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 시리즈 (3)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팔복 (3)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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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Notes
Transcript
Intro
사랑하는 대학청년부 여러분, 지난 주까지 우리는 팔복의 두번째 복, 애통하는 자까지 말씀을 보았습니다.
진도가 너무 부진해서 오늘은 3가지의 복을 다루고, 나머지 3가지를 다음주에 다루려고 합니다.
본문 (마 5:5-7)
Matthew 5:5–7 KRV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예화
나폴레옹은 세계 정복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프랑스 영토를 다 차지하고 또한 유럽전체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자신이 빼앗은 영토를 다 빼앗겼고, 심지어 함께 수 많은 전쟁을 치룬 그의 부하들도 나폴레옹을 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라는 작은 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 때 나폴레옹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오늘까지 나의 영토와 나의 권세를 위해서 일했고, 나의 부하를 얻기 싸웠는데 지금 내 것은 하나도 없다.그러나 예수는 영토도 없고 부하도 없고, 십자가에서 힘 없이 죽었는데 오늘날 그를 따르자는 셀 수 없이 많다. 이제야 나도 알겠다.. 나는 강한 병정을 모았지만, 그는 사랑을 나누어 주었다"
나폴레옹의 절망적 고백은 강력한 자가 최후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자가 마지막으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번째 복은 온유한 자입니다.
본론 1) 온유한 자 마:5:5
Matthew 5:5 KRV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의 한자 ‘온'은 ‘따뜻할 온' 이고, ‘유'는 ‘부드러울 유' 자 입니다.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럽다. 이것이 온유의 의미입니다.
영어 단어로는 meek 라는 가 쓰입니다.
이 뜻은 화를 내지 않고 참으면서 피해를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한자의 의미와 영어 사전상의 의미를 종합해보면
온유는 피해를 입었을 때 분개하지 않고 인내하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순한 성품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정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온유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나요?
온유와 비슷한 단어로 온순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온순은 천성적으로 순한 것을 말하고,
온유는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은혜로 부드러워진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순한 온순한 사람은 불의에 대해서 “NO” 라고 하지 못하지만
온유는 불의에 대해 “NO” 라고 말하면서 정의를 이루는 성품입니다.
시편 37:11 절에 보면
Psalm 37:11 KRV
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여기 시편에서도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고 기록이 되어 있네요.
37편의 문맥은 악한 꾀로 형통한 자에 대한 반응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시편 37:1) 에서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Psalm 37:1 KRV
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하지만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불평, 분노, 분개 하게 됩니다. 어떻게 저렇게 악한 자가 형통할 수 이나라고 하며 분을 표출하지요.
시편 37편 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 37:8)
Psalm 37:8 KRV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사탄을 성공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 형제, 자매들 속에 있는 죄와 실패에 대해서 분을 내고 똑같이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하지만, 죄를 지으면 안되고,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할 때 혈기를 부려서도 안됩니다.
분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온유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답답한 일을 당할 때,
남이 나를 괴롭힐 때,
특히 남에게 책망을 받을 때 부드럽게 참고 견디는 성품입니다.
온유는 사람들에 대한 겸손, 부드럽고,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은 성품을 말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며 불평하지 않고,
여호와를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37:7)절과 9절에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Psalm 37:7 KRV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Psalm 37:9 KRV
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온유는 주인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심판의 특권을 내어 드리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온유는 사자 같은 분노와 이리 같은 분노를 어린양처럼 양순하게 길들이는 것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에 대해 자기 고집을 꺾는 것이고 사람들에 대해 악한 의지를 꺾는 것이다" by Arthur Pink.
“말굽을 박은 말을 야생 당나귀보다 인간에게 더 큰 기여를 한다.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는 위험하지만 통제된 에너지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Billy Graham.
하나님이 주시는 말굽을 박고 하나님에게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의 뜻대로 고집 부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에 맞추는,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사건이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 때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비방을 합니다.
그들은 비방을 하면서 아예 모세의 리더쉽 자체에도 도전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런 누이와 형에 도전에 대해 만약 40대의 모세 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40대의 모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쳐 죽여서 모래 속에 감춘 사람이었습니다.
Exodus 2:12 KRV
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혈기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빚으셨습니다.
광야 훈련을 통해서 모세 안에 있는 못된 성깔이 빠져나갔습니다.
미리암과 아론 말고도 모세는 미성숙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엄청난 비난과 원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가족들이 자신을 그렇게 비방하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Numbers 12:3 KRV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는 자신의 옛 모습으로 그들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드러워진 모세는 그들을 용서하고 나병에 걸린 미리암을 위해서 기도해줍니다.
온유는 나약하거나 비굴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유 부단한 모습도 아닙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5 (KRV)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또한 역설입니다.
강한자가 돈 많은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이 이 땅의 원리입니다.
얼바인에 땅을 많이 가진 자가 온유한 자 인가요?
본문에서 “땅"은 구약에서는 가나안을 의미하고, 신약에서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자는 지금 천국을 소유하고 누릴 뿐 아니라, 미래의 완성된 천국을 보장 받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온유한 자는 적이 없으므로 모두의 친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롯과 아브라함은 소유가 많아서 헤어져야 했습니다.
롯은 자기 것을 먼저 챙기고 자기 소원대로 기름진 땅을 차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에는 결국 누가 땅을 차지 했나요?
양보하고 조카에게 부드럽게 처신했던 아브라함이 땅을 차지했습니다.
온유해지는 방법
첫번째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겸손해지는 것을 예수님께 배워야 하는 것처럼 온유해지는 것도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Matthew 11:29 KRV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는 하루아침에 그리스도를 닮지는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계속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온유를 배울 수 있는 일본의 MK 택시운전기사의 고백입니다.
“2000년 전에 죄도 없고 허물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차마 받지 못할 모욕과 고통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삽니다. 그분의 고토을 생각하면 참지 못할 모욕이 없고 이겨내지 못할 고통이 없습니다. 택시를 운전하다 보면 세상에 대해 잔뜩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직장을 잃거나 장사가 잘 안되어서 불만이 생긴 사람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술을 잔뜩 먹고 택시를 타고는 운전기사에게 화풀이 할 때도 있습니다. 고함을 지르고 시트를 발로 차고 목에 주먹을 들이대고 심지어는 발을 머리에 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저는 꾹 참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이런 것쯤은 고생도 아닙니다. 제가 그런 무례한 사람들에 대해 참는 것이 가족의 생계 때문이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비참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참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힘을 내서 이 사회에서 떳떳하게 살게 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만 있다면 저는 얼마든지 화풀이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온유해지는 방법은 8복의 순서에 따라 자신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애통하게 되고 애통하면 온유하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보고 애통하는 자는 내가 지독한 죄임이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용해주시는 주님을 체험했으므로 남이 나에게 잘못할 때도 온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살펴보고 관찰하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남들이 나를 죄인이라고 할 때는 참아내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이것은 외식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정직하게 인정한다면 남들이 내게 그렇게 말해도 그것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이런 온유한 마음이 있을 때 남이 욕해도 욕하지 아니하고
누군가에게 고통을 당해도 위협하지 아니하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복수를 맡길 수 있습니다.
‘내 속을 십자가의 보혈로 정켤케 하소서. 십자가의 주님을 본받게 하소서. 내 속에서 분노의 독침을 빼주시고 거기서 온유의 씨가 자라게 하소서' 십자가 밑에서 많이 운 사람은 온유해집니다.
셋째,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온유이므로 성령에 순종할 때 온유해집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소원을 주시고 그대로 행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특히 우리를 해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혈기와 분노로 달려가려는 자아를 조절하면서
너그럽고 부드럽게 대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온유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면 온유해집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은 친구도 많았지만 적도 많았습니다.
스탠턴이라는 변호사이자 정치인이였던 훗날에 장관까지 지냈던 자 인데, 이 사람은 링컨을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신문지상에는 링컨을 ‘교활한 광대'라고 선전했고 공식석상에서는 링컨을 ‘오리지날 고릴라' 라고 조롱할 정도로 링컨을 괴롭혔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고릴라를 보러 아프리카까지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의 스프링필드에 가면 멋진 고릴라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그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사람들은 경악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국방장관으로 세울 수 있습니까? “ 물었지만 링컨은 “그 자리엔 그가 적임자요" 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링컨이 암살된 후에 스탠턴은 링컨의 시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꿇어 엎드리며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 계십니다.”
그는 진정으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바로 배운 온유한 사람입니다.
주님께 배우고 팔복의 순서에 따라 자신을 다스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4번째 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Matthew 5:6 KRV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배고픔은 고통스럽습니다.
요즘은 먹을께 넘쳐서 시도때도 없이 먹지만 사실 몇 십년전만 해도 배고픔 때문에 굶어 죽는 경우가 있었고,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 많은 사람들이 먹지 못해서 굶주려 죽고 있습니다.
BC 436년 로마에는 기근이 너무나 심해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수천 명의 사람들이 티베르 강에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배고픔 때문에 동물의 왕 사자도 울고요,
사람도 배고프면 이성을 잃기도 하고 참을성도 사라지고, 기쁨이 없습니다.
목마름 또한 고통스러운 갈망입니다.
갈증이 나면 생각나는 것은 물밖에 없습니다.
태아는 97%, 신생아는 77%, 어린이는 70%, 어른은 60%, 노인은 5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물이 모자라서 죽는다고 합니다.
물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어서 사람은 목마를 때 죽음의 고통을 느ㄱ고 강렬하게 물을 사모합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쫓겨 났을 때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질 때,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렇듯 물을 마시지 못할 때 죽음의 고통을 느낍니다.
그런데 6절 말씀을 다시 보면
마태복음 5:6 (KRV)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배고픔과 목마름이 동시에 겹쳤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 이것이 합쳐진 것은 가장 강렬한 욕망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이렇게 가장 강렬하게 사모하나요?
돈벌기 위해서는 밤을 자지 않아도 되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 있고
건강하기 위해서 매일 매일 체육관을 갑니다. 아무리 늦어도 가고, 아무리 피곤해도 갑니다.
어떤 여자분들은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건강을 헤치기 까지 합니다.
지식을 얻어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밤새워 공부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어디에 이런 열정과 갈망이 있나요?
사탕을 먹은 아이는 위장은 텅 비었는데도 당분으로 헛 배가 불러서 밥상 앞에서도 밥을 외면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세상의 죄악 된 쾌락에 빠져 있어서
영적인 것에 대한 식욕이 없고, 대신 마귀가 차려주는 진수성찬을 너무 많이 먹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만 먹으면 영적인 것에 대한 식욕이 사라집니다.
예배 오기가 힘들어지고, 예배때 하는 통성기도에 기도가 하기 싫습니다. 말씀 보기가 힘들고, 말씀 묵상은 더욱 되지도 않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없습니다.
세상의 것만 먹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들에 대한 갈망이 사라집니다.
사탕만 먹어서 당분으로 헛 배가 불러 진짜 갈망해야하고 마시고 먹어야 할 하늘 나라의 것들을 놓치고 사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나요?
잠시 멈춤.. <하나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망하게 된 모습을 보고 자신의 어떤 선행이나 공적을 붙잡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을 부여잡는 것이 “심령의 가난” 입니다.
멸망의 원인인 죄 때문에 괴로워 하며 하나님 앞에 우는 것이 “애통" 입니다.
이렇게 울고 나면 남을 대할 때 “온유"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복된 사람은 “심령의 가난"과 “애통"과 “온유"로 소극적인 자세에서 끝나지 않고 “의"를 추구하는 적극적인 단계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과거의 죄로 애통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미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의의 필요를 느끼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배고픈것이 아닙니다.
탕자가 배고플 때는 쥐엄 열매를 먹었지만, 굶어죽게 되었을 때는 아버지께로 돌아 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복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너무나 귀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대학청년부 지체분들도 참 귀합니다.
저희가 아이를 키우면서 보니까요,
아이를 키우면서도 교회를 섬기고 애쓰시는 분들이 참 너무나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를 3-4명을 키우시면서도 라이드에 집안일에.. 얼마나 피곤하고 지칠까요.
그래서 때로는 교회 일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남들보다 일찍 나와서 섬기는게 힘들어서
볼멘 소리를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냐면 그게 결코 쉬운게 아니고 정말 힘이 들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배우는 자리에는 늦은 시간에도 아무리 피곤해도 웃는 얼굴로 나와 말씀을 배우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바로 의에 대한 갈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그 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으니, 그 고된 일을 다 마치고도 은혜의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이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의에 대한 갈망> 나의 예화...
의에 대해서 한번 살펴 봅시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먼저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 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3 가지 측면으로 의를 이야기 합니다. 법정적인 의 그리고 개인적은 의, 그리고 사회적인 의를 이야기 합니다.
법정적인 의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저와 여러분을“의롭다" 고 선언해주셨을 때, 칭의 (justification) 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법정의 의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의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칭의를 받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수관계에서 화목관계로 전환이 됩니다. 이것이 법적의 측면의 의입니다.
개인적인 의: 개인이 하나님의 법 (10계명)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격과 행동을 가지고 살 때 개인적인 의를 이룹니다. 개인적인 의에서 중요한 것은 외부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동기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외부적인 규정에만 맞추는 외형적인 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는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 앞에 바로 되어 있는 의를 의미합니다.
사회적인 의: 하나님께서는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법과 질서를 잘 지키고 구조적인 악을 척결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압제, 여성들과 아이들이 대한 인권, 사회 정의, 이런 부분에서 신자들은 의를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깐 본문에서 말하는 의는 “의롭다" 는 선언만이 아니고 “의롭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의를 갈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완벽한 의, 하나님의 의를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의를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주리고 목마른 자에 주시는 복은 무엇인가요?
배부름
Matthew 5:6 KRV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리는 복은 바로 배부름입니다.
마태복음 5:6 (NIV)
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마태복음 5:6 (NRSV)
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마태복음 5:6 (ESV)
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satisfied.
마태복음 5:6 (NASB 2020)
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satisfied.
영어로 보니깐 배부를 것이다를 채워지다, 만족함을 얻을 것이다 라고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죄인인 인간에게는 하나님 없이는 만족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가수 박진영이 힐링캠프에 나왔던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그가 가수가 되면서 가졌던 첫 목표가 20대에 10억이었나 20억을 버는 것이 자신의 목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앨범은 처음부터 대박을 쳐서 20대에 20억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 목표가 채워지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그 만족이 결코 오래 가지 못해서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고 합니다.
아시안 작곡가 빌보드 차트에 top 10 에 들어간 앨범을 제작한 적이 없기에 자신이 쓴 곡이 있는 미국 가수의 앨범이 빌보드 차트 top 10에 들어가는 것으로 목표를 정하고,
그는 부단하게 노력했습니다. 그것도 마침내 이뤄냈습니다.
그런데 그 만족감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부자가 되었고, 세상적인 명예도 얻었지만, 만족감을 누리지 못하자.
그래! 내가 베풀면서 살면 이 빈 마음이 채워질꺼야 라고 생각을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달랐다고 합니다. 너무나 기뻤고, 너무나 만족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의 존재를 찾아보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가서 2년을 살다가 왔다고 하지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배부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사는 것이 결코 먼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먼저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에 만족이 있다. 배부름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 다른 이유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이 리스도인으로서 살아 있다는 생명의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아이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아기는 엄마의 젖을 갈망합니다.
우리 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모습이 없다면
우린 죽은 신자 인지도 모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이 모두에게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를 때 하나님과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배우자와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족을 주시기 때문이고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Psalm 107:9 KRV
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Psalm 34:10 KRV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의 영적 갈증을 해결하지 못한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대화 가운데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John 4:10 KRV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한복음 4:13–14 (KRV)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의 샘은 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의의 원천인 예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며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끊기지 않고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다섯번째 복)
Matthew 5:7 KRV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넘어진 자를 짓밝지 않고 손을 잡아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잔인한 사람은 넘어진 자에게 침을 뱉지만, 자비한 사람은 넘어진 자를 붙잡아 일으킵니다.
긍휼은 남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고 동정하며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 John Piper 목사님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긍휼을 은혜와 비교하면, 은혜는 죄 중에 빠진 자를 돕는 것이고, 긍휼은 불행 중에 빠진 자를 돕는 것이다.
긍휼은 죄로 인해 고통 당하는 자를 동정(sympathy)하고 그 고통을 제거해주려는 욕망과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긍휼은 죄인을 용서하고 불행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뉴욕에 나과다 라는 비행장이 있다고 합니다. ‘나과다' 라는 뉴욕 시장의 아름다운 삶 때문에 공항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고 합니다. 나과다 시장이 판사로 재직 중에 한 노인이 법정에 끌려왔습니다.
판사: 어르신은 무슨 죄로 여기 오셨습니까?
노인: 저는 뉴욕 거리에서 빵을 훔쳐 먹은 죄로 여기 붙잡혀 왔습니다.
판사: 어째서 빵을 훔쳐 먹었습니까?
노인: 너무 배가 고파서 길을 지나가다가 저도 모르게 빵을 훔쳐 먹었습니다.
판사: 어르신이 남의 것을 훔쳤으니 벌금 10불을 판결합니다.
노인: 판사님 저는 돈이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그 때 판사는 호주머니에서 10불을 꺼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벌금을 내겠습니다. 이토록 굶주린 형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배불리 먹었으니 그 죄를 회개하며 그 대신 벌금을 내놓겠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도 저와 같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이 되시거든 제가 모자를 돌리 겠으니 거기에 헌금을 하십시요" 많은 사람들이 모자에 헌금을 하였고, 판사는 모인 돈을 노인에게 드리면서 “돌아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고 이곳으로 오지 마십시요"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전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잖아요.
긍휼과 의에 대한 갈망과 비교를 하면,
우리가 의를 추구하는데 잘못된 방향으로 집중하면 자칫 불의나 죄 때문에 고통당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기 보다는 그들을 쉽게 비난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의와 긍휼을 둘 다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는 의대로 세워 나가야 하지만,
동시에 불의를 행하거나 당하여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불의를 미워하는 의로운 분이시지만 동시에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85:10 (KRV)
10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우리 하나님 너무나 좋은 분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긍휼과 정의가 만나는 행동을 보여주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율법의 정의에 따라 돌을 들어 치려 했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 하시면서
그녀를 돌로 치려고 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치심으로써 간음한 여인을 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긍휼은 바로 정의와 연결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10–11 (KRV)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장)에 나와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긍휼을 베푼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나와있죠.
강도들에게 맞아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고 그냥 지나갔지만 사마리아인은 도와주었습니다.
Luke 10:33–35 KRV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사마리안인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사마리안의 행동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죽어가는 우리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어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외아들 예수를 통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고달플 때
예수님을 통해 연약한 우리를 동정하시고 구체적으로 도우십니다.
괴로울 때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위험할 때 우리의 방패가 되시며, 아플 때 우리를 업고 가십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사는 우리가 긍휼을 베푸는 것은 마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긍휼을 베푸는 하나님의 긍휼의 통로입니다.
긍휼은 죄인을 용서해주는 것과 궁핍한 자를 도와주는 것, 두 가지를 다 포함합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면서 동시에 복 받는 길입니다.
긍휼을 베풀면 긍휼을 받기 때문입니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도와주자, 정말 힘들겠다..너무 안됬잖아.. 불쌍해...” 라고 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죄를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해주면 용서를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수를 아주 고소하게 생각합니다. 드라마를 볼 때 너무나 착해서 억울하게 계속 당하던 주인공이
복수를 하게 되면 얼마나 우리가 속이 다 후련하고 마음에 평화가 오며 희열을 느낍니까?
세상 사람들은 용서를 재미없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생 벌어도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죄를 진정으로 용서받은 사람이 남의 죄를 진정으로 용서할 줄 알게 됩니다.
또한 긍휼을 베푸는 것은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이라 말씀 드렸습니다.
긍휼을 베풀어 남을 도와주면 도움을 받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Deuteronomy 15:10 KRV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Psalm 37:26 KRV
26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Proverbs 11:25 KRV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용서해야 하는데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요?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요?
가족들 중에 용서하지 못하는 가족, 도무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가족이 있나요?
그러다가 언뜻 그 사람이 불쌍하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립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생명과 능력과 행복과 위로의 파이프가 breakthrough 됩니다.
남을 도와주면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시되 풍족하고 윤택하게 하시며 자손까지 복을 받게 하십니다.
용서하지 못함은 우리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히게 합니다.
나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나를 괴롭힌 자를 용서해 줌으로써 막힌 데가 뚫려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과 위로가 흘러 넘치는 삶을 사는 모든 대학청년부 가족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천국 시민의 내면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3번째 4번째 5번째 복있는 자의 성품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들었습니다.
복이 있는 자는 온유한 자입니다.
복이 있는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복이 있는 자는 긍휼히 여기는 자 입니다.
내 자신이 심령이 가난해져서 나의 죄를 볼 때 애통하고,
하나님 앞에서 많이 애통한 사람은 남들에게 온유하게 됩니다.
온유하게 되면 더욱 더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은혜를 갈망합니다.
의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나의 주변에 믿음의 식구들이 죄로 인해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과 마음을 함께 하며, 어려운 상황에서 도와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원히 우리의 땅인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이 땅 가운데 진정한 만족을 얻게 되며,
우리 또한 긍휼함을 얻게 되는,
은혜의 삶이 될 것입니다.
함께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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