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망가진 이정표(요 1:6-8)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58 views
Notes
Transcript
2023년 3월 22일
“망가진 이정표”
요한복음 1:6-8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오늘은 요한복음 두 번째 시간입니다. 요한복음은 총 21장으로 되어 있는데,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과, 2-12장, 그리고 13-21장입니다. 그중에서 1장은 요한복음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한은 1장에서 앞으로 어떤 내용을 써내려 갈 것인가에 대하여 굵은 그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지난 시간에 살폈던 바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실 것을 증거하였던, 세례 요한에 대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살펴보는 가운데 참 증인이 누구인가? 참된 증인의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함께 나누어 보기를 원합니다.
6절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본문은 요한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례 요한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먼 친척이었고,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메뚜기와 꿀을 먹으면서 광야에서 기인처럼 살았고,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요한이 그렇게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의 메세지를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7절입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은 자신의 본질적인 사명이 증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명때문에 이 땅에 태어나 살고 있다라는 것이지요. 그는 빛을 증언하고 사람들이 이 빛을 믿게 하는 그것 때문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은 그 빛이 아니라는 자기 인식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정하여 부르셨습니다.
세상에는 이정표라는 것이 있습니다. 위치와 방향을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즘에야 굳이 지도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지만, 몇 년전만 하더라도 어디를 찾아 가려면,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이 토마스 맵과 같은 지도였습니다. 그 지도를 따라 가다보면 이정표가 나오고 그 이정표를 통해 어느 쪽으로 가야하고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찌되었건 보통의 이정표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 하나는 대부분의 이정표는 모양과 색깔이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미학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선을 오래 붙잡아 놓아서는 안되는 애매한 경계선에 있는 것 같습니다. 방향이라는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음에도 결코 화려한 작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만일 이정표가 사람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것이 세워진 도로에는 아마도 숯한 사고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런 이유때문인지 도로변에 세워진 이정표는 미적인 면보다는 기능성이 중요해 보입니다.
또한 이정표는 반드시 올바른 방향을 가리켜야만 합니다.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초기에 이런 뉴스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했을 때,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러시아군인들이 길을 헤메이도록 하기 위해, 이정표의 위치를 바꾸고 가짜 간판을 내걸었다고 합니다. 망가진 이정표 전략이었습니다.
비단 전쟁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망가진 이정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정표라고 믿고 따르고 있는 수많은 것들이 잘못된 것들을 가리키고, 그것이 진리인것 마냥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톰 라이트라는 학자는 정의와 사랑, 영성과 아름다움, 자유와 진리, 그리고 권력이라는 7가지의 주제들을 가지고 ‘망가진 이정표’라는 책을 썼습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일곱가지의 주제가운데 ‘권력’이라는 이정표를 예를 들어 봅시다. 세상 권력이라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에는 어김없이 폭력과 박해와 파괴가 있다고 말합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입니다.
원래 ‘권력’이라는 이정표가 가리켜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시지요. 로마서 13:1에서 “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고 증거하는 바와 같이 모든 세상 권력,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의 모든 권력의 시작이며 전부입니다.
그렇기에 권력이라는 이정표는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하는데, 세상 권력의 대부분은 속이고 선동하고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며, 파괴하면서 두려워 떨게 만드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정의와 사랑, 영성과 아름다움, 자유와 진리, 권력과 같은 것들은 모두가 교회에서 줄기치가 외치는 것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기독교적 가치라고 여기는 것들이 방향을 상실한 망가진 것들이라면 어떠시겠습니까? 망가진 이정표를 따라갈 때에 그 결국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황금빛 미래와 비전을 제시해 주고 은혜를 말한다 할지라도, 애초에 방향과 그 목적이 잘못된 이정표는 결국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의 길에서 생명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바른 이정표입니다. 올바로 주님을 가리키고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해 알려줄 온전한 이정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세례 요한이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정표는 빛을 향하여 있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의 이정표가 향한 곳은 천국, 하나님이 오신다라는 하나의 진리를 잘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요한의 이정표는 망가진 이정표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삶은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전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자존심으로 가득차 보였습니다. 그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면 소위 출세나 성공과 같은 것들은 전혀 기대할 수도 없어 보였습니다. 결국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어처구니 없게 목이 잘림으로 그 삶을 끝나지 않았습니까?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세례 요한이라는 이정표는 결코 따라가면 안될 망가진 이정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증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는 분명 망가져서 보잘것 없는 이정표인데, 그 이정표야말로 주님을 제대로 증거하는 진짜 이정표라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7절입니다.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요한은 빛을 증거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었습니다. 살고자 하면 그 빛되신 주님을 믿어야 한다는 너무나도 단순한 이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이렇듯이 세례 요한은 오롯히 주님만을 가리키고 증거하는 이정표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것과 동시에 세례 요한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진짜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분명 세상은 뒤틀려져 있습니다.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자끄 엘룰의 명저인 ‘뒤틀려진 기독교’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세상속의 기독교는 순전하며, 이 땅의 교회는 모두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암흑으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그 가운데 빛이 있다고 그 빛을 믿어야 살수 있다고 증거하는 세례 요한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사도요한이 1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굵직한 주제를 말하면서 세례요한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교회가 아무리 뒤틀려 있다 할지라도 바른 이정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정표를 찾아 발견하고 그것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례 요한과 같이 바른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바른 이정표가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이정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셨다! 그분이 정하셨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전혀 그럴 수가 없지요. 세상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습니다. 상하고 깨어지고, 편협하고 뒤틀린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이정표로 정하시고 보내셨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의 능력과 의지에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의미겠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누가 아닌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8절입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보내신 이정표의 존재 목적이 무엇입니까? 가리키는 것입니다.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치는 주님을 드러내고 가리키는 존재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저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해야할 일은 하나이지요. 주님을 드러내는 이정표로서의 역할입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사실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판단해서도 안되구요. 자신의 뜻과 욕심을 하나님의 것인 것 마냥 지껄여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누가 아닌지를 아는 것도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무엇을 할지를 아는 것만큼이나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아는 것이 인생의 성패를 결정합니다.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는 만큼 이웃이 보이고,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는 만큼 /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동시에 여러가지 것들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크리스쳔 리더들은 이렇게 가리킵니다. 큰 그릇을 가져야 한다구요. 세상적으로 성공해야 하나님의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기도의 제목들을 거창하게 가져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십에 일조를 내는 인생에서 십에 이조, 삼조를 내는 인생으로, 백불 헌금바치는 인생에서 만불 십만불, 아니 그 이상을 내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헌금을 그렇게 많이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질적 축복도 분명 그럴듯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가리키는 이정표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는 이것은 망가진 이정표입니다. 하나님께 많은 헌금을 바치는 것이 복된 인생이라구요? 그런 복을 받아 크게 하나님을 일을 해야 한다구요? 만일 그렇다면, 그렇게 될 때까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정표는 잠시 수리중인가요? 아니면 여전히 이정표를 세우고 있는 중인가요? 이정표는 멋지고 화려하게 만들어야만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초라하고 때로는 빛 바랜 것이라 할지라도 있어야 할 곳에 방향만 제대로 향하고 있다면, 그 존재가치가 충분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동시에 여러가지 것들을 다 잘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에요. 이말은 자신에게도 잘하면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을 동시에 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해하지 말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열심히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세상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야 하고,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좋은 것들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방향의 문제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순서의 문제입니다. 그 모든 것을 이룬 다음에 그것들을 가지고 주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한다구요. 세상에 자신의 이름도 알리는 일에 열심이면서, 주님을 알리는 것도 잘하는 것 그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입니까? 주님인가요 자신인가요?
부디 바라건데 우리 주님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쉽고 안전한 삶을 보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속에 요한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인생살이는 참 고달팠을 것입니다. 한낯의 더위와 밤의 추위가 공존하는 곳에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뻣뻣한 낙타의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입고, 소박한 음식들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렇게 산 것은 과연 그가 기인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아닌것 같아요. 정말 없었기 때문이에요. 배고팠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아닙니까? 그럼에4 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참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그의 삶의 결국은 어떻습니까?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 아니었나요?
그런데도 오늘 말씀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머라고 그래도 세례 요한은 망가진 이정표로 가득한 세상에서 온전한 이정표였다고 말입니다. 그는 빛에 대해서 증거하는 이정표라는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고 말입니다. 그 생명의 빛에 인생 전체를 걸었다고 말하면서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여전히 고달프고 어쩌면 주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어렵고 힘들 수 있지만, 우리는 주님을 가리키며 보여주는 이정표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것은 증인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정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어느 편에 서시렵니까? 무엇에 여러분의 인생을 투자하시렵니까?
인터넷에서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주님 저를 이정표가 되게 하소서”라는 시의 한 부분을 읽어드리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 저를 이정표가 되게 하소서
목적지도 목적지의 데레다 주는 운송장비도
목적지를 설명하는 화려한 안내책자도 아닌
오로지 주님이 가르쳐 주는 방향을 표시하는
이정표가 되게 하소서
저를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며 가야 할 목적지에 표시로 볼 뿐
제게 머물지도 제가 그 상대에게 머물지도 않게 하소서
제 모습이 낡아도 좋습니다.
비 바람에 녹슬고 먼지를 뒤집어 써도 좋습니다.
오로지 당신이라는 글자는 뚜렷이 보여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자 했을 때
당신이 있는 곳을 알려 줄 수 있는 이정표가 되게 하소서
사람들이 저를 잊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이정표를 만들고 쓰신 분이 당신임을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길 잃은 사람들이 저를 봤을 때
당신이 안배하고 길을 보여 주고 계심을 믿게 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제가 이정표가 되게 하소서
새롭고 신선하고 화려한 이정표가 되기를 바리지 않습니다.
주님이라는 행선지만 뚜렷이 보일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이 언제든 쓰시고 아무 곳에나 던져 쓰실 수 있는
이정표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누가 저를 보든 주님을 발견하는 나침반이 되게 하소서.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