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의 두 렙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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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41-44
//41a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헌금함(γαζοφυλακίου)'은 무리와 여인들이 드나들 수 있는 여인의 뜰에 있는 여러 헌금함 중 하나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헌금함에 '대하여(κατέναντι)' '앉아서(καθίσας)' 보신다. 앉는 것은 재판 행위이다. 헌금함과 관련된 일을 판단하시려는 것이다. 서기관도 '앉아서' 예수를 판단한 적이 있다(2:6). '대하여(κατέναντι)'는 뒤에 살펴본다.
'보시는(ἐθεώρει)' 것은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어 계속 지켜 보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주께서는 한참을 지켜보셨을 것이다. 눈을 들었는데 우연히 보게 된 것 같이 표현하는 누가복음의 ‘눈을 들어 … 보시고(Ἀναβλέψας δὲ εἶδεν)’와는 어조가 다르다. '대하여 앉으신' 것은 헌금함인데 '지켜보시는' 것은 헌금함이 아니라 무리들이 헌금함에 돈을 어떻게(πῶς) 넣는지를 지켜보신다. 헌금함이 여러 개 있어서 헌금함마다 용도가 정해져 있지만 예수께서 지켜보신 것은 아마 자유헌금함이었으 것이다.
//41b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어떻게 넣는지 보고 계시는데 여러 부자는 많이 넣고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넣었다. 예수께서 신적 지식을 발휘하셔서 그들이 얼마를 넣는지 낱낱이 아셨던 것일 수도 있지만 넣는 행위들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아셨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헌금함 담당자는 헌금액수와 목적을 크게 외치도록 되어 있었고 헌금함에 울리는 소리로도 금액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많은(πολλοὶ 폴로이)' 부자가 '많이(πολλά 폴라)' 넣는 것과 '한(μία 미아)' 가난한 과부가 '두(δύο)' 렙돈을 넣는 것이 대조된다. 헬라 주화 두 렙돈은 로마 주화로 한 고드란트이다. 현대 한국 화폐 가치로는 500~1000원쯤 될 것이다. '두' 렙돈이라는 말에는 하나만 넣어도 되는 것과 둘 다 넣을 수밖에 없는 강제성이 함께 나타나 있다.
//43a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중요한 것을 가르치시려고 '불러 이르심(προσκαλεσάμενος 3:23; 7:14; 8:1; 8:34; 9:35; 10:42 등)'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Ἀμὴν λέγω 아멘 레고)'가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경우는 마가복음 전체에서 여기가 유일하다. 지금 이 장면은 중요한 장면이며 하시려는 말씀은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반드시 주목해서 보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43b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통은 예수께서 이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으로 보지만(France 2002; Boring 2006; Stein 2008; Marcus 2009; Brooks 1992; Edwards 2002; 그닐카 1986 등), 반대로 이 말씀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성전에 대한 비탄으로 읽거나 비판이 담긴 말씀으로 읽을 수도 있다(A. Wright 1982; Fitzmyer 1983; Ch. Myers 1988; Evans 2001). 박윤만(2017)은 중의적으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하는 본문을 성전이 과부의 가산을 섬기는 강도의 소굴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문맥에서 읽을 것을 제안하고 그에 대해 간소하게 논증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이 본문의 문맥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후(11:1-10),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사건과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에서의 소동(11:11-26), 권위의 출처 논쟁(11:27-33), 아들을 죽이는 포도원 농부 비유(12:1-12), 바리새인-헤롯당과의 세금 논쟁(12:13-17), 사두개인들과의 부활 논쟁(12:18-27), 서기관과의 대화를 통한 율법 정리(12:28-34), 성전보다 크신 자신을 드러내심(12:35-37) 그리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외식하는 서기관들을 삼갈 것을 경계하심(12:38-41)에 이어지는(42-44) 말씀이며, 이 본문 다음에는 다시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을 예언하시는 말씀(13:1-2)과 그 시기와 징조에 대한 문답 등(3-37)으로 이어진다. 누가복음의 문맥도 거의 동일하다.
즉, 이 본문은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11:17)에서 소동을 일으키신 사건에서 촉발된, 교권자들과의 권위 문제 갈등이 진행되는 중에, 예수에 의해 그들의 반역성, 율법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등이 폭로되고, 서기관의 외식과 탐욕(12:40)이 결론적으로 지적된 직후 이어지는 장면이다. 과부의 전재산이 성전 헌금함에 삼켜지는 장면을 통해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과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이 같은 종류라는 것이 드러난다. 서기관은 받는 판결이 중할 것이고 성전은 무너져야 할 것이다.
마가복음 전체의 문맥에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시는 소자 예수의 모습과 생활비 전체를 헌금함에 넣은 가난한 과부의 모습이 잘 겹친다는 점이나 한 서기관과 예수의 대화 중에 마음과 지혜와 힘을 다해 하나님 섬김이 어떤 계명보다 중요하다는 표현과 이 과부의 행위가 잘 어울리는 점 등에 주목하면 이 과부의 헌금 행위를 두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칭찬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문맥이 과부의 행위를 칭찬하는 문맥이라기보다는 서기관과 성전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동일 기능을 하는 것을 보시고 탄식하신 것으로 읽거나 판결하신 것으로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또한, 과부의 행위에 대한 말씀도, 비교급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많이 넣었다'나 '전부를 넣었다'와 같이 사실을 묘사할 뿐 긍정적인 가치 판단을 묘사할 때 사용될만 한 ‘좋은’, ‘선한’, ‘착한’, ‘잘’, '잘 하였다' 등의 낱말들(καλός, καλῶς, ἀγαθός, χρηστότης, ἀγαθωσύνη, ἀγαθοποιέω, εὐεργετέω)은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을 향하여 "그녀가 내게 좋은(καλὸν) 일을 하였다(14:6)"고 하신 것과 대비된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셨다'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문에서 '헌금함에 대하여 앉으셨던(καθίσας κατέναντι τοῦ γαζοφυλακίου)' 주께서 그 성전에서 나가시면서는 그 성전이 남김없이 파괴될 것을 말씀하시고 이어 감람산에서는 '성전을 대하여 앉아서(καθημένου αὐτοῦ ... κατέναντι τοῦ ἱεροῦ)' 그 성전 파괴가 일어날 때와 징조를 말씀하신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과부의 두 렙돈을 삼키는 헌금함이 성전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본문은 생활비 전체를 넣는 과부의 헌신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질 수밖에 없는 성전의 악독함을 노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핵심 문제 중의 하나는 예수께서 그들의 성전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14:58; 15:29). 교회는 이 악독한 성전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다시 일어난 성전을 물려 받는다. 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들이 옛 서기관이나 성전처럼 가난한 이의 생활을 삼킨다면 그들 스스로가 다시 심판 받을 자리에 있음을 노출하는 것이다.
