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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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1-9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소명을 주시는 본문으로서 구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의미를 우리가 깊게 곱씹어 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창세기12장의 말씀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삶의 여정을 시작했다는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아브라함 한 개인을 넘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불리게 될 이스라엘 민족과 더 나아가 새로운 이스라엘로 불리게 될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즉 앞으로 나타나게 될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걸어가게 될 믿음의 여정에 대한 유형론적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묵상한다는 것은 수천년 전 가나안 땅에 살았던 아브라함 한 개인의 삶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할 믿음의 여정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선택을 받기 전 창세기 11장에서 아브라함은 처음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였던 데라와 그의 자손들은 우르 출신으로서 하란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왜 우르에서 하란으로 거처를 옮겼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데라와 그의 가족은 하란에서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창세기 기자는 그들의 가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지점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11:30 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이것은 사라 한 개인의 불임을 의미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12장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유형론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때, 단순한 불임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즉 사라의 불임은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한 인류가 11장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을 떠난 모습, 즉 진정한 생명을 잃은 상태의 인류를 뜻하는 것입니다. 인류는 마치 불임의 상태처럼 참 생명을 잃었고, 진정한 삶의 가능성을 상실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처해있는 비참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삶의 가능성을 상실한 인류에게 찾아오십니다. 어떠한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죽음 밖에 기다릴 것이 없는 인류를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주시기 위하여 인류의 삶 가운데로 찾아오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모습 속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음 밖에 기다릴 것이 없는 인류에게 새로운 삶을 열러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가운데 선택된 첫번째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다시금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사래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사래라는 이름은 당시 달의 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추정되는데요, 즉 아브라함의 집안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교도의 집안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선택된 인간이 이교도라니요? 노아와 같이 신실한 사람으로 선택해도 모자를 판에 이 중요한 역사 가운데 선택된 것은 이교도였습니다. 이는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나요? 하나님의 선택에는 어떠한 자격 조건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대단하여, 특별한 조건을 충족하여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로 포섭된 자들이 아닙니다.
하란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어느날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창12:1
창세기 12:1 NKRV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얼마나 날벼락 같은 이야기일까요? 모든 것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말씀이 원문에는 숨겨져 있습니다. לֶךְ־לְךָ֛ “가라”라고 하는 레크 뒤에 “레카"라고 하는 말씀이 이어나오는데요 우리 성경은 이 말씀을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레카’는 ‘너를 위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하여 하시는 이 파격적인 선언,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낯설고 외롭고 본적도, 가본 적도 없는 그곳으로 가는 것이 아브라함을 위한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그 땅에서 아브라함을 복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복이 되어 그를 통해 온 민족이 복을 받게되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가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은 무엇인가요? 시편 1편은 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 NKRV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복이라고 하는 것은 악을 쫓지 않고 죄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악의 길에서 떠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삶, 그것이 바로 복된 삶이며, 복 있는 자의 삶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왜곡된 세상의 모습을 폭로합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세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나타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세상에 대항할 수 있는 하나님의 특벼한 도우심을 얻게 되고, 거짓된 세상에서 다른 차원의 세상을 열어 젓히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복이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이 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그의 복이 단순히 아브라함에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하여 궁극적으로는 땅의 모든 족속에게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은 단순히 우리 한 개인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시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은 우리를 넘어서 열방을 향하여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비전을 어떻게 정의하나요? 갖가지 아름다운 말들로 포장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비전은 무엇을 하며 먹고 살 것인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뭘 해서 사람들에게 어떠한 인정을 받으며 먹고 살 것인가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은 우리 개개인을 넘어 열방을 향하여 열려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을 이루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 복을 이루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갈 것을 명령받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친척과 고향을 떠나 아브라함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오늘날과 같이 치안이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하란에서 가나안 땅의 여정이 쉽지 않은 길이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겠다고 하신 그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믿고, 보지도 듣지도 못한 그곳으로 발걸음을 떼었던 아브라함이 어떤 심정으로 가나안으로 향했을까요? 적어도 떠나기 전의 삶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보여주실 그 땅이 바로 자신이 땅이 될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앉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가기만 하면 모두 자신의 것이 될 것으로 생각했을데, 그것을 착각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 땅이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성경은 아브라함의 심경을 전하지는 않고 있지만,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헤 볼 때, 아브라함의 심정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상상했던 미래가 무너질 떼의 그 좌절감과 실망, 이루말할 수 없는 허탈함이 그에게 밀려왔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왔는데, 눈 앞에 펼쳐진 막막한 현실이 아브라함을 주저앉게 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처음으로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이 때 나타나셨다고 하는 히브리어는 יֵּרָ֤א 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히브리어 יֵּרָ֤א 는 ‘보다’ 라는 뜻을 가지는 히브리어 ראה 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 표현은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그 때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겠다’고 하신 그 땅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보여지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가나안 땅 전체를 아브라함이 소유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보여지실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기업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란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안정적이고, 익숙했으며, 평온함을 가져다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매우 익숙한 삶의 자리로부터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곳’으로 ‘갈 것'을 요구 받았습니다. 그곳은 가나안 백성이 거주하는 곳, 즉 불안함과 낯섬, 고난과 역경을 의미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시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 고난과 뜻하지 않은 역경, 불편함과 낯설음을 감수해야 하는 그 자리가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자리입니다. 삶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현실에 마주하게 될 것이지만 또한 우리가 선 그곳은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거룩한 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도달한 그 땅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불안하고 낯설로 고난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는 그 곳을 떠나지 않고 치열하게 마주한 현실과 싸우며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결단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갈망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도 마치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안정적이고, 평온하고, 익숙한 삶의 자리에 머무르길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곳으로부터 우리가 새로운 곳으로 가길 원하십니다. 그곳은 우리에게 낯설고, 불안하고, 고난과 역경을 가져다 주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우리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게 될 삶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그 곳에서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며 주님을 갈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서 있느 그 자리에서 자신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평범하지만 비범한 일상이 차곡차곡 쌓여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뜻하신 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를 위하여’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익숙한 곳으로부터 고난의 자리로 말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이 길은 사람들 눈에는 어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를 위한 길입니다. 또한 그 곳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곳입니다. 그 곳에서 매일의 일상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우리는 또 다른 하나님의 약속인 ‘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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