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05 수요] 아버지의 뜻, 회개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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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도전 151 만왕의 왕 내 주께서 / 149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찬송 154 생명의 주여 면류관 / 144 예수 나를 위하여
존귀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크신 은혜 베푸시어 주의 권속 삼으시고 날마다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죄인들이 한날 한시에 모여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주께서 우리의 경배를 받아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러나 주님, 이 시간 하나님이 베푸신 크신 은혜 앞에서 우리의 지난 날들을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온갖 악행들에 적극적으로 행하였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에는 무관심했고 외면했던 우리였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크신 은혜를 입었음도 잘 알고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보이셨는지도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요구하시는지도 아는데, 이러한 지식들이 우리의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연약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나약함을 애통해하며 이 시간, 오직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고통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며 간절히 간구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쏟아 부어 주옵소서. 죄사함의 확신을 허락하시고,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 안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세상 속에서 여러 문제들로 인해 괴로워하는 자들의 마음에 평안함을 허락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며, 우리 가운데 죽은 영들을 소생케하여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날마다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죄의 소욕을 꺾어주시옵소서. 우리를 주의 피값으로 사셔서 주의 몸된 교회로 부르셨사오니 또한 은혜를 베푸셔서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귀한 사명들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고난 주간을 지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피흘리신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게 하시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는 우리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마 21:18-32
예전에 부모님과 함께 텃밭을 가꿀 때였다. 쓸모없는 돌무더기 땅의 돌들을 걸러내고, 경작하여 밭으로 만드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작은 평수였음에도 좋은 밭으로 만들기 위해 땅을 일구다보니 손에 굳은살이 생기고, 수많은 땀방울도 흘려야만 했다. 그 작은 땅에 상추도 심고 고추도 심고 가지도 심었다. 때에 따라 풍족한 물을 길어다 뿌려주고, 거름도 주면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했고, 후에 많은 결실이 맺혔을 때 기뻐하던 기억이 난다. 어떤 농부나 똑같을 것이다. 자기의 밭에 정성을 쏟을 때 훗날 좋은 결실을 기대하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경은 종종 이스라엘을 포도나무 혹 포도원으로 비유하고, 하나님을 농부 혹은 주인으로 묘사한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는 포도나무들을 사랑하시어 많은 종들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그 땅을 경작하게 하셨다. 당연히 포도나무들에게서 그에 합당한 결실을 기대하셨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의 말씀인 21장 18절부터 22장 14절까지는 동일한 주제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선포였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라.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주님은 그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신다. 이 나무는 잎만 무성했지 열매가 없는 상태였다. 마치 이스라엘의 영적모습과도 같이 말이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것이 건강함의 상징인 것처럼, 신앙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신실함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한 이스라엘은 성전을 타락시켰고,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주님은 단지 배가 고프셨기에 우발적으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말라버리게 하신 것은 순간적인 화로 인함이 아니라 상징적인 행위였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모든 신자들이 창조와 구속을 입은 목적대로 신앙의 열매들을 맺어가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에 심판이 있을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어서 주님은 23절처럼 성전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 종교지도자들이 나타나 주님의 권위에 도전한다. 그들은 예수님께 묻는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그들은 대답을 얻기 위해 질문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역을 훼방하고자 질문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말씀하신다. 24절부터 보시면,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이 질문의 요점은 세례요한이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전파한 것이 하나님의 권위로 행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권위로 행한 것인지를 물으시는 것이었다. 비록 이미 처형된 후였지만 당시 세례요한은 여전히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위대한 선지자라는 인식이 있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들은 세례요한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면 그들은 앞으로 백성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또한 세례요한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한다면,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권위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선포하였는데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종교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고 다만 27절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들은 진정 대답을 알지 못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에 따른 손실을 계산하였고, 이도 저도 대답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모른다고 둘러댔을 뿐이다. 따라서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의 질문, 곧 누구의 권위로 이와 같이 행하는가에 대해 답할 의무가 없으심을 느끼신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복음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영적으로 부정직하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대화의 주도권은 예수님께로 넘어간다. 주님은 이어지는 3개의 비유, 곧 우리에게 “두 아들 비유”, “포도원 품꾼 비유”, “혼인 잔치 비유”라고 알려진 3개의 비유를 통해 종교지도자들을 압박하신다. 각각의 비유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인 것 같지만 실은 공통된 한 가지의 주제로 엮여 있다. 곧 먼저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에 합당한 결실을 맺지 못했을 때 그 받았던 지위와 은혜를 모두 빼앗기고 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이어지는 3개의 비유 중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비유는 본문 28-32절에 기록된 두 아들 비유이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도록 부른다. 그런데 두 아들을 동시에 부르지 않고 각기 부르시니, 첫번째로는 맏아들에게, 두번째로는 둘째 아들에게였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사람들을 시간 안에서 복음으로 초청하시고 예수를 영접하도록 인도하신다. 시간 안에서 각 사람의 부르심은 동일하지만, 각 사람마다 부르시는 시간이 다르다. 어떤 이들에게는 먼저 복음을 영접하게 하시고, 어떤 이들은 늦게 복음을 영접하게 하시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음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순서에는 그 분 만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반영된 것이며, 먼저 은혜를 베푸신 것에는 그만한 결실을 기대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세우신 종교지도자들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모든 회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결실을 맺게끔 바르게 지도하고 인도했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셨지만,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합당한 결실을 맺게끔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지도자들이 모든 백성들보다 더 악한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보라. 비유 속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포도원에서 일할 것을 요구한다. 맏아들은 가겠다고 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이 비유에서 맏아들은 율법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척 하며 자신들의 믿음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겉으로는 ‘예 아버지,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라고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에 합당한 행실로 이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은 마23:3 처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라며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외식적인 신앙행태를 비판하셨다. 마치 본문 속의 맏아들과 같았다. 그들은 비유 속의 맏아들처럼 순종하겠노라고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외적으로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 세례 요한을 보내셨을 때 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어떠했는가?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간다. 둘째 아들은 31-32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당대에 도무지 신앙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도무지 믿음이 없어보이는 악한 자들, 곧 세리와 창녀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복음에 대한 합당한 반응을 요구하실 때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만 그럴 듯 하게 큰 믿음이 있는 척 하였지만, 실제로는 순종하지 않았다. 반면 둘째 아들을 의미하는 세리나 창녀들은 어떠했는가? 복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들의 죄악된 민낯이 드러났다. 치부가 드러났다. 그래서 복음을 들은 처음에는 거절했다. 거부한다. 그러나 끝내 마음이 변화하여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회개하였다. 마음이 변화되어 돌이켜서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그분의 뜻대로 회개의 열매를 맺었다.
이 비유의 핵심 키워드는 31절이다. 주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질문하신다.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둘째 아들이니이다" 라고 인정하며 대답한다. 본 비유는 이 대답을 그들 스스로 깨우치고 대답하게 하시기 위해 종교지도자들을 압박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 책임을 인정하게 하시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외적으로 순종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 세례 요한을 보내사 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32절에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의미는 "세례 요한이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기 위해 왔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사역을 준비하며 회개를 선포하였다. 마3장에 이러한 세례요한의 메세지가 잘 나타나 있는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죄인들은 유일한 생명의 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고, 그들의 행실을 통해 자신의 회개를 나타내 보일 것이다.
이 사실을 염두하면서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하나님의 권위로 세우셨고,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 말씀을 듣던 무리들은 세례요한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입술로 대언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말씀 봉사자를 통해서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하신다. 그 말씀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으며, 오직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를 갈망하는 자들만이 영생을 얻게 되리라는 복음의 말씀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에 합당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즉, 우리가 말씀봉사자를 통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여부를 입증해주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삶의 열매, 회개이다. 바른 설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준다. 설교를 듣는 신자들은 설교를 통해 자신을 살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회개의 열매를 맺어가야 한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신의 상태를 발견하고 구원자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그 어느 선한 결실도 맺을 수 없음을 기억하여 늘 그분만을 의지하고 붙들며, 날마다 삶 속에서 짓는 죄악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돌이켜 회개로 나아가야만 한다.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처럼 될 것이 아니라 거룩과 성결을 향하여 날마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라. 만약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열매를 내 능력과 내 힘으로만 이루어내야 한다면 어떠할까? 내 능력과 의지와 결단으로 열매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면 사채업자들에게 닥달당하는 것 마냥 우리의 신앙여정이 얼마나 마음이 졸이고 불안할까? "요 며칠 고난주간 새벽기도 참석하면서 곧잘 거룩의 열매를 만들어 내는 것 같더니만, 오늘자 열매는 왜 없어? 빨리 만들어가지고 와! 지금 8시니까 9시까지 열매 만들어가지고 와!" 우리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독촉하신다면 우리는 너무나 무거운 멍에를 짊어진, 힘겹고 괴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이와 같은 열매는 나 자신의 능력으로 맺을 수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본문 21-22절을 통해 큰 일을 행하는 주체가 제자들이나 혹은 그들이 가진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21-22절 함께 읽어보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모든 것의 시작은 결국 나 자신의 마음에서부터이다"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뀐다는 것은 곧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뭔가 우리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란 마치 온 세상이 변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이겠다. 마치 본문 속에서 산이 옮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산이 옮겨진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 간주되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참된 회개의 열매, 즉 예수 그리스도 복음 초청에 합당하게 반응하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 죄를 멀리하고 거룩과 성결로 나아가는 성화의 삶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그 일을,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결실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믿음이 이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지만 우리의 믿음이 이 놀라운 결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말씀을 맺는다. 여러분, 삼위하나님께서는 주의 몸된 교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열매가 풍성히 맺히기를 원하신다. 그렇기에 성부 하나님은 계속해서 교회를 보존하시고 지키시며 다스리신다.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그분의 말씀을 계속해서 교회 가운데 선포하신다. 성령께서는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애통하는 마음과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을 부어주셔서 날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인도하신다.
본문 22절은 이러한 맥락으로 주셨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열망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의 소원대로 날마다 정결케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결실하게 하실 것이다. 특별히 고난 주간을 보내는 이 때에 다시금 우리의 영적 상태를 뒤돌아보자.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때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들이 저들보다 먼저 복음을 전해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셨는데, 우리는 먼저 은혜를 받아 누리는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많은 결실을 맺고 있는가? 아니 어쩌면 우리는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그리고 당대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별다른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상태는 아닌가?
교회 밖의 수많은 방황하는 사람들보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복음을 듣게 하시며 예수 영접하여 구원받게 하신 것에는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열매를 거두시기 위함인데,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그 열매가 보이는가?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열매가 보이는가 말이다. 먼저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 은혜를 받아 누리며, 내가 속한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지역과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를 바라셨건만 정작 우리는 우리의 삶에 기본적인 회개의 열매조차 맺지 못한 상태는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이것만큼이나 비참한 것이 어디있는가? 이것만큼이나 우리가 가슴을 치며 애통해야 할 일이 또 무엇이냐 말이다.
(Term)
주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우리 이 시간 마음을 다하여 간절하게 함께 기도하자.
"주님, 이 시간 나의 눈을 열어 나의 영적 상태를 바라보게 해 주십시요. 혹 우리도 주님께 책망을 들었던 유대종교지도자들처럼 잎만 무성한, 어떠한 열매도 보이지 않는 무화과나무 같은 상태는 아닌지요?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며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셨지만, 그 이후로 어떠한 열매없이 하나님을 근심하게 만드는 지금의 내 상태는 아닌지요? 하나님,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아십니다. 다시금 간절하게 기도하며 부르짖을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결실들이 맺혀지게 해 주십시요. 참된 회개의 열매들이 맺혀지게 해 주십시요. 복음의 말씀처럼 날마다 구원의 길 되시는 그리스도만을 붙드는 우리가 되게 해 주십시요.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게 해 주십시요. 우리 안에 이와 같은 경건의 열매들이 맺혀져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우리 되게 해 주십시요"
사랑과 자비의 주님, 오늘 말씀처럼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불쌍한 신자가 되지않게 붙들어 주옵소서. 우리에게 크신 은혜 베푸신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많은 회개의 결실들을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이 일들을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이뤄가신다고 하셨으니, 주여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붙드사 거룩과 성결의 삶을 소망하게 하시고, 늘 우리의 구원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찬송 144 예수 나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