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를 이루는 교회(요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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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3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간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부터 요한복음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함께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축복을 누리는 시간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1.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시니라 이 말씀(‘Logos’)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Logos’)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요한은 1절을 시작하면서 ‘태초’라는 단어를 언급합니다. 영어로는 in the begining 입니다. 시작에, 시작에서라는 뜻이겠지요. 태초라는 단어는 인간이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이고, 초시간적이며 우주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로 몇 시간 아니 몇 분 전의 것도 기억하기 어려워하는 존재인데,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근원과 본질을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또 얼마나 신비스러운 것인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냐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태초’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에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는 구절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누가요? 바로 하나님이신거지요. 창세기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동일한 태초에 대하여 요한은 다르게 말합니다. ‘창조하시느니라’가 아니라 ‘계시니라’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근원적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알 수 없고, 이를 수 없는 그곳에 이미 있던 그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그 존재는 누구입니까?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배웠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말씀에게 ‘계셨다’라는 동사를 사용하면서, 인격적인 존재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당황하였을꺼에요. 요한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인격적 존재인 그 말씀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분명 당시 유대인들은 창조의 하나님, 그 하나님과 함께 하신 그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요한의 주장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니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의 논리가 대단히 놀랍지 않습니까? 그 백성들 모두가 알고 있는 창세기 1장 1절 말씀으로 그들의 관심을 모으고, 그 하나님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으로 끌어가는 그 능력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비단 그들뿐이겠습니까?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사상은 헬라철학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데아론’으로 잘 알려진 플라톤 철학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에게 ‘말씀’이라고 번역된 logos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익숙한 단어였습니다. 그들은 세상 만물에는 근원적인 본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한이 말하는 ‘말씀’, 즉 Logos가 바로 그것이라 여겼던 것이지요.
그런데 요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지요.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라고 증거합니다. 그들의 이해에서 근원적인 본질적 실체는 하나에요. 여럿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logos가 ‘함께’ 있다니요. 이건 말도 안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헬라 철학과 분리가 일어납니다. 헬라 철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논리적 체계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헬라인들은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지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고상하고 영원한 것이라도 이해했습니다. 당연히 말씀이라는 Logos는 영적인 것인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영적인 세계가 물질적인 세계속으로 내려올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헬라적 사고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 버렸습니다.
요한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창조에 대한 지식과, 당시 세계를 주도하고 있던 헬라 철학을 이용하고 또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서 당대의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누가 요한복음을 쉬운 성경이라고 하였습니까? 요한복음을 제대로 설교하는 것은 많은 설교자들의 꿈입니다. 그만큼 깊고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이 그렇습니다.
1절과 2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에서 요한은 하나님께서 ‘함께’ 존재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함께’라는 단어를 눈여겨 봅시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 함께 존재한다” 요한은 지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함께 계셨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삼위일체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중에 삼위일체라는 신학적 용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 개념은 교회가 세워진 이래로 수많은 위해한 신학자들이 제대로된 설명을 내놓기 위해 애썼던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이 삼위일체를 세잎 클로버에 빗대어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도 문제는 있지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시면서 한 분이신데, 클로버의 세 잎은 각기 존재하지는 않지 않나요? 한 줄기에 세 잎이잖아요. 이렇듯이 그 누구도 이 개념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머리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지만, 또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개념입니다.
그런데 조금은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함께 계신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고, 하나님이 싫어하신 것을 예수님도 싫어하셨고,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을 예수님도 사랑하셨다는 뜻이 아니겠냐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하나님이 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교회’의 원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우리들 각자를 성도로 또 하나의 교회로 부르신 원리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함께 입니다. 오늘 본문속에서 보았던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영원한 시간속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계십니까? 함께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함께’는 하나님의 성품이자 속성이며 ‘관계’를 보여주는 원리입니다. 누가 그 어떤 존재가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속성을 따라, 그 형상을 따라 함께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관계를 누릴 수 없지만, 당신의 속성을 따라 지어진 존재인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함께 라는 그 완벽하고 신령하면서 감히 경험할 수 없는 세계에 우리를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과 결코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의 회복입니다. 원래 창조의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완전한 교제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세상가운데 육신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왜 주님이 오신 것입니까인? 바로 깨어진 관계의 회복입니다. 구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여, 이 땅가운데에서 함께하는 교회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이 땅의 교회는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공동체, 또 함께를 누리며, 함께를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교회의 중요한 원리는 “함께”입니다.
교회는 영원히 함께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드려내고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함께 경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로부터 우리는 이미 천국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사는 이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까? 바로 ‘함께’입니다. 거룩한 이들이 함께 모이기 시작할 때에,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함께 도모하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함께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삶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함께 경험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함께 공동의 선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부르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내도록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무엇입니까? 이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주님과 같이 함께 나누고 섬기며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한이 자신이 기록한 성경을 통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종교나 철학이 무어라 말하더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이 하나의 사실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묵상하면서 계속해서 놓치지 먈고 불들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입니다.
또한 ‘함께’라는 원리를 보았습니다. 함께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교제하시면서 존재하시는 방식입니다. 삼위일체이며, 성육신입니다.
이 원리를 따라 이 땅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함께를 누리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함께를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분열되고 깨어지고 상한 세상과 함께하면서 치료하는 공동체입니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함께를 누리는 공동체입니다.
조금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함께 세워져 가는 공동체의 시작과 끝은 다름 아니라, 강단에서 선포되는 올바른 말씀을 통해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또 온 성도가 동일한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서 함께 말씀을 공부하고, 그렇게 배운 말씀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이 순종하고자 날마다 애쓰며, 성도들이 자주 만나 그렇게 실천한 삶을 서로 나누며 위로를 주고받는 그런 ‘함께’하는 교회입니다. 그렇게 말씀으로 함께 지어져가고 함께 성장하며,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교회 공동체를 꿈꾸어 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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