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다카포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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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다카포 ‘부활’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매년 부활절을 맞이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부활절하면 생각나는게 ebs에서 우연히 본 어떤 섬나라 부족이야기입니다.
그 부족은 조상대대로 물고기를 잡아먹고, 거북이를 숭배하며 살아가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부족에게 한 선교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그 부족은 전도되어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첫번째 한 일이 자신들이 신으로 섬기던 거북이를 잡아먹은 것입니다.
영양가가 풍부한 큰 거북이 한마리를 잡아 가족들 뿐만 아니라 이웃들까지 함께 나눠먹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다큐멘터리를 보며 무릎을 딱 쳤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부활의 능력이구나 했습니다.
자신들이 섬기던 깊이 뿌리박힌 우상을 과감히 버리고, 주님께 돌이키는 것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닫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론]
첫째,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선포하는 나팔입니다.
먼저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바로 앞 구절인 27장 66절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가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소문낼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총독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막는 돌을 봉인합니다.
봉인한다는 것은 돌문을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밧줄로 묶고, 그 위에 총독의 도장을 찍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도장을 훼손하게 되면 사형에 처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경비병들을 시켜 그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제 이정도면 자신들이 이겼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1절입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이레의 첫 날 통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이 금요일 오후 3시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오후 6시부터 토요일 오후 6시까지입니다.
안식일에는 돌아다닐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난후 예수님의 장례를 치룰 시간이 3시간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장례식을 생각해보십시오.
3시간만에 어떻게 장례를 치룹니까?
시신도 씻겨야 하고, 염도 해야하고, 모시옷도 입혀야 하고 참 할일이 많습니다.
자연사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예수님은 온갖 고문과 십자가형을 당하셨으니 시신을 처리할때도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시신이 3시간만에 장례처리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간단히 치뤄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과정을 다 지켜봤던 여인들이 마음이 안 좋았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밤새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안식일이 끝나자 날이 밝은 주일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향품을 들고와서 어떻게든 돌을 치우고 예수님을 제대로 장례 치뤄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때도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지진은 악에 대한 심판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진은 인류의 역사를 뒤흔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지진입니다.
천사가 1300킬로가 넘는 큰 돌을 굴리고 그 돌 위에 앉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왜 땅에 안 서고, 돌 위에 앉았을까요?
웃기지 않습니까?
마치 가소롭다는듯 앉아있는 모습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돌문이 크고, 사람들의 계략이 악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게 아닐까요?
이 광경을 누가 보고 있습니까?
바로 로마의 경비병들입니다.
그들은 이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워 떨었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되었다고 말합니다.
죽었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는데 살아있던 경비병들이 죽은 사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5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
여인들은 경비병들처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천사는 단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려주기 위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여인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찾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분명 여인들이 찾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 죽었던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으며,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말씀하신대로’입니다.
예수님이 세번이나 하신 말씀이 이제 이뤄진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들 역시 이뤄질 것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천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누워계시던 자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해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가두었던 무덤이 이제는 부활의 증거가 된 것입니다.
원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종교지도자들의 승리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거짓과 탐욕, 시기와 분노가 버무려진 결과물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방식이 잘 통했고, 그들은 승승장구했습니다.
돌로 봉인했고, 강력한 로마군사들이 지키기에 이번에도 승리한줄 알았습니다.
이런 종교지도자들 뒤에는 든든한 배후인 사탄있습니다.
사탄은 그들을 노예삼아 왕노릇, 주인노릇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십자가에서 메시아를 제거하여 자신의 왕국을 견고히 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을 어둠과 죄악으로 밀어넣어 사망의 길로 가게 하는 게 사탄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사탄의 계획과 목표를 무너뜨린 사건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사탄이 아무리 용을 써도 막을수 없는 것입니다.
완벽한 반전, 완벽한 역전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과 동시에 사탄의 나라는 무너졌습니다.
부활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왔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빛이 함께할 수 없듯 사탄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와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 나라가 승리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는게 틀리지 않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욕망과 세상 기준으로 살아가는게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세상 우상에 속지 말고, 거북이 먹는 섬나라 사람들처럼 주님께 돌이켜야 한다는 의미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승리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삶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해보이고 어리석어 보여도 그게 결국 승리합니다.
세상에서는 악인들이 잘되고, 부조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이해할수 없는 고통이 있더라도 실망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습니다.
제자의 삶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지만 완벽한 역전의 부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무덤을 봉인했고, 로마병사도 지키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겁도없이 무덤에 여인들이 찾아옵니다.
가장 연약한 여인들이 무시무시한 로마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삼엄한 무덤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겨자씨같은 연약한 여인을 통해 시작됩니다.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한가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7절입니다.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 계실것이라는 말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던 첫사랑의 장소입니다.
이 여인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렸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보았으니 무서울만 합니다.
그러나 이 무서움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느낀 무서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니 얼마나 큰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이 여인들의 기쁨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녀들을 직접 만나러 오십니다.
천사가 한 말을 빨리 전하려고 달려가던 도중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여인들에게 부탁하신 말씀도 천사와 동일합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이 여인들을 제일 먼저 만나신 것일까요?
배신한 제자들이 꼴보기 싫어서일까요?
예수님이 이 여인들을 부활의 첫증인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때문입니다.
이 여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작은 겨자씨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많은 비유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가 천국이 작은 겨자씨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되어 기독교는 결국 로마를 집어삼켜버렸습니다.
말그대로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연약하고 무력한 작은 겨자씨같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형편없었습니다.
남편에게 하나의 재산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은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닌 이 여인들을 자신의 첫번째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호언장담했지만 모두 도망가버렸고, 연약해보이는 여인들만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께 목숨을 바친다던 제자들은 어디가고 여인들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만만한 자가 아닌 연약한 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하나님 나라는 힘있고 능력있는 자보다 충성된 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가치관과 통념을 뒤집어 엎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온 세상에 선포하는 나팔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나만 믿고 끝나면 안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기다리라고 하신 그 이유가 있습니다.
둘째, 부활의 증인은 또다른 부활의 증인을 만드는 것이 사명입니다.
10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전달할 말씀을 알려주십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부르시는 호칭이 ‘나의 형제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길 원하십니다.
반대로 제자들은 아마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모든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용서와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실수와 실패가 그리 치명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게 부활때문입니다.
부활은 지금까지의 실수와 실패를 뒤집을 하나님의 묘수입니다.
제가 영국에 있을때 함께 공부하던 미얀마 친구는 어릴적 마약 중독으로 개망나니였는데 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또 제가 아는 어떤 친구는 성폭력을 당해 죽고싶을 정도로 괴로웠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복되었습니다.
부활은 우리 교회 이름처럼 ‘다카포’입니다.
다시 시작하고 다시 일어설수 있는 주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관계를 회복한 제자들이 가야할 곳이 어디인가요?
바로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첫사랑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려는 것입니다.
실패했지만, 실수했지만 이제 일어나서 다시 자신들의 사명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사명을 감당하는데 방해하는 세력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가 곧바로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의 나라는 망했지만 그의 졸개들인 마귀들은 끈질기게 발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그들과 영적 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11-15절이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는 사이 재빨리 달려가 나쁜 소식을 전하는 또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죽은 사람처럼 되었던 무덤을 지키던 로마 병사들입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보고합니다.
지진이 일어난 일, 무덤이 열린 일, 무덤 돌 위에 천사가 앉아 여자들에게 했던 말들을 보고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일을 보고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의논을 거쳐 병사들에게 돈을 주고 거짓말을 시킵니다.
병사들이 잠든 사이에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소문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사들이 잠들어서 시신이 사라졌다면 그 책임은 병사들이 지어야만 합니다.
총독의 도장으로 무덤을 봉인했는데 소홀히 일해서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들은 사형에 처해집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그것까지 고려해서 총독에게 해가 미치지 않게 해주겠다고 말합니다.
병사들이 이러한 위험부담까지 지게 하려면 아마 많은 돈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빌라도 총독까지 회유해야 하니까 그에게도 많은 돈을 썼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믿기를 거부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진실을 왜곡하기 위해 불의한 방법들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적하는 사탄의 발악입니다.
사탄의 나라는 거짓과 속임수로 진리를 감추는데 능합니다.
이러한 도전들이 존재하지만 제자들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 즉 하나님 나라의 승리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이제 열한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알려주신 갈릴리의 어떤 산에 모입니다.
제자들도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경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많이 말씀하셨는데도 여전히 믿음이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라면 어떻게 할까요?
“안되겠다. 날 배신하고도 정신을 아직 못차렸구나. 고생한번 더 해볼래?”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을 믿어주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제자들이 처음 부름받았던 그곳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사명의 부활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대위임령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 제자들에게 맡기신 가장 큰 명령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명령이니 그 중요성은 이루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다시 부르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고나서야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면 설명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것을 보여주시고 첫사랑의 장소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알기에 다시 시작할수 있습니다.
넘어져도 실패해도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주님, 저는 아직 준비가 안됐습니다, 주님 저는 전도의 은사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명령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명을 행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기에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령이 '먼저 가라’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을 가진 왕이 파송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크게 보면 단한가지입니다.
너만 믿고 누리지 말고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또다른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 전도만 했던 제자들에게 더 큰 비전을 주십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제자삼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승리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또 만들라는 것입니다.
제자를 만든다는 것은 우리의 제자를 만드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임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또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옆에서 가르치고 도울뿐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부터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삼는 방법도 알려주십니다.
첫째,침례를 주는 것입니다.
침례는 물속에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물속에서 나올때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려면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그렇다면 이제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합니다.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제자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또다른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나의 시간과 돈과 생명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끝날때까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약속을 지키신 예수님은 분명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도 지키십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실때 천사는 요셉에게 태어날 아이의 이름이 ‘임마누엘’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그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1장의 임마누엘로 시작해 28장의 임마누엘로 끝납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책 자체에서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활은 믿기만 할게 아니라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은 관념이 아닙니다.
부활정신 이런게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된 것이고 우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또한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치트키이고, 하나님의 묘수, 하나님의 다카포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능력을 삶속에서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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