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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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도전 찬송
찬송 260 151 148
존귀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크신 은혜 베푸시어 주의 권속 삼으시고 날마다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죄인들이 한날 한시에 모여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주께서 우리의 경배를 받아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러나 주님, 이 시간 하나님이 베푸신 크신 은혜 앞에서 우리의 지난 날들을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온갖 악행들에 적극적으로 행하였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에는 무관심했고 외면했던 우리였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크신 은혜를 입었음도 잘 알고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보이셨는지도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요구하시는지도 아는데, 이러한 지식들이 우리의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연약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나약함을 애통해하며 이 시간, 오직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고통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며 간절히 간구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쏟아 부어 주옵소서. 죄사함의 확신을 허락하시고,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 안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세상 속에서 여러 문제들로 인해 괴로워하는 자들의 마음에 평안함을 허락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며, 우리 가운데 죽은 영들을 소생케하여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날마다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죄의 소욕을 꺾어주시옵소서. 우리를 주의 피값으로 사셔서 주의 몸된 교회로 부르셨사오니 또한 은혜를 베푸셔서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귀한 사명들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고난 주간을 지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피흘리신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게 하시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는 우리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마26:57-75(신p.49)
지난 주일저녁에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대해 말씀을 전했었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후, 가룟 유다를 비롯한 병사들이 예수님을 잡으로 찾아온다. 베드로는 로마 병사들이 가지고 다니던 작은 양날검을 취하여 무리들이 예수께로 접근하는 것을 막고자 마구 휘두르다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린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귀를 고쳐주시며 이 모든 일들이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순순히 체포되어 끌려가신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다소 긴 본문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버림 받으신 예수님의 기사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제자들에게도 버림을 받으시며, 27장 중반부에서는 온 백성에게 버림을 받으신다. 그리고 27장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에게서도 버림을 받으신다. 주님은 철저하게 버림받으신다. 그 내용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받으신 예수님

첫째로, 주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으신다.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인 금요일 새벽녘, 예수님은 병사들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시며 심문을 당하신다. 이제 24시간도 남지 않은 안식일 이전에 예수를 처형할 수 있도록 종교지도자들은 기를 쓰고 일을 추진해가고 있다. 본문 57-59절은 예수님을 체포하며 열린 종교재판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 겟세마네에서 붙잡힌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려가신다. 그런데 그 장소에는 이미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이 이와 같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재판에 대해 아주 빠르게 처리해버리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를, 늦은 밤 시간에 무슨 재판을 연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재판은 아침이나 낮 시간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재판은 한 밤중에 열린다. 또한 재판은 반드시 지정된 장소에서만 열려야 한다. 당시 재판은 성전공관에서만 진행되었다. 그런데 지금 예수의 재판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개인저택에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 또한 모든 유대인의 재판은 죄를 용서하고 다시금 형제사랑으로 회복시켜주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교회의 권징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예수의 재판은 처형이 주목적이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두세 증인의 일치된 증언을 통해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재판에서는 59-60절을 보니 거짓 증인들의 위증으로 인해 일치된 어떠한 증언도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처형판결을 내릴 수 없었던 상황이다. 또한 재판과정은 1심과 2심에 나누어 며칠 혹은 몇주 이상의 간격을 두고 재판선고를 해야했는데, 예수의 재판은 저녁늦게 재판을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녘에 처형판결을 내려버리니, 이것이 얼마나 졸속으로 진행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불합리한 재판과정에서도 주님은 계속해서 침묵하신다. 이는 사53:7 에 기록된 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라는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거짓 증언들 속에서 감정에 복받쳐 작은 말실수라도 하게 되면, 그것을 책잡아 로마에 넘기려했는데 예수께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니 가야바는 애간장이 탔을 것이다. 주께서 계속해서 침묵하시자 대제사장은 63절처럼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라고 요구한다. 예수님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는 그리스도인가..? 그런데 가야바는 과연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이 궁금하여, 이를 알기 위해 질문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분명 예수에 대한 여러 참된 증언들도 수집했을 것이다.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그분의 말씀도 전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가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데 그리스도가 무슨 대수가 되겠는가?
그가 예수님에게 그리스도인지를 묻는 이유가 무엇인가?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하실 분이라는 소망이 있었다. 가야바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유도함으로, 지금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는 자, 곧 로마에 대항하는 반동죄 혹은 내란죄로 빌라도 총독에게 고소하여 사형을 언도받도록 몰아가려 했던 것이다. 이에 주님은 64절 처럼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가야바는 내심 이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예수께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운다. 율법은 신성모독죄를 저지른 자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지만, 로마법 상으로 신성모독죄는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야바와 산헤드린 공회는 이를 조작하여 예수를 로마의 반동자로서, 로마정부에 위협적인 자로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킬 위험한 자로서 예수를 고발하게 된다. 그리고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예수를, 유대관료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며, 잔인한 방식으로 그분을 학대하기 시작한다.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받으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버림받으신다.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장면을 연극 무대로 생각한다면, 이제 학대당하기 시작하는 주님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다른 막이 오른다. 이제 무대는 가야바의 집안이 아니라 집 밖의 뜰, 그리고 뜰 가운데에서 종들과 로마병사들이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피워둔 모닥불을 비춘다. 주께서 겟세마네에서 잡히시던 밤에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나 눅22장에 의하면 베드로와 어떤 제자 한 사람은 주께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 들어가실때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기 위해 먼 발치에서 들키지 않게 따라 들어간다. 예수께서 산헤드린에 의해 심문을 받으시는 동안 베드로는 여전히 뜰 안에 있다. 그는 제법 오랜 시간 이 곳에 있었고, 그의 신분이 여러 사람들에게 노출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예수의 추종자로 몰아세우던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는 분명 로마의 병사들 앞에서도 주님을 지키기 위해 칼을 휘둘렀던 용맹한 제자였지만, 그 용감함은 온대간대 없어지고 그저 작고 연약한 여종에게 굴복하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주께서 이미 잡히시기 전에 예고하셨던 바와 같이 베드로는 세번 주를 부인하기에 이른다. 첫번째 부인은 69-70절의 내용처럼 한 여종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는 말에 용기를 잃어버리고, 여종의 말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주변인들에게까지 공개적으로 부인한다. 이후 베드로는 자신의 안전에 위협이 가중되는 것을 깨닫고, 따뜻한 불이 있던 마당 뜰을 떠나 입구 앞문의 차갑고 그늘진 곳으로 이동한다. 이전보다는 어두운 곳으로 그곳에 가면 사람들의 관심이 더이상 쏠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또 다른 여종이 그를 찾아온다. 71-72절에 또 다른 여종이 베드로에게 찾아와 큰 소리로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첫번째 여종은 베드로 개인에게 한 말이었다면, 두번째 여종은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외친 것이기에 베드로의 부인 또한 전보다 강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맹세까지 하며 ‘나는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라고 부인한다. 이러한 맹세는 통속적인 맹세가 아니라 자신의 진술의 진실을 확증하기 위해 거룩한 것, 곧 하나님의 칭호나 성전 등을 끌어들여 하는 맹세이다. 그리고 주께서는 앞서 이러한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었다. 베드로가 주님과의 어떠한 연관성이라도 제거하기 위해 이와 같은 맹세를 했을 것이다. 그는 분명 마16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었지만, 이제는 72절에 그저 ‘그 사람’이라 부를 뿐이었다.
평행본문인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후로 약 한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이때 쯤이면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은 거의 마지막 단계였을 것이다. 주께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거룩한 신분을 드러내셨고 이에 사형판결로 이어질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시며 죽음을 향하 가셨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주님과의 관계를 점점 더 강하게 부인한다. 73절을 보니 베드로 곁에 있던 몇 사람이 의도적으로 베드로에게 찾아온다. 그리고는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말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를 마지막에 의심한 사람 중 하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의 칼에 귀를 다쳤던 말고의 친척이 있었다고 말씀한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해를 끼친 사람, 기억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베드로는 그의 억양 때문에 신분이 탄로나고야 만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주로 제자들은 갈릴리 출신이었기 때문에 유다 사람들은 단번에 갈릴리 사투리를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베드로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다. 많은 사람들의 증언 속에서 베드로는 자신까지도 저주하며 맹세하여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한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만약 거짓을 말한다면 하나님께 죽임을 당해도 좋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마지막 말을 마치자마자 곧 닭이 울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눅22장에 의하면 그 때에 재판 중이던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 보시던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으며, 그 때에 주님께서 자신에게 예언하셨던 것이 생각이 나서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게 된다.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신 예수님은, 우리가 함께 읽지는 않았지만 온 백성에게까지 버림을 받으신다. 마27:20-26을 보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학대한 후에 빌라도에게 반동죄로 넘긴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온 무리를 설득하여 바라바 죄수를 풀어주게 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도록 선동하기 시작한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어떠한 죄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도대체 이 자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십자가 처형을 내리려 하느냐고 물었으나, 이미 광기어린 무리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동할 뿐이었다. 빌라도가 예수의 피에 자신은 무죄하니 그 책임을 너희가 지라고 했을 때에도, 무리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려도 좋으니 예수를 죽여달라고 요동한다. 그런데 참 특이한 것이, 헬라어에 ‘무리’를 뜻하는 단어는 여러 개가 있고 성경 안에서도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런데 마태복음 27장에서 이 단어가 종교지도자들에게 선동되어 예수를 죽이라고 요동하는 무리들에게 한번 쓰였고, 또 한번 언제 쓰였느냐면 예수께서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부르짖던 자들을 지칭할 때도 쓰인다. 열광적으로 주님을 환호하던 무리들이 순식간에 돌변하여 십자가에 죽이라고 요동하는 광기어린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에게나, 제자들에게나, 그리고 허다한 무리들에게 버림받고 외면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셔야만 했는가? 그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예수께서 2천년 전에 광기어린 집단에 의해 죽임당했다 정도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야기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도 아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왜 예수께서 이와 같이 버림을 받으셨는지, 왜 이와 같이 외면 당하셔야만 했는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는지, 그리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지를 알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1장에 의하면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그리고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함께 하셨던, 영원한 빛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 백성들은 주를 영접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를 거부하고 대적하며 몰아내고 죽여 그 존재를 없에려 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왜 주님은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셔야만 했는가?
바로 택하신 백성들의 죄 때문이었다. 사53:6-8 말씀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 앞에 패역한 자들은 바로 우리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우리의 허물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로 짊어 지우셨다. 그분은 곤욕을 당하시고, 심문을 받으시며, 죄수처럼 끌려가셨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리라는 것을 생각치도 못했다. 그러나 성경은 증언하기를, 롬4:25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주께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시고, 곤욕과 심문을 당하시며, 악랄한 죄수처럼 끌려가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요,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친히 이 모든 수모를 당하신 것이다. 이에 대해 인쇄물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7문답이 잘 설명하고 있다. 37문답이 속해 있는 항목은 사도신경을 해설하는 부분인데, 제가 문을 읽을테니 답을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고난을 받으사 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 그분은 유일한 화목제물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우리는 죄인으로서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마땅하고,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아야 했을 운명이었으며, 철저한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징계를 받아 마땅했다. 그것도 잠시 잠깐 받고 끝나는 형벌이 아닌, 영원토록 그분의 진노 앞에 두려워해야 하고, 우리의 죄로 인한 저주받은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사, 그를 화목제물로 삼아 본래 우리가 받아야 했을 영원한 저주를 그분에게로 옮기시고, 우리에게는 예수께서 누리시던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옮겨주셨다. 예수 이전의 삶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영원 형벌과 저주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영원한 슬픔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애통해하는 것만이 우리의 형편이었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로 인하여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래 내가 받아야 했을 그 모든 죄값을 대신 짊어지셨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그분의 핏값으로 지불하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모든 자들에게 거저 베풀어주셨다. 저주의 삶을 복의 삶으로 바꾸어 주셨고, 슬프고 괴롭고 애통해 하던 삶을 기쁨과 감사의 삶으로 바꾸어 주셨다. 롬10:11-13에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시고, 버림 받으심으로 주를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끄러움 당하지 않게 하셨다. 할렐루야!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할렐루야! 이와 같이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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