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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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지도자들의 모의
종교지도자들의 모의
25장의 열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를 끝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끝이나고, 오늘 이어지는 26:1절의 말씀은 급격한 전환을 암시합니다.
마26: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라는 말은 가르치시는 사역이 모두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미 세번이나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던 것처럼,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십니다. 2절입니다.
마26: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바꾸어 말하면, “그 동안 내가 예고했던 바와 같이"입니다. 이제 그 때가 도래했고,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인데 그때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한편, “그때에"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서는 종교지도자들이 모여 은밀하게 모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전임 안나스 대제사장의 사위였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죽음에 빠뜨리려고 모의합니다. 그동안 여러번에 걸쳐 이런 음모를 꾸며왔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논의 결론은 민란을 우려해 명절에는 죽이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백성들은 예수님에 관해 큰 관심이 없었지만, 갈릴리에서부터 온 자들과 순례객들이 예수님을 추종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성안의 분위기를 뒤흔들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부를 건 여인의 헌신
전부를 건 여인의 헌신
종교지도자들의 음모 다음에 곧바로 14절의 유다의 배신이야기가 등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매끄럽지만, 마태는 중간에 아주 중요한 사건 하나를 끼워 소개합니다. 예루살렘에서 4km 정도 떨어진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한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시몬은 과거에 나병을 앓았던 환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아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순례객들로 예루살렘에는 숙박을 할 곳이 없었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을 왕래하며 명절 기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남녀 간의 공간 구별이 엄격했는데, 남자들만 식사하는 자리에 여성이 들어온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전통적으로 일탈 행위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행위는 더욱 충격적이었죠.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분노합니다. 무슨 의도로 그 귀한 향유를 허비하느냐고 꾸짖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향유가 아무런 유익없이 그저 바닥으로 쏟아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죠. 쏟아지는 값비싼 향유에는 주목하면서 향유가 타고 흘러내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그 정도 가치라면 가난한 자들을 충분히 도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명절이 되면 누구나 평소 잊고 지냈던 자선을 합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수차례에 걸쳐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행동이 정말 낭비라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른셈이죠. 하지만, 이것은 낭비가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여인에게 의도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여인을 추궁해 괴롭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그녀는 무척 가치있고 유익한 일을 하고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가치 있는 향유로,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은 언제든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그들 곁에 존재하기 때문이죠(신15:11). 이말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은 아무 때고 할 수 있으니 미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은 매우 가치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더 시급하고 더 가치있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있을 시간이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영광스러운 부활 이후 성령을 통해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겠지만, 육체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인이 지금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고 매우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좋은 일'이란 무엇일까요? 그녀가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을 알았을까요? 더욱이 장례를 위한 일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죽은 시신에 향품을 바르는 일인데, 지금 그녀는 살아 있는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고 있습니다.
바로 앞 2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틀 후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고 믿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언제까지나 자신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만은 그 사실을 현실로 공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에게 좋은 그 일은 자신의 전부와도 같은 향유를 그 몸에 부어 그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부터 흘러내려 온 몸을 적신 이 향유 냄새는 지금부터 죽음을 맞는 그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폭력과 피비린내와 사망의 냄새로 진동하는 그 자리를 아름다운 헌신의 향이 물들인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흉계와 유다의 배신 사이에 아름다운 한 여인의 헌신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과 유다가 죽음을 준비하는 것과, 이 여인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의 의미는 천양지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큰 의미를 잊지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어디서든지 이 여인이 행한 ‘좋은 일'을 꼭 말하고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전부를 건 유다의 배신
전부를 건 유다의 배신
14절의 “그 때에"라는 말은 3절의 “그 때에”라는 말과 평행을 이룹니다.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지만 방법과 시기가 막막했던 종교지도자들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예수님의 제자중 하나인 내부자 유다가 그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유다는 스승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고 말하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15절에서 말씀하는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라는 유다의 말은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앞선 2절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넘겨지리라"고 말씀하셨고, 이 일을 행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주체가 유다로 밝혀집니다. 물론, 궁극적인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다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유다의 악한 행위를 인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유다의 배신 원인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가 기대한 나라와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는 나라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꿈꾸었던 유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배반한 배신자였던 것이죠. 그래서 유다는 마카비 이후 또다시 무너져 내린 독립의 꿈, 그 깊은 좌절감과 배신감을 안고 대적자들의 심장부로 자진하여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노예 한 명 값에 해당하는 은 삼십(출21:32)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그러고는 다시 무리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노립니다.
향유 여인과 유다는 전부를 걸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자신의 전부를 드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고, 유다는 자신의 전부를 걸어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여인은 돈을 아끼지 않고 매우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드렸고, 유다는 헐값에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여인의 거룩한 낭비는 세세토록 ‘좋은 일’로 남게 되었고, 푼돈에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는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한 이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향유를 부은 여인은, 가장 알맞은 때에 합당한 헌신을 드렸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여인처럼, 나의 모든 것을 드려도 결코 아깝지 않을 예수님께 온 삶을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WEC 선교단체를 설립한 찰스 스터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분께 드리는 어떤 것도 그보다 더 하다고 할 수 없다"
나를 위해 피 한방울 남김없이 쏟아 구원하신 주님의 그 은혜가 사실이라면 내가 드리는 어떤 헌신도 그에 비할바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영원히 빚진 자로서, 온 삶을 드려도 결코 아깝지 않을 주님께 기꺼이 모든 것을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에는 인색하십시오. 다만,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시간과 열정과 헌신은 기꺼이 거룩한 낭비로 드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