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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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장 사역
우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로) 얻은 동일한 믿음을 가진 우리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이다.
은혜와 평화가 하나님과 예수 우리 주의 인식을 통해 너희에게 더할 것이다.
3. 생명과 경건으로 향하는 모든 그의 신적 권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아는 것을 통해
4. 보배롭고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통해
정욕으로 세상에서의 부패를 피하고 이 약속을 통해 본성의 신적 동료(참여자)가 되기 위하여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혹시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삶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를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규정하자면, 여러 거대 담론이 존재하는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여러 세계관, 여러 생각들이 존재하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건데, 각자마다 생각하는 세계가 있고, 이 세계 안에서 각자 원하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즉, 절대적 진리는 없고, 각 사람마다 각자가 생각하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상입니다. 하나님 말씀, 성경이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있어서 경계해야 하는 사상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의 경계를 배타적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고 되돌아보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는 베드로가 여러 교인들에게 전한 메시지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절에 보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즉,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은 지금의 북부 소아시아, 튀르키예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흩어진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흩어지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에는 무엇이 있었길래 그렇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교회를 향한 박해 때문입니다. 베드로전후서가 쓰여졌을 때는 대략 A.D. 50-70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때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박해가 극심하던 때였습니다. 로마의 황제였던 네로 황제도 이러한 박해를 가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죠. 어떠한 박해가 있었는지는 베드로전서 4장 12-1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벧전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벧전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불같은 시련(불시험)을 당했다고 12절에 나와 있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며 치욕을 당했다고 13-14절에 나와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모욕과 치욕, 그리고 고난을 받게 되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지역 중 한 곳이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자신의 고향에 있지 못하고 다른 여러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을 총칭해서 ‘디아스포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전서 1장 1절에 나온 ‘흩어진’이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이 쓰여진 원어로는 ‘디아스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박해로 인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여러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 사상들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하나는 거짓 선지자의 사상입니다. 즉, 이단이죠. 그리스도인 공동체 중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이단으로 끌어들이는 자가 있다고 베드로후서 2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벧후 2장 2-3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벧후 2장 2-3절에는 호색하는 것을 따르고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고, 탐심으로 지어낸 말을 가지고 이득을 삼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같이 읽도록 할까요? 베드로후서 2장 1-3절입니다.
(벧후 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1)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또는 상전
(벧후 2:2)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벧후 2:3)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에 나온 호색하는 것과 탐심으로 지어낸 말에 대해 알려면 이 당시에 많이 유행했던 문화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헬라 시대, 그리스 시대 사람들이 가졌던 문화 중에 동성애 문화가 있었습니다. 특히, 그리스 시대에는 여성을 얕잡아 보는 때였기에, 남성끼리의 동성애가 사랑의 형태 중에 가장 위대한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한 시대입니다. 한 예시로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데스는 자신의 제자 청년인 알키비아데스와 연인 사이었습니다. 그들은 남성들과의 진한 우정이 플라토닉 러브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스승과 청년 제자가 서로 동성애를 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때가 이 시대였던 것입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지성인으로서 “여자와 동침하면 육신을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고, 이에 대한 생각을 그의 저서인 ‘향연’이라는 책에 심어 놓았습니다.
성경에서는 로마서 1장을 보면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죠.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롬 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 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그러나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즉,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몸을 이룬다는 창조 질서를 지키지 않는 문화 및 사상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죄악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을 보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가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단으로 빠지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동성애라는 이름의 호색과 탐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도를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 나누었던 2가지를 보았을 때 베드로가 여러 다른 나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쓴 이유는 극심한 박해로 인해, 이단과 동성애 등 하나님의 뜻과 대적하려는 자들로 인해 어렵고 힘들어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은혜와 평강의 위로를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목적을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통해 은혜와 평강, 위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후서 1장 2절 앞부분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바로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아는 인식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진리를 인식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 은혜와 평강,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의 시대와 이 베드로전후서가 쓰여졌을 당시와의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몇 안 되는 그리스도인의 수입니다. 초대교회, 베드로전후서가 쓰여졌을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이 로마 시민들의 숫자에 비해 현저히 적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10-20년밖에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 현저히 적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로 인해, 이단의 공격으로 인해 여러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교회에 대한 실망, 이로 인한 편견과 잘못된 인식이 오늘 날로 하여금 교인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줄어들 것이라고 교계는 보고 있습니다. 종교분포를 보았을 때, 만 19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개신교인이 2012년에는 22%라는 통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7년에는 20%가 되었고, 2022년에는 15%로 급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이 10년 동안 무종교인은 45%에서 63%로 급증하였습니다. 점점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아지고, 사회 구성원 중 기독교인이 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점점 흩어지는 그리스도인들, 혹은 사회 구성원 중에 몇 % 밖에 안 되는 상황이 앞으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향후에 사회에서는 교회를 박해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가 나중에 생겨날 때, 왜 이렇게 모이냐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왜 이리 배타적이고 이기적이냐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이단들의 공격도 있을 것입니다. 신천지, 여호와의 증인, 요즘 넷플릭스에 뜨고 있는 ‘나는 신이다’ 라는 다큐에 등장하는 JMS 및 다른 여러 이단이 서로 자기네 교주가 신이라고 우길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믿음은 잘못 되었다고, 자신들의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고 우길 것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동성애가 옳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올 것입니다. 동성애를 왜 나쁘게 보냐고! 동성애를 무조건 옹호해야 된다고!! 인권 침해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창조질서에 어긋나지 않도록 이 땅에서 살아야 된다는 목적을 상실하고 자신이 원하는 호색과 탐심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뿐입니까? 마약 합법화도 이제 곧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요즘 10-30대 사이에 마약 복용자가 점점 급증하고 있습니다. 모르게 복용하든 원해서 복용하든 말입니다. 심지어 대마초 같은 경우에는 환각 현상 이외에 담배보다 몸에 덜 해롭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대마 합법화를 주장하는 사람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사회 현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마주하며, 마지막 날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운데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앎, 인식을 통해 더욱 주님의 은혜와 평화, 위로를 느껴야 할 것입니다. 이 어지럽고 어려운 세상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모욕과 핍박과 박해받는 이 세상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앎을 삶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내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담임 목사님 말씀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안에 은혜와 평강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을 보면 화평케 된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앎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느끼는 것을 통해 이러한 모습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라고 벧후 1장 3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원어로 좀 더 살펴보면, 생명과 경건으로 향하는 신적권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2가지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오늘 말씀에는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을 통한 방법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보배롭고 큰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통한 방법입니다. 전자를 먼저 살펴보면,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덕은 그 누구보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분의 영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뛰어난 신은 없으며 이 세상의 유일한 신이며, 그분으로 인해 구원이 주어진다는 사실이 그분의 영적인 면입니다. 그리고 그분보다 더 선하거나 아름답거나, 옳은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 그분의 도덕적인 면입니다. 그러한 분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나아간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직접 그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 추악함을 보면, 주님 앞으로 나아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러한 우리의 추악함을 씻어주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내고 있는 사순절 기간에 느끼고 묵상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알게 되고 믿으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고자 합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부르신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뛰어나신, 넘사벽이신 하나님을 앎으로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보배롭고 큰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통해 신적 권능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배롭고 큰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앞서 말한 예수님의 행적을 알고, 이것을 믿으면 천국열쇠를, 구원을 주겠다는 바로 그 약속이 보배롭고 큰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로마서 1장 1-2절을 보면, 바울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는데,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의 약속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행적을,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베드로전후서를 통해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앎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어떤 사람은 구제로, 어떤 사람은 섬김으로, 어떤 사람은 말씀 가르침으로, 어떤 사람은 봉사로, 어떤 사람은 물질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었고, 이것이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로 보면 누군가는 식당 봉사로, 누군가는 주차로,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위해주는 중보기도로, 누구는 다른 사람을 돌봐주고 챙겨주는 것으로, 누군가는 말씀으로 이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야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 4절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우리에게 신적 능력, 하나님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즉, 정욕과 탐심,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운명을 피하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그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는 대목을 헬라어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의 본성이 신적 동료, 참여자가 되는 것, 즉,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동화되어 그분의 동료가 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가 될 자격이 없음에도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동료, 참여자를 헬라어로 ‘코이노노이’ 라고 합니다. 이 ‘코이노노이’라는 단어가 쓰여진 다른 2개의 구절을 통해 신적 동료, 참여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보고자 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0장 18절을 보겠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고린도전서 10장은 성찬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것으로 비유를 들면서 같은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성찬식에 같이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 교회의 일원으로써 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이웃을 섬기는 일이 신적 동료,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히브리서 10장 3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이 때에도 로마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콜로세움이나 원형 경기장 등에서 그리스도인들과 맹수를 싸우게 하는 그러한 박해도 있었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박해 당하고 죽는 것이 엔터테인먼트가 되는 시대였죠. 이러한 고난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에서 사귀는 이라는 대목이 바로 ‘코이노노이’입니다. 즉,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에 참여하고 이로 인해 고난을 받게 되는 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우리의 복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이로 인해 박해와 고난을 달게 받겠다는 삶을 살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1장 5-7절에 나와 있죠.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신적 권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권능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때,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라 불러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2-14절을 보면 이것을 더 알 수 있습니다.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랑을 행하면 주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후서 1장 7절의 마지막이 사랑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를 행할 때에 주님이 우리를 나의 친구라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날에도 베드로전후서 시대와 같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모욕을 받고, 그딴 걸 왜 믿냐고 조롱을 받고, 교회 말씀대로 살지도 못하는 위선자 집단이라는 오해를 받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동성애를 비롯한 여러 세상의 사상들과 이단들이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앎과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에 이르게 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 능력으로 주님은 우리를 예배 공동체와 고난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 사랑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후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십자가에 참여하는 자로 불러주실 것이며, 마지막 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주님과 같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예수님의 친구로 불림받게 되는 화도광성교회의 모든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