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5 양청] 소요리1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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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리문답 1번. 170여 문항 중 1번은 가장 잘 알려지기도 했고 가장 중요하기도 하다. 이는 정말 여러분이 암송했음 좋겠다. 함께 읽어보자. “제 1문.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chief end 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하느냐가 관건이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너 공부는 왜 하니? 좋은 학점 받으려구요. 좋은 학점은 왜 받으려고 하니? 졸업하려구요. 졸업해서는 뭐하려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야지요. 좋은 직장에 취업은 왜하려고? 그래야 시집장가가죠. 시집장가가서 뭐하려고? 애도 낳고, 집도 장만하고 하려고요. 애도 낳고 집도 장만하고 해서는 뭐하려고? 이 모든 일들의 목적을 인생 가운데서 찾으려 하면 할 수록 우리의 대답은 점점 궁색해진다.
여러분들은 목적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삶의 목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왜 밥을 먹니? 배고파서요.” 이를 목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는 그냥 본성 혹은 본능적인 것이다. 짐승들에게 목적은 없다. 반면 인간은 목적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일부 허무주의라든지 염세주의자들과 연결되는 실존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의 목적은 무슨 목적, 그냥 지금을 즐겨라" 그들은 스스로 인생의 목적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데 그 답을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답을 찾는 노력을 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다. 반면 우리는 그렇게 답을 찾을 노력을 할 필요 없이 성경에 딱 써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수많은 이들이 답을 찾아왔으나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인간 최고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목적은 우리가 수정하거나 우리가 변경할 수 없다. 내 판단 하에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회심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그 순간 회심이 일어난다. 회심은 회개와는 다르다. “회개+믿음"을 회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회심을 하면 세계관이 바뀐다. 내가 인생을 보고 가치를 판단하고 결정을 하고 내 의식세계속에 가장 근저해 있는 그 핵심, 그게 세계관인데 그게 바뀐다. 그게 바뀌기 때문에 돈에 대한 태도, 인생에 대한 태도, 연애와 결혼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돈이 나의 주인이었는데, 회심을 하게 되면서 돈이 더이상 내 주인이 아니라 내가 가진 수단이 된다. 어떤 수단? 목적을 위한 수단. 전부 이 목적을 향한다 이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성경을 믿는 자들과 무신론자들, 두 가지 인생관이 삶의 태도를 결정한다. 성경을 믿는 자들이 기독교인이고, 그리고 무신론자들이 있다. 성경을 믿는 자가 무신론자처럼 살고, 무신론자가 성경을 믿는 자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런데 현상을 보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사는 모습을 보면 무신론자처럼 살아간다. 이를 명목상의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기에 절대 진리는 존재하며 인생의 절대목적이 주어져있다고 믿는다. 말씀을 찾아보자.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모든 것의 목적이시며 모든 것의 종착지이시며 모든 것의 원인이시다.
왜 ? 라는 질문을 던질 때 기독교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는 대답 외에는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 없다. 왜 결혼을 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서로 좋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근본적인 목적이 흐려지면 없다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에게 이것은 적어도 말은 한다. 그러나 이것이 흐려진다. 그러면 삶의 자세와 태도도 달라진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이 목적이 선명하느냐? 정말 내 목적이냐 이것이다. 왜 공부를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왜 일을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존재할 수 없다.
코람데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라는 의미의 라틴어이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자신의 삶의 모토로 여겼던 것이다. 이런 삶의 태도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부모님이 결혼하셔서 내가 생긴 것인가? 천만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방금 읽었던 말씀처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시기에 이 자리의 언젠가 우리도 하나님 앞으로 서게 될 것이다. 그 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설명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기준, 그게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절대적 진리이다.
반면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란 없으므로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고 인생의 목적은 스스로 찾는 것이라 한다. 의외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진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너에겐 그게 중요한만큼 나에겐 이게 중요해. 서로 다른 거지”
소요리문답은 누구를 위해 기록된 것인가? 어린 아이와 초신자용. 그 중에서도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소요리문답이다. 가정에서 부모가 일년 내내 가르치는 것이 소요리문답이 기록된 목적이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신6장의 말씀대로 아이들이 일어설때나 누울때나 길을 갈 때나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라 한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명이다. 그렇게 가르칠 때 무얼 가르쳐야 하나? 창세기부터 가르쳐야 하나? 웨민 소요리문답이다. 이것이 모태신앙이 가진 최고의 장점 아니겠는가?
주된 목적이라 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본문을 가지고 존 파이퍼가 이런 말을했다. “어떻게 우리는 오렌지주스를 마시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을까?” 이는 참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실은 우리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데 이는 과장법이나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야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년에는 살좀 빼야겠다. 왜? 건강해지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뻐지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삶에서 본질적인 이 부분을 놓치면 안된다. 주된 목적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우리 삶을 움직이게 만드는 다양한 동기, 다양한 목적들이 존재한다. 예뻐질려고, 건강해질려고,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등등 행위의 목적이 있다. 그런데 본문은 주된 목적이라 한다. 인간이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목적들을 수단으로 만드는 최고 궁극적인 목적을 의미한다. 예뻐지려고, 건강해지려고, 넉넉하게 살려고, 좋은 학점 따려고 등등 그 목적들을 부인하는게 아니다. 그런 것들을 배제시키라는게 아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결합해서 최고의 목적, 가장 상위의 목적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연결되지 않는다면, 단절이 된다면, 우리는 분명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뭔가 우리는 행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내 고집 때문에. 내 고집과 원함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를 스스로 질문 해야 한다. 누가 이건 틀렸다 맞다 얘기해주는것보다, 나 자신이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 인생의 성공과 실패라고 까지 말할 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다면, 그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신자에게는 이것이 잘 연결될 때 그는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산다.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다른 문제이다. 인생의 종착역에 섰을 때 그는 정말 만족스럽게 기쁘게 인생을 마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내 삶의 최고의 목적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느냐?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 두가지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 glorify him, enjoy him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한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느냐하는 것을 17세기의 탁월한 신학자 100여명 이상이 수년에 걸쳐 모여 첫번째로 만든 이 문장 안에는 대단히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분을 즐거워함을 통해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to glorify God by enjoying Him” 영어 단어로 “enjoy him” 이라고 되어 있다. 그분을 내 기쁨으로 삼는 것이다.
enjoy 와 비슷한 단어이면서도 조금 다른 단어로 please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릴 때 율법을 순종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라. 주일에 돈 안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등등 이것이 우리에게 율법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들이 있다. 마치 우리를 강요하고 얽메는 것 같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랴. 그런데 그 모든 문장들의 본래 의미는 그분이 만족하시도록 우리가 뭔가를 강압적으로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내가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 그분을 내가 기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enjoy한다는 것은 내 안에 joy가 있다는 것이다. 기쁨.
마치 악덕 상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떨어가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힘이 강하시고 전능하시고 나를 늘 압도하시는 분이시니까 어쩔 수없이, 강압적으로 그분을 즐겁게 해 드린다 이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please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enjoy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이 것은 두 가지가 아니다.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함으로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상상해보라. 특히 결혼을 준비하는 커플들을 보면, 서로가 서로를 enjoy한다. 오늘날 이 단어가 단지 쾌락주의적인 의미로, 퇴폐적인 의미로 변질되었지만 사실 이 단어는 참 아름다운 단어이다. 함께 하는 모든 상황들을 기뻐하고, 함께 보내는 모든 시간들을 즐거워한다. 이게 바로 enjoy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신다. 우리 안에 모든 순종과 예배의 근본이 joy, 즉 기쁨에서부터 출발하는지를 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복음과 믿음은 힘이 있는 것이, 그 믿음이 단지 교회를 출석하거나 세례를 받는 외적인 것에 있는게 아니라, 그분을 향한 마음이고 신뢰이기 때문에, 그분을 향한 기쁨에 있기 때문에 힘이 있다. 속이 바뀌니까 비록 천천히 더디긴 해도 힘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동안 유지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기쁨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 잠8:30-31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일반적인 종교는 인간이 신에게 먼가를 드려서 정성을 들여서 신을 감동케 해서 신이 나에게 축복을 주도록, 순서가 이렇다. 내가 제물로 정성을 드려야 한다. 그래서 구약에 몰렉 종교는 자신의 아들까지 신에게 바쳤다. 내가 옆집 아줌마보다 내가 드리는게 더 정성스러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 신이 감동해서 내 소원을 들어주지. 여기서의 핵심은 인간이 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데도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더라. 내가 저들보다 기도 더 많이 해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기쁨을 주시기 위해 창조하셨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영광이고, 하나님의 창조동기는 기쁨이었다. 잊지 말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영광받으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의 동기, 무엇이 막 넘쳐 흘러나와서 창조하셨느냐, 기쁨이다. 성삼위하나님의 기쁨. 기쁨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먼저 기쁨을 주신다. 순서가 바뀌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람에게 하셨다. 기쁨을 주신다. joy. 에덴동산의 에덴의 뜻은 기쁨이다. 아담이 먼저 애걸복걸해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주셨는가? 아니다. 외롭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하와를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고 이걸 통해서 아담은 기쁨을 누렸다. 기뻐할 때 우리가 종교적 언어로 은혜 받았다고 한다.
은혜 받은 자의 특징이 바로 기쁨이다. 그럼 은혜받은 자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과 같은 분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홍해가 갈라진다던지,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은 “주 같은 신이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것이었다. 주님이 전부라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고백이다. 감사, 찬양, 예배 등. 감사와 찬양과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따라서 감사와 찬양과 예배는 본질적으로 무엇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행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행위이다. 이걸 놓치지 말라. 감사와 찬양과 예배를 우리가 주일 아침에 드리는 예배로 묶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것대로 중요하고, 우리의 삶 전부가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드려지는 것에 비추어본다면 우리의 삶 전부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예배올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 단지 주일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주중에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왜 기독교인들은 식기도 하는가? 그냥 부모님들이 하라고 하시니까. 왠지 해야만 할 것 같으니까. 배우긴 배웠는데 왜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모든 것들이 주께로부터 왔다. 내 삶 가운데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기억할 때 참 감사함을 고백할 수 있다. 이 감사함은 늘상 좋은 것들만 찾아올 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생 가운데 안 좋은 일들도 온다. 그러나 욥의 고백처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도로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그럼에도 너무나도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이 또한 나의 유익을 위해 주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태도. 이것이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다. 무슨 시상식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라고 고백하지 않아도 이 것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홀로 영광스러우신 분이시다. 우리가 영광을 돌림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커지는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영광스러우신 분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추어주신 영광의 빛 그것이 기쁨으로 오는 것인데 이를 반사하여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아까 읽은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 표현이다. 이 개념에서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의 개념이 다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주님 내가 숨쉬고 누리는 모든 것들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3가지를 말씀드린다. 신28:47-48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섬기라 하신다. 만일 기쁨과 즐거움으로 섬기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가시겠다고 하신다. 또 하나는 사람이 대상을 향하여 즐거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찬송이다. 시147:1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하고 아름답고 마땅한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시73:25-28 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 말씀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그 이름에 걸맞게 섬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무엇이 요구될까?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존재와 속성과 성품은 어떠하신지, 그분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들을 행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왜? 아는만큼 그분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만큼 그분을 즐거워할 수 있으며, 즐거워하는 만큼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에 대해 2문과 3문이 답을 제시해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