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당신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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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Handout
고백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헌금 :
먼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주옵소서. 또한 우리의 가장 값진 물질을 봉헌합니다. 주님 받으시고 기쁘게 흠향하여 주옵소서. 이 드림이 우리의 예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 : 너무 멀리 왔나요, 마음이 상한 자
본문 : 창3:1-20 (9-12)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우리는 믿는대로 행동합니다.
백조새끼가 아무리 주변에서 ‘너 백조야’라고 말을 해줘도,
‘나는 오리야.’라고 하면은 오리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을 바꾸기 전에
‘내가 누구인가’ 하는 믿음을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중요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믿는 사람은,
서투르지만,
날개를 펴고,
백조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오늘 말씀은,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 믿음’을 잃어버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방에 있으면 거실에 누가 있는지 들립니다.
8절에 보면,
아담은,
집에 들어와서,
거실에 계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8절을 보세요.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요.
못 들은 척 합니다.
숨어 버립니다.
마치, 사춘기 10대가,
부모님이 집에 들어오신 소리를 듣고도
나가보지 않고,
방문을 꼭 잠그고 있듯이,
지금 아담은,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도,
하나님을 만나러 가지 않고,
숲속에 숨어버린 것이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숨어버린 것이죠.
여러분, 이것을 수치심이라고 합니다.
수치심은 잘못된 행동이 발각되거나 부끄러운 모습이 타인에게 드러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내 잘못이 드러나면 어떡하지?’
‘내 행동이 발각되면 어떡하지?’
이게 수치심입니다.
*오늘 본문은,
타락 이후, 하나님을 피해 숨는 아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좋은 것을 주셨는데,
그들이 뱀의 유혹에 속아,
타락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을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그 위치’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미 8절에서 아담은,
하나님이 거실에 들어오신 소리,
에덴 동산에 들어오신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었습니다.
그러니, 이 질문은,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이지만,
“너 왜 나 안 찾아오냐?”
“너 왜 나 안 만나냐?”
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노크 소리인 것이죠.
‘얘야, 방문 열어라.”
‘얘야,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분명, 아담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작품인데,
하나님이 부담 스럽고,
하나님이 피하고 싶은 존재가 된 것이죠.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어떤 책을 보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한국인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국적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남자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성별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대학 교수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직업입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은, 자신이 속한 소속입니다.
나는 한국에 소속되어 있고,
나는 남성에 속하고,
나는 교수라는 직업군에 속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정말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10대를 넘어 20대를 지나, 30대까지 살아온 여기 있는 모든 청년들이여,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온 모든 분들이여)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이후로, 이 질문에 답변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사는 것인가?
그저 우연히 태어나 사는 것인가?
영혼도 없이,
육체만 있는 내가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죽으면 안 되는 것인가?
여러분 세상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물질에서 태어나서
물질로 돌아가는 존재이지,
영혼 자체는 허구이자 허상입니다.
정재승,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는 당연히 영혼은 허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영혼은 물질에서 진화한 정신적 개념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세상이 말하는 논리입니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영혼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종교도 허구이고,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이니,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종교 활동은 모두 허사이고,
믿을 건 없으니,
자기만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삽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합니다.
그게 우리가 내리는 정의입니다.
사람들이 돈을 위해서 사니까
열심히 돈 벌기 위해서 삽니다.
돈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전부라고 생각하니까,
돈이 없는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쾌락을 위해서 사니까
열심히 쾌락을 추구하며 삽니다.
쾌락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쾌락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쾌락이 전부라고 생각하니까,
인생이 건강하지 못하고,
쉽게 무기력해지고,
쉽게 인생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달콤한 게 나쁜 건 아닌데,
설탕에 중독되면,
사람이 쉽게 무기력해지고 나약해지는 것입니다.
모두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생긴 영적 질병들이죠.
우리는 사는 이유를 상실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살고,
사람들이 말하는대로 삽니다.
우리는 허무감을 느낍니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사는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관계중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해가 되는 관계인데도,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말이 있죠.
자기에게 해로운 관계인데도 그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게 관계 중독입니다.
왜 그럴까요?
허무해서 그런 것입니다.
저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면, 살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렇죠.
헤어지고 나면 살 이유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별일 없어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나를 거부하고 거절했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관계중독자들은, 이게 너무 힘이 든 것입니다.
누가 자기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면,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사람에게 매달리거나 집착하게 되는 것이죠.
이게 영적 질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걸 잃어버리니까,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고,
나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마음이 힘들고 고통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누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 고통에도 직면해야 해요.
누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고통도 통과해야 하고,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고통도 버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는
두려움과 염려,
수치심과 죄책감,
우울과 분노의 감정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제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내 인생이 불확실하고, 불안전하다라는 생각이 가득하니까,
늘상 두려움과 염려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방패이시다.
나의 보험이다.
나의 보호자다.
이런 믿음이 없으니까, 늘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니까,
늘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에 대답을 못하는 이유는,
늘상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지 않고,
늘 가면을 쓰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분노와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리면서,
늘 가짜로만 살아왔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행복감이 없고,
늘 고통스럽고,
외롭고, 소외감이 드는 것이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만나지만,
진짜 자기는 개방하지 않으니까, 진정한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죠.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분노하거나 실패감과 우울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과 업적을 믿으니까,
분노하고 우울하고 실패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늘 자기 자신에게 과도한 기준을 세우고,
실패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늘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는 인생을 사는 것이죠.
그러니,
남들보다 열심히 살고,
힘들게 살아도,
성취감이나 기쁨보다는,
화가 나고, 실패감과 우울감에 시달리는 것이죠.
“완벽주의는 우울 증상, 우울 증상의 합병증 또는 둘 다에 대한 취약 요소인가? 라는 제목의 최근 연구를 보면,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거나 실수에 대해 과잉 반응하는 완벽주의적 자기 관심은 우울한 증상이 스며들어 점령할 기회를 만든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한테 관심이 많은데,
완벽을 이루기 위한 자기 관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무엇입니까?
아담처럼,
하나님이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도,
하나님을 찾아가 만나려 하지 않고,
자기를 숨기고,
가면을 쓰려하는,
타락의 증상인 것이죠.
*그런데 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해 내린 특단의 방법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부터 12절까지 합독하겠습니다.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러자 아담이 대답합니다.
“제가 숨었습니다. 저 찾지 마십시오. 이제 당신이 두렵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누구냐? 누가 너의 벗었음을 알게 하였느냐? 그것은 내가 먹지 말라고 했던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 아니냐?”
이게 성경이 말하는 진단법입니다.
하나님을 피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수치심과 죄책감,
두려움에 시달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변명합니다.
12절을 보면, ‘나탄’이라는 동사가 2번 등장합니다.
12절을 합독하겠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나탄’이라는 동사가 두 번 등장하는데,
하나님이 주셨다.
여기서 1번,
그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었다.”
여기서 2번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 여자가 준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 열매를 먹었다는 것이죠.
변명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지 않고,
‘나탄’이라는 동사를 2번 반복하면서,
하나님 때문이고,
그 여자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다른 사람 때문도 아닙니다.
성경의 진단이 무엇입니까?
아담이 두려움과 수치심,
죄책감과,
가면 쓴 인생이 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통의 원인을 어디에 두십니까?
하나님 때문입니까
다른 사람 때문입니까
우리는 우리자신을 탓하는 게 싫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우리 자신이 훼손되는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비판하는 게 싫은 것이죠.
누군가가 나를 거절하는 게 싫어서
우리는 가면을 쓰고,
우리는 자신을 숨기며,
연기자처럼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은 이미 아담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죄를 숨기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나아오라고 했습니다.
죄 있는 그대로 나아오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용서하실 마음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아담은 당돌하게도 자기 자신을 변호합니다.
변명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 때문에 내가 먹은 것입니다.
라고 변명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가면을 씁니다.
있는 그대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속이려고 합니다.
정말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 때문입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탓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면서
나의 죄를 숨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죄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용납하심과 용서하심을 경험하고,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가 가득하고, 실수가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내가 너와 다시 만나고 싶구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의 실패와,
연약함,
죄악까지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이죠.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죄인이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만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전히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완벽하게 치유하시고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자유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자유함을 누릴 때,
죄는 더 이상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함께 찬양합시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오늘도 우리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들고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받은 상처,
말씀을 듣고 보니,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내 죄악된 습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서 초라해지고, 우울해지는 것.
말씀을 듣고 보니,
하나님보다 세상의 평판이나 물질을 더 중시했던 내 죄악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런 모습 그대로 나아오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오늘도 우리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여 주옵소서.
*함께 기도합시다.
들은 말씀을 가지고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도록. 죄된 우리이지만, 여전히 우리를 부르시고 만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교회를 위해서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순장들과 리더들을 위해. 하나님 은혜 주시고 인도해주시도록. 섬김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만배의 은혜를 더하여 달라고.
고난주간특새를 위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성령의 열매라는 주제로 진행될 때에, 성령의 열매를 더욱 사모하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내 안에 성령이 열매가 맺어지게 해달라고.
관찰
9 하나님이 부르셨다, 아담을 향하여, 그리고 말하셨다, 그에게. “너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부르셨고
하나님이 말하셨다.
아담은 침묵하고, 숨었다.
아담은 죄를 짓고 스스로 떨어져 나갔다.
이것이 타락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신다.
10 이르되, 당신의 소리를, 내가 들었다, 동산에서, 그리고 내가 두려웠다, 내가 에롬(벗은)하였기에, 그리고 내가 숨었다.
당신의 소리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최초의 대화이다.
2장에서 하나님과 대화가 없다.
그런데 3장에서의 대화는 타락 이후의 대화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알려주었느냐?, 너에게, 너의 에롬(벗은)을, 내가 네게 명령한 그 나무, 그로부터 먹지 말라고 한, 네가 먹었느냐?(먹었다!)
공동번역에서는 “네가 따먹었다!” 라고 번역하였다.
나머지 새번역, 개역개정은 “네가 먹었느냐?” 라고 의문문으로 번역했다.
아담은 새로운 지식이 생겼다.
사단의 말이 맞다.
그러나 그 지식은 ‘아담’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였다.
자신의 벗었음을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은 명령하셨다.
그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그러나 아담은 먹었냐.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
명령은 절대적이다.
안 먹어도 그만, 먹어도 그만이 아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람은 그것보다 ‘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12 아담이 이르되, 그 여자, 당신이 내게 준(나탄), 나와 함께 있는, 그 여자가 나에게 주었다(나탄). 그 나무를, 그래서 내가 먹었다.
‘나탄’의 반복
하나님이 내게 주셨고,
그 여자가 내게 주었다.
자신은 잘못이 없고, 하나님 잘못이고, 그 여자가 잘못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맨 뒤에 두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먹었다.”
핑계 대는 습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존감이 낮아서
자기 능력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 때문에
무시 당할까봐
연구
아담은 하나님과 처음으로 대화하는 인간이지만, 그가 그렇게 할 때 범죄에 대해 하와를 비난하고 모든 상황이 당신이 내게 주신 여자 때문에 발생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잘못임을 암시합니다 (12 절). 여자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고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13절).
하나님이 아담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부르는 것은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아담은 "어디 있느냐?"를 자신의 위치에 대한 질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숨어 있는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 왜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니?”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Where are you?
너 어디 있니? 왜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니?
8절에서처럼 "동산에서 주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는 "동산에서 주님이 걸어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8절에서 아담은 ‘하나님이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지만, 하나님을 만나러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한번 거절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찾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7절에 따르면 10절의 아담은 더 이상 완전히 벌거벗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이미 ‘무화가나무 잎으로 치마’를 삼아 입었다.
그러므로 벌거벗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벗음’은 다른 의미에서의 ‘벗음’이다.
남자는 자신의 벌거벗음을 고백했지만 자신의 불순종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벌거 벗음’에 대해서만 말하고, 자신의 ‘불순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의 시작이다.
그러나 남자는 ‘죄책감’과 ‘수치심’ 등으로 자기 죄를 은폐한다.
우리 모두는 아담의 반항적인 본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죄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죄의 비극과 그로 인한 영적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리치러 오신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죽음(하나님께 응답할 수 없는 완전한 무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바르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남자는 고백에서 직접적으로 여자를 비난하고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죄는 단 한 번의 불순종에서 비롯되어 전 인류를 오염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 치명적인 죄의 바이러스를 처리하고 우리를 영적인 생명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첫 아담이 죽음의 원인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남자는 “반항적”이다.
여자는 “탓”을 합니다.
인류의 타락은 나머지 피조물과의 관계도 망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과 자연계의 쉽고 부드러운 파트너십은 사라졌습니다. 이제부터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 땅에서 생계를 긁어모아야 하며, 죽어서 스스로 땅의 일부가 될 때까지 땅을 긁어모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남자에게 말씀하신 다음 여자와 뱀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행위 참여자 (뱀, 여자, 남자)의 순서를 뒤집고 인간 부부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주요 관심을 나타냅니다. 남자가 하와를 가리키고 나서야 하나님이 그녀에게 말씀하시는데, 에덴 이야기에서 하와와 하나님이 대화하는 것은 이 장면이 처음입니다.
여성도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한 존재이다.
9-11절은 2인칭 단수 "당신"을 강조하며 아담의 개인적 책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며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사실 그의 두려움은 동산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으며, 그는 벌거벗은 채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대 근동과 성경에서 공개적인 벌거벗음은 끔찍한 수치였습니다.
인간의 불순종 이전에는 수치심이 없었지만(2:25), 죄로 인해 인간의 자의식은 변했습니다. 그의 수치심은 하나님 앞뿐만 아니라 여자 앞에서도 은폐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 아담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따라 ‘선악을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아담은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웠다.
‘하나님의 뜻’은 아담이 자기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뜻’은 최대한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었다. 숨는 것이었다.
NIV의 "두다"는 문자 그대로 "주다"를 번역한 것으로, 다음 절인 "그녀가 내게 주었다"에서 반복됩니다. 이로써 아담은 주님이 여자를 자신에게 "주셨고" 그 여자가 그에게 열매를 "주었다"고 주장합니다.
생명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영원히 살리라(3:22). 생명나무(창 2:9에 대한 주석 참조)는 한 번 먹으면 영원히 영생하는 마법의 열매를 생산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이 열매를 먹어 왔으며, 이제 동산에서 쫓겨남으로써 노화와 죽음이 인간의 조건으로 들어오는 것을 상징하는 이 열매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형벌과 추방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생명이 있었으나 이제는 죽음이 있고, 쾌락이 있었으나 이제는 고통이 있고, 풍요로움이 있었으나 이제는 수고로 인한 빈약한 생계가 있고, 완전한 교제가 있었으나 이제는 소외와 갈등이 있습니다.
3장의 모티브인 죽음, 수고, 땀, 가시나무, 나무, 투쟁, 씨앗은 모두 나중에 그리스도로 이어집니다. 그분은 저주가 되신 또 다른 아담이시며, 쓰라린 고통 속에서 많은 피를 흘리셨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으며, 죽을 때까지 나무에 매달려 계셨고, 죽음의 먼지 속에 놓이셨던 분이십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진지하게 고려해야합니다. 그들은 모든 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원수들 가운데 있고, 사탄에게 속박되어 있으며, 완전한 파멸로가는 높은 길에 있습니다. 이 잃어버린 양은 선한 목자가 그를 찾지 않았다면 끝없이 방황했을 것이며, 그가 길을 잃은 곳에서는 행복하거나 편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죄인들이 자신이 있는 곳을 생각만 한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까지 쉬지 않을 것입니다.
내 위치가 어디인가?
나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가?
이 위치를 생각해야 한다.
1장과 2장에서 창조주이자 은인이 되셨던 하나님이 이제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하십니다(참조, 1:3-4). 그분은 먼저 범죄자들을 심문하여 자백을 받아내신 다음, 새로운 삶의 조건을 선포하시고, 마침내 죄인들을 은혜롭게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신성한 은혜와 용서, 의로움입니다. 죄인들의 책임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요일 1:9 참조). 그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탓했습니다.
본문은 타락이 아담과 이브에게 미친 몇 가지 영향을 기록합니다.
1. 그들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꼈습니다(7절).
2. 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이러한 상태를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7절).
3.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면전에서 도망했습니다(8, 10절).
4. 그들은 개인적인 책임을 고백하기보다는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고 했습니다(12, 13절).
그들은 ‘자신의 죄를 제거’하지는 않고, 가리기만 하였다.
자신의 노력으로 상황을 바꾸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거리”이다.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가?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서 하는 모든 노력은 “허사”다.
선택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이다.
선택된 백성이다.
가난하든 부하든, 어리든 나이가 많든, 인종이 어떠하든,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
거절감, 거절 민감성
주변을 살펴보면 유독 ‘거절’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언가 부탁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낸 뒤 상대방의 답장이 두려워 곧바로 확인하지 못하거나, 선물을 주고 나서 상대방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지 수차례 확인하는 사람들이 있죠.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거절이나 거부를 당하는 상황에 처하면 극도의 불안감을 느낍니다.
이를 ‘거절 민감성(rejection sensitive dysphoria)’이라고 부릅니다. 거절 민감성이 높은 사람은 실제로 거부를 당하거나, 거부를 당했다고 느낄 때, 혹은 비판받았을 때 기분이 가라앉고 자존감이 하락합니다. 이러한 느낌은 마치 감정에 압도당하는 것처럼 매우 강렬합니다.
거절 민감성이 높은 사람들은 작은 자극에도 크게 놀라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부정적인 정서에 매우 높은 생리적 각성 반응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고통을 느끼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즉, 신체적으로 민감하고, 과장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향의 사람은 학교나 직장에서 작은 비판을 받는 것,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 심지어 상대가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만큼 큰 두려움을 느낍니다. 가장 큰 문제는 친밀하고 안정된 관계에 대한 욕구가 지나치게 강한 점입니다. 자신에게 안정감을 줄 것 같은 사람과의 관계에 전전긍긍하고, 그들이 친밀한 표현을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을 은근히 드러냅니다.
두 명의 친구가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A는 그날 직장에서 정신없이 바빴던 탓에 조금 지친 상황이었습니다. B와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평소만큼 즐겁게 추임새를 넣거나 크게 웃지 못했습니다. 단지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B가 거절 민감성이 높은 사람일 경우, A의 추임새가 강할 땐 더욱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반대로 A가 집중하지 못하면 금세 침울해할 가능성이 큽니다.
B와 같은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A에게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닌지’, ‘A가 이제 자신을 싫어하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A의 표정이나 행동을 확인하기 시작하죠. 이런 행동은 금방 티가 나기 때문에 A가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B는 그러한 A의 불편함을 민감하게 포착해 “그럴 줄 알았어,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라며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관계의 악순환을 만들어 냅니다.
① 완벽함에 대한 환상
이는 본인 스스로와 관련된 것으로, 자신은 실수를 하면 안 되고 실수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평생 그 어떤 실수도 하지 않고 완벽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내 실수에 대해 누군가 비판하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를 위협할 만큼 중요한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② 친밀감에 대한 환상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합니다. 상대가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좋아해야 하고, 갈등이 발생할 경우 관계가 틀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연인 관계에서도 일정한 거리와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건강한 관계란, 아무런 갈등이 없는 게 아니라 갈등을 성숙한 태도로 직면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친밀감을 형성하며 발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거절감’ 때문에 수시로 불안함을 느낀다면 상대의 어떤 말과 태도로 인해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지 파악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침묵에 거절감을 느낄 경우, 상대의 침묵이 거절인지 아닌지 알아내려 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달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우선 불안함이 가라앉아야 상대가 단지 생각에 잠긴 것인지, 그저 할 말이 없는 것인지, 진짜 거절하는 것인지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상대의 언행에 대한 의미를 데이터로 쌓아 두는 태도도 지양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저번에도 이런 상황에서 침묵했고, 이번에도 같은 상황에서 침묵했으니 자신을 거절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상대의 반응만으로 판단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불안감을 낮추고, 상대가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아동기 외상과 관계중독 간 고나게에서 내면화된 수치심과 거절민감성의 매개효과
일부 데이트 폭력 피해자들은 폭력적인 관계가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그 관계를유지하려 하거나, 폭행이나 폭언을 당하면서도 가해자를 두둔해가며 관계를 유지하려는특성을 종종 나타내곤 한다. 이러한 관계의뒷면에는 그릇된 의존성이 있는데, 이는 관계중독자들이 나타내는 특성과 매우 유사하다고볼 수 있다.
관계중독(Relationship Addiction)이란 자신에게 해가 되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그 관계를 끝내지 못하고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되는, 말하자면 관계 그 자체나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에게 보이는 중독적 양상을 의미한다(송연주, 2019b; 우상우, 2014). 일반적으로알코올 중독자들은 점점 내성이 생겨 더 많은술을 먹게 되고 술을 끊게 되면 심각한 금단현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관계에 중독된 사람들 역시 의미 있는 대상과의 관계에 비합리적일만큼 의존적이고, 관계에 내성이 생겨온전히 만족하지 못하며, 관계가 끊어지거나일시적으로 소원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해 집착하는 모습을 나타낸다(Whiteman & Petersen, 1998).
관계중독은 관계에 대한 결핍의 경험에서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있거나 학대를 받은 경우 관계중독에 빠질 위험이 높은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특히 아동기 양육자로부터 경험하는 지속적인 거절이나 무시는 아동에게 거절 상황에 대한 방어적인 반응을 일으켜 높은 거절민감성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성인기 대인관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하수홍, 장문선, 2013; Feldman & Downey, 1994). 거절민감성이 높은 이들은 상대에게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거절당하는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게 되고, 이로 인해 상대방의 마음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인받으려하면서 집착적인 행동을 유발하게 된다.
아동기 외상을 경험한 개인은 자신의 존재에대해 결함이 많고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되면서 부적절함, 공허감, 자기비난과 같은 내면화된 수치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손승희, 2017).
내면화된 수치심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외부대상에 의존하여 자신의 불편감을 제거함으로써 수치심으로 인한 내면의 고통을 보상받으려 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만성화된 자신의고통이 관계를 통해 해결된다면 그 관계가 해가 된다 할지라도 몰두하려 하는 것이다(Cook, 2001). 이처럼 수치심으로부터의 느끼는 정서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에집착하고 의존하게 되면서 점차 관계중독으로이어질 수 있다.
수치심이 내면화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하게 되고 이는 상대가 자신을 거절할 것에 대한 민감성을 높이게 된다.
묵상
하나님은 “나의 기쁨”이시다.
나는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는 “하나님께 힘이 되는 존재”이다.
“존재”가 “사람”을 만든다.
행위 이전에 “정체성”이 먼저이다.
*내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
주변 관계에서 무시받거나 소회될 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사회에서 내 역할을 찾지 못할 때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미국 콜로라도주립대학의 심리학자 마이클 스티거(Michael Steger) 등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어디에서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연 재해, 질병, 예술작품, 결혼 등에서 의미를 찾듯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행동이 내가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인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의미감의 핵심은 내 삶이 중요하고 나란 존재가 덧없지 않다는 믿음이다(Steger et al., 2006).
특히 삶이 힘들 때, 큰 실패를 맛보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발등을 찍힐 때, 기존에 내 삶을 의미있게 해준다고 생각했던 중요한 일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우리는 ‘의미의 공백’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허무감이다. 허무감이 찾아올 때 보통 ‘여기에 다 무슨 의미가 있지?’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허무감이 밀려올 때조차 여전히 내 삶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건강하고 행복하며 심지어 더 오래사는 경향을 보인다. 2차 대전 나치 수용소에서 힘들게 살아남은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그런 상황에서조차 절망하지 않고 여전히 내 삶은 의미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은 몸 이전에 마음이 죽어버려 살아있는 시체가 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플로리다주립대학의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Baumeister)와 미주리 대학의 심리학자 로라 킹(Laura King) 등의 연구에 의하면 종교, 봉사활동, 양질의 인간관계 만들기,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기, 소소한 즐거움 등이 큰 도움이 된다(Baumeister & Vous, 2005; Heintzelman & King, 2014; Lambert et al., 2013). 의미라고 하면 뭔가 거대하고 중요한 일만 해당이 될 거 같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언제 자신의 삶이 의미있다고 이야기하는지 보면 무엇을 성취했을 때 보다도 ‘행복할 때’이다. 또한 외롭지 않을 때, 또 계속해서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하고 있을 때이다.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 역시 사람들은 '편해지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지만, 우리는 무언가에 잔뜩 빠져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때 행복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의미감의 반대는 ‘무관심’일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무관심”하다고 느낄 만한 본문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20년 침묵기?
언제인가? 그때 하나님은 무얼 하셨는가?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기를.
적용 / 서론
하나님을 만나야 허무감을 느끼지 않는다.
영원한 것을 의지해야 허무감을 느끼지 않는다.
하나님, 임재, 말씀
내면화된 수치심,
자기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정도가 커지면, 관계중독에 빠지기 쉽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잊기 위해, ‘자신을 의미있게 만들어 주는’ 관계에 집착하게 된다.
관계 중독,
물질 중독,
성 중독,
알코올 중독,
쾌락과 관련된 것들이다.
쾌락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쾌락을 주는 대상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주시는 쾌락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쾌락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찾으신다.
왜냐하면 우리를 살리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피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려고 한다.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하나님만 붙듭시다.
하나님 외에 것들은 끊어버립시다.
결국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 한분” 뿐이다.
그 외에는 우리를 온전히 만족하게 하지 못한다.
중요감 상실, 보호감 상실, 소속감 상실
3가지를 상실했다.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세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가지려고 한다.
수치와 죄책감 때문에 끊임없이 가면을 쓴다.
우울과 분노는 자기 안에서 가능성을 찾으려는 헛된 행위다.
자기를 기대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화가 나고 우울해지는 것이다.
나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거나 실수에 대한 과잉 반응을 포함하는 완벽주의적 관심은 우울한 증상이 스며들어 점령할 기회를 만든다.
자신에게 완벽함을 기대하는 것은 실패할 준비가 된 상태로 생각할 수 있다.
우울증은 사람과 감정에 쉽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이는 완벽하다는 개념에 반하는 자아에 대한 통제력 상실로 이어진다.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완벽 주의적 노력이 높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비현실적인 목표는 인지 된 실패의 빈도를 높이고 인지 된 성공의 빈도를 낮출 수 있다.
실패를 높이고, 성공을 낮추는 삶의 방식이다.
Smith 등 (2021)은 완벽주의와 우울증이 종종 파괴적인 악순환을 구성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완벽주의적 우려는 우리 모두를 우울증에 취약하게 만들고 우울증에 의해 주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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