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출발점
0 ratings
· 10 viewsNotes
Transcript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출발점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을 뽑으라면 대부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가 참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했는데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내 뜻도 잘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자기 스스로도 모를때가 많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고 한다면 오히려 교만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그럼 예수님의 경우는 어떨까요?
예수님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교제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본론1]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신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위치한 곳입니다.
그곳은 많은 올리브 나무 숲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36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가신 이유는 기도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이야기를 다룬 누가복음 22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늘 하시던대로”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모두 아십니다.
그럼 예수님에게는 기도가 필요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항상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사귐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정기적인 사귐의 기도를 가르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주 제자들을 데리고 올리브 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산에 특별한 정기가 있어서 오르신게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나 밤늦게 기도하셨던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왜 이렇게 둔할까요?
그 이유는 가장 기본적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하더라도 사귐의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시한채 내가 원하는 것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삶의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려한다면, 하나님이 왜 자신의 뜻을 감추실까요?
뭔가 큰 일이 있을때에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매달리니 깨닫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쪽지 시험도 제대로 못풀면서 중간 고사는 잘보기를 바라는 마치 로또를 뽑는 심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보다 더 어려운게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인지 다 알면서도 하기 힘든게 순종입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순종은 나를 꺾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아시지만 기도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계시기에 순종이 어려우신 것입니다.
38절에서는 심지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십자가로 가시는 길이기에 더욱 그러셨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가야할 순종의 길도 역시 나를 부인해야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힘드셨던지 3명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일에는 이처럼 소수의 제자들을 데리고 가십니다.
앞서 변화산에서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실 때에도 이 멤버들이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도 매우 중요한 자리이기에 핵심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38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이 제자들에게 깨어서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하셨습니다.
원래 예수님이 철없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신 것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고뇌가 굉장히 힘드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함께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을 떼어놓으신 이유는 자신의 고통을 보며 제자들이 동요할까봐 걱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힘드셨는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께 기도할 힘을 북돋아드렸다고 말합니다.
또한 기도하시며 흘리신 예수님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겟세마네 동산 이름 의미가 ‘기름짜는 동산’입니다.
이 이름이 의미심장합니다.
큰 돌을 올리브 위에 올려 기름을 짜듯 예수님 위에 올려진 엄청난 고통의 무게가 예수님의 땀과 피를 짜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도 마음에 무거운 돌하나 얹혀놓은것 같으면 움직이지 않아도 땀이 나는 경험을 합니다.
예수님 역시 백퍼센트 사람이셨기에 기도가운데 마음이 굉장히 고통스러우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이렇게 괴로워하시는 것일까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두려워서 일까요?
아니면 고문당하고 수치를 당하는게 두려워서 일까요?
39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하실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고통의 원인은 바로 ‘이 잔’때문입니다.
‘이 잔’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은 이 잔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두 아들의 높은 자리를 예수님께 청탁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마실 잔을 너희들도 마실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잔’이란 고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역시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고난과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큰 두려움의 원인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가장 두렵게 만든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닌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사람들의 죄를 예수님이 다 뒤집어쓰시고, 죄로 인해 하나님과 등을 져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인해 예수님은 하나님과 끊어지는 경험을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근본적인 두려움과 고통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을 슬픔때문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만큼 큰 슬픔과 고통이 어디 있을까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만큼 큰 슬픔과 고통이 어디 있을까요?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슬픔과 고통은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첫번째 기도에서 하실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 한문장을 접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예수님은 이러한 내용으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이 덮어쓰는게 하나님의 뜻인줄 아시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시기에 너무나 피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으신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을 조금만 쓰셔도 하나님의 저주가 쏟아질 십자가 만큼은 피할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마지막 시험이자 유혹인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타협하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이 방법말고 다른 방법이면 안될까요?
다른 방법도 죄는 아니잖아요?
우리의 얍샵한 마음은 어떻게든 도망칠 구실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는게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조차도 그렇게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망은 숨겨놓은채 듣기좋은 말만 늘여놓는게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가장 솔직한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거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39절 후반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시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나온 구절과도 같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내 욕망과 타협하려 합니다.
기도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하며 기도만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순종이 단 한번의 기도로 이뤄진게 아니라는 사실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조차도 세번이나 같은 기도를 하십니다.
그런데 두번째 기도는 첫번째 기도와는 조금 다릅니다.
42절입니다.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하실수만 있다면’이란 말이 없습니다.
첫번째 기도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쪽에 기도의 추가 좀 더 기울어져 있었다면, 두번째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추가 기울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계속된 기도를 통해 더 확고해지신 것입니다.
세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어땠을까요?
44절에 보면 ‘같은 말씀으로 세번째로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만약 두번째와 동일한 기도셨다면 기록할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의 ‘같은 말씀’이란 ‘같은 주제로’라고 보는게 더 적절할 것입니다.
분명 세번째 기도는 두번째 기도보다 더 진전된 기도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게 제자들에게 보이신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졸고있는 제자들을 더이상 꾸중하지 않으시고, 뭔가 온화한 태도를 보이십니다.
어떻습니까?
(인자한 미소로) ‘이제 남은 시간은 자고 쉬어라’일까요?
(화난 표정으로) ‘이제 남은 시간은 자고 쉬어라’일까요?
저는 이제 예수님의 마음이 완전히 확고해지셨기에 인자한 미소로 제자들의 연약함을 품어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은 예수님의 이러한 기도에 하나님 아버지의 응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이처럼 고통스러워하며 기도하시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어디 계신 것일까요?
세번의 기도 모두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아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침묵은 외면이 아니고 무시도 아니고 분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슬픔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도와주고 싶지만 도와줄 수 없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가운데 있을 때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분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다 알수 없습니다.
[본론2]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세번의 기도를 보면서 다루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세번씩 기도하실 때 세명의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뒷편에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돌 던져서 닿을 만한 거리에 제자들이 있었다고 좀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들은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렇게 복음서에 예수님의 기도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기도를 잘 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번이나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세번이나 졸았습니다.
40절입니다.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분명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워낙 예수님의 사역이 빡세다보니 제자들 육체가 졸음을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43절에 보면 두번째 예수님의 기도후에도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반부 설명을 보면 제자들이 너무 졸려서 눈을 뜰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어찌보면 이런 제자들의 졸음에는 예수님 탓이 큽니다.
저도 예전에 사역이 얼마나 빡셌던지 사람과 대화하면서도 졸았던 적이 많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내가 무슨말을 하는지 모르면 뇌가 자고 있는 것입니다.
졸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압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이 순간만큼은 졸면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몇시간 후면 예수님이 붙잡혀 가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졸려도 이때만큼은 깨어서 기도했어야 합니다.
그럼 이들이 기도하지 않고 졸았던 결과가 무엇일까요?
47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와 함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시는 것을 신호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제자들의 태도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세번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는 평안과 담대함이 묻어 있습니다.
유다가 입을 맞추자 50절에서 예수님은 ‘친구여, 무엇 하러 여기에 왔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구절은 번역이 따가로워서 영어성경을 보면 한글성경과 다르게 해석합니다.
‘너가 여기온 목적대로 행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고 담대하게 반응하신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은 무력으로 무리들을 대합니다.
칼로 대제사장의 종 귀를 잘라버립니다.
요한복음은 칼을 쓴 자가 베드로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지키는 길이 자신들이 해야할 일로 여겼습니다.
무력을 써서라도 스승님을 지키는 게 맞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칼을 도로 집어넣으라고 하시며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과 폭력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힘과 폭력은 세상제국의 문화이지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사랑과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 수없이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셨습니다.
53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무력을 사용하려했다면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시켜 이 사람들을 싹 쓸어버렸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사들을 부릴 권세를 가지셨지만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수 없으며 그것이 십자가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성경의 예언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가신 것은 그들의 무력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이런 제자들의 반응이 나타난 것일까요?
그들이 기도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올바로 기도하지 않으면 자기 방법, 세상 방법을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56절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토록 몸서리치며 기도하고 두려워하시던 예수님은 실제 그 상황이 닥치자 가장 담대하셨고, 평안하셨습니다.
반면,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 목숨을 바치겠다고 자신감 충만하던 제자들은 실제 상황이 벌어지자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여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은 치열하게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하고 졸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의 무게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시험에 빠져 넘어진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졸지말고 깨어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하십니다.
우리가 늘 습관처럼 올라가야할 겟세마네 동산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시간과 장소를 구별합시다.
그것이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출발점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도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험과 유혹이 넘치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방법, 내 방법 쓰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처럼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