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ip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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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훈육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훈육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채널 A에서 방송하고 있는 오은영박사의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거식증에 걸린 금쪽이에 관한 에피소드를 보았습니다. 오은영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이 금쪽이는 굉장히 어려운 아이이며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주변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성향을 지닌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자신의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을 통제할 때 정서적 안정을 갖는 그러한 타입의 아이입니다. 존 파웰의 “왜 나자신을 밝히기를 두려워 하는가"의 책에서는 이러한 통제하려는 정서를 “슈퍼자아"라 표현합니다. 주변 사람, 사물 등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어야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는 그러한 타입입니다. 이 금쪽이는 가족 중 유일하게 엄마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기분이 상하면 무조건 방에 들어가 크게 울면, 엄마가 달려와서 달랩니다. 이 아이의 무기는 우는 것과 또 하나 거식증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 주변 가족들이 자기에게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가장 반응을 잘하는 사람이 엄마입니다. 이러한 엄마와 같은 정서 상태를 존 파웰은 “유아기적 자아”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음으로서 정서적 안정감을 갖는 것이지요. 여기서 안정감이란 마음이 안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안정감입니다. 그 둘은 다릅니다.
이 슈퍼자아를 가진 금쪽이는 결코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코 훈육을 받지 않습니다. 이대로 이 아이가 그 정서 상태로 자라면, 이 아이는 다른 사람의 충고나 고언같은 말을 결코 듣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자신 주변에는 자기의 말대로 움직이는 사람만 있을 뿐 잘 못을 지적하고 충고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슈퍼 자아가 국가나 조직 회사의 대표가 되면, 자신 밑에는 오직 자신에게 좋은 말만 하는 아첨꾼들만 득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매우 잘 하고 있다 착각하게 됩니다.
저희 아버지가 늘 말씀하던 것이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잘 못을 지적하는 사람이고, 거짓된 친구는 칭찬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문장을 찾으라면, 지혜를 얻는다 일 것입니다. 지혜를 얻으려면 지혜로운 자와 동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혜로운 자일까요?
지혜로운 자는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자식을 사랑하면 매를 아끼지 않고 근실히 징계합니다. 이 말씀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성경에서 자식이란 단순히 혈연적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배움을 받는 사람을 “아이”, 혹은 “자식"이라 합니다. 그리고 매를 아끼지 않는 사람은 부모일 수도 있고 스승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나 스승은 자신의 제자나 자녀의 잘 못한 행동에 따끔하게 매를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매를 드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폭력을 행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호한 말투, 엄한 얼굴 등 훈계를 받는 사람이 움찔할 수 있는 정도의 단호함을 의미합니다.
24절 후반부의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는 영어 성경에서는 “Discipline”으로 번역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 훈육입니다. 훈육은 꾸준히 지속적으로 잘 못된 행동을 제한하고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하도록 끊임없이 지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뉴질랜드에 있을 때, 어느 날 우리 선교회 사람들과 모두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김재일 선교사님의 두 딸은 유치원 생이었습니다.어른들은 식사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유치원생들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온 집안을 뛰어다니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그 곳에는 두 유치원생 뿐 아니라 또 다른 어린 아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던 저의 뉴질랜드 인 동갑내기 친구 캐런이 상기된 얼굴로 우리들에게 말을 해습니다. 그 친구는 한국말을 썩 잘해서 한국말과 영어를 썩어가며 이야기 했습니다.
“너희들은 왜 아이들을 DIscipline 하지 않지?”
뉴질랜드 가정에서 아이들이 식사 중에 식탁을 떠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합니다. 큰 소리를 내도 안 되고 정 자세로 식사를 하고 온 가족이 식사를 마치기 전까지 계속 그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트나 식당에서 아이들은 절대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떼를 써도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을 가정에서 Discipline 합니다.
Discipline은 꾸준히 바람직한 태도와 자세를 가르쳐서 몸에 베도록 합니다. 아이들의 본성상 얼마나 자리를 뜨고 싶겠습니까? 이리저리 친구들과 뛰어 다니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무질서하고 무분별한 태도와 자세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얼마간 아이들을 불편하게 해야 합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다 보면, 하기 싫다고 투덜대며 가만히 앉아 공부하는 것을 거부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울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하고 싶은데로 내버려 둘 수 있겠지요. 그러면, 좋은 선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올바른 자세를 가지도록 따끔하게 매를 들어야 합니다. 즉 단호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훈육해야 아이들이 좋은 정서적 상태를 유지합니다.
통제적인 그 금쪽이가 가족들과 탁구를 치는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작은 공을 탁구채로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일이 아닙니다. 그 금쪽이는 탁구공이 자신의 통제에 들어오지 않자 심술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공을 탁구채 대신 손으로 던져버리며 가족의 즐거운 탁구 놀이를 망칩니다. 급기야 그 동안 금쪽이의 통제를 받아왔던 엄마가 탁구대에서 그 금쪽이를 분리했습니다. 그 금쪽이는 엉엉울지요. 그런데 엄마는 단호하게 그 금쪽이를 떠나 탁구를 치려 갔습니다. 그러자 그 금쪽이는 더 크게 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이를 앙 물고 단호하게 그 금쪽이에게 다가가 예전처럼 안아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엄마가 행동한 이유는 오은영 박사의 처방때문이었습니다. 성경말씀 대로 “매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한참 상담을 공부할 때, 저희 상담실 실장님었던 김회성 실장님도 이와 유사한 처방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유치원에 한 아이가 머리를 다쳐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붕대로 머리를 칭칭 감은채 유치원을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조금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붕대 감은 머리를 벽에다 부딪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치원 선생님은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그래서 몇일 동안 그 아이의 비위를 마추느라 다른 아이들을 희생시켜야 했습니다. 이 상황에 김회성 실장님이 상담했습니다. 김 회성 실장님은 그 머리를 다친 아이는 선생님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머리를 벽에 부딪히려고 한다고 분석하고, 그 아이가 또 울며 머리를 벽에 부딪히려 할 때, 선생님은 이렇게 하라고 솔루션을 주었습니다. 이이가 울며 머리를 부딪혀려 할 때, 선생님은 “자 우리 옆방으로 가서 놀까?” 하며, 그 울고 있는 아이 머리를 부딪히려하는 아이만 그 자리에 두고 아이들만 데리고 옆방으로 이동하게 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따금하게 매를 드는 것이지요. 더 이상 붕대감은 머리로 선생님을 조정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단호하게 알려 주는 행동입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로은 자는 상대방의 잘 못된 행동을 보면, 매우 단호하게 충고하는 사람입니다. 미련한 자는 상대방의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좋은 말로만 아첨만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동행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따금하게 충고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기분 좋은 말만 하는 사람만 있습니까?
또 지혜자는 누구일까요?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육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육하는 사람입니다.
따름하게 충고를 할 때, 충고하는 사람이 올바른 가치관이 있어야 겠지요. 요즘 마약사건이 뉴스에서 종종 나옵니다. 마약을 하지 말라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마약을 사용해야 하는지 충고하는 것이 올바른 충고일까요? 대학원 에서 공부할 때,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교수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덕교 교수님이 크리스챤이 되기 전에 가수 생활 할 때 그렇게 마약을 많이 했다고 하면서, 잠깐 마약 복용방법을 이야기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들끼리 서로 서로 어떤 식으로 마약을 종류별로 해야 하는지 정보를 교환하고 잘 못 사용하면 올바른 사용법 예를 들어 코케인으로 올려주고 히로뽕으로 내려 주고 등등 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올바른 discipline 일까요? 지혜자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마약을 잘 하고, 또 절도를 잘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범죄를 잘 할 수 있는 지 아는 사람이 지혜자가 아닙니다. 교도소에서 사기꾼들은 더 낳은 사기수법을 배워서 온다고 합니다. 그들끼리는 서로 지혜자라 하겠지만, 지혜자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지요. 우리의 본성이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혜자는 분명한 기준을 있어야 합니다. 그 분명한 기준은 성경말씀입니다.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거니와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슬기로운 자란 지혜자와 동의어 입니다. 이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미련한 자는 자기의 것, 즉 자기의 미련한 것으로 행합니다. 자신의 충고의 기준이 오직 자기 자신의 것, 자기 가치관, 자기 신념, 자기 경험이 최고이고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성경에서 미련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옳다 믿고 그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삶을 살아가고 충고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늘 삶을 살아가고 경험이 쌓여가고 견문이 넓어지기 시작하면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만 살 때와 해외에 나가 다른 문화를 경험하게 되면 훨씬 더 유연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몇년씩 해외 일주를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변함없이 시대를 초월하여 관통하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16절에서 “지식"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지식은 성경말씀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말씀과 계명이라는 두 단어가 보입니다. 그 두 단어는 기록된 성경말씀을 의미합니다. 기록된 성경말씀을 멸시하는 하고, 오직 자신의 생각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으로 충고하는 사람은 패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을 보십시오. 후회의 연속 아닙니까?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서 후회하셨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생각과 욕심으로 계획하며 살아서 후회했습니까? 지금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자기 자신의 생각은 세월이 더 흐르면 후회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수 천년전에도 진리의 말씀이고 지금도 진리의말씀이며 앞으로도 진리의 말씀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지혜자 입니다.
주변에 이러한 지혜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지혜자가 있습니까? 그 지혜자의 충고를 들으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오늘 말씀 처럼 지혜로운 자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그 말씀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는 그러한 지혜로운 사람이 많아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자가 Discipline 할 때 겸손히 들으십시오. 비록 따름한 충고는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지만, 겸손히 듣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수정하려고 하는 즉 discipine 하려는 사람이 또한 오늘 본문에서는 지혜자라 말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지혜자는 기꺼지 다른 사람의 훈계를 듣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훈계를 듣는 지혜자가 되시기를 또한 축원합니다. 우리 서로 서로에게 지혜자가 되십시다. 서로 서로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Discipline 하고 해 주는 참된 공동체가 되십시오. 이미 우리 교회는 아침마다 집사님과 소혜영자매가 하나님 말씀으로 discipline 하고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서로 서로에게 discipline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