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4 금요기도회 : 삼하 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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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17–27 NKRV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새순교회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 나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오늘 기도회에서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을 가지고 돌아가시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전환점의 시작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사무엘상의 끝인 31장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과 왕자 요나단이 길보아 산에서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죽었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사무엘하는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비보를 다윗이 듣게 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울의 죽음은 여러 차례 사울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실거라는 예언이 성취되는 장면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결국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불어넣게 만듭니다.
사울이 죽은지 4일째 되는 날에 옷은 찢어지고 머리에는 흙이 그대로 있는 한 사람이 다윗을 찾아옵니다. 그는 다윗 앞에 엎드려 절하고 다윗은 그에게 “너는 어디서 왔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쳐왔다고 대답합니다. 바로 이 사람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됐는지 알리러 온 사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됐는지를 말하라고 묻고, 그는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라고 대답하면서 이스라엘이 참패를 당했고 심지어 국왕인 사울과 왕자 요나단까지도 죽었다는 비보를 전합니다.
이에 다윗은 곧장 사자의 비보를 믿지 않고 5절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라고 묻습니다. 다윗이 물어본 이 사자는 아직까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고 그저 청년이라고만 5,6절에서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다윗의 질문에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자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너는 누구냐’라고 물어보시길래 ‘나는 아말렉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니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어서 내가 고통스러우니 청하건대 너는 내 옆에서 나를 죽이라’라고 하시길래 그가 엎드러진 후에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사자 청년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증거로 사울의 왕관과 팔고리를 다윗에게 내밉니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이 사자 청년의 정체는 아말렉인이었다는 것이고, 1절에서 아말렉인을 다윗이 쳐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보를 전한 사람은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아말렉인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비보는 보통 자국민이 전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매우 특이한 장면으로 이 아말렉은 1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스라엘 편에서 처리해야 할 이방민족이었지만 사울은 사무엘상 15:15 에서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하셨음에도 아말렉의 살찐 양과 소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울 왕권이 전복되었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아말렉인은 사울의 죽음을 알리는 사자로 다윗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 다윗도 사울처럼 이 아말렉인에 의한 시험을 받게 됩니다. 다윗은 그동안 사울로부터 많은 핍박과 고난을 겪어 이제 원수인 사울이 죽고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으니 이제 자기가 바로 왕이 될 수 있는 명분이 생긴 상황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말렉인이 제시하는 왕의 자리를 냉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시험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에 이어 다윗도 이 아말렉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 아말렉인은 사울의 왕관과 팔고리를 벗겨 다윗에게로 가져온 것은 자신이 사울을 직접 죽인 것에 대해 다윗으로부터 환심을 사고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온 것입니다. 이 아말렉인은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고 있었고 자신이 사울을 직접 죽인 공에 대한 대가를 다윗에게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아말렉인의 이야기는 거짓말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상 31:4을 보면 사울은 누구에게도 죽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말렉인은 그저 다윗으로부터 조금의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것을 기대하며 사울의 시체에서 왕관과 팔고리만을 빼어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아말렉인의 기대와는 달리 다윗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다윗은 11-12절에서 애통하며 금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비보를 전한 아말렉 사자에게 14절에서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하며 청년 한 명을 불러 이 아말렉 사자를 처형시키고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인 피의 값을 스스로 치뤘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아말렉인이 가져다 준 왕의 자리를 냉큼 받았다면 원수를 멸하고 왕권을 거머쥐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으로 판명되었을 것이고 이스라엘의 왕권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말렉인을 처형하고 난 다음 다윗은 오늘 읽은 본문인 17-27절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조가 또는 애가를 지어 부릅니다. 다윗은 이 애가를 부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을 그토록 죽이고 싶어하던 원수 사울이 죽은 것이 너무나 기쁘지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겉으로라도 슬퍼보이기 위해 부른 것일까요? 우리가 사극이나 현대 드라마를 보다보면 정치인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장례식장에 찾아가 조문을 한다던지 심지어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연기를 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그런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애가를 부른 것일까요?
다윗은 한 때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울이 망하게 될 것을 사무엘상 26:10 에서 예언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친히 사울을 심판해주시길 시편 54:5 에서 간구하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알고 감사의 찬송을 사무엘하 22:2-20 에서 드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습의 다윗이 위선적으로 보이거나 그들의 죽음에 다윗이 연루가 된 것은 아닌가 라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다윗은 결코 위선이나 얕은 정치적 술수가 들어있는 이중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다윗은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사울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위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때때로 사울이 심판 받기를 바라는듯한 모습은 사울 개인에 대한 다윗의 인간적인 원한과 복수의 감정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의 권세가 심판 받고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길 바라는 믿음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죽은 것에 대한 슬픔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기에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가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통해 악인이 그 악행으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어도 하나님은 그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8절에서 말하는 야살의 책에 기록된 다윗의 활의 노래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영광, 이스라엘의 두 용사, 이스라엘의 딸들이 언급되고 동시에 블레셋의 도시들과 블레셋 사람의 딸들,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다윗은 두 사람의 죽음과 함께 이스라엘의 패배를 슬퍼하고 있습니다.
“바로 할례받은 참 신의 민족이 어찌 할례받지 못한 가짜 신의 민족들에게 패배하여 조롱과 모욕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라는 뜻입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바로 참된 이스라엘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조롱과 모욕했던 골리앗 때와 같은 모습을 여기에서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이스라엘은 반드시 하나님과 관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스라엘을 다윗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다윗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다윗보다도 더 위대하신 왕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이웃 사랑을 넘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인이 직접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고 있을 때 생명의 위협은 느꼈어도 죽음의 순간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순간 속에서도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바로 지난 주일 말씀처럼 그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에게 “저 사람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진짜 그리스도라면 자신도 구원할 것이다.”, “니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니가 너를 구원하라”라고 조롱하는 자들과 “니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비방하는 십자가에 같이 달린 행악자들에게조차 그분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며 자신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자신들을 조롱하며 모욕하는 원수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두고 애가를 부른 다윗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는 우리를 두고 십자가에서조차 슬퍼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아무리 까닭없이 우리를 핍박하고 미워하는 원수 같은 자에게조차 그 자의 죄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맡기면서 우리는 오히려 그 원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힘이 바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분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묵상한다면 우리가 원수를 만났을 때 그 사람에게 복수하고 미워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더 나아가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두고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듣고 개인적인 원한으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슬퍼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순간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혹시 지금 자신에게 원수가 있습니까?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한테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나를 미워하고 나에게 못된 짓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으로 돌아갑시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에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복수와 원한에서 해방되어 그 원수를 우리는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게 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원수였던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며 우리 또한 예수님과 같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도록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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