태어나는 것부터 시작하여,
모든 과정에,
부모님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부모님을 소중히 대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약속도 주셨습니다.
연약하고, 늙은 부모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도 주셨는데요.
번영과 장수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에서 번영하고 장수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고 존경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터전에서
번영하고 장수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도 나타나는데,
에베소서, 6장 3절에,
네 인생이 잘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잘 될것이다. 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권위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때로는 부당하고, 억울하게 느껴질 때에도,
권위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함과 같이 노아의 허물을 소문내는 것이 아니라,
셋과 야벳처럼,
노아의 허물을 덮어주고 가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부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뜻을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권위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우리 역시,
까다로운 상급자,
부당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갚으심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권위에 순종하고,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 저와 모든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들은 말씀을 가지고 기도합시다.
부당한 대우에 원망하고, 까다로운 상관에 대해 불복종했던 죄를 회개합시다.
우리가 부당한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권위에 순종하고,
권위를 사랑하고, 권위자를 위해 기도하며 그분들의 실수와 허물을 덮어줄 줄 아는 셈과 야벳 같은 사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앞서 세우신 담임목사님 그리고 사모님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영적 지도자이신 담임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남은 미국 방문 일정 가운데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해주시도록. 우리가 목사님과 사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함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또한 교회 안에 병약한 성도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해,
가정과 다음세대 아이들 양육 가운데 하나님이 은혜주시고 변화시켜 달라고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진보주의, 합리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과거의 지혜를 담지하신 웃어른들이나 부모님들의 지혜를 귀담아듣지 않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권위에 순종함으로 권위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오늘 들은 말씀처럼 우리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 자녀들에게도 부당한 대우나 억울한 일을 해소하는 것보다, 권위를 존중하고 권위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일임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이 모든 말씀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관찰
12 너는 무겁게 여겨라!(카베드 / 피엘 명령 / 풍부하다, 무겁다, 영광을 돌리다), 너의 아버지와 너의 어머니를. 너의 날(욤이) 아라크(오래 살리라, 길어지다, 길게 하다 / 미완료)될 것이다. 아다마(땅) 위에서, 여호와가 준, 너의 엘로힘, 너에게 넘겨 준(나탄 / 주다, 넘기다, 드리다),
*피엘형은 ‘강조능동’, 혹은 ‘반복’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말로 무겁게 여겨라
무겁게 여기고 무겁게 여기라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면 (그 때문에)
너의 날들이 길어질 것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에게 넘겨준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땅의 의미 (아다마)
땅은 구약 이해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심 주제이다. 인간 자체가 땅의 흙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삶과 역사가 땅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하나님 계시의 중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 역사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자손 번성과 함께 땅의 소유를 약속하셨다. 그에 따라 출애굽 구원의 최종 목적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이었다.
땅이 구약의 중심 주제인 것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약에서 땅은 2504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언약이 사용된 경우보다 더 많은 것으로서 땅이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땅은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이다. 즉 전쟁, 갈등, 횡포와 같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삶의 현장이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역사의 무대 역시 땅이다. 구약은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들의 자서전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을 담고 있는 땅의 이야기이다.
구약성경에서 땅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아다마’와 ‘에레츠’ 두 가지가 있다.
‘아다마’는 ‘붉다’(red)는 뜻의 히브리어 ‘아돔’에서 파생된 것으로, 붉은색을 띈 비옥한 토양을 의미한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산지에서 흘러내려와 아래쪽 골짜기에 쌓인 충적토가 유명하다.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이를 ‘테라로사’(terra rosa), 즉 ‘붉은 색의 흙’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아다마’는 경작이 가능한 땅, 경제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땅, 곧 인간의 거주와 생존에 적합한 땅을 의미한다. ‘아다마’의 반대 개념은 인간이나 생물의 생존이 어렵고 힘든 사막 혹은 광야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아다마’의 땅이다. 토양 자체도 비옥하였지만, 네 개의 강으로 나뉘어 흘러 내려갈 정도로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 근원이 에덴동산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물 근원, 그리고 그런 좋은 여건 속에서 잘 자라는 각종 과일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에덴동산을 최고의 ‘아다마’로 만들었다.
비옥한 땅 ‘아다마’와는 달리, ‘에레츠’는 조건과 관계 없이 창조와 우주적 관점에서 본 땅이다. ‘에레츠’는 하늘 혹은 바다와 반대되는 보다 큰 개념의 땅이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이등분되거나,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등분된다. 곧 ‘에레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함께 창조하신 땅이 곧 ‘에레츠’이다(창 1:1).
‘에레츠’의 또 다른 이해는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한 나라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이 곧 ‘에레츠’이다. ‘아다마’가 인간 생존에 적합한 좋은 환경으로서의 땅이라면, ‘에레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적 개념의 땅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장으로서의 땅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땅은 ‘아다마’보다는 ‘에레츠’가 더 우선적이다. ‘에레츠’가 하나님과의 본질적 관계를 전제한다면, ‘아다마’는 주어진 ‘에레츠’ 안에서 누리는 복과 관련된다.
‘에레츠’와 ‘아다마’와 의미상으로 유사한 것이 ‘공간’(space)으로서의 땅과 ‘장소’(place)로서의 땅 구분이다. ‘공간’으로서의 땅은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다. 그런 ‘공간’은 어떤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 상태의 땅이다. 모든 부담을 벗어버리고 마음껏 휴식을 취하는 바캉스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장소’로서의 땅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기억을 통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역사의식으로 정착된 땅,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땅, 그것이 ‘장소’로서의 땅이다. 따라서 ‘공간’의 추구는 역사로부터의 도피이지만, ‘장소’의 소유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결단이다. (권혁승 교수)
경작할 수 있는 땅. 많은 문맥에서 אֲדָמָה는 불모의 땅이 아닌 경작 가능한 땅/밭을 의미합니다.
이슬(삼하 17:12)과 비(왕상 17:14, 18:1, 사 30:23)는 물이 부족하면 수확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는 것처럼 풍요로운 비옥함을 위해 필요합니다(렘 14:4).
야훼께서 택한 백성에게 주신 모든 것(예: 성읍, 신 13:12; 20:16; 민족, 7:16; 가축과 양떼, 12:21 등) 중에서 땅은 그분의 가장 탁월한 선물이었습니다. 땅에서 추방되거나 땅에서 생산성이 없는 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전형인 것처럼, 땅을 소유하고 그 땅에서 삶을 누리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축복하시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신 것은 야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제한을 불순종한 후(창 3:1-7), 주님은 뱀(3:14)과 땅(אֲדָמָה, 3:17)에 대해 저주(אָרוּר)를 선포하셨습니다. 땅에 대한 저주는 가시와 엉겅퀴를 자라게 하여 공간, 물, 영양분을 놓고 원하는 식물과 경쟁하게 함으로써 농업 노동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후, 하나님은 가인에게 저주(אָרוּר)를 내렸습니다(4:11, 인간에게 내린 최초의 저주). 이전에는 가인의 기쁨의 대상이었던 땅은 그의 모든 노동에 대해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비생산성의 보장은 가인을 유목민의 삶으로 내몰았습니다.
장수의 가능성은 다섯 번째 계명(출 20:12, 신 5:16), 정확한 도량형을 유지하라는 요구(신 25:15), 언약 규정에 순종하라는 권고(4:40, 11:9, 32:47)와 명백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야훼의 언약적 기대에 전심으로 순종하면, 야훼는 그들의 농작물(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가축의 성장, 신 7:13; 28:4, 11; 30:9; 참조, 말 3:11)에 축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의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면, 그분은 그들의 농작물을 저주하셨습니다(28:18).
언약 배반에 대한 궁극적인 형벌은 땅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언약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야훼는 또한 사랑하는 백성들이 자신에게 순종하기만 한다면 그들을 אֲדָמָה에서 제거하지 않겠다고 상기시켜 주셨습니다(왕하 21:8; 대하 33:8).
연구
63-66문에 대하여
제63문 : 제5계명이 무엇입니까?
답 :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하신 것입니다.
제64문 : 제5계명이 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제5계명이 명하는 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 그리고 동료와 같은, 각각의 여러 지위와 인륜관계에서 각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고 각 사람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제65문 : 제5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5계명이 금하는 것은 각각의 여러 지위와 인륜 관계에서 각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지 않고, 각 사람에 대한 의무 수행하기를 소홀히 하거나 거스르는 것입니다.
제66문 : 제5계명을 지킬 이유로 이어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제5계명을 지킬 이유로 이어서 말씀하신 것은 이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이 장수하고 번영하리라는 약속입니다. 다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들에게 선이 되는 한, 그렇습니다.
64문과 65문이 서로 대조되며 가르치고 있다.
66문은 ‘장수와 번영’에 대한 약속과 관련된다.
Deuteronomy 5:16 NKRV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Ephesians 6:3 NKRV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64문
명예를 보호하고 의무를 이행하라!
모든 사회적 관계 : 윗 사람, 아랫 사람, 동등한 관계에 있는 사람
Matthew 15:4 NKRV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Ezekiel 34:2 NKRV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Romans 13:8 NKRV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어떤 명예와 의무 : 그들 각자의 지위와 관계 내에서의 모든 사람들에게 속한
65문
명예와 의무를 무시하는 것을 금한다.
무엇이든지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
대요리문답 제124문
문: 제5계명에 있는 부모는 누구를 뜻하는가?
답: 제5계명에 있는 부모는 혈육의 부모뿐 아니라 연령, 은사의 모든 윗사람과 특히 하나님의 규례에 의하여 가정, 교회, 국가를 막론하고 우리 위에 권위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12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것은 단순히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 계명은 주로 성인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공경'이라는 단어는 '존경하다'라는 의미로 '무게 또는 존엄성을 부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문화는 남성 중심적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나열되어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어머니를 동등하게 중요시하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젊은 나이에 죽는 반면 많은 죄인들이 무한정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긴 날은 양이 아니라 질, 즉 풍요롭고 의미 있는 날들로 가득 찬 삶을 의미합니다.
930세까지 살았던 첫 아담은 서른셋의 나이에 돌아가신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보다 30배나 더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를 완벽하게 공경하셨기 때문에 첫 아담이 마지막 아담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30배 더 공경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계명 뒤에는 약속의 땅에서 오래 살라는 약속이 뒤따릅니다. 개인의 삶에서 오래 살아온 부모가 그 장수의 마지막에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국가로서의 이스라엘(그 안에 있는 모든 개인이 아니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장수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안식일에 안식하셨듯이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은 매주 각자의 가정에서 안식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그의 부양자인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셨듯이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은 필요에 따라 각자의 가정에서 부양자인 부모를 오랫동안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것은 단순히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 계명은 주로 성인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공경'이라는 단어는 '존경하다'라는 의미로 '무게 또는 존엄성을 부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문화는 남성 중심적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나열되어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어머니를 동등하게 중요시하기 때문에 "부모"라고 번역해서는 안 됩니다.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시는 땅은 "약속의 땅"을 가리킵니다(더럼). 땅이라는 단어는 땅 또는 흙을 의미하며(창 2:7에서처럼), 번영하는 농업 생활을 암시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은 "야훼 너의 [단수] '엘로힘"입니다. "주다"는 분사가 지속적인 행동을 암시하기 때문에 "주고 있다"로 더 잘 이해됩니다.
처음 네 계명은 이스라엘과 야훼와의 관계를 인도하는 원칙을 제시하고, 마지막 여섯 계명은 이스라엘과 언약 공동체, 더 넓게는 인간 가족과의 관계를 인도하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명은 여러 가지 면에서 첫 번째 계명의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처음 네 계명은 마지막 여섯 계명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고 모든 계명은 언약 관계를 규율하는 원칙으로서, 십계명의 프롤로그 역할을 하는 구약의 궁극적인 관계 진술에 기초합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사회 행정 질서에서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인이기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모를 공경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다섯 번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이 두 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의 기초가 되는 것처럼 여섯 번째부터 열 번째 계명의 기초가 되는 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공경해야 했고, 부모는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도구였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해야 했습니다.
Ephesians 6:1–3 NKRV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사도 바울은 ‘공경하라’를 ‘순종하라’로 바꾸었다.
고대 세계에서 노인을 부양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가족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고대 독자들은 최소한 노부모를 돌보라는 훈계로 이해했을 것이지만, 다른 형태의 공경도 배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여기에는 생계를 위한 식량 공급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헌에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기본 생필품으로 간주했던 보리, 양모, 기름의 세 가지 품목에 대한 배급이 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보리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노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생각은 12절 후반부와 잘 맞아떨어집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부모가 늙어감에 따라 부모를 부양하여 수명을 연장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황혼기에 비슷한 대우를 받을 것을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에는 어머니와 아버지(레 19:3에서 어머니가 먼저 언급됨)가 모두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아버지에 대한 관심만 표현한 아카드의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50년)과 대조적입니다. 땅에서 장수에 대한 약속이 첨부된 것은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대가족에 부여한 중심 가치를 보여줍니다.
구체적인 율법에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근본적으로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공격하거나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21:15, 17; 레 20:9; 신 21:18-21; 27:16). 그러나 이 계명은 긍정적이며, 단순히 부모가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부모를 공경(또는 "무게", 카베드)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종속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관심사와 필요에 진지한 비중을 두라는 것입니다.
Leviticus 19:3 NKRV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서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먼저 언급되고 있다.
존경해야 하는 이유
부모는 입법자요 재판자요 처벌자로서의 기능을 모두 수행한다.
입법부, 사법부, 집행부
⑤ 부모 공경에 관한 법(출 21:15, 17)
이 법은 부모 공경에 대한 제5계명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한 것이다. 언약 백성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부모를 폭행하거나 저주해서는 안 된다(출 21:15, 17). 우리는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자의 형벌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왜 최고 형벌을 적용하고 있을까? 그것은 부모를 하나님의 위치에 두고 부모 공경을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 생활과 사회생활의 가장 기본으로 보기 때문이다. 언약 백성은 부모가 많은 교육을 시켜주었든지 시켜 주지 않았든지, 돈이 많든지 많지 않든지, 힘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내가 선택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부모를 맡겨 주시고 세워 주신 자라 생각하고 하나님 섬기듯이 공경해야 한다.
Leviticus 19:32 NKRV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세다’는 말은 ‘머리카락이나 수염 따위의 털이 희어지다’는 뜻이다. 즉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자연스럽게 머리나 수염이 하얗게 되었다는 말이다. ‘센머리’는 곧 ‘노인’을 뜻한다. 따라서 ‘센머리 앞에 일어서라’는 말은 노인을 공경하라는 뜻이다.
‘세다’와 ‘희다’는 다같이 ‘백(白)’의 뜻을 나타낸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나타낸다. ‘세다’의 옛말은 ‘셰다’인데 이 말은 머리털이 생리적으로 희어진다는 뜻이다. ‘희다’는 눈빛과 같다는 뜻이다. 즉 색깔이 하얗다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가정이 해체된 상태에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요즈음 흔히 유행하는 말로 ‘콩가루 집안’이 돼버리고 만 것이다. 서로가 바쁘게 살다보니 가장은 자녀들의 얼굴보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한 밥상에서 맛있는 반찬을 집어주며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오고가는 가족의 정을 맛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먼 나라 이야기가 돼버린 느낌이다. 가족도 없고 식구도 없으니 가정교육은 물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밥상머리 교육이 중요한 몫을 차지했었다. 밥상을 대한 자리에서 어른에게 식사 예절을 배웠고 가족 중에 한 사람만 안 보여도 찾아서 같이 식사를 했다. 특히 동무들과 해지는 줄 모르고 놀고 있을 때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음성을 많이도 듣고 자랐다.
어머니가 부르는 음성을 들은 아이들은 재미있게 놀던 소꿉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미련 없이 집으로 달려가 저녁을 먹었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생선의 살점을 떼어서 친히 자식의 입에 넣어줌으로써 지극한 모정이 가슴 깊이 아로새겨지게 했다. 우리 민족은 때에 따라서는 가축마저 식구로 생각하는 정감 깊은 심성을 가졌다. 그러나 요즈음처럼 가축을 방안으로 끌어들여 상전처럼 모시는 짓은 하지 않았다. 짐승과 사람의 선은 엄격히 그은 상태에서 가축을 아끼고 애호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유
국내 반려동물 사육 인구가 1천만명을 넘어선 가운데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반려동물 사육의 가장 큰 장점으로 '정서적 안정감과 행복감'을 꼽았다.
2천11명을 대상으로 한 '반려동물 양육실태'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반려동물 사육 회원 698명 중 84.1%가 반려동물을 키움으로써 얻는 가장 큰 장점으로 '가족구성원으로서 주는 정서적 안정감 및 행복감'을 들었다.
이어 8.9%가 '귀엽고 예뻐서', 4.9%가 '양육하면서 책임감을 기를 수 있어서'라고 답했다.
부모 공경에 대한 실천적 내용으로, 잠언에서는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할 지 그 방법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잠 23:22–35). ① 아버지의 말씀에 청종할 것. ② 어머니를 가볍게 여기지 말 것. ③ 부모를 즐겁고 기쁘게 할 것. ④ 음녀나 이방 여인을 좇지 말 것. ⑤ 술을 찾거나 즐기지 말 것 등이다. 이와 더불어 성경에서는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창 28:7; 잠 6:20–23; 엡 6:1–3), 기쁘게 하며(잠 13:1; 29:3), 부모의 쓸 것을 공급하고(창 45:9–11; 마 15:5), 어려움 중에 평안하도록 돌봐주어야 한다고 가르친다(수 2:12–13; 룻 2:11). 이같이 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주 안에서’라고 단서를 단다(엡 6:1). 여기에는 부모가 원하는 것이라도 주님이 원치 않는 것이라면 삼가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실 부모를 세우시고 붙드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때 부모 공경의 참 뜻을 깨달을 수 있다.
공손히 섬김(신5:16). 존경과 흠모의 심정으로 섬기는 자세를 취함(레19:32; 26:2). 상대방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예의를 갖춤(막7:10).
부모 됨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직분자입니다. 부모에게 특별한 권위를 부여해 일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권위를 주신 것일까요? 돈을 잘 버는 것?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국가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하는 것? 예, 그런 것들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모의 일은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전해 준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한 신앙을 배워 자녀가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언약 백성에게 언약의 말씀을 들려 주시고 힘써 순종하며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부모뿐만 아니라 자녀와 손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지키게 해야 했습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이렇게 부모는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이웃인 자녀들을 사랑해야 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면 가장 귀한 것을 주려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이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언약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자녀에게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부모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큰 책임을 주셨기 때문에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 부모가 신앙교육과 훈련을 위해 권위를 행사하지 않거나 자녀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은 없습니다. 부모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권위를 가집니다.
권위란?
권위(權威, majesty, authority)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권력과 위세’, 혹은 ‘개인적인 덕망이나 문벌 등으로 생겨난 사회적 세력’, ‘어떤 분야에서의 탁월한 기술이나 지식’ 등을 가리킨다(딛 2:15).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우트’(גֵּאוּת)는 ‘오르다’, ‘높여지다’, ‘존귀하게 되다’는 뜻의 동사 ‘가아’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권위’, 위엄’, ‘주권’ 등의 뜻(시 93:1; 사 26:10)과 함께 ‘교만’(시 17:10; 사 28:1,3)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헬라어 ‘에피타게’(ἐπιταγή)는 ‘명령하다’, ‘지시(분부)하다’는 뜻의 동사 ‘에피탓소’에서 유래한 말로 ‘명령’(고전 7:6; 고후 8:8), ‘지시’(롬 16:25; 딛 1:3), ‘권위’(딛 2:15) 등의 뜻을 담고 있다. 이 두 단어를 종합해 볼 때, 권위는 존귀하고 위엄에 찬 존재로서 타인에게 지시하고 명령할 수 있는 힘(권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권위에는 하나님의 권위와 인간의 권위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에 ‘하나님의 권위’는 다른 존재에 의해 부여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본래부터 지니고 계시며 영원히 스스로 유지하시는 권위이다(신 4:39–40; 사 46:9–11). 만민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시 93:1).
이에 비해 ‘인간의 권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롬 13:1). 즉, 인간이 지닌 모든 권위는 위임된 권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위에 의해 세워진 각종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순복할 수 있어야 한다(벧전 2:18).
카보드
아람어 등 동족어에서, 무겁다, 어렵다, 명예롭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기본적으로 구약에서는 ‘무겁다’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엘리(삼상 4:18, 그는 뚱뚱했다), 압살롬의 머리카락(삼하 14:26), 모세의 손(출 17:12, 즉 그의 팔이 피곤했다)과 같이 이 무거움에 불이 켜질 수 있습니다.
‘반응이 없음’
신체 부위가 무거우면 반응이 없고 적절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כָּבֵד라고 불릴 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촉구하는 적절한 역할에 반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응하지 않는 다른 신체 부위로는 눈(창 48:10, 더 이상 잘 볼 수 없음), 귀(사 6:10, 슥 7:11,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함, 사 59:1, 하나님의 귀가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듣지 못하느냐?), 입과 입술(출 4:10, 모세가 어떤 종류의 언어 장애를 가졌다는 주장에 대한 티게이 참조, 겔 3:5-6,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를 의미함)이 포함됩니다.
‘명예로운’
존경받는다는 정태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적절하게 공경합니다.
주님께 대한 적절한 공경 또는 경배는 주님의 구원 활동에 대한 반응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친절한 자는 여호와를 공경하는 자이다.
학 1:8에서 하나님은 재건된 성전에서 자신을 영광스럽게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묵상
요즘은 ‘권위’를 따르는 시대가 아니다.
요즘은 ‘과학적 사실’을 따르는 시대이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에만 복종하고 순종한다.
그 외에는 모두 ‘가치관’이나 ‘개인의 취향’에 따르면 된다고 생각한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는 과학적 검증이 불가능하다.
과학이 뭡니까?
관찰 가능해야 하고, 측정가능해야 하고, 경험할 수 있어야 과학적 사실이 됩니다.
종교나 기독교는 과학적으로 연구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종교학이라는 학문 분야에서는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방법론을 적용하여 종교 현상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의 역사적 발전, 사회적 기능, 심리적 영향, 문화적 표현 등에 대해 과학적인 증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연구하고 분석합니다.
하지만 종교나 기독교의 근본적인 질문들은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하는가? 성경은 신의 말씀인가?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등에 대한 답은 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믿음과 가치에 관한 것이므로 개인의 선택과 판단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과학과 종교는 서로 충돌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영역과 한계를 인정하며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현상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종교는 의미와 가치를 제공하고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과학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사례들
1. 연구부정행위(fraud)는 과학의 객관성을 침해하는 가장 심각한 행위입니다. 연구부정행위는 연구 결과를 조작하거나 표절하거나 위조하는 등의 행위를 말합니다¹.
2. 과학자의 편견(bias)은 과학의 객관성을 해치는 요인입니다. 과학자는 자신의 가설이나 이론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수 있으며, 그로 인해 관찰이나 실험을 왜곡하거나 무시할 수 있습니다².
3. 과학자의 감정(emotion)은 과학의 객관성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에 대해 애착이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비판적인 태도를 잃거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².
4. 과학자의 믿음(belief)은 과학의 객관성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는 종교적이나 철학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이나 의미를 왜곡하거나 부여할 수 있습니다².
5. 사회적 압력(social pressure)은 과학의 객관성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과학자는 자신이 속한 학문 분야나 기관에서 인정받고 싶어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유행하는 주제나 방법에 따르거나 반대되는 의견을 억압할 수 있습니다².
6. 정치적 압력(political pressure)은 과학의 객관성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과학자는 자신이 속한 국가나 단체에서 원하는 결과를 내야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연구 방향이나 결과가 조절되거나 왜곡될 수 있습니다³.
7. 경제적 압력(economic pressure)은 과학의 객관성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과학자는 자신이 속한 기업이나 단체에서 이익을 추구하고 싶어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연구 비용이나 시간이 제한되거나 윤리적인 문제가 무시될 수 있습니다³.
8. 언어적 한계(linguistic limit)은 과학의 객관성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과학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으로 현상을 설명하고 전달하려고 하지만, 언어와 개념은 현상과 일치하지 않거나 다른 언어와 개념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².
9. 관측적 한계(observational limit)
과학을 하는 인간은 완벽히 객관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인식과 사고에 한계가 있으며, 다양한 요인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학은 인간의 객관성을 향상시키고 보완하기 위한 노력이며, 과학적 방법과 원칙을 따르면서 연구를 수행하고 검증하고 공유함으로써 과학의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권위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다양합니다. 10가지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권위는 자유와 창의성을 억압하고, 개인의 독립성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
2. 권위는 부당하고 폭력적이며, 권력 남용과 탄압의 원인이 된다.
3. 권위는 사람들에게 비판적 사고와 타성적 판단을 방해하고, 맹목적 순종과 편견을 조장한다.
4. 권위는 사회의 변화와 진보를 저해하고, 보수적이고 고정된 관습과 가치를 강요한다.
5. 권위는 인간의 본질과 적합하지 않으며, 인간은 자연스럽게 협력하고 상호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6. 권위는 신뢰와 존중에 기반하지 않으며, 강제와 위협에 의존한다.
7. 권위는 항상 정당하지 않으며, 오류와 편향이 있을 수 있다.
8. 권위는 개인의 능력과 자유를 증진시키지 않으며, 의존성과 속박을 유발한다.
9. 권위는 다양성과 평등을 인정하지 않으며, 소수자와 약자를 차별하고 억압한다.
10. 권위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과학적인 사실이나 전문적인 지식을 알려주는 경우에는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강요하거나 비난하는 경우에는 권위에 반대하는 것이 옳을 수 있습니다.
적용
교육과 권위
우리 아이들이 ‘수학 공부’할 때 수학을 ‘의심’하면서 공부하지 않는다.
1+1은 당연히 2라고 ‘믿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교육과 권위다.
의심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공부하기 전에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믿고’ ‘공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육과 권위’의 관계다.
우리 부모님이, 선생님들 비판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부족하고,
아무리 특이해도,
선생님들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교육이 안 되는 것이다.
카보드는,
무겁다, 반응이 없다, 명예롭게 하다 라는 의미인데,
그 중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명예롭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 사람의 이름을 깎아내리지 않는 것, 명에를 실추시키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부모님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 주변 동료들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회사 사장, 부장, 임원들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말에 무게를 안 둔다.
말에 대해 가볍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한다.
남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그것이 옳아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이다.
물론 우리가 건강한 비판은 할 수 있다.
나라와 민족을 염려하며 이야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난과 비판은 죄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그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를 망치는 행위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그리고 말은 다른 사람의 권위를 실추시킬 수 있다.
주중양육을 한다.
양육받는 것은 굉장히 기쁜 일이다.
한 사람이라도 양육받는 것이 굉장히 기쁘다.
부모님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교역자의 권위를 확실하게 세워주는 일이다.
교역자도 사람이다.
말씀을 맡았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권위를 확실하게 세워줘야 교육이 되는 것이다.
교역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말,
교역자의 이름을 깎아내리는 말들이 양육받는 자녀들의 교육을 망치게 되는 것이다.
어렵게 하는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가르쳐야 한다.
말씀 듣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정말 고민하고 고민했던 적이 있다.
말씀에 은혜가 너무 안 되고 마음이 버거워서 고통스러웠다.
그 일로 수 년 동안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끝까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 분을 사랑하고 있다.
이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와도 깊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왜? 말씀의 권위에 대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에 그분과의 거리를 조절하게 되었다.
아내가 아무리 양육하는 모습이 올바르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교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르지 못한 것’을 가르치는 아내의 ‘권위’를 여전히 인정하도록 돕는 것이다.
남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아무리 자식에게 ‘틀리게’ 대할지라도, 그것을 ‘교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틀린 것을 가르치는’ 남편에 대하여 자녀가 여전히 ‘권위’를 인정하도록 돕는 것이다.
교권
교권 개념은 학생인권 개념과 대립적인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학교 교육의 주체인 교사와 학생이 서로 존중하고 각각의 인권이 존중되어야 하는 점에서 교권과 학생인권을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교권이 사회적 신뢰 속에서 지지를 받았던 과거에는 교권을 논할 일이 많지 않았다. 현재는 교권 침해 문제가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교권’에 대한 개념과 법령 규정을 찾고 있고, 교육청과 교육 관련 기관에서 교권에 대한 연구와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
교권 침해의 대상은 교원이지만, 가해 주체는 다양하다. 그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학생과 학부모이다.
권위
우리의 상황을 직시해보면 스승의 권위를 포함한 제 권위가 가속적으로 상실되어가는 세태를 개탄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드높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부모님의 말씀’은 더 이상 조건 없는 경청과 순종의 권위를 갖지 못할뿐더러 심지어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김준수, 2005:32).
권위 상실에 대한 우려는 우리 삶의 골격인 사회 질서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동반한다. 부모의 권위, 스승의 권위, 학문의 권위, 법의 권위, 공권력의 권위, 국가의 권위가 모두 부정되고 허물어진다면 우리 가족, 우리 사회, 그리고 우리 나라는 대체 어찌되겠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이들은 권위가 자유와 배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오늘날을 일컬어 권위 위기의 시대라고도 한다.
권위에 대한 배척이 결국 오히려 개인의 진정한 자유를 위협했고 사회질서마저 혼란하게 한 것은 우리의 경험으로도 입증되었다. 정당한 제한이 무시될 때 임의적인 강압과 압력 때문에 보다 많은 자유가 제한되고 가치 있는 지식의 형식에 입문되지 못한 아이들에게 판단을 맡김으로써 지적 혼란의 악순환을 가져오게 된다.
권위와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과 비판은 근대 계몽주의의 본질적인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근대의 문턱에 서있던 베이컨(진석용, 2001:48)의 우상론, 특히 ‘동굴의 우상’과 ‘극장의 우상’은 바로 기성 권위의 허구성과 비합리성에 대한 신랄한 폭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는 권위에 대한 회의와 도전과 파괴가 일상화된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탈권위의 시대이며, 이런 점에서 현시대는 고스란히 근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근대 계몽주의가 비판의 표적으로 삼았던 것은 실은 권위 자체가 아니라 거짓된 권위와 권위주의였다. 이때 존중 받을 자격이 있는 진정한 권위와 그렇지 못한 사이비 권위를 판정하는 기준은 바로 이성이었다. 계몽주의는 권위를 가장한 불합리하고 부당한 지배 권력을 이성에 의거하여 타파하고 그 자리에 이성적 권위를 새롭게 수립하고자 했다. 이성은 모든 정당한 권위의 원천이자 기준이고 그 자체가 최고의 권위였다. 이성은 거짓 권위에 저항하는 혁명의 무기였으며 동시에 참된 권위의 입법자였다. 그러나 니체(F. Nietzsche)가 이성을 비이성적인 욕망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권력 의지’의 한 양태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절하한 후 참과 거짓, 옳고 그름, 정당함과 부당함을 가리는 기준이었던 이성의 권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더 나아가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의 근거였던 이성이 이제는 권위주의의 주범으로 비판받게 된다. 이성의 획일성․ 배타성․ 억압적 규율로부터 탈출하는 길은 오히려 비이성에서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성의 뒷받침 없는 권위는 강제의 부담을 짊어질 수밖에 없고 이러한 의미에서 비이성적권위나 반이성적권위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는 한, 권위와 권력을 구분하는 주요준거 가운데 하나가 사라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박효종, 2005:78).
권위의 위기를 초래하는 더 심각한 요인은 현대 사회의 근본적인 유동성, 그리고 그로 인한 서사적 삶의 단절과 파편화에 있다.
월쩌(Walzer,1990:11)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네 가지 유형의 유동성에 의해 극심한 불안정성에 노출되어 있다. 첫째는 잦은 이주 등으로 인한 지역적 유동성으로서 이는 공동체로의 귀속감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둘째로 직업․ 계층․ 교육 등에서의 사회적 유동성은 전통의 급속한 약화를 초래한다. 셋째로 혼인 관계의 유동성은 사회 구성의 기본 단위인 가족의 해체를 가져온다. 넷째로 정치적 유동성은 제도의 불안정성을 낳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유목 문화에 따른 유동성 때문에 기존의 정주 문화에서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가능하게 했던 연대적 결속감은 사라지고 가치 판단에 실질적인 내용을 제공해 줄 생활세계적 지평은 희박해지며 개인은 뿌리 뽑힌 무연고적 원자로 고립되기 마련이다.
해리스(R. B. Harris, 1976:1)는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불안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권위무시현상에서 오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참된 권위의 본질과 그 소재를 파악하는 과제가 급선무라고 역설하였다.
현실적으로 권위의 공백으로 생겨난 공간은 사이비 권위와 권력에 의해 점령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전문가는 ‘명령’보다 ‘설득’, 혹은 ‘지시’보다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다. 명령이 아니라 설득과 조언이기 때문에 사람들로서는 자발적 판단을 하고 이에 따라 행동의 복종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자유롭다. 명령과 지시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설득과 조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자유가 아무리 소중한 가치일지라도 마치 장미에는 가시가 있듯이 자유에 는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첫째, 인간은 절대적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존재다. 육체적으로 볼 때 공간적·시 간적 제약을 받고 있는 인간은 갈등, 배고픔,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인간은 관계성을 갖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주 지 않는 범위 내에서 또한 다른 사람의 천부적 창조성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 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
셋째, 자유는 곧 선택이기 때문에 자유의 행사에는 갈등상황과 사고작용이 개재 된다. 또한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책임을 진다는 뜻이므로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 을 동반한다(정범모, 2008:177-179).
넷째, 자유는 그것을 창조적인 자유로 승화시키기 위해 능력과 역량을 동반한다. 자유를 최대한 행사하려면 응당의 지적, 기술적, 정서적 역량이 필수적이다. 아무 리 자유가 소중하다 하더라도 철부지 아이들에게 칼을 마음대로 휘두를 자유는 줄 수 없고, 운전면허증이 없는 사람에게 자동차를 몰고 다닐 자유를 줄 수 없는 것이다.
다섯째, 소극적인 입장에서 더 큰 속박을 안 받으려면 보다 작은 속박은 참고 견뎌야 하고 적극적인 입장에서 보다 큰 자유를 누리려면 보다 작은 자유는 유보 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만연하고 있는 권위의 추락, 권위의 상실이란 말은 권위가 응당히 부여되어야 할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하지 않음을 뜻한다.
나이, 지위와 같은 권위의 전통적 원천수단은 합리주의 및 자유주의, 능력중심의 서구적 가치관의 도입과 더불어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나이나 지위가 자신보다 높더라도 그에 따른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의 권위는 권위 수 용자에 의해서 거부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교 이념을 대표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덕목들을 살펴보면 수직적 혹은 종적 인간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규범이 대부분이다. 수직적 인간관계에서는 위계가 높은 사람의 권위에 위계가 낮은 사람이 복종함으로써 그 관계는 유지되었고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어 수직적인 인간관계는 권위와 복종에 의해 통제되고 유지되었다. 이러한 권위에 의한 사회통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 적용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수직적 관계 속에서 스승의 권위는 정당화되었다. 스승의 그림자는 밟아서도 안 된다고 하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는 교육에 있어서 스승의 권위에 많은 의존을 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한국사회에 서양의 합리 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전통적인 유교의 영향력은 약화되었으며 수직적인 인간관계보다는 수평적인 평등한 인간관계가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수평적 인간관계의 일반화는 기득권층이 보기에는 자신들이 갖고 있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으며 반대로 권위수용자들에게는 권위는 없어져야 할 구시 대의 유물이 된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의 가치관의 변화로 인하여 이전 세대가 교육을 신분상승의 도구로, 성공의 열쇠로 여긴 것에 반해 요즘 청소년들의 삶의 목표는 자아 실현, 행복추구 등으로 변하고 있다.
하나님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입니다(시 29:10, 사 40). 자연(욥 38장), 정부(단 4:17, 34-35), 역사(행 1:7, 17:24-31)에 대한 권위를 가지며,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는 권세도 있습니다(눅 12:5).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요 10:25-30), 성령의 권위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주어지는 것처럼 이 권위는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고 합니다(요 14:26; 15:26; 16:13-15).
그리스도에게는 죄를 용서하고(요 5:26-27), 생명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살리며(요 10:17-18),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요 17:2).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실 때 드러난 권위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마 7:28-29, 8:27, 눅 4:36).
성경은 하나님의 내재적 권위 외에도 여러 종류의 파생적 권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들로는 시민 정부(롬 13:1-7), 부모(엡 6:1-4), 고용주(엡 6:5-9), 교회 지도자(히 13:7, 17), 천사(눅 1:19-20), 사탄(눅 4:6), 사탄 이외의 악령(엡 6:11-12)의 권위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권한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권위는 하나님께서 한시적으로만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딤후 3:16, 벧후 1:20-21) 신성한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읽기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종종 특정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여기에는 부모나 교회 지도자의 권위가 포함됩니다. 권위의 가장 고귀한 사용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스리는 사람은 ... 섬기는 사람과 같이 ... 되라. . . 나는 섬기는 자로서 너희 가운데 있다"(눅 22:26-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보다 다른 사람에게 권위를 사용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현명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권위는 언젠가 그 권위를 주신 하나님께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고전 15:24~28).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즘 시대에 추구했던 보편성이나 절대성 토대 권위 등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포스트모더니즘 이 “절대성과 확실성, 혹은 기반을 배제한 문화적 감성으로 "진 리의 문제와 관련해서 상대주의나 다원주의에 대한 헌신”으로 향 한다고 규정한다.
모든 인류에게 권위와 확실성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전통이나 이야기는 없다.
모더니즘의 시대는 “권위의 시대였다. 다만 문제는 어떤 것을 진리의 권위로 삼는가였다. 어느 시대나 성경 이외의 것에 권위 를 두려는 시도가 있었다. 워필드가 활동했던 모더니즘 시대에 는 이성과 경험(감정)이 성경의 권위에 도전했다. 이러한 시도들 은 각각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와 인간의 주관적 경험 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의 형태로 발전했다.
합리주의와 신비주의는 언뜻 서로 상반된 사조처럼 보인다. 그 러나 둘 다 인간 내면에 권위를 두고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는 측면에서 주관주의적인 특성을 띤다. 결과적으로 합리주의와 신비주의는 성경의 객관적이고 외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 내 면의 주관적인 권위를 강조한다는 공통된 특징을 갖는다.
수직과 수평
요즘은 수평성을 강조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수직성’은 틀린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수직도 ‘건강한 수직’이 있다.
하나님의 ‘수직’을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수직’은 자신을 희생하는 수직이다.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수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백성으로 삼으셨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건강한 수직’이다.
그런데 요즘은 ‘수직성’ 자체를 악으로 규정한다.
소통과 협력, 화해와 평등과 같은 가치만 중요한 것으로 이야기한다.
요즘 아이들은 예민하다.
그리고 짜증이 많다.
또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 시대가 ‘수평적 가치관’을 가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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