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

고난 주간 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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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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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베드로전서 2장 24절
천주교에서 매우 충격적인 발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바티칸 대변인은 “아마도 예수의 부활은 없을 것이다”라고 발언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발표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믿음은 지속되기를 바란다”라는 공식 발표를 하였습니다. 살바도르 추기경은 “올해는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마지막 해가 될 것이다”라고 발언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지키지 못할 재림 약속은 아마도 그런 말을 했을 당시에 와인 음주로 인한 실언이었을 수 있다”고 바틴칸은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천주교의 모습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18세기 이후 현대주의에 의해서 여러 가지 도전을 받았습니다. 현대주의란 성경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솝 우화와 같은 사람의 작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천주교의 반응은 더욱 극단주의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교황 무오설이나, 마리아 무죄설과 같은 여러 가지 주장들을 펼치게 됩니다. 1차 바티칸 회의는 이러한 주장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된 시대의 조류에 따라 천주교회도 바뀌게 됩니다. 그것이 1962년에 있었던 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이때에 종교개혁 이후에 취했던 방어적인 자세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연합하는 것으로 정책이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개신교에 대한 태도,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가 처음에 들어 왔을 때 조상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허용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개신교와도 대화할 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에 대해서도 포용적 자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의 이런 자세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개신교를 인정하지 않고, 개신교의 주장에 대해서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천주교와 대립했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구원입니다. 물론 천주교에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은혜로 구원 받는 다는 사실을 가르쳤지만 동시에 행위 구원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죄를 용서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가 없는 상태이지 천국에 갈 만큼 의로운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갈만한 의로운 행동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이 후로 쌓은 공덕을 통해서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천국에 가기에 공덕이 부족하다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연옥에 들어가서 불의 연단을 거친 후에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초대교회부터 가르쳤던 오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구원에 대해서 가르치게 됩니다.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자가 누구인가?’가 아닙니다.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노력이 얼마나 필요한가?’ 이것이 종교 개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개신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 받는 것이고 우리의 행위는 그곳에 자리할 틈이 없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공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논쟁은 현대에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현대에 논란이 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참여가 어느 정도 필요한가가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인가?’ 이제는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이 하나 밖에 없는가?’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의 통로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00년 동안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공격한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해서 성경에서 등장하는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고를 투영한 것이고, 실제 역사적인 예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예수님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의 핵심은 그가 신이 아니고, 단순한 사람이며 도덕 선생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이런 주장은 초대교회부터 있어 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공격은 이단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이루어 졌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더 광범위하고, 이단만이 아니라 기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 안에도 침투하고, 천주교 안에도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통로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WCC 총회가 부산에서 열렸습니다. 그 때에 우리 교단을 비롯해서 보수적인 교단들이 반대 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WCC 문제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WCC를 찬성하는 교단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 받는 다는 사실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 방식에 대해서 예전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있는 다양한 구원의 방식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WCC의 핵심은 상대방이 어떤 주장을 하든지 간에 문제 삼지 말고, 각자의 구원의 방식을 따르되 연합 하는 운동입니다. 다름을 전제한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다는 이 진리가 더 이상 유일한 진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단들의 주장도 수용하고, 어떤 종교나 이단도 WCC를 통해서 종교 통합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WCC 총회를 하면서 어떤 여자 교수가 초혼제를 하면서 이것이 성령 충만이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를 현대의 상대주의적 가치관에 의해서 새로 정립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계속해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하게 만들고, 흠집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길이 있다고 계속해서 주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전히 선악과를 먹으면 된다고 사람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대학을 다니게 되면 이런 상대주의적 사고 관에 젖어 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고 그들은 지옥불에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이 처하게 될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편협하게 생각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자비와 관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저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매우 비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주장인 것입니다.
성경에 있어서 죄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다룹니다. 죄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1093년 영국의 대주교로 임명 받았습니다. 그가 신학에 끼친 큰 공헌은 속죄론에 대한 것입니다. 그의 저서로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는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이 되시면서 까지 속죄를 이루셔야만 했는가가 그 책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실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주듯이 쉽게 용서해 줄 수 있는 문제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그냥 용서해 주실 수는 없습니다. 그냥 용서해 주실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안셀무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간단히 용서하실 것이라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왜냐면 죄는 매우 심각한 것이고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얼마나 진노하시는지에 대해서 끝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찾는 것이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로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갈아 앉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을 만족시키기는커녕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죄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이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범죄한 장본인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잘못을 바로 잡을 책임도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 외에는 완전히 불가능 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될 어떤 존재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존재는 예수님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구원자, 다른 구원의 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고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한 희생 제사였던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일4:10)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제도와 성전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잡한 장막 구조와 제사 제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제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거룩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정결의식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사역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고, 화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인간이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분노와 공의를 만족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제도가 인간의 행위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제사제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사람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속죄의 피를 흘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하나님께서 은혜로 속죄의 피를 흘리는 이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성경이 계속해서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공로로 구원 받는 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리는 은혜로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속죄의 제사를 통해서 사람이 정결하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그의 피를 모두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희생 제사는 바로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피를 흘린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어떤 피로도 우리의 죄는 완전히 씻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결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대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두 가지 측면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금 전에 우리가 살펴본 속죄의 은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의 대가를 그가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십자가의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을 잘 보여줍니다. 먼저는 죄에 대해서 죽고, 두 번째는 의에 대해서 살게 하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에 대해서 죽게 됩니까?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를 보면 양이나 염소를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 됩니다. 그리고 제물은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죽고, 피를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그가 짊어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공생애 기간 동안에 쌓아 놓으신 의로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단지 십자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만족시키시고, 의롭게 살아가시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왜냐면 그 의로움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율법의 모든 규례에 순종하시고 선을 행하신 이유는 그것을 우리에게 전가 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것을 거룩한 교환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는 주님이 가져가시고, 주님의 의로움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의인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가 사해졌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도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의로움을 전가 받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 곳이고, 우리가 의롭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친첸도르프 백장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예수, 당신의 보혈과 의로우심 나의 아름다움이며, 나의 영광스러운 옷입니다. 불타는 세상 가운데 이렇게 좋은 옷을 입혀 주심으로 나는 기쁨으로 내 머리를 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기쁨이며 영광인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누더기 같은 옷을 벗기시고, 영광스러운 웃을 입혀 주시고, 주님의 신부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정수를 깨달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신학자들이나,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천주교나 개신교안의 일부 교단들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씻기시고, 주님의 영광으로 옷 입히실 수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를 통해서만 아버지께 갈 수 있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격하시키는 모든 노력들은 믿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조력자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나이고, 교회나 구원이라는 것도 내 이익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언제든지 팔아먹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교회 안에도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서 돈벌이로 먹고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나오는 이유가 내 사업장에 사람들이 오게 만들기 위해서 나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내가 사회에서 쌓아야 할 인맥을 쌓는 공간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중에 출세하려면 소망교회에 가야 한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실제로 소망교회 출신 중에 정계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애나 결혼을 목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 자체는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고 있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때문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입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번 주가 고난 주간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 동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을 가상칠언이라고 말합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한 주 동안 필사하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묵상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따르는 여러분들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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