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과 믿음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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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 권능 혹은 이적은 우리 믿음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믿음이 있으면 이적이 일어나고, 믿음이 없으면 이적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한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치유하셨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먼저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를 보면, 그녀에게는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믿음으로 치유받은 여인을 보내시며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분명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야이로의 경우는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혈루증 여인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실 때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때 야이로의 마음을 붙잡았던 것은 더 이상은 어찌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딸을 잃은 것에 대한 절망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야이로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모시고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여인에게는 믿음이 있었고, 야이로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똑같이 일어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몇 몇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신 것 외에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믿음이 있어서 치유를 받았고, 회당장의 경우엔 믿음이 없었어도 죽은 자를 살려내는 엄청난 기적을 일으킨 반면, 고향에서는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보니 일관성 없이 뒤죽박죽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기적과 믿음의 관계가 원래 그렇습니다. 두서가 없어보이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영원한 구원의 경륜에 따라 주권적 의지로 모든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요,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초점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혈루증 여인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병에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야이로에게는 없었습니다. 딸을 잃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은 즉각 그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하도록 하십니다. “두려워하지말고 믿기만 하라” 세상의 절망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일하십니다. 기적은 믿음을 통해 일어나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일어나기도 하며,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능력과 믿음은 분명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믿음을 사용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개념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알고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해설
본문 해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음 없이 예수님을 배척한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거기서 권능을 행하시지 않고, 소수의 병자만 고치셨습니다. 이는 앞서 나타난 야이로나 혈루증 여인의 믿음과는 대조적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케 하시며 그분께서 자연 만물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거라사 광인을 붙잡고 있던 군대 귀신을 쫓아내시며 모든 악한 권세를 제어하는 가장 높으신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혈루증 여인 치유를 통해 질병을 치유하시는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을 통해 사망을 이기시는 충만한 생명이 그 안에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고향에서 예수님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배척당합니다.
막6: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거기를 떠나셨다는 말씀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곳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나사렛에서 자라셨으며,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해오셨듯이 “회당"에서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은 마을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떤 랍비의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권위로 위대한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순사가 벌교장에서 아낙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안규홍 의병장이 일본 순사를 한 주먹을 때려눕힌 사건에서 이 말이 시작되었다고 하죠. 이 말과 비슷하게 ‘유대 땅에서는 박식함, 서기관, 랍비를 자랑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어떤 민족도 유대 민족보다 더 많은 선지자와 박식한 서기관, 랍비, 학자를 자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선생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웠고, 경쟁이 심한 곳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떤 선생과도 같지 않은 가르침과 권위로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고향 사람들에게 이것은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유명한 랍비에게 지도를 받으신 적도 없고, 그의 지혜는 설명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매우 놀랐는데, 부정적으로 놀랍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무리들의 놀라움은 거의 “긍정적 반응"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예외입니다. 2절과 3절입니다.
막6:2-3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먼저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건드리라는 학자는 2-3절에 나타난 그들의 무시하는 어조를 활용해 이 부분을 이렇게 다시 표현합니다. “이 녀석이 어디에서 이런 것들을 습득했을까? 이 녀석에게 주어진 지혜는 무엇이며, 그 손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녀석은 목수다. 그리고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결정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 합니다. 여기에서 쓰인 ‘아칸달리조'라는 헬라어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혐오하고 질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우 놀랐지만, 믿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고 혐오하고 질색합니다. 그 이유를 3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그들은 예수님의 집안에 대해 말하면서 대단하지 않은 출신의 평범한 범인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이 사실은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는 말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목수'를 뜻하는 단어인 ‘테크톤'은 문자적으로 보통 나무로 공예 등을 만들거나 생산하는 사람을 뜻하지만, 때로 돌로 만드는 사람 즉 ‘석수'를 뜻하기도 합니다(삼하5:11, 70인역). 팔레스타인에 나무가 귀하고 돌이 많은 것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이 목공품 뿐 아니라 석공품을 취급했다고 해도 놀라울 것이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육체노동에 대한 비하는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목수'로 부르는 것은 모욕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가가 이 글을 썼을 때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속한 이방인의 세계에서 예수님을 “목수"로 지칭하는 것은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고, 폄하하려는 말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더 미심쩍은 것은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유대교는 우리나라처럼 부친의 이름을 따르는 문화가 있습니다. 남자 아이의 이름에 아버지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고, 아버지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을 때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간직되었습니다. 3절에서 요셉의 이름이 빠진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요셉이 이미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마리아의 아들로 불린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아들의 성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유대 사회에서도 그랬습니다. “쟤가 그 정씨네 아들이잖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설령 요셉이 죽은 다음에 이 일이 일어났더라도, “요셉의 아들"로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이죠. 한 사람을 여자의 아들로 부르는 것은 유대교에서 평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멸과 모욕이 담긴 표현이었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신앙의 ‘고정관념'
1.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신앙의 ‘고정관념'
이 부분을 통해 우리는 믿지 못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고정관념' 을 통한 ‘선입견'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고정관념'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출신, 성장과정, 가족사 등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분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다는 선입견이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영역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선입견으로 작용해 그분의 능력을 제한할 때가 있습니다. ‘신자마다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크기가 모두 다르다'는 말을 혹시 들어보셨나요?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무한하신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능력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에 대해 신자가 얼만큼 경험했느냐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생소한 분야에 있어서 하나님은 여전히 미지의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입으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실제로는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현상보다 더 확실하게 믿는) 믿음을 통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폭넓게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더 큰 믿음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다르고, 그분을 얼마나 친밀하게 만나고 경험했는지도 각각 다릅니다. 이것이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크기에 대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 하나님의 영광은 변하지 않지만, 신자의 삶에서 그 영광은 가변적이다.
내가 하나님을 경험한 만큼 고정관념이 생기고, 이는 앞으로 어떤 사건을 겪게 될 때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선입견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방법을 통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우리 기도는 때로 ‘답정너'가 되기도 합니다. ‘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만 하면되' - 내가 듣고 싶은 응답을 미리 결정해 놓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셔야 하고, 그렇게 응답하지 않으시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할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고쳐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결국 소천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시지 않았으니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라고 여기는 것이죠. 나중에 비슷한 기도의 제목이 생겼을 때, ‘내가 전에 기도해 봤는데 하나님은 그 기도 들어주시지 않았어. 기도하는게 의미가 있을까?’ 이런 선입견이 생겨버리는 것이죠. 물론, 극단적인 예시입니다. 또한 신앙이 어느 정도 자리잡은 상태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고정관념으로 하나님의 크기를 얼마든지 제한해 버릴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늘의 별, 태양과 온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능력에는 결코 한계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고정관념이 그 하나님의 능력을 함부로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믿고 믿지 않고 관계없이 주권적으로 일하십니다. 하지만 때로 예수님의 능력과 믿음은 상호 긴밀한 관계에 놓여있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주권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데, 믿음을 통해 그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믿음보다 내 경험이 앞서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늘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한계가 없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평범함-예수님 믿기를 꺼리는 마음
2. 평범함-예수님 믿기를 꺼리는 마음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함이 그분 믿기를 꺼리는 마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에도 그분을 온전히 믿지 못한 채 고정관념을 통한 선입견으로 배척하며 밀어내자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 세 곳 자기 고향, 자기 친척, 자기 집을 제외한 곳에서 선지자는 늘 존경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권능 행하시는 것을 중단합니다. 다만, 소수의 병자를 안수하여 고치셨을 뿐입니다. 5절입니다.
막6: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권능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미 우리는 자연과 귀신과 병과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놀라우신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전도하시고, 고치시는 사역을 통해서 그분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선포하고 나타내셨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셨죠. 하지만, 예수님을 불신하고, 배척한 나사렛에서는 이런 구원의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는 그들의 믿음 없음과 예수님께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은 것을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지속적으로 믿음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막6: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놀라움, 크게 놀람, 두려움, 이상히 여김등은 항상 예수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일하게 예수님이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라고 말씀합니다. ‘믿지 않음'(아피스티아)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나사렛 사람들의 마음을 묘사합니다. 예수님을 놀라게 한 인간의 모습은 그들의 죄많음이나 악한 성향이 아니라 마음의 완악함과 믿기를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지 목수로, 마리아의 아들로, 장성하여 고향을 찾은 동네 청년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갖는 이미지가 너무 평범해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저 목수로, 마리아의 아들로 낮추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예수님 탄생 700년 전에 메시야의 평범함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이,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의 탄생을 보십시오. 평범하다 못해 비천하기까지 합니다. 인류의 구원자께서는 마굿간의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서른살이 되기까지 대도시가 아니라, 나사렛이라는 무명의 촌동네에서 사셨습니다. 그분은 목공과 석공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 평범함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믿음보다 꺼리는 마음이 훨씬 더 앞섰습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보게 되는 예수님의 자기 비하를 생각해 볼까요? “그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분은 평범하셨고, 낮아지셨으며,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신원인도 많은 부분에 있어 구원자의 평범함에 기인합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던 2천년전의 한 목수가 어떻게 나를 구원한단 말인가? 라고 조소하며 조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사,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높여 지극히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아멘.
내가 가진 마음의 완악함, 예수님을 향하여 꺼리는 마음. 이것이 ‘믿지 않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수님을 믿기는 믿지만, 여전히 그분에 대하여 거리끼는 한 부분이 있어, 그것이 순도 높은 믿음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어떠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능력과 믿음의 상관관계
3. 능력과 믿음의 상관관계
예수님은 기적이 믿음을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셨고, 그래서 믿지 않고 꺼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배척한 그들에게 권능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이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능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공식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주권적으로 모든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정된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개개인에게 맞는 최선의 방식으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능력과 믿음은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앞서 본 것처럼, 혈루증 여인은 믿음이 있어서 치유를 받았고, 회당장 야이로의 경우는 믿음이 없었어도 딸을 살려내셨습니다. 고향에서는 믿지 않음을 보시고 권능을 행하시지 않으셨죠. 우리 주님께서는 주권적으로 그분의 영원한 경륜에 따라 일하십니다. 다만, 믿음은 주님의 권능을 보게 되는 중요한 통로로서 작용합니다.
내가 가진 고정관념과 선입견, 꺼리는 마음과 완악함을 내려놓고,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 앞에 나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경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하여 우리 주님을 신뢰하는 것.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전지하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주님께서 전능하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능치 못함이 없으신 분임을 신뢰하십니까? 우리의 모든 괴로움을 기쁨으로 바꾸시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신 줄 믿으십니까? 이 고백이 있는 자에게 우리 주님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찬양으로 함께 이러한 고백으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믿음으로 주의 권능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며 기도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