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십자가를 진 아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37 views
Notes
Transcript

Mark 15:21 NKRV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요즘 미국의 한 회사가 개발한 챗GPT라는 인공지능 서비스가 전 세계적으로 큰 유행입니다. 챗GPT란 사용자가 어떤 질문을 입력하면 글로 답변을 해 주는 언어 서비스인데요. 이미 미국 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이 챗GPT로 과제를 제출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학생들이 작성한 과제물보다 훨씬 내용이 훌륭해 교수들을 당황케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궁금해서 챗GPT에게 “십자가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라고 입력을 해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앞에 부분은 ‘십자가가 기독교의 중요한 상징이다’ 이런 내용이고요. 제가 인상 깊었던 답변은 그 다음 문장입니다.
(ppt)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여기며, 이를 참고하여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인공지능도 알고 있는 것은, 십자가를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가장 기본적인 믿음이라는 것이죠.
‘이래서 미국 대학생들이 과제를 다 이걸로 하나?’ 십자가를 단지 기독교의 상징이 아닌, 삶의 요체로 답변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지만, 인공지능으로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이기에 크게 마음에 와닿지는 않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것처럼, 갈릴리 호숫가에서 밤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자, 만선의 기쁨을 누리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게 된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렇듯 십자가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베드로만큼이나 예수님을 1:1로 만나 인생이 바뀐 한 남자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매고 걸으셨던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골고다 언덕까지 약 1km의 좁고 가파른 길을 라틴어로 ‘비아돌로로사’ ‘고난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길의 끝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골고다 언덕입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로 ‘해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무게는 약 30~40kg 정도에 달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성인 남성이 지고 언덕을 오르기에도 꽤 무거웠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의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의 글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대해 저항운동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끌고 가서 매달리는 처형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깊은 공포를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실 때, 땀이 피가 될 정도였는데, 그 밤에 체포를 당하시고 밤새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시면서 불법 재판을 받고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측근이었던 제자들의 배신, 그리고 잔혹한 채찍질과 가시면류관 이 엄청난 육체적 고통은 예수님을 극한으로 몰아세웠던 것이죠.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길을 가시면서 쓰러지시고, 또 가다가 쓰러지시고 이 과정을 14번이나 반복하셨던 것이죠. 사형을 선고했던 빌라도로서는 급한 게 없지만, 사형집행을 하는 로마 군인들로서는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사람들에게는 공포감을 주기 위해 십자가 사형수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사형집행자들은 사형수가 빨리 죽으면 죽을수록 좋으니까 예수님이 쓰러지실 때마다, 채찍을 내리쳤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어깨는 이미 종잇장처럼 살점과 근육이 다 떨어져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다섯 번째 쓰러지셨을 때는 누군가가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면 사형집행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아서 대신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를 사람을 급하게 찾게 됩니다. 당시의 로마 군인들은 공무 집행을 위해 아무 인력이나 차출할 수가 있었는데, 마침 인근에 있던 건장한 체구의 남자를 지목하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구레네 사람 시몬의 만남은 시작되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27:32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지도) ‘구레네’는 지금의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 지방으로 구레네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1,500km가 넘는 아주 먼 거리였습니다. 시몬이 이방 땅으로 이주한 유대인이었는지 아니면 사도행전 1장 13절에 기록된 대로 ‘니게르’ 즉 흑인이었는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 먼 아프리카 땅에서 적어도 도보로 3개월 정도가 걸렸을 이 멀고 험한 순례자의 길을 찾아올 정도로 그는 나름대로 신앙의 열심히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오순절, 초막절 이 3대 절기를 지키기 위해 매년 세 차례 예루살렘을 와야만 했는데, 이방 지역에 살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 순례를 하는 것이 아버지의 의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12살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마침 유월절을 맞아 구레네 사람 시몬도 어린 두 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 그리고 그의 아내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십자가 처형을 위한 행렬을 보게 된 것이죠. 예수님께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으니 오전 7시나 8시에 있었던 상황입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을 종종 지켜봤던 약삭빠른 예루살렘 남자들은 눈치를 채고 피해 있었지만, 먼 구레네에서 온 남자는 그것을 알 리가 있습니까? 멋 모르고 구경하려다가 억지로 십자가를 지도록 지목을 당했던 것이죠.
그리고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의 저자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마침” 거기에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마침’은 ‘우연히’라는 뜻 아닙니까? 성경에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 때 이 ‘마침’이 사용합니다.
사실 지난 4주간 살펴본 예수님의 만난 사람들이 다 그렇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마침 그곳에 와계신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바뀐 것 아닙니까? 사람이 볼 때, 우연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이 단어가 쓰일 때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이 강조할 때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더 감동적인 이유는 시몬의 이야기가 우리 각자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침, 우연히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을 만나게 된 시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길 원하는데요. 구레네 시몬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또 다른 증언을 보겠습니다. 눅 23:26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누가복음에는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알고 보니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먼저 앞세우고 시몬은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처형을 빨리 끝내려면 사형의 몸을 가볍게 해줘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피가 묻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때 시몬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1,500km, 그 먼 길을 달려 예루살렘에 겨우 도착했는데,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한 참혹한 사형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저 같으면 억울하고 재수 없다고 그랬을 것 같아요.
원망스러운 마음이 가득할 때 문득 ‘저 사람은 어떤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참혹하게 죽어가는 것인가?’ ‘왜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욕을 먹고 조롱당하는 것인가?’ ‘왜 나는 하필 저 사람을 만나서 이 고생을 하는 걸까?’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위태롭게 겨우겨우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겠습니까?
시몬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기도하고 성경도 읽으며 절기 때마다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 순례의 길을 올 정도로 믿음이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십자가가 그에게로 성큼 다가온 것이죠. 여러분, 왜 하필 시몬이 ‘마침’ 유월절 그 아침에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시리즈 마지막 시간으로 구레네 사람 시몬과 함께 우리가 경험하고 알아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세 가지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데요.
먼저 우리가 경험하고 알아야 할 첫 번째 십자가는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십자가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대해 두 가지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첫 번째는 인공지능이 대답한 것처럼 기독교의 상징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배당 앞에 십자가를 거는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에 달아두고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로도 사용합니다. 그렇게 달아두면 뭔가 신앙적인 것 같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6:24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제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이라도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상징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십자가를 경험해 본 사람은요. 십자가가 상징이나 액세사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을 넘어 십자가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중요한 상징이다 보니 이런저런 해석들이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본질 한 가지는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이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인하다”라는 말을 헬라어(ἀρνέομαι) 원문으로 보면, ‘인연을 끊는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인연을 끊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살았던 내 자아와 인연을 끊어야 예수님과의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상황이 ‘자기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병들게 하는 내 남편, 말 안 듣고 속을 썩이는 내 자식이 ‘자기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는 나를 부인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주님을 부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베드로의 그물이 찢어지듯이 내 자아가 찢는 게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말 안 듣고 속을 썩이는 자식들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 많은 사람이었는지를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 부인입니다. 나를 죽을 만큼 힘들게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내 누추함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 부인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그 상황들이 내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십자가를 보게 되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를 좀 따라 하시겠습니까? “나를 부인하는 것이 / 자기 십자가이다” (2번)
구레네 사람 시몬은 십자가의 진정한 무게를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몇십 kg짜리 나무 십자가가 아니라, 아직까지 자기 부인을 못한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다 짊어진 십자가였습니다. 시몬이 진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가 그를 살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얼굴과 온몸에 주님의 피를 묻히면서 걸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33년을 사시면서 철저히 자기 부인만을 해 오셨습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골고다 언덕과 십자가 위에서도 그분은 베드로의 그물이 찢어지듯이 자기 자신을 찢고 목숨을 버려서 저와 여러분을 구하신 유일한 구원자가 되셨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요. 정말 매일 새벽마다 다짐합니다. ‘주님, 제가 게으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열심히 목회하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예수님의 목숨값이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우리는 정말 열심히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목숨값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겁니까? 나를 더 무너뜨리고 부수는 일, 나의 옛 자아와 인연을 끊고 예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면 우리는 잘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십자가의 경험과 은혜가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경험하고 알아야 할 두 번째 십자가는 “억지로 지는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력서를 작성할 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죠.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이런 전공을 했습니다.’ 모두 ‘나’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고대 근동인들이 나를 소개할 때는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들, 야곱의 아들. 늘 아버지를 먼저 소개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소개할 때 참 희한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15:21 합독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두 아들의 이름을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거의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외인 경우가 있는데, 이 알렉산더와 루포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인 이 로마서의 마지막 장에 시몬의 아들 루포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롬16:13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성서학자들은 로마서의 루포가 구레네 시몬의 아들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사도바울과 바나바를 수행하고 다녔던 전도 여행에서 루포라는 사람을 만났고, 그로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억지로 진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루포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사도바울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바울을 도와줬던 사람입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그 알렉산더와 루포 있지? 그 두 형제의 아버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대” 초대교회 성도들은 알렉산더와 루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계산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루포는 어린아이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유대교를 전수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평생 한 번은 자기 자녀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구레네 시몬은 3개월이 걸려 자녀들을 이끌고 이집트 사막을 지나 예루살렘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그는 두 아들에게 여기저기를 보여주며 견학을 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저기가 솔로몬 왕의 궁전이야. 저기가 다윗성이야” 한창 감동을 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십자가와 함께 쓰러져 있는 것이죠. ‘무슨 영문인가?’ 다가가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대신 십자가를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억지로 진 십자가였습니다.
로마의 공권력에 저항하면 즉결 처형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그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두 아들에게 말합니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알았지?” “대신 아빠 뒤에 바짝 붙어야 한다.”
그렇게 억지로 십자가를 진, 시몬은 두 아들은 골고다 언덕을 함께 오르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은 내 앞에 가는 예수님을 조롱하기도 하지만, 또 여인들은 울기도 하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렸을 때, “네가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 자신이나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라”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더니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런 광경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외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엘리 라마 사막다니”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고 마지막 숨을 거두시자, 형장의 책임자인 로마의 백부장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합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러분, 시몬의 가족 전부가 그 광경 보지 않았겠습니까? 누가 봐도 옆에 같이 매달린 강도들과는 달리 죄가 없어 보이는 거예요. 시몬은 도대체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한결같이 죽어선 안 되는 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했을 것입니다.
뭔지 모르지만, 그의 가슴을 치는 무언가를 느끼게 됩니다. 아이들과 유월절을 지키고 다시 구레네로 출발하게 됩니다. 한참을 또 광야를 걷고 있는데, 멀리 예루살렘부터 소식이 들려옵니다. “다시 살아나셨대” 다시 소문이 들려옵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대” 또 소문이 들려옵니다. “그분이 메시아셨대” “나와 너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대” 그 순간, 시몬의 세계관이 뒤집히는 거예요.
그런데요. 여러분! 아이들의 마음과 눈에는요. 이미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각인이 된, 하나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바로 아빠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모습입니다. 그 골고다 언덕 위를 오르시던 뒷모습을 뒤에서 계속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알렉산더와 루포, 그리고 시몬의 아내까지 깨닫게 됩니다. ‘아! 십자가는 저렇게 지는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저런 거구나!’ 이 두 아들의 삶의 여정에서요. 삶이 힘들 때마다, 신앙의 회의가 찾아올 때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던 아빠의 뒷모습이 이 두 아들에게는 큰 용기와 힘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경험해야 할 십자가는 “억지로 진 십자가로 주님 따르기”입니다.
여러분, 구레네 시몬은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을 합니다. 행13:1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교회는 금방 사라지지만, 이 안디옥교회는 세계 복음화의 주역이 되는 놀라운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안디옥교회의 핵심 리더 중의 하나가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안디옥교회 지도자들 소개하는 리스트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바나바는 잘 아시죠? 그 사람 다음에 구레네 시몬이 등장합니다. 주목할 점은 사도행전에서 처음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되는데요. 행11:26
26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에 와서 제자들이 비로소 크리스천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라는 뜻 아닙니까?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한 안디옥교회에서 어떻게 그런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나왔을까요?
바로 구레네 시몬과 같은 스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물론이고 시몬은 뛰어난 평신도 양육자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을 만들었을까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주님을 따라가면서 모든 것을 다 봤잖아요? 그날 아침의 일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가장 가까이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었어요.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날 그 뜨거운 경험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던 것이죠. 안디옥 사람들에게 그날 보았던 예수님의 얼굴을 이야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몸에 묻힌 보혈이 어떤 의미인지를 얘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살면서 힘들고 영적으로 지칠 때마다 골고다의 아침을 떠올리며 다시 일어섰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아들들이 다 봤을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아버지가 변했어요. 아버지가 변하자 자식들도 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증인의 삶은 말로 되는 게 아닙니다. 아이들을 주일에 깨워 교회 보내는 것만으로 부모가 할 일 다 한 것 아닙니다. 아빠인 내가, 엄마인 내가 내 자식 앞에서 나를 부인하고 먼저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 없다면 아무리 목사 가정이라도 믿음의 가문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구레네 시몬의 가정처럼 부모가 먼저 십자가 앞에 서보십시오. 억지로 진 십자가라도 그분의 삶을 따라가 보십시오. 탐구해 보시고 자녀들과 함께 십자가 앞에 서는 훈련을 해보십시오.
많은 분이 목회자나 선교사의 길을 갈 때 “십자가의 길”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기거나 섬김을 부탁하면 “제가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더 기도해 보겠다”고 하시고 “다음에 하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그럴 때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로마 군인이 십자가를 지라고 했을 때 “제가 아직 준비가 덜 되었어요” “다음에 할게요” 그럴 수 있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실 때는 그냥 끌려가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 십자가가 나에게로 온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기도하며 준비한 사역자들도 있지만, 구레네 시몬처럼 뒤통수 맞듯이 헌신의 자리로 나온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도 엄청나게 뒤통수 맞은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제 어머니가 저의 동의도 없이 목사로 서원하셨거든요.
여러분, 구레네 사람 시몬은 절대 초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1,500km를 가족을 이끌고 예루살렘 순례를 온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던 그 날 아침에 그의 모든 삶의 방향이 결정되었습니다. “마침” “우연히” 끌려 들어온 인생인 것 같지만, 그것은 사람의 관점에서 그런 거고, 하나님은 이미 이 일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이죠.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 생각에 준비가 되었든 안 되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오시는 그때가 여러분이 십자가를 질 때이고 순종할 때 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순종은 갑자기 다가온 십자가를 지려고 몸을 움직이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아내가 변하고 자녀들이 변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훗날 시몬이 천국에서 예수님과 다시 만났을 때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예수님 품에 안겼을 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시몬아, 내가 그때 정말 힘들었는데, 네가 내 십자가를 지워줘서 정말 고마웠다.”
“무슨 말씀이세요, 주님? 주님이 제 십자가를 대신 져 주시지 않았다면 오늘의 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 자식들도 믿음의 가문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진심을 나누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과 그런 이야기들을 많으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사역에 지치고 힘든 분들이 계신다면, 또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못하는 자녀들 때문에 애통해하고 계신다면, 구레네 시몬처럼 처음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던 그때를 다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를 보는 눈이 활짝 열리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오늘 말씀 기억하시면서 이 찬양을 불러보길 원합니다.
❙결단찬양 : 내게 있는 향유옥합
❙합심기도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다른 것 기도하지 마시고요. 인공지능처럼 십자가를 알고만 있는 존재가 아닌,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짊어진 십자가를 통해 내 자식들이, 내 부모님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가지고 한목소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 기도
2,000년 전 바로 골고다로 올라가는 길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지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 뒷모습을 우리 자식들이 보고 배우길 원합니다. 주님 부디 은혜를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