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 그리고 십자가] 가족을 넘어 식구로(요19: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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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3월 26일 주일 청년부
시리즈 : 가상칠언, 그리고 십자가
제목 : 가족을 넘어 식구로
본문 : 요한복음 19장 26-27절 *신181
결단찬양 : 주 안에 우린 하나
[가족인가 식구인가]
‘가족’이 일본식 한자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뭐 사실 뜻을 알면 특별히 일본식이라 해서 문제가 없어보이긴 합니다. 가족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너무 문제 없어 보이는 단어 아닙니까?
그래서 이 가족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어떻게 표현했는가 보니까, 순우리말로 ‘식구’라 표현했습니다. 식구의 뜻은 ‘한 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 이들’을 뜻합니다.
그렇게 저는 뜻을 듣고나니 가족보다 식구의 뜻이 저는 더 따뜻하고 좋았습니다. 가족은 친족에 국한되어 설명하나, 식구는 ‘밥’에 기준을 두었으니 말입니다. 이런걸 생각해보면, 참 우리나라는 밥에 미쳐있는 나라가 맞구나 이해가 됩니다.
사실 가족이란 단어도 사용함에는 전혀 이질감은 없지만, 예전과 지금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달라졌기에, 우리 공동체가 가족을 넘어 식구가 되어야함을 보았습니다.
예전 가족이란 단어가 나올 때, 혈연으로 이루어진 이들이 대가족을 이루어 한 집에 살며, 함께 밥을 먹을 수 밖에 없는 구도 였습니다. 이들에게 가족은 곧 식구고, 식구가 곧 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가족은 달라졌습니다. 대가족이 핵가족화 되었고, 결혼하여 부모와 함께 살던 옛 문화와는 다르게 분가하여 살아가며, 심지어 같은 집에 산다 하더라도 가족과 식사를 하기보다 친구와 때로는 직장동료와 저녁을 먹거나 외식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지금의 가족은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구도로부터 벗어난 형태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식구의 개념이 우리 안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저 같은 교회 안의 청년들, 같은 공동체라는 개념을 넘어 식사하는 공동체가 되면 너무 좋겠다 싶습니다. 육의 양식도 먹고, 영의 양식도 먹는 그런 식구가 되면 너무나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식구라는 가족개념의 공동체의 탄생을 우리는 ‘교회'라는 건물 공간 안에서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기회인지 모릅니다.
[“여자여” 새로운 가족의 시작]
이처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본문 속에서도 새로운 가족이 탄생되었음을 보게 합니다.
본문을 봅시다.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만약 제가 여러분들에게 ‘여자여, 제게 물 좀 떠 주시겠습니까?’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의 기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마냥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왠지 모를 비아냥 거리는 느낌도 조금 있고, 반대로 ‘남자여’라 부른다 해도, 왠지 하대하는 느낌도 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문화 속에서 ‘여자여’라는 호칭은 극존칭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존중’의 모습을 보였다는 겁니다. 오히려 높인다는거죠.
그런데, 그 호칭이 지금 누굴 향합니까?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라 부른다는거죠. 굳이? 어머니라 부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여자여라 부르신 예수님의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사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처음이 아닙니다. 선례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던 연회장 사건. 거기서도 예수님은 어머니를 향해 이렇게 부릅니다. 요한복음 2장 4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때에도 예수님은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말하는 장면이 보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어머니가 보인 반응은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2장 5절에 보니,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만약 제가 어머니라면 충분히 놀랄 법한대, 생각보다 덤덤합니다. 아니 어쩌면 예수님의 의도와 또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뜻을 알았는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그녀는 자신을 제 3자처럼 부른 예수님의 모습에, 하인들을 향해 제 3자의 모습으로 전합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대로 해라’
이처럼 오늘 본문 속,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라 부름은 이제는 자신의 어머니를 넘어 제 3자, 즉 조금 더 넓고 포괄적인 모습 속에서 어머니와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새로운 가족으로서 세워집니다. 그들은 피를 한 방울도 나누지 않은, 예수님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지냈을 남남이었지만, 그러나 이제 이들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끈끈한 가족 공동체 속으로 초대됩니다.
[더 나아가, 새생명의 시작]
뿐만 아니라 요한은 유독 예수님의 ‘새로운 시작’을 잘 표현해 냈다 볼 수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다 잡히셨다 기록하고, 누가는 그곳이 바로 '감람산'이라 기록하는데, 요한은 그저 ‘동산’에서 붙잡히셨다 기록합니다.
또 그가 죽으신 곳이 ‘동산’이라 기록하며, 부활하신 곳 또한 ‘동산’이라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가 부활하시어 무엇을 하셨는가? 요한복음 20장 22절을 보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가 제자들 앞에서 ‘숨’을 내쉬었다 기록합니다. 이를 헬라어로 ‘엠퓌사오’라 기록하는데, ‘동산’과 ‘숨’, 왠지 익숙하지 않습니까? 언제 이 두 단어를 보았습니까? 바로 창세기, 천지창조 아니겠습니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코에 ‘생기’ 즉 ‘숨’을 불어 넣으셨는데, 어떻게 됩니까? 그가 생기가 있어 생령이 됩니다. 창세기는 ‘동산’과 ‘엠퓌사오’를 통해 새로운 창조가 되었음을 보이는데, 요한도 ‘동산’이라는 단어와 ‘엠퓌사오’라는 단어를 가지고 와, 그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새생명을 제자들에게 불어 넣었음을 보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엠퓌사오’는 에스겔 마른 뼈 환상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어, 마른 뼈가 일어나 살아 움직였음을 보게 합니다. 여하튼 요한은 ‘새로운 시작’에 있어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고, 또 적극적으로 표현했고 전했습니다.
[십자가가 가족을 만듭니다]
요한은 그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의 선포를, 새로운 가족의 선포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굳이? 왜 굳이 십자가 위에서, 그 힘든 상황 속에서 어머니와 요한을 향해 ‘새로운 가족’의 시작을 선포합니까?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것이 힘든 그 순간 굳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니 해도 됬지만, 하필 십자가 위에서 해야 했음은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가 정답일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이 말씀이, 십자가와 관련이 없다곤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리 행하신 목적이 그 무엇보다 분명했을 것입니다. 이유를 우리가 근사치나마 찾아보려면, 먼저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건이 왜 존재해야만 했습니까? 우리 때문 아닙니까? 우리 죄 때문에 이 모든 사건이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이 사건이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 사함 아닙니까? 죄인으로 하염없이 죽어 마땅한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자신의 품으로 품고자 계획하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한 속죄함 아니겠습니까?
그럼 굳이 십자가에서 ‘새로운 가족’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니, 굳이가 아니죠. 너무나 놀라운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죠. 그 의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즉 속죄함을 통해 이를 믿는 모두가 하나의 가족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말하는 새로운 가족이 형성됨에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함을 우리는 발견해볼 수 있는데, 첫번째는 바로 ‘십자가의 속죄함’ 입니다. 단순 교회를 다니기에 한 가족이 되었다 말할 수 있지만, 이런 개념이라면 굳이 교회가 아니어도 타종교에서도 성립되는 개념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특별함이 있다면, 우리 모두 우리의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 받음에 감사하며 속죄함의 은혜를 누리는 가족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과 또 그 안에서의 교제가 풍성함은, 우리의 감정적인 만남으로는 충족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힘은 늘 한계치가 있기에, 이 공동체가 풍성함을 누림은, 이 공동체 안에 십자가의 속죄함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가족을 만듭니다]
또 새로운 가족이 됨에는 십자가의 속죄함뿐만 아니라, 사랑도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은, 사실 모르는 사람 찾는 것이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눌 이 사랑은 조금 더 아름답고, 단순 사랑의 개념을 더 넓게 보는 시간이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사랑하라.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등 예수님은 늘 사랑을 노래해 오셨습니다. 또 행동으로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다던지, 사회적 약자나 어려운 자들과 함께 하며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강조한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이 사랑은 겸손입니다. 낮아짐입니다. 그리고 상대를 높이는 사랑입니다. 외롭고 힘든 자들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네 편이야’ 라고 말해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세상 사람과 같은 눈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비판하기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형제자매들의 공동체가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곧 아들을 잃습니다. 아들이 십자가에 죽습니다. 이보다 슬픈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이보다 마음 아픈 일이 어디 있겠냐는겁니다. 하지만, 가족이 된 요한이 이를 위로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처럼 자신의 형 야고보를 잃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듯,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한을 가족의 모습으로 위로합니다.
새로운 가족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만드는 공동체 입니다. 혼자 외로이 서 있는 곳이 아니라, 함께 손 붙들고 일어나는 공동체 입니다. 홀로 두려워 떨 때, ‘걱정마, 내가 너와 함께 할거야.’ 라고 말해주는 공동체 입니다.
[결론]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한 가족, 식구가 되었음을 다시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한 가족으로 선포하심과 같이, 우리도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늬상, 형식상 가족이 아닌, 정말 함께 밥도 먹고 은혜를 나누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칭찬하고 세워주고 응원해주는 그런 식구가 되길 소망합니다.
더욱이 십자가의 속죄함과 사랑으로 하나 되어가는 우리 모두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Ⅰ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주님께 날마다 감사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Ⅱ 우리게 행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품고 위로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찬양 후 기도제목]
Ⅲ 서로 다르나 주 안에 하나되어, 주님의 뜻 이뤄가는 청년 공동체 되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 충만하심이
우리를 십자가의 속죄함과 사랑으로 하나 되게 만드심에 감사하며
주 뜻 위해 하나되어 달려가겠노라 다짐한 자들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서로 위하고 품어주는 가족 공동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노라 결단한 자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