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지막 소원

요한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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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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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사도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2절에서 베드로가 사도요한은 나중이 어떻게 될지가 매우 궁금했을 때 예수님은 요 21:22 “....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사도요한은 94세까지 에베소교회를 목회하다가 주님곁으로 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꼭 장수를 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90세에 밧모섬으로 유배를 갔을 정도로 오래 산만큼 고난과 박해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꼭 이렇다하고 정의할 순 없지만 사도 요한이 다른 사도들에 비해서 오래 살게 된데에는 그가 받은 사명이 목회자의 사명때문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사도들은 선교사의 사명을 받았지만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는 목회자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일찍 순교를 당한 반면 사도요한은 생전에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지도하였고 말년에는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죠.
사도 요한은 말년에 혼자 설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했지만 성도들의 부축을 받아 설교 단상에 설 정도로 온 힘을 다해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교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진정한 ‘예수님의 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사랑을 많이 강조하는 것도 그가 교회와 성도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써내려갔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7장은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겟세마네의 기도가 담겨있지 않습니다. 다음장인 요한복음 18 장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기 때문에 문맥상 이곳에는 다른 복음서처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와야 하지만 사도요한은 겟세마네 기도가 아닌 다른 예수님의 기도를 수록해 놓았습니다.
이는 겟세마네 기도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래도록 교회를 돌보았던 사도요한의 시각에서는 예수님이 체포되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수님이 그토록 성도와 교회에게 가장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경어디에서도 예수님의 기도가 이렇게 길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번 장에서 예수님의 기도의 언어를 배울 수 있기도 하고,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을 알 수 있기에 이 장은 매우 귀중한 장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마지막까지 간절히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5절)

요한복음 17:1–5 NKRV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먼저 예수님의 기도 초반부를 보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기도를 올립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예수님의 일평생 소원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힘쓰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개신교 교회에서는 세례를 하기 전에 세례 입교 문답을 합니다. 세례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묻는 제일 첫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
그리고 저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죠.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땅에 지으신 목적이고 우리의 삶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오롯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은 어떤 삶의 모습을 말합니까?
흔히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에 단순하게 주의 일만 하거나 아니면 내가 예수를 믿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최근에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얻었습니다. 학교폭력에 대해서 다룬 드라마인데 그 드라마의 제목이 ‘더 글로리’ 즉 ‘영광’이라고 지은 것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허울뿐인 영광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고, 무의미한 용서 따위 보다는 제대로 복수를 하는 것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말하는 영광은 이기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도들도 내가 남들보다 잘되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지, 내가 공부못하고, 내가 남들보다 잘나가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내가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분리시켜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늘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생명도 주시고, 복도 주시고, 은혜도 주시고, 성공도 주시고, 권세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 17.2-4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 말씀을 풀어서 말하면 사람이 영생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인 한 사람이 영생에 이르는 것 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만드는 것이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영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들 영생을 죽지 않고 오래사는 것을 생각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관점이 아닙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비극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고,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이란 단순하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영원토록 사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의 결론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아는 것이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부부로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 남이었던 남녀가 한몸이 되고 한 가정이 되어 서로를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아는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영생에 이르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음의 세가지를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1. 저들이 아버지의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6-10절)
요한복음 17:6–10 NKRV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것이란 사실입니다.
요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성도는 이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아버지의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지만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전에 죄로 둘러싸여 있을 때에는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생각했기에 내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가 그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오롯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자아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요 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돌이켜보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시종일관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은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왔고 그분이 자신을 보내셨다는 사실 즉 아버지와 하나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을 확실히 아셨기 때문에 그 인생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흐트러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란 그 정체성을 깨닫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요 17.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것이 깨달아야 삶이 바뀝니다. 흔히들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고 했을 때 종속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은 우리가 그분의 철저한 보호와 돌보심 속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시 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세밀히 돌보십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반려동물문화가 활기를 띠고 있는데 개와 고양이가 주인을 잘 만나면 팔자를 고칩니다. 도둑고양이는 늘 쓰레기를 뒤져야하지만 주인을 만난 고양이는 사람보다도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그분의 기르시는 양이 되었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기에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이유는 우리가 바로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깨달아야 삶의 인식이 바뀌고 놀라운 은헤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주님의 것이란 자아인식을 늘 마음에 담고 주님 안에 거하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저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알게 하소서 (11-19절)
요한복음 17:11–19 NKRV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남녀가 서로 만나서 연예를 하다가 부부의 관계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한 사람에게만 속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사람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제 다른 이성은 모두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얼짱, 몸짱이 많아도 나와는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다른 이성에게 기웃기웃 거린다면 그 사람은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고,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 성도들을 신부로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성도는 자신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사는 동안 순결한 신부와 같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 17.14-15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우리가 당장 천국에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분이 된 거룩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구분된 거룩한 삶은 무엇입니까?
많은 신앙인들이 거룩함을 욕망과 즐거움을 절제하는 금욕의 삶을 거룩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불경건한 삶을 산다고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룩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삶의 모습과 육신의 본성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동일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육신에 대한 안목과 그 육신이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가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진리, 즉 말씀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요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육신을 입고 이땅에서 사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가 거짓과 비진리로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온전히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고, 말씀을 분별을 해야 하며, 말씀 속에서 삶의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이 가르치는대로 세상이 정해놓은 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가르치는 인격을 갖추고, 말씀이 가르치는 사랑의 정신을 쫓아서 사는 것이 바로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모르면 성도는 절대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말씀만이 세상에서 빛과 어둠의 구분을 드러내기 때문에 성도는 말씀의 안격을 가지고 삶을 보아야 하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에 보냄을 받았으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 즉,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늘 영의 양식으로 우리의 영을 살찌우고,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20-26절)
요한복음 17:20–26 NKRV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하십니다.
요 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통해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된 일이지만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것은 그분께 더욱더 큰 영광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초두에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지혜도 주시고, 성공도 주시고, 은혜도 주시고, 권세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즉 우리가 전도자가 되어 믿지 않는 자들을 주님께로 이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전도자의 삶을 사는 것은 단순한 복음전파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을 세상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사랑의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 그것이 바로 전도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단순히 종교생활이 되어서는 안되고, 교회도 단순히 종교의 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도와 교회 안에는 언제나 따뜻한 주님의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랑이 누군가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난 주에 한 여자 청년이 우리 교회를 찾아왔었습니다.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 청년은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우리교회에까지 이르렀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친척도, 보호시설도, 성당도 다 자기를 내쫓아서 여기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었습니다. 몸은 앙상하게 말라있었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2층에 임시거처를 마련해주고 몇몇 분들이 시간이 될 때마다 그 청년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몇 일 뒤에 이 청년이 쪽지를 남기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쪽지의 일부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제게 따뜻한 사랑과 살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감사하다는 말씀밖에 못 드리지만 나중에 제가 기회가 된다면 웃으면서 은혜를 베풀겠습니다. 사실 제가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할 정도로 못되게 살았는데 그런 저를 색안경 없이 바라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때까지 저는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다 얻으려고 노력했어요. 욕심쟁이 였어요. 하지만 여기와서 지금 한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얻으려고 하는 삶이 아니라 주려고 하는 삶을 사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제가 만약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 그런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몇몇 분이 보여주신 예수의 사랑이 삶의 소망을 잃었던 한 청년의 삶을 다시 일으켜 주었고 그를 다시 가정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목회자로서 이런 따뜻한 성도님들이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어서 너무나도 감사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것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된 줄 알기에 감사하고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자들이 되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제목도 그 주님의 기도와 일치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속하였기에 세상의 길을 따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사랑의 예수님이 계시기에 사랑을 베풀며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되어 우리의 삶의 모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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