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설 기회

룻기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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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는 돌봄받지 못하는 존재를 보면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돌봄받지 못하는 존재는 참 안타깝습니다.
저와 친한 선교사님이 현재 우크라이나 난민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 사역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피난 온 자들을 돌보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먹이는 일이 아주 귀합니다.
그 일이 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하여 돌봄을 받지 못하는 자들을 돌보는 선교를 하고 계시니까 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모두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돌봄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부족함이 없고, 채워지는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는 완전한 돌봄을 받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에게는 아무리 채우려고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뭔가 부족한 부분이 생기고 그 부분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돌봄받지 못하는 상황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거죠.
이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오늘 나오미와 룻도 행복이 가득한 삶을 살았던 것 같은데도 어느 순간 돌봄받지 못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돌본 자” (19절)
나오미가 룻에게 하는 질문들을 보면 그 감정의 변화가 느껴집니다.
두 가지 질문을 하죠? 첫째로, 어디서 주웠는지, 둘째로, 어디서 일을 했는지입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2장)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지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보리 한 에바는 전에도 말했듯이 성인의 한달치 임금의 절반 정도 되는 농작물의 양이었으니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정상적으로는 수확할 수 없는 정도의 농작물을 가져왔으니 분명히 누군가가 룻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는 룻을 돌본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묻습니다.
사실 나오미와 룻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보리 한 에바 정도의 충분한 농작물이었을까요?
나오미와 룻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그들을 돌볼 자였습니다.
남편이 가정의 거의 모든 생계를 책임지던 사회 속에서 과부가 된다는 것은 생명을 책임지던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가정과 아내를 돌보던 남편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 나오미와 룻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들을 돌보는 자입니다.
2. “돌본 자” 보아스
룻을 돌본 자는 보아스였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어떻게 돌보았는지 지난 주 설교를 통해 보았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을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일할 것을 허락했습니다.
또한 그 종들에게 말해서 안전을 보장하죠.
더 나아가 일부로 더 보리를 수확하지 않고 남겨서 룻이 수확하도록 돕습니다.
식사 자리에도 초대해서 먹고 남을 정도로 먹이기도 합니다.
3. “기업 무를 자” 보아스 (20절)
그런데 우리는 돌보는 자를 넘어서서 나오미가 보아스를 “기업을 무를 자”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0절에 보면 “기업을 무를 자”라는 말이 나오죠.
룻기 2:20 (NKRV)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ppt)
“기업을 무를 자”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고엘”이라는 단어입니다.
“고엘”이라는 단어는 “가알”이라는 동사의 명사형인데, “가알”은 “갚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redeem 이에요. 그러면 고엘은 redeemer이죠.
redeemer는 구속자라는 의미로 신약에 쓰입니다.
그러면 “고엘”은 지금 본문에서 무엇을 구속하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엘”은 하나의 제도였습니다. 율법에 포함되어있는 제도였습니다.
이 “고엘”제도는 두 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이런 고엘이 있습니다.
레위기 25:23–25 (NKRV)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레위기에서 고엘이 등장합니다.
(ppt)
‘기업’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heritage 즉 유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땅을 하나님의 기업,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난 후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습니다.
땅은 그들에게 살아가는 터전이 되기도 하고, 농작물을 재배하는 생산지였습니다.
땅으로부터 나오는 소산을 통해 그들은 경제 활동을 하고, 생계를 유지했죠.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그 땅을 팔기도 했습니다. 생계를 땅으로부터 유지해야 하는데 당장 경제력이 너무 없는 자들은 돈을 주고 그 기업을 파는 겁니다.
그때 고엘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이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는데, 그 땅을 파는 자들 중 가장 가까운 친척들 중 유력한 자, 부유한 자가 그 땅을 삽니다.
그리고 그 땅을 다시 파는 자에게 무르는 것이죠.
이게 바로 고엘 제도입니다.
또한 어떤 여자가 자녀가 없이 남편을 잃게 되면 그 여자와 결혼을 해서 생계를 책임지는 고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보아스를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라고 하는 것은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4. 나오미의 텅빈 삶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계획
나오미는 룻에게 이제 다른 밭을 가지 말고 보아스의 말대로 보아스의 밭에서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나오미의 지시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나오미와 룻의 기업 무를 자, 고엘이 되게 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겠다는 추측이죠.
여러분 나오미의 텅빈 삶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돌보는 자가 3명이나 있었던 나오미였습니다.
남편, 두 아들 모두 자신을 돌보는 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잃게 됩니다.
그 후 나오미는 돌볼 자가 텅 비어버린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텅빈 삶을 채우시고 다시 일어설 기회가 나오미에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오미는 그 다시 일어설 기회를 바라보게 된 거죠.
나오미와 룻은 돌보는 자가 없어지면서 순식간에 사회적 약자 그룹에 속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회적 약자의 생계를 보장하는 선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율법을 넘어서서 더 큰 계획이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삶을 ‘고엘’ , ‘기업을 무를 자’를 통해서 충만하게 채우실 계획이 있으신 겁니다.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1. 돌볼 자 없는 우리의 삶

우리의 삶은 마치 나오미의 텅빈 삶과 비슷한 면이 참 많습니다.
나오미의 텅빈 삶의 원인은 무엇이었죠? “돌볼 자”의 부재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적 부모의 돌봄 안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세 번의 돌봄의 부재를 경험하게 됐었습니다.
딱 청년 시기에 겪은 것인데 먼저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였습니다.
성인이 되니까 이제 제가 해야하는 선택이 있더라고요.
그것들이 책임을 요구하고요.
물론 그 가운데 누군가의 도움과 조언을 받아서 결정을 하겠지만 그 책임이 저에게 있게 되는 걸 경험했습니다.
대학교에서 그 누구도 공부 안한다고해서 뭐라 안해요. 그런데 공부 안한 것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 있게 되는겁니다.
고등학교 때 안그랬거든요? 공부하라고 시키고, 선생님들이 나름대로 챙겨주셨잖아요.
그런데 대학교는 정말 안그러더라고요.
제가 졸업할 때도 참 고생을 했었어요. 4학년 때 필수 학점을 잘못 채워서 다시 수강 변경도 하기도 하고. 이런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제가 지게 됐습니다.
두번째는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였습니다.
저는 첫 직장이 군대였잖아요? 처음 이제 소위로 임관하면서 월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월급은 사실 아니거든요. 그런데 200만원 정도 되는 월급을 턱 받으니까 좋으면서도 두려움이 조금 생기는 거에요.
이제 이 돈들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어떻게 해야 지혜로울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충고는 듣겠지만 결국 제가 선택하고 그에 따른 결과는 저의 책임인거에요.
세번째는 결혼을 하게 되면서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이게 가장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제 내 아내와 함께 결정하는 것이 모두 우리의 책임인 거에요.
그리고 미래의 나의 자녀의 영혼과 육체의 그 양육권이 나에게 있는 겁니다.
그 막중한 책임감이요. 어떤 때는 막 저를 과도하게 억누를 때도 있는 거에요.
정말 솔직히 고백하는 거에요. 이 고백이 쉽지는 않은데 그 어려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 미래 심지어 영적인 부분도 나의 책임감이 저를 억누르면 불안감이 오게 되는 겁니다.
마치 텅 빈 공간 안에 나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드는거죠.
여러분에게도 종종 이런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 경험으로 얘기했지만 더 많은 경우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만한 일이죠.

2. 예수님께서 ‘돌볼 자’가 되기 위해 ‘고엘’이 되어주심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이런 삶 속에서 돌볼 자가 되어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돌볼 자가 친히 되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음 6장 2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6장)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예수님께서 우리의 돌볼 자가 누구라고 말씀하고 계시나요?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기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나님이 우리의 돌보는 자가 되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31절에서 이어서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마치 혼자 남겨진 그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말로만 하실까요? 아니요.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에게 있는 “결핍”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거나,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을 때 그 기분이 드는겁니다.
그런데 그 결핍은 어디서부터 오나요? 인간의 불안함의 근본 원인인 ‘죄’로부터 온다는거죠.
여러분 죄로 인해 인간에게 오는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으므로 인해서 더이상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평안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려하고 불안해지는거에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그 우리의 욕구가 채워지지 못하는거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을 해결하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결하실까요?
디도서 2:14 (NKRV)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속량하다” 영어로 redeem, 히브리어로 뭐에요? “가알”입니다.
고엘의 그 동사 가알이 바로 이 속량하다라는 단어에요.
예수님이 우리의 고엘이 되어주시는거죠.
우리의 삶에 채워지지 못하고 텅비어있어서 문제가 있던 그 삶의 부분을 예수님으로 채우십니다.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자가 될텐데, 그러려면 그 땅의 값을 대신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서 받아야 할 그 값을 대신 지불하십니다.
죄값은 사망이죠. 사망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지불하시죠. 자신이 대신 죽으심으로 인해서요.
고엘이 되어주시죠. 예수님이 우리의 완전한 고엘이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생겼던 죄로 인한 결핍, 그 텅 빈 것을 예수님으로 채우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뻥 뚫렸던 그 자리를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시죠. 그러고도 충분히 남는 아름다운 값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값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돌보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가득 채우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생명값을 무르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원하고 완벽한 ‘고엘’이 되십니다.

3. 고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라.

우리는 이제 무엇을 신뢰해야 합니까? 모든 우리의 값을 대신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엘이 되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완벽하게 돌보시는 분이 예수님이 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혼자 남아있는 그 기분이 들 때에도, 인생에 텅 빈 순간이 찾아올 때에도, 그 모든 상황 가운데 우리를 지켜주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되면 우리는 도저히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약속은 영원하고,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죠.
여러분은 우리를 돌보는 자, 고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다시 일어설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다시 일어설 기회는 예수 그리스도 붙잡는 거에요.
다시 일어설 그 힘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고요.
우리의 삶 전체를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분이 완벽한 고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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